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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강총독(兩江總督)이 조선 비민(匪民)을 조사하여 체포하는 일에 관한 비밀 자문을 보낸다고 예부(禮部)에서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내는 문서와 양강총독(兩江總督)의 자문 첨부 문서

密咨兩江總督咨覆訪拿朝鮮匪民事.
  • 발신자
    禮部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68년 8월 20일 (음)(同治七年八月二十日) , 1867년 10월 5일 (同治七年八月二十日)
  • 문서번호
    2-1-5-02 (90, 107b-109b)
八月二十日, 禮部文稱:
 
主客司案呈:
准兩江總督曾咨稱:
據蘇松太道禀稱:
遵飭密訪, 朝鮮匪民來去無定.
等情. 合咨禮部, 轉咨總理各國事務衙門查核辦理.
等因. 前來. 相應抄錄該督原文, 密咨總理各國事務衙門查照可也.
별지: 「兩江總督咨文」:朝鮮匪民來去不定, 請轉總署照會各國公使協同緝捕.
 
1. 照錄原文.
兩江總督曾, 為咨明事.
據蘇松太道禀稱:
本年七月初一日, 奉札開:
六月二十五日, 准禮部咨:
主客司案呈:
同治七年六月十四日, 准總理各國事務衙門咨稱:
本衙門具奏朝鮮國近被洋船滋擾, 先經籌辦一摺. 於同治七年六月十三日, 軍機大臣奉旨:
依議.
欽此. 相應抄錄原奏, 恭錄諭旨, 密咨禮部, 欽遵辦理.
等因. 前來. 除轉咨該國王外, 相應抄錄總理各國事務衙門原奏, 飛咨兩江總督, 迅即遵奉諭旨, 密飭所屬將朝鮮匪民七名嚴密訪挐, 解送該國王懲辦, 毋任聞風逃逸. 事關欽奉, 妥速辦理可也.
等因. 並抄單. 准此. 合就抄單札道, 即便遵照, 在于上海附近購覓眼線, 將朝鮮匪民崔喜一等七名嚴密緝挐, 解送該國王懲辦, 毋任聞風逃逸. 勿違.
等因. 奉經分札密訪松海防廳주 001
각주 001)
해방청(海防廳)은 연해 지방의 방어 업무를 위해 설치된 관청으로, 해방동지(海防同知) 또는 해방통판(海防通判)이 담당하였다. 전국적으로 해방동지는 총 14명(직예 1명, 봉천·산동·강소·복건 각각 2명, 절강 5명), 해방통판은 총 2명(복건·광동 각각 1명)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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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海縣會捕局,주 002
각주 002)
상해 회포국(會捕局)은 1866년 상해도가 프랑스 조계에 설치한 기구로서 프랑스 조계로 도주한 중국인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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暨會審委員陳丞福勳 주 003
각주 003)
회심위원(會審委員)이란 1864년 5월, 상해도대(上海道臺) 응보시(應寶時)가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함께 구성한 혼합 법정인 양경빈북수(洋涇浜北首) 이사아문(理事衙門)의 중국인 재판관(讞員)을 지칭한다.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은 1869년 상해공공조계회심공해(上海公共租界會審公廨)가 정식 성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진복훈(陳福勳, 1810~?)은 절강 출신으로 1862년부터 상해 회방국(會防局), 기기국(機器局) 등에서 근무하였다.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강소순무(江蘇巡撫) 이홍장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1868년 8월, 양강총독(兩江總督) 증국번에 의해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의 위원에 임명되어 중외 교섭사건을 전담하였다. 陳丞福勳은 陳福勳이 지방관의 보좌관, 또는 현승(縣丞)의 직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쓰이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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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洋務委員胡令裕燕 주 004
각주 004)
양무국(洋務局)은 太平天國軍의 상해 위협 당시 영국·프랑스에 대한 알선 및 외국군과의 협조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세워졌던 회방국(會防局)이 태평천국의 진압 이후 철폐된 후 각 지역의 대외 업무, 중외 교섭사건을 총괄하기 위해 상해도대(上海道臺) 아문에 건립한 기구이다. 양무위원은 양무국의 인원을 지칭한다. 호유연(胡裕燕)은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없다. 단지 『광서청하현지(光緒清河縣志)』 26권의 수찬자(修纂者)로 검색이 되므로, 아마도 하북성(河北省) 청하현(淸河縣) 출신으로 보인다. ‘胡令裕燕’은 胡裕燕이 지현 또는 동급의 직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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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葛令繩孝,주 005
각주 005)
갈승효(葛繩孝, 1833~1909)는 절강 출신으로 1860년 이홍장의 막부에 들어가 단련(團練)을 조직하였고,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여 외국군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태평천국 진압 후 양무(洋務)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양무위원으로 중외교섭 사무를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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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股購覓眼線, 將匪民崔喜一等, 務獲解送. 去後. 嗣於七月初三日, 奉撫憲札同前, 由下道又經分札轉飭, 並將遵辦緣由, 具復在案. 茲據該廳縣局委各員禀稱:
密訪得上海小東門外有外國教堂名曰:‘三德.’주 006
각주 006)
1850년대 이후 천주교 선교회 단체들은 상해에 대표 사무소(帳房)를 설치하였는데, 이 중 파리외방傳敎회가 설립하였던 사무소의 명칭이 삼덕당(三德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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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五年間, 有洋人自朝鮮來滬, 帶有朝鮮國人九名, 同住該堂. 此後來去無常, 行踪甚秘. 本年春間, 聞該堂洋人同朝鮮國人二名, 搭船前徃朝鮮國, 不便上岸, 仍由原船回滬. 至閏四月復同朝鮮人六名他去, 所往何處, 無從查詢. 其在滬時, 曾改穿中國服式, 因言語不通, 人莫能知其姓名. 此外復加細訪, 並無朝鮮人逗遛在滬. 容仍不時探緝, 遇有朝鮮人來, 即盤詰確切, 解送辦理.
等情. 具禀前來. 伏查本年五月間, 職道訪有美國人秦鎮西,주 007
각주 007)
프레드릭 젠킨스(Fredrich B. Jenkins. 秦鎮西)는 상해의 미국 총영사 통역으로서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의 주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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係美國繙譯秦右之子,주 008
각주 008)
벤자민 젠킨스(Benjamin Jenkins. ?~1871. 秦右)는 미국 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1849년부터 상해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862년 이후 상해영사관 통역, 부총영사 등으로 재직하였고 1871년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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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居上海, 最喜生事. 法國人非而恩,주 009
각주 009)
페롱(Stanislas Féron. 非而恩)은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 당시 상해로 겨우 탈출하였다. 이때 최선일 등 중국 거주 천주교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오페르트에게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 부장품을 탈취하고, 이를 조선의 개항을 위한 대원군과의 협상 카드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 프랑스로 소환되었다가 인도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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係向在朝鮮傳教之人, 于本年三四月間, 勾結華洋匪人, 乘坐布國船隻, 由前赴朝鮮, 盜發該國王墳情事. 當經照會法, 布, 美等國領事, 令其查訊, 並究出同往華人姓名, 以憑飭挐嚴辦. 嗣准法領事白來尼照復,주 010
각주 010)
브레니(Brenier de Montmornad. 1813~1894. 白來尼)는 프랑스 외교관으로 1864~1869년까지 프랑스의 상해 총영사로 재직하였다. 1876~1879년까지 중국주재 프랑스 공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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為非而恩力辯其誣. 且言船主, 水手均屬無罪. 布領事德登賁照復,주 011
각주 011)
德登賁은 테튼보른(A. Tettenborn)이라는 것 외에 인적 사항은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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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此案三人, 均非所屬. 惟前赴高麗之輪船, 因張掛北德意記旗號, 是以立在布國船薄, 該船主, 水手並不知此三人謀計, 無從責罰. 美總領事西華.주 012
각주 012)
시워드(George F. Seward. 1840~1910는 미국 외교관으로 1861~1876년까지 상해 주재 총영사를, 1876~1880년까지 중국주재 미국 공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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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抄粘公堂會審情形.주 013
각주 013)
회심공해(會審公廨)는 동치 7년(1868), 상해도대(上海道台)와 英·美 등의 영사가 체결한 『양경빈설관회심장정(洋泾浜设官会审章程)』에 근거하여 1869년 영미조계(英美租界)에 설립되었다. 양경빈북수 이사아문 자리에 설치되었다. 또한 회심공당(会审公堂. Mixed Court)이라고도 하는데, 상해도대가 임명한 회심관(會審官)과 외방배심관(外方陪审官. 외국영사)이 공동으로 조계 내에서 영사재판권을 누리는 국가의 교민이 피고가 된 경우 이외의 모든 안건, 즉 조계 내의 중국인과 관련된 소송안건을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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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五月下旬所呈新聞紙, 語意相同, 無非為開脫秦鎮西地步. 惟昂不爾國領事欣臣復函內稱:주 014
각주 014)
하인센(Rudolph Heinsen. ?~1868. 欣臣)은 함부르크 출신의 상인으로, 독일 Siemssen 사의 상해 지점장(1859~1868)이자 1861년부터 이듬해까지 상해 주재 독일(프로이센) 영사였다. 1864년에는 상해 공공 조계 공부국(工部局) 이사로 활동하였다.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상해 주재 초대 영사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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查有該國人噯伯自高麗回來後,주 015
각주 015)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태계 상인으로서 1851년 홍콩으로 건너와 상업에 종사하다가 1854년 상해로 이동하였다. 조선과의 무역 개통을 위해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으나 모두 거부당하였다. 이후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 미국인 젠킨스,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1868년 5월 충청도 홍주(현재의 홍성)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하여 상해로 철수하였다. 이후 함부르크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고 3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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即經提訊, 業將全案口供等, 據遞送昂布爾大議事廳, 按照所應得之罪辦理.
等語. 且均未究出華人姓名, 以致無從查辦. 當其出往之時, 有無朝鮮人相與煽惑勾結, 亦不能悉其端倪. 然以時考之, 則與該國王原奏內稱:“有異船一隻, 停泊洪州牧外洋, 登岸隳墳”之語, 可以遙相印證.
今該廳縣等所訪朝鮮人出沒踪跡, 似即係崔善一等無疑. 職道復經察訪, 聞前往上海三德教堂之朝鮮人, 均于本年閏四月, 附搭洋船前赴烟台. 該處並無外國教堂, 或僦屋居住, 或又赴他處, 均未可定. 惟伊等既經歸教勢, 必恃西人為護符, 去來自若, 難保不重到上海. 其潛匿之處, 亦必不出教堂, 洋房之外. 若非知照領事協力會挐, 則難購線緝獲, 各國領事必出頭阻撓. 用將遵飭密訪及前次照會查辦緣由, 禀祈鑒核, 應否咨請禮部, 轉咨總理衙門照會英, 法, 美三國公使, 令其轉飭上海, 烟台領事, 會同地方官一體嚴挐解究, 勿稍袒匿, 或可就獲. 其法領事白來尼, 偶有入教之人, 必致竭力庇護. 倘非該國公使切使飭辦, 更恐徒託空言, 仍無實際. 職道愚昧之見, 是否之當, 伏乞鈞裁.
等情. 到本部堂. 據此. 當經批飭:
據禀已悉, 候咨明禮部, 轉咨總理衙門查核辦理. 至該朝鮮匪民來去無定, 如由烟台仍到上海, 自可即在三德教堂等處, 得其踪跡. 仰仍分飭該聽縣局委各員, 督線隨時嚴密跴緝. 勿得意存諉懈. 切切. 仍候撫院批示. 繳.주 016
각주 016)
繳은 문서를 받은 사람이 이 문서의 지시대로 처리한 다음 원 문서를 다시 반납하라는 지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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等語. 印發在案. 相應咨明. 為此合咨禮部, 相煩查照, 希即轉咨總理衙門查核辦理. 望切施行.

  • 각주 001)
    해방청(海防廳)은 연해 지방의 방어 업무를 위해 설치된 관청으로, 해방동지(海防同知) 또는 해방통판(海防通判)이 담당하였다. 전국적으로 해방동지는 총 14명(직예 1명, 봉천·산동·강소·복건 각각 2명, 절강 5명), 해방통판은 총 2명(복건·광동 각각 1명)이 설치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상해 회포국(會捕局)은 1866년 상해도가 프랑스 조계에 설치한 기구로서 프랑스 조계로 도주한 중국인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회심위원(會審委員)이란 1864년 5월, 상해도대(上海道臺) 응보시(應寶時)가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함께 구성한 혼합 법정인 양경빈북수(洋涇浜北首) 이사아문(理事衙門)의 중국인 재판관(讞員)을 지칭한다.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은 1869년 상해공공조계회심공해(上海公共租界會審公廨)가 정식 성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진복훈(陳福勳, 1810~?)은 절강 출신으로 1862년부터 상해 회방국(會防局), 기기국(機器局) 등에서 근무하였다.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강소순무(江蘇巡撫) 이홍장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1868년 8월, 양강총독(兩江總督) 증국번에 의해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의 위원에 임명되어 중외 교섭사건을 전담하였다. 陳丞福勳은 陳福勳이 지방관의 보좌관, 또는 현승(縣丞)의 직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쓰이는 표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양무국(洋務局)은 太平天國軍의 상해 위협 당시 영국·프랑스에 대한 알선 및 외국군과의 협조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세워졌던 회방국(會防局)이 태평천국의 진압 이후 철폐된 후 각 지역의 대외 업무, 중외 교섭사건을 총괄하기 위해 상해도대(上海道臺) 아문에 건립한 기구이다. 양무위원은 양무국의 인원을 지칭한다. 호유연(胡裕燕)은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없다. 단지 『광서청하현지(光緒清河縣志)』 26권의 수찬자(修纂者)로 검색이 되므로, 아마도 하북성(河北省) 청하현(淸河縣) 출신으로 보인다. ‘胡令裕燕’은 胡裕燕이 지현 또는 동급의 직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갈승효(葛繩孝, 1833~1909)는 절강 출신으로 1860년 이홍장의 막부에 들어가 단련(團練)을 조직하였고,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여 외국군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태평천국 진압 후 양무(洋務)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양무위원으로 중외교섭 사무를 처리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1850년대 이후 천주교 선교회 단체들은 상해에 대표 사무소(帳房)를 설치하였는데, 이 중 파리외방傳敎회가 설립하였던 사무소의 명칭이 삼덕당(三德堂)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프레드릭 젠킨스(Fredrich B. Jenkins. 秦鎮西)는 상해의 미국 총영사 통역으로서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의 주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벤자민 젠킨스(Benjamin Jenkins. ?~1871. 秦右)는 미국 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1849년부터 상해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862년 이후 상해영사관 통역, 부총영사 등으로 재직하였고 1871년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9)
    페롱(Stanislas Féron. 非而恩)은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 당시 상해로 겨우 탈출하였다. 이때 최선일 등 중국 거주 천주교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오페르트에게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 부장품을 탈취하고, 이를 조선의 개항을 위한 대원군과의 협상 카드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 프랑스로 소환되었다가 인도로 전출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브레니(Brenier de Montmornad. 1813~1894. 白來尼)는 프랑스 외교관으로 1864~1869년까지 프랑스의 상해 총영사로 재직하였다. 1876~1879년까지 중국주재 프랑스 공사를 지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德登賁은 테튼보른(A. Tettenborn)이라는 것 외에 인적 사항은 불명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2)
    시워드(George F. Seward. 1840~1910는 미국 외교관으로 1861~1876년까지 상해 주재 총영사를, 1876~1880년까지 중국주재 미국 공사를 지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회심공해(會審公廨)는 동치 7년(1868), 상해도대(上海道台)와 英·美 등의 영사가 체결한 『양경빈설관회심장정(洋泾浜设官会审章程)』에 근거하여 1869년 영미조계(英美租界)에 설립되었다. 양경빈북수 이사아문 자리에 설치되었다. 또한 회심공당(会审公堂. Mixed Court)이라고도 하는데, 상해도대가 임명한 회심관(會審官)과 외방배심관(外方陪审官. 외국영사)이 공동으로 조계 내에서 영사재판권을 누리는 국가의 교민이 피고가 된 경우 이외의 모든 안건, 즉 조계 내의 중국인과 관련된 소송안건을 처리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4)
    하인센(Rudolph Heinsen. ?~1868. 欣臣)은 함부르크 출신의 상인으로, 독일 Siemssen 사의 상해 지점장(1859~1868)이자 1861년부터 이듬해까지 상해 주재 독일(프로이센) 영사였다. 1864년에는 상해 공공 조계 공부국(工部局) 이사로 활동하였다.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상해 주재 초대 영사에 임명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태계 상인으로서 1851년 홍콩으로 건너와 상업에 종사하다가 1854년 상해로 이동하였다. 조선과의 무역 개통을 위해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으나 모두 거부당하였다. 이후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 미국인 젠킨스,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1868년 5월 충청도 홍주(현재의 홍성)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하여 상해로 철수하였다. 이후 함부르크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고 3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바로가기
  • 각주 016)
    繳은 문서를 받은 사람이 이 문서의 지시대로 처리한 다음 원 문서를 다시 반납하라는 지시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崔喜一, 福勳, 裕燕, 繩孝, 崔喜一, 秦鎮西, 秦右, 非而恩, 白來尼, 德登賁, 西華, 欣臣, 噯伯, 白來尼
지명
上海, 上海縣, 上海, 上海, 布國, , 北德意記, 布國, 昂布爾, 洪州牧, 上海, 上海, 烟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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