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강총독(兩江總督)이 조선 비민(匪民)을 조사하여 체포하는 일에 관한 비밀 자문을 보낸다고 예부(禮部)에서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내는 문서와 양강총독(兩江總督)의 자문 첨부 문서
密咨兩江總督咨覆訪拿朝鮮匪民事.
八月二十日, 禮部文稱:
主客司案呈:
准兩江總督曾咨稱:
據蘇松太道禀稱:
遵飭密訪, 朝鮮匪民來去無定.
等情. 合咨禮部, 轉咨總理各國事務衙門查核辦理.
等因. 前來. 相應抄錄該督原文, 密咨總理各國事務衙門查照可也.
별지: 「兩江總督咨文」:朝鮮匪民來去不定, 請轉總署照會各國公使協同緝捕.
1. 照錄原文.
兩江總督曾, 為咨明事.
據蘇松太道禀稱:
本年七月初一日, 奉札開:
六月二十五日, 准禮部咨:
主客司案呈:
同治七年六月十四日, 准總理各國事務衙門咨稱:
本衙門具奏朝鮮國近被洋船滋擾, 先經籌辦一摺. 於同治七年六月十三日, 軍機大臣奉旨:
依議.
欽此. 相應抄錄原奏, 恭錄諭旨, 密咨禮部, 欽遵辦理.
等因. 前來. 除轉咨該國王外, 相應抄錄總理各國事務衙門原奏, 飛咨兩江總督, 迅即遵奉諭旨, 密飭所屬將朝鮮匪民七名嚴密訪挐, 解送該國王懲辦, 毋任聞風逃逸. 事關欽奉, 妥速辦理可也.
等因. 並抄單. 准此. 合就抄單札道, 即便遵照, 在于上海附近購覓眼線, 將朝鮮匪民崔喜一等七名嚴密緝挐, 解送該國王懲辦, 毋任聞風逃逸. 勿違.
等因. 奉經分札密訪松海防廳주 001, 上海縣會捕局,주 002 暨會審委員陳丞福勳
주 003
각주 003)

, 洋務委員胡令裕燕
주 004회심위원(會審委員)이란 1864년 5월, 상해도대(上海道臺) 응보시(應寶時)가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함께 구성한 혼합 법정인 양경빈북수(洋涇浜北首) 이사아문(理事衙門)의 중국인 재판관(讞員)을 지칭한다.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은 1869년 상해공공조계회심공해(上海公共租界會審公廨)가 정식 성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진복훈(陳福勳, 1810~?)은 절강 출신으로 1862년부터 상해 회방국(會防局), 기기국(機器局) 등에서 근무하였다.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강소순무(江蘇巡撫) 이홍장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1868년 8월, 양강총독(兩江總督) 증국번에 의해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의 위원에 임명되어 중외 교섭사건을 전담하였다. 陳丞福勳은 陳福勳이 지방관의 보좌관, 또는 현승(縣丞)의 직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쓰이는 표현이다.
각주 004)

, 葛令繩孝,주 005 分股購覓眼線, 將匪民崔喜一等, 務獲解送. 去後. 嗣於七月初三日, 奉撫憲札同前, 由下道又經分札轉飭, 並將遵辦緣由, 具復在案. 茲據該廳縣局委各員禀稱:양무국(洋務局)은 太平天國軍의 상해 위협 당시 영국·프랑스에 대한 알선 및 외국군과의 협조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세워졌던 회방국(會防局)이 태평천국의 진압 이후 철폐된 후 각 지역의 대외 업무, 중외 교섭사건을 총괄하기 위해 상해도대(上海道臺) 아문에 건립한 기구이다. 양무위원은 양무국의 인원을 지칭한다. 호유연(胡裕燕)은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없다. 단지 『광서청하현지(光緒清河縣志)』 26권의 수찬자(修纂者)로 검색이 되므로, 아마도 하북성(河北省) 청하현(淸河縣) 출신으로 보인다. ‘胡令裕燕’은 胡裕燕이 지현 또는 동급의 직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密訪得上海小東門外有外國教堂名曰:‘三德.’주 006 同治五年間, 有洋人自朝鮮來滬, 帶有朝鮮國人九名, 同住該堂. 此後來去無常, 行踪甚秘. 本年春間, 聞該堂洋人同朝鮮國人二名, 搭船前徃朝鮮國, 不便上岸, 仍由原船回滬. 至閏四月復同朝鮮人六名他去, 所往何處, 無從查詢. 其在滬時, 曾改穿中國服式, 因言語不通, 人莫能知其姓名. 此外復加細訪, 並無朝鮮人逗遛在滬. 容仍不時探緝, 遇有朝鮮人來, 即盤詰確切, 解送辦理.
等情. 具禀前來. 伏查本年五月間, 職道訪有美國人秦鎮西,주 007 係美國繙譯秦右之子,주 008 久居上海, 最喜生事. 法國人非而恩,주 009 係向在朝鮮傳教之人, 于本年三四月間, 勾結華洋匪人, 乘坐布國船隻, 由滬前赴朝鮮, 盜發該國王墳情事. 當經照會法, 布, 美等國領事, 令其查訊, 並究出同往華人姓名, 以憑飭挐嚴辦. 嗣准法領事白來尼照復,주 010 為非而恩力辯其誣. 且言船主, 水手均屬無罪. 布領事德登賁照復,주 011 以此案三人, 均非所屬. 惟前赴高麗之輪船, 因張掛北德意記旗號, 是以立在布國船薄, 該船主, 水手並不知此三人謀計, 無從責罰. 美總領事西華.주 012 則抄粘公堂會審情形.주 013 與五月下旬所呈新聞紙, 語意相同, 無非為開脫秦鎮西地步. 惟昂不爾國領事欣臣復函內稱:주 014
查有該國人噯伯自高麗回來後,주 015
각주 015)

即經提訊, 業將全案口供等, 據遞送昂布爾大議事廳, 按照所應得之罪辦理.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태계 상인으로서 1851년 홍콩으로 건너와 상업에 종사하다가 1854년 상해로 이동하였다. 조선과의 무역 개통을 위해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으나 모두 거부당하였다. 이후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 미국인 젠킨스,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1868년 5월 충청도 홍주(현재의 홍성)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하여 상해로 철수하였다. 이후 함부르크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고 3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等語. 且均未究出華人姓名, 以致無從查辦. 當其出往之時, 有無朝鮮人相與煽惑勾結, 亦不能悉其端倪. 然以時考之, 則與該國王原奏內稱:“有異船一隻, 停泊洪州牧外洋, 登岸隳墳”之語, 可以遙相印證.
今該廳縣等所訪朝鮮人出沒踪跡, 似即係崔善一等無疑. 職道復經察訪, 聞前往上海三德教堂之朝鮮人, 均于本年閏四月, 附搭洋船前赴烟台. 該處並無外國教堂, 或僦屋居住, 或又赴他處, 均未可定. 惟伊等既經歸教勢, 必恃西人為護符, 去來自若, 難保不重到上海. 其潛匿之處, 亦必不出教堂, 洋房之外. 若非知照領事協力會挐, 則難購線緝獲, 各國領事必出頭阻撓. 用將遵飭密訪及前次照會查辦緣由, 禀祈鑒核, 應否咨請禮部, 轉咨總理衙門照會英, 法, 美三國公使, 令其轉飭上海, 烟台領事, 會同地方官一體嚴挐解究, 勿稍袒匿, 或可就獲. 其法領事白來尼, 偶有入教之人, 必致竭力庇護. 倘非該國公使切使飭辦, 更恐徒託空言, 仍無實際. 職道愚昧之見, 是否之當, 伏乞鈞裁.
等情. 到本部堂. 據此. 當經批飭:
據禀已悉, 候咨明禮部, 轉咨總理衙門查核辦理. 至該朝鮮匪民來去無定, 如由烟台仍到上海, 自可即在三德教堂等處, 得其踪跡. 仰仍分飭該聽縣局委各員, 督線隨時嚴密跴緝. 勿得意存諉懈. 切切. 仍候撫院批示. 繳.주 016
等語. 印發在案. 相應咨明. 為此合咨禮部, 相煩查照, 希即轉咨總理衙門查核辦理. 望切施行.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회심위원(會審委員)이란 1864년 5월, 상해도대(上海道臺) 응보시(應寶時)가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함께 구성한 혼합 법정인 양경빈북수(洋涇浜北首) 이사아문(理事衙門)의 중국인 재판관(讞員)을 지칭한다.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은 1869년 상해공공조계회심공해(上海公共租界會審公廨)가 정식 성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진복훈(陳福勳, 1810~?)은 절강 출신으로 1862년부터 상해 회방국(會防局), 기기국(機器局) 등에서 근무하였다.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강소순무(江蘇巡撫) 이홍장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1868년 8월, 양강총독(兩江總督) 증국번에 의해 양경빈북수 이사아문의 위원에 임명되어 중외 교섭사건을 전담하였다. 陳丞福勳은 陳福勳이 지방관의 보좌관, 또는 현승(縣丞)의 직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쓰이는 표현이다.
-
각주 004)
양무국(洋務局)은 太平天國軍의 상해 위협 당시 영국·프랑스에 대한 알선 및 외국군과의 협조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세워졌던 회방국(會防局)이 태평천국의 진압 이후 철폐된 후 각 지역의 대외 업무, 중외 교섭사건을 총괄하기 위해 상해도대(上海道臺) 아문에 건립한 기구이다. 양무위원은 양무국의 인원을 지칭한다. 호유연(胡裕燕)은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없다. 단지 『광서청하현지(光緒清河縣志)』 26권의 수찬자(修纂者)로 검색이 되므로, 아마도 하북성(河北省) 청하현(淸河縣) 출신으로 보인다. ‘胡令裕燕’은 胡裕燕이 지현 또는 동급의 직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태계 상인으로서 1851년 홍콩으로 건너와 상업에 종사하다가 1854년 상해로 이동하였다. 조선과의 무역 개통을 위해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으나 모두 거부당하였다. 이후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 미국인 젠킨스,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1868년 5월 충청도 홍주(현재의 홍성)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하여 상해로 철수하였다. 이후 함부르크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고 3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崔喜一, 福勳, 裕燕, 繩孝, 崔喜一, 秦鎮西, 秦右, 非而恩, 白來尼, 德登賁, 西華, 欣臣, 噯伯, 白來尼
- 지명
- 上海, 上海縣, 上海, 上海, 布國, 滬, 北德意記, 布國, 昂布爾, 洪州牧, 上海, 上海, 烟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