조선 서리 공사가 중국이 조선을 정벌하려고 한다는 신문 내용이 사실인지를 물었다고 사일대신(使日大臣)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신문지 기사 번역 첨부 문서
朝鮮署使李鶴圭面詢, 報載中國欲伐朝鮮是否確實.
七月二十一日, 出使大臣黎庶昌函稱:
六月十九肅寄昌字第六十六號函, 並抄摺二扣, 計邀鈞詧. 朝鮮署使李鶴圭,주 001
각주 001)

日前署面詢, 謂:이학규(李鶴圭. 1852~?)는 조선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관료로, 본관은 홍주이다. 1883년 규장각 검서관,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1885년 형조 정랑, 1890년 내무부 주사로 임명되었다. 1890년 주일본공사관 서기관, 1893년 교섭아문 주사, 총무사 주사, 1894년 6월 외무아문 참의를 거쳤으며 1894년 이후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899년 평리원 검사, 1900년 시강원 첨사를 거쳐 1902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을 역임했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강원도 참여관을 역임하였다.
見日本新聞, 載有中國征伐朝鮮一事, 係因撤棧,주 002 及處置朴定陽, 雇用李善得,주 003
각주 003)

三端是否的確, 求為明示.이선득(1830~1899, Charles W. Legendre, 李善得)은 미국 외교관으로서 청과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제국주의자 및 반청론자로 평가받는데, 주청 廈門 미국 영사로 근무할 당시 1867년 미국 로버트호의 대만 난파와 선원 피살사건이 발생하자 미군함을 파견하는 포함외교를 주도하였다. 1872년에는 일본에서 대만 침공을 위한 외교 고문으로 발탁하였고, 배상금 교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후 주일 공사 金嘉鎭과 조선 주한 일본 대리공사 곤도(近藤眞鋤)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관으로 전격 발탁되어 1890년 2월 協辦內務府事에 임명되었다. 이에 總理衙門에서는 李善得이 과거 일본의 대만침공에 동행하였다는 점을 상기하며 경계하였고, 袁世凱 등은 조선과 일본과의 공모를 의심하면서 조선 정부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李善得은 고문관이 된 이후, 청 차관을 대체하기 위해 일본 및 다른 외국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시도하였으며, 조선·일본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고 있었던 漁採 사안의 협상 대표로 활약하였다.
庶昌答以:“新聞所載, 毫不足憑. 如果用兵, 此是何等大事, 我處必有電報, 反覆開諭.” 似已晤曉, 次日又接一函, 有:“終宵思維, 不能成寐, 求為電詢北洋.”等語. 適於是日接到李傅相初七日來函, 庶昌又令繙譯往告, 以“信中並未提及征伐朝鮮, 絕無是事.” 伊始放心. 庶昌深惜朝鮮之愚, 而又憫李鶴圭之怯懦. 茲將新聞譯抄呈鑒.
六月二十八日, 萬壽聖節讌客,주 004 正值西曆八月中旬, 率多下鄉避暑, 來客不多, 足以成禮. 庶昌俟摒擋清楚, 亦擬赴近鄉作旬日之游. 閱『申報』知京津一帶大水連年,주 005 災害不已, 賑貸維艱. 日本今年雨水亦多, 田稻淹傷不少, 秋收仍不免歉薄. 現值各衙門放假之時, 東京別無多事. 伏乞轉回堂憲為禱. 專肅. 敬請均安.주 006
照錄清摺
별지: 「新聞紙譯文」:中國將以朴定陽等案, 征伐朝鮮懲其屢犯屬國分限.
1. 「繙譯新聞紙」
現征伐朝鮮, 現在四川提督宋慶奉李相國之命, 目下在旅順口日夜訓練兵卒, 磨劍治砲, 如臨事之狀, 以致謠言不一. 或云:“朝鮮不依中國處治, 出使美國之朴定陽, 又京城撤棧一事, 不與袁世凱商量, 直照會李中堂, 及不謀於中國而雇用李善德, 種種犯属國分限. 故李中堂大怒, 俟秋高馬肥時征之. 令宋公準備兵器如此.” 或曰:“練兵伐朝鮮, 其時尚早. 目下因李中堂試騐兵船, 檢閱兵器次, 此擬試騐在福建船廠所造鉄甲兵船龍咸號機器, 速力, 因順便巡閱北洋諸口, 至旅順閱兵. 故宋公專心練兵以待.” 或曰:“朝鮮今日外面雖號獨立, 其實隸属我中國, 內治, 外交無不仰我鼻息, 滿朝臣僚戰戰兢兢. 如此弱國, 何用練兵磨器? 只要李中堂下一嚴令, 袁觀察一開口, 韓民叩首, 舉國而為中國之臣民矣. 今日宋公之練兵者, 非此. 蓋守衛北境以備俄國之窺伺.” 諸說紛紛, 信偽不可知. 然自以柔主義之曾侯故後,주 007 李中堂之對朝鮮益以壓抑主義, 故傍人之云如此. 按四川提督宋公者征長髮賊有大功.주 008 今年七十四歲精神奕奕. 本年三月二十二日陛見, 上問尚能騎馬馳驅否, 駐防旅順畏外洋人否. 奏對, “臣祗知鎮撫外人, 不知所畏. 騎馬馳驅係臣得意事.” 又將昔日南戰北伐戰跡上奏. 皇上大悅, 蓋宋公亦今日中國一大豪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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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이학규(李鶴圭. 1852~?)는 조선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관료로, 본관은 홍주이다. 1883년 규장각 검서관,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1885년 형조 정랑, 1890년 내무부 주사로 임명되었다. 1890년 주일본공사관 서기관, 1893년 교섭아문 주사, 총무사 주사, 1894년 6월 외무아문 참의를 거쳤으며 1894년 이후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899년 평리원 검사, 1900년 시강원 첨사를 거쳐 1902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을 역임했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강원도 참여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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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득(1830~1899, Charles W. Legendre, 李善得)은 미국 외교관으로서 청과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제국주의자 및 반청론자로 평가받는데, 주청 廈門 미국 영사로 근무할 당시 1867년 미국 로버트호의 대만 난파와 선원 피살사건이 발생하자 미군함을 파견하는 포함외교를 주도하였다. 1872년에는 일본에서 대만 침공을 위한 외교 고문으로 발탁하였고, 배상금 교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후 주일 공사 金嘉鎭과 조선 주한 일본 대리공사 곤도(近藤眞鋤)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관으로 전격 발탁되어 1890년 2월 協辦內務府事에 임명되었다. 이에 總理衙門에서는 李善得이 과거 일본의 대만침공에 동행하였다는 점을 상기하며 경계하였고, 袁世凱 등은 조선과 일본과의 공모를 의심하면서 조선 정부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李善得은 고문관이 된 이후, 청 차관을 대체하기 위해 일본 및 다른 외국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시도하였으며, 조선·일본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고 있었던 漁採 사안의 협상 대표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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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黎庶昌, 李鶴圭, 撤棧, 朴定陽, 李善得, 宋慶, 袁世凱, 李善德
- 지명
- 東京, 旅順, 俄國, 旅順
- 서명
- 『申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