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난당(亂黨)이 난동을 일으켜서 일본이 함대를 파견하므로 중국도 군함을 파견하여 사태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는 문서와 전보(電報) 자료
高麗亂黨滋事, 日將派艦問罪, 中國宜派兵船及熟悉交涉大員前往應變.
주 001
주 002
六月十九日, 署北洋大臣張樹聲
주 003
각주 003)

函稱:장수성(張樹聲, 1824~1884)은 자가 진헌(振軒)으로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출신이며 이홍장이 거느리는 회군(淮軍)의 장령(將领)이었다. 1882년 이홍장이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가자 당시 양광총독이었던 장수성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따라서 署理北洋通商大臣의 직함도 겸직)을 맡았는데, 조선이 임오군란을 맞자 회군 오장경(吳長慶)의 부대를 산동에서 조선으로 출병시켜 일본에 맞서게 하였다. 다음 해 그는 양광총독(兩廣總督)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光緖 8년 3월 2일(1882년 4월 19일) 모친이 사망하자 이홍장은 예법에 따라 종제(終制)를 위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청 황실에서는 시국의 어려움과 북양대신 업무의 중요성을 이유로 100일의 휴가를 허가하였다.(「懇請終制摺」, 『李鴻章全集』10, 安徽敎育出版社, 2008, pp.66-67.)
本日叠接黎蒓齋星使十七·十八兩日來電.주 004
각주 004)

知高麗亂黨現向日本使館滋事. 謹將兩電錄呈鈞覽.주 005 高麗向爲日本所制, 近日徑與各國立約通商. 日人又屢議税則而不能定, 其心不無觖望. 今高人圍打使館, 致有傷亡, 日本兵船駛往, 自係藉題威嚇, 期遂其大欲. 何子峩星使頃間遇此,주 006여서창(黎庶昌, 1837~1896)은 자가 순재(蒓齋)로, 귀주성(貴州省) 준의현(遵義縣) 출신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반란 때에는 증국번(曾國藩)의 막우로 있으면서 설복성(薛福成), 오여륜(吳汝綸), 장유조(張裕釗)와 함께 증국번의 4대 제자(曾門四弟子)로 일컬어졌다. 광서(光緖) 연간에는 곽숭도(郭嵩燾)・증기택(曾紀澤) 등이 유럽으로 파견될 때 수행하여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참찬(參讚)으로 일하였고, 1881년 도원(道員)으로 승진한 다음, 초대 공사 하여장(何如璋)의 뒤를 이어 제2대 주일본 공사로 파견되었다. 3년간 일본에 머물렀다가, 모친상으로 귀국하여 3년간의 정우(丁憂) 기간을 보내고 1884년 다시 일본으로 파견되면서 총 6년간 주일본 공사를 지냈다. 성사(星使)는 천절팔성(天節八星)이 사신사(使臣事)를 주지한다고 생각해서 제왕의 사자를 가리켜 사성(使星)이나 성사(星使)라고 부른 데서 나온 명칭이다. 즉 황제의 명으로 외국에 파견된 외교관을 의미한다.
각주 006)

渠謂: “其外務大輔既來相告, 亦未始無希冀調停之意, 兵船雖往, 或未必遽開兵釁.” 子峩久習倭情, 自非無見. 惟高爲中國屬邦. 日人既經來告, 中國既知此事, 誼不可若罔聞知. 蒓齋謂: “宜派船前往觀變,” 似亦题中應有之義. 樹聲已飭統領北洋水師丁提督汝昌預備快船兩號,주 007하여장(何如璋, 1838~1891)은 자가 자아(子峨)로 광동성(廣東省) 대포현(大埔縣) 출신의 외교관으로 중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다음의 첫 번째 주일본 공사로 4년여를 근무하였다. 1880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그를 방문하였을 때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黄遵憲)에게 쓰게 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기증한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1868년 진사(進士) 출신인 하여장은 1877년 일본으로 파견되기 전에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으로 승진한 상태였으므로 하시강(何侍講)으로 불리기도 한다.
각주 007)

兵船一號, 在此伺候. 如須派往, 自可借籌議中·高商務爲名, 不必牽及此事. 惟高人之求助, 日人之以問罪高人, 相語皆在意中. 此時相機因應, 或竟可爲作調人. 必得熟習交渉事宜, 能達權變之文職大員同往, 方可期周旋得法. 馬道建忠堪勝是役,주 008정여창(丁汝昌, 1836~1895)은 청 말 북양해군의 제독을 지낸 군인으로 안휘성(安徽省) 노강(盧江) 출신으로 호는 차장(次章)이다. 자는 우정(禹亭)이다. 젊은 시절에 태평천국에 참여하였다가 상군(湘軍)에 투항하였고, 뒤이어 이홍장의 회군(淮軍)에 예속되어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봉기 진압에 공을 세워 기명제독(記名提督)에 올랐다. 1879년 이홍장의 추천으로 북양수사(北洋水師)의 포함을 맡게 되면서 해군에 투신하여, 1881년에는 200명의 북양수사 관병을 이끌고 영국에 가서 초용(超勇), 양위(揚威) 순양함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북양해군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나, 북양함대의 기지인 위해위(威海衛)를 침범한 일본과 싸우다가 자결하였다.
각주 008)

昨已乘輪赴皖, 屈計日內甫能抵滬, 頃已電囑在滬守候. 應否飛飭該道刻日折回, 與丁提督乘輪同赴朝鮮相機觀變之處, 伏乞迅賜指示遵行. 除電復蒓齊請將實在情形隨時電寄外, 專肅密達. 祗敂鈞祺.주 009
마건충(馬建忠, 1845~1900)은 강소성(江蘇省) 단도(丹徒) 출신으로 자는 미숙(眉叔)이다. 1876년 이홍장에 의해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어 변호사 등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이홍장의 지휘 아래 인도와 조선에서 외교 교섭(「조・미조약」 등의 체결)에 종사하였고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 때에는 대원군(大院君)을 중국에 연행하는 일 등을 맡았다. 조선이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과 조약을 맺는 일에도 관여하였으나, 관직은 도원(道員)에 그쳤다. 그는 철도 부설, 이금(釐金) 감면에 의한 상공업 발전을 주창한 양무파 관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서로 『적가재기언기행(適可齋記言記行)』, 『동행삼록(東行三錄)』, 『마씨문통(馬氏文通)』 등이 있다.
再,주 010 密肅者. 馬道建忠赴皖至少荃中堂處, 禀商「中·高通商章程」諸事,주 011 亦皆目前要務. 倘鈞署以該道未便折回, 則現在子峩星使指日回京復命. 渠於日人情僞, 既所深知, 此次高麗與各國通商亦多得子峩從中引導之力, 故高人亦頗感之. 如鈞署奏明派往, 似亦可以任此. 謹以附陳, 統候裁奪. 再叩崇祺.
照錄抄摺.
별지: 「出仕日本大臣黎庶昌發直督張樹聲電」: 高麗亂黨圍攻日使館滋事, 日擬派兵船前往.
(1) 「出仕日本大臣주 012
黎庶昌發直督張樹聲電」.
外務大輔來告, 中六月初九, 高麗亂黨突圍日本使館, 打死一人, 傷數人, 日使花房等逃至仁川.주 013 又被高兵圍阻, 後得上英船載至長崎. 現擬派兵船三隻前往, 查辦此事. 特電知, 懇錄呈總署.
十七, 黎.
六月十八日下午兩點鐘到.
별지: 「出仕日本黎庶昌大臣發直督張樹聲電」: 日兵船卽赴高麗, 中國宜派兵船前往觀變.
(2) 「出仕日本黎庶昌大臣發直督張樹聲電」.
日本兵船即赴高麗, 中國似宜派兵船, 前往觀變.
十八, 黎.
六月十八日 下午二點四十分到.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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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장수성(張樹聲, 1824~1884)은 자가 진헌(振軒)으로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출신이며 이홍장이 거느리는 회군(淮軍)의 장령(將领)이었다. 1882년 이홍장이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가자 당시 양광총독이었던 장수성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따라서 署理北洋通商大臣의 직함도 겸직)을 맡았는데, 조선이 임오군란을 맞자 회군 오장경(吳長慶)의 부대를 산동에서 조선으로 출병시켜 일본에 맞서게 하였다. 다음 해 그는 양광총독(兩廣總督)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光緖 8년 3월 2일(1882년 4월 19일) 모친이 사망하자 이홍장은 예법에 따라 종제(終制)를 위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청 황실에서는 시국의 어려움과 북양대신 업무의 중요성을 이유로 100일의 휴가를 허가하였다.(「懇請終制摺」, 『李鴻章全集』10, 安徽敎育出版社, 2008, p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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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여서창(黎庶昌, 1837~1896)은 자가 순재(蒓齋)로, 귀주성(貴州省) 준의현(遵義縣) 출신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반란 때에는 증국번(曾國藩)의 막우로 있으면서 설복성(薛福成), 오여륜(吳汝綸), 장유조(張裕釗)와 함께 증국번의 4대 제자(曾門四弟子)로 일컬어졌다. 광서(光緖) 연간에는 곽숭도(郭嵩燾)・증기택(曾紀澤) 등이 유럽으로 파견될 때 수행하여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참찬(參讚)으로 일하였고, 1881년 도원(道員)으로 승진한 다음, 초대 공사 하여장(何如璋)의 뒤를 이어 제2대 주일본 공사로 파견되었다. 3년간 일본에 머물렀다가, 모친상으로 귀국하여 3년간의 정우(丁憂) 기간을 보내고 1884년 다시 일본으로 파견되면서 총 6년간 주일본 공사를 지냈다. 성사(星使)는 천절팔성(天節八星)이 사신사(使臣事)를 주지한다고 생각해서 제왕의 사자를 가리켜 사성(使星)이나 성사(星使)라고 부른 데서 나온 명칭이다. 즉 황제의 명으로 외국에 파견된 외교관을 의미한다.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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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정여창(丁汝昌, 1836~1895)은 청 말 북양해군의 제독을 지낸 군인으로 안휘성(安徽省) 노강(盧江) 출신으로 호는 차장(次章)이다. 자는 우정(禹亭)이다. 젊은 시절에 태평천국에 참여하였다가 상군(湘軍)에 투항하였고, 뒤이어 이홍장의 회군(淮軍)에 예속되어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봉기 진압에 공을 세워 기명제독(記名提督)에 올랐다. 1879년 이홍장의 추천으로 북양수사(北洋水師)의 포함을 맡게 되면서 해군에 투신하여, 1881년에는 200명의 북양수사 관병을 이끌고 영국에 가서 초용(超勇), 양위(揚威) 순양함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북양해군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나, 북양함대의 기지인 위해위(威海衛)를 침범한 일본과 싸우다가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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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마건충(馬建忠, 1845~1900)은 강소성(江蘇省) 단도(丹徒) 출신으로 자는 미숙(眉叔)이다. 1876년 이홍장에 의해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어 변호사 등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이홍장의 지휘 아래 인도와 조선에서 외교 교섭(「조・미조약」 등의 체결)에 종사하였고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 때에는 대원군(大院君)을 중국에 연행하는 일 등을 맡았다. 조선이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과 조약을 맺는 일에도 관여하였으나, 관직은 도원(道員)에 그쳤다. 그는 철도 부설, 이금(釐金) 감면에 의한 상공업 발전을 주창한 양무파 관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서로 『적가재기언기행(適可齋記言記行)』, 『동행삼록(東行三錄)』, 『마씨문통(馬氏文通)』 등이 있다.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색인어
- 이름
- 張樹聲, 黎蒓齋, 建忠, 蒓齊, 建忠, 黎庶昌, 張樹聲, 花房, 黎庶昌, 張樹聲
- 지명
- 皖, 滬, 滬, 皖, 仁川, 長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