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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조선의 난당(亂黨)이 난동을 일으켜서 일본이 함대를 파견하므로 중국도 군함을 파견하여 사태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는 문서와 전보(電報) 자료

高麗亂黨滋事, 日將派艦問罪, 中國宜派兵船及熟悉交涉大員前往應變.
  • 발신자
    署理北洋通商大臣(이하 署理北洋大臣으로 약칭) 張樹聲
  • 수신자
    總理各國事務衙門(이하 總理衙門으로 약칭)
  • 날짜
    1882년 6월 19일 (음)(光緖八年六月十九日) , 1882년 8월 2일 (光緖八年六月十九日)
  • 문서번호
    4-1-01(463, 734a-735a)
주 001
각주 001)
여기의 사안 제목은 원 자료집 제1권의 주제별 목차 밑 부분에 각 문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을 옮겨 번역한 것이다. 본문의 제목이나 설명과 약간 다르기도 하나 실제로는 같은 내용이며, 때에 따라서는 실제 내용을 잘 드러내기 위해 본문의 제목・설명을 적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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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02
각주 002)
4-1-1(463, 734a-735a)에서 ‘4-1-1’은 각 공문의 구분을 위해 역자가 임의로 순서대로 붙인 것이고(IV. 임오군란 1. 조선 난사에 대한 대책 논의 첫 번째 문서라는 뜻이다) 뒤의 (463, 734a-735a) 부분은 원래의 문서번호 463과 수록 페이지(734a-735a), 즉 734 쪽 상단에서 735쪽 상단까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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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十九日, 署北洋大臣張樹聲 주 003
각주 003)
장수성(張樹聲, 1824~1884)은 자가 진헌(振軒)으로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출신이며 이홍장이 거느리는 회군(淮軍)의 장령(將领)이었다. 1882년 이홍장이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가자 당시 양광총독이었던 장수성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따라서 署理北洋通商大臣의 직함도 겸직)을 맡았는데, 조선이 임오군란을 맞자 회군 오장경(吳長慶)의 부대를 산동에서 조선으로 출병시켜 일본에 맞서게 하였다. 다음 해 그는 양광총독(兩廣總督)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光緖 8년 3월 2일(1882년 4월 19일) 모친이 사망하자 이홍장은 예법에 따라 종제(終制)를 위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청 황실에서는 시국의 어려움과 북양대신 업무의 중요성을 이유로 100일의 휴가를 허가하였다.(「懇請終制摺」, 『李鴻章全集』10, 安徽敎育出版社, 2008, p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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函稱:
 
本日叠接黎蒓齋星使十七·十八兩日來電.주 004
각주 004)
여서창(黎庶昌, 1837~1896)은 자가 순재(蒓齋)로, 귀주성(貴州省) 준의현(遵義縣) 출신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반란 때에는 증국번(曾國藩)의 막우로 있으면서 설복성(薛福成), 오여륜(吳汝綸), 장유조(張裕釗)와 함께 증국번의 4대 제자(曾門四弟子)로 일컬어졌다. 광서(光緖) 연간에는 곽숭도(郭嵩燾)・증기택(曾紀澤) 등이 유럽으로 파견될 때 수행하여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참찬(參讚)으로 일하였고, 1881년 도원(道員)으로 승진한 다음, 초대 공사 하여장(何如璋)의 뒤를 이어 제2대 주일본 공사로 파견되었다. 3년간 일본에 머물렀다가, 모친상으로 귀국하여 3년간의 정우(丁憂) 기간을 보내고 1884년 다시 일본으로 파견되면서 총 6년간 주일본 공사를 지냈다. 성사(星使)는 천절팔성(天節八星)이 사신사(使臣事)를 주지한다고 생각해서 제왕의 사자를 가리켜 사성(使星)이나 성사(星使)라고 부른 데서 나온 명칭이다. 즉 황제의 명으로 외국에 파견된 외교관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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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高麗亂黨現向日本使館滋事. 謹將兩電錄呈鈞覽.주 005
각주 005)
균람(鈞覽)에서 람(覽)은 검토하다, 열람한다는 뜻이고, 균(鈞)은 겸양어로서 수신자가 상급자인 경우 사용하여 상대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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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向爲日本所制, 近日徑與各國立約通商. 日人又屢議税則而不能定, 其心不無觖望. 今高人圍打使館, 致有傷亡, 日本兵船駛往, 自係藉題威嚇, 期遂其大欲. 何子峩星使頃間遇此,주 006
각주 006)
하여장(何如璋, 1838~1891)은 자가 자아(子峨)로 광동성(廣東省) 대포현(大埔縣) 출신의 외교관으로 중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다음의 첫 번째 주일본 공사로 4년여를 근무하였다. 1880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그를 방문하였을 때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黄遵憲)에게 쓰게 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기증한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1868년 진사(進士) 출신인 하여장은 1877년 일본으로 파견되기 전에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으로 승진한 상태였으므로 하시강(何侍講)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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渠謂: “其外務大輔既來相告, 亦未始無希冀調停之意, 兵船雖往, 或未必遽開兵釁.” 子峩久習倭情, 自非無見. 惟高爲中國屬邦. 日人既經來告, 中國既知此事, 誼不可若罔聞知. 蒓齋謂: “宜派船前往觀變,” 似亦题中應有之義. 樹聲已飭統領北洋水師丁提督汝昌預備快船兩號,주 007
각주 007)
정여창(丁汝昌, 1836~1895)은 청 말 북양해군의 제독을 지낸 군인으로 안휘성(安徽省) 노강(盧江) 출신으로 호는 차장(次章)이다. 자는 우정(禹亭)이다. 젊은 시절에 태평천국에 참여하였다가 상군(湘軍)에 투항하였고, 뒤이어 이홍장의 회군(淮軍)에 예속되어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봉기 진압에 공을 세워 기명제독(記名提督)에 올랐다. 1879년 이홍장의 추천으로 북양수사(北洋水師)의 포함을 맡게 되면서 해군에 투신하여, 1881년에는 200명의 북양수사 관병을 이끌고 영국에 가서 초용(超勇), 양위(揚威) 순양함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북양해군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나, 북양함대의 기지인 위해위(威海衛)를 침범한 일본과 싸우다가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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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船一號, 在此伺候. 如須派往, 自可借籌議中·高商務爲名, 不必牽及此事. 惟高人之求助, 日人之以問罪高人, 相語皆在意中. 此時相機因應, 或竟可爲作調人. 必得熟習交渉事宜, 能達權變之文職大員同往, 方可期周旋得法. 馬道建忠堪勝是役,주 008
각주 008)
마건충(馬建忠, 1845~1900)은 강소성(江蘇省) 단도(丹徒) 출신으로 자는 미숙(眉叔)이다. 1876년 이홍장에 의해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어 변호사 등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이홍장의 지휘 아래 인도와 조선에서 외교 교섭(「조・미조약」 등의 체결)에 종사하였고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 때에는 대원군(大院君)을 중국에 연행하는 일 등을 맡았다. 조선이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과 조약을 맺는 일에도 관여하였으나, 관직은 도원(道員)에 그쳤다. 그는 철도 부설, 이금(釐金) 감면에 의한 상공업 발전을 주창한 양무파 관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서로 『적가재기언기행(適可齋記言記行)』, 『동행삼록(東行三錄)』, 『마씨문통(馬氏文通)』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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昨已乘輪赴, 屈計日內甫能抵, 頃已電囑在守候. 應否飛飭該道刻日折回, 與丁提督乘輪同赴朝鮮相機觀變之處, 伏乞迅賜指示遵行. 除電復蒓齊請將實在情形隨時電寄外, 專肅密達. 祗敂鈞祺.주 009
각주 009)
‘기(祺)’는 서신용어에서 자주 쓰이는데, 행복, 길상(吉祥)의 의미이다. 따라서 ‘안(安)’의 쓰임과 비슷하다. 다만, 일반적으로 연장자에게 ‘기(祺)’를 사용하지 않고, 동급자・동년배나 친속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사용한다. 보통 동급자・동년배에게 ‘태기(臺祺)’를 사용하고, 정치 관계에서 “훈기(勛祺)”를 사용한다. 상급자(실권자)에게는 “균기(鈞祺)”를 쓴다. “기”와 결합하는 동사는 보통 “송(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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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주 010
각주 010)
이 내용은 『국역 淸季中日韓史料』 제4권에 실린 (27) 문서번호: 2-1-1-86(457, 728)과 (28) 문서번호: 2-1-1-87(458, 729a) 관련 첨부 내용이다. 재(再)는 역사 문서에서 보충 서술을 한다고 표시하는 용어로, 1) 청대 신하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주접 문서에 덧붙이는 협편(夾片)의 첫머리에 써서 주접 본문 외에 다른 사정을 보충하여 서술한다고 표시하거나, 2) 일반 문서에서 관련 사정을 보충 서술할 필요가 있을 때 첫머리에 사용하고 뒤이어 보충하는 사정을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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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肅者. 馬道建忠至少荃中堂處, 禀商「中·高通商章程」諸事,주 011
각주 011)
임오군란 이후인 1882년 가을 의정(議定)・반포된 이 장정의 정식 명칭은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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亦皆目前要務. 倘鈞署以該道未便折回, 則現在子峩星使指日回京復命. 渠於日人情僞, 既所深知, 此次高麗與各國通商亦多得子峩從中引導之力, 故高人亦頗感之. 如鈞署奏明派往, 似亦可以任此. 謹以附陳, 統候裁奪. 再叩崇祺.
 
照錄抄摺.
별지: 「出仕日本大臣黎庶昌發直督張樹聲電」: 高麗亂黨圍攻日使館滋事, 日擬派兵船前往.
 
(1) 「出仕日本大臣주 012
각주 012)
출사대신(出使大臣)은 “흠명출사대신(欽命出使大臣)”을 가리킨다. 청 말 각국에 파견된 고위 외교 관료를 의미한다. 일본 출사대신은 주일본 중국 공사(公使)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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黎庶昌發直督張樹聲電」.
外務大輔來告, 中六月初九, 高麗亂黨突圍日本使館, 打死一人, 傷數人, 日使花房等逃至仁川.주 013
각주 013)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는 공사관 서기생(書記生)으로 1871년 내한하여 한일교역 교섭에 종사하였다. 그해 9월 대리공사로 부임하고, 1880년 변리공사(辨理公使)에 승진, 인천・원산의 개항을 꾀하였으며. 1882년 임오군란을 만나 스스로 공사관 건물을 불태우고 서울을 탈출하여 귀국하였으나, 다시 돌아와서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1911년 자작(子爵)을 받고 그해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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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被高兵圍阻, 後得上英船載至長崎. 現擬派兵船三隻前往, 查辦此事. 特電知, 懇錄呈總署.
十七, 黎.
六月十八日下午兩點鐘到.
별지: 「出仕日本黎庶昌大臣發直督張樹聲電」: 日兵船卽赴高麗, 中國宜派兵船前往觀變.
 
(2) 「出仕日本黎庶昌大臣發直督張樹聲電」.
日本兵船即赴高麗, 中國似宜派兵船, 前往觀變.
十八, 黎.
六月十八日 下午二點四十分到.

  • 각주 001)
    여기의 사안 제목은 원 자료집 제1권의 주제별 목차 밑 부분에 각 문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을 옮겨 번역한 것이다. 본문의 제목이나 설명과 약간 다르기도 하나 실제로는 같은 내용이며, 때에 따라서는 실제 내용을 잘 드러내기 위해 본문의 제목・설명을 적용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4-1-1(463, 734a-735a)에서 ‘4-1-1’은 각 공문의 구분을 위해 역자가 임의로 순서대로 붙인 것이고(IV. 임오군란 1. 조선 난사에 대한 대책 논의 첫 번째 문서라는 뜻이다) 뒤의 (463, 734a-735a) 부분은 원래의 문서번호 463과 수록 페이지(734a-735a), 즉 734 쪽 상단에서 735쪽 상단까지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장수성(張樹聲, 1824~1884)은 자가 진헌(振軒)으로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출신이며 이홍장이 거느리는 회군(淮軍)의 장령(將领)이었다. 1882년 이홍장이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가자 당시 양광총독이었던 장수성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따라서 署理北洋通商大臣의 직함도 겸직)을 맡았는데, 조선이 임오군란을 맞자 회군 오장경(吳長慶)의 부대를 산동에서 조선으로 출병시켜 일본에 맞서게 하였다. 다음 해 그는 양광총독(兩廣總督)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光緖 8년 3월 2일(1882년 4월 19일) 모친이 사망하자 이홍장은 예법에 따라 종제(終制)를 위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청 황실에서는 시국의 어려움과 북양대신 업무의 중요성을 이유로 100일의 휴가를 허가하였다.(「懇請終制摺」, 『李鴻章全集』10, 安徽敎育出版社, 2008, pp.66-67.) 바로가기
  • 각주 004)
    여서창(黎庶昌, 1837~1896)은 자가 순재(蒓齋)로, 귀주성(貴州省) 준의현(遵義縣) 출신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반란 때에는 증국번(曾國藩)의 막우로 있으면서 설복성(薛福成), 오여륜(吳汝綸), 장유조(張裕釗)와 함께 증국번의 4대 제자(曾門四弟子)로 일컬어졌다. 광서(光緖) 연간에는 곽숭도(郭嵩燾)・증기택(曾紀澤) 등이 유럽으로 파견될 때 수행하여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참찬(參讚)으로 일하였고, 1881년 도원(道員)으로 승진한 다음, 초대 공사 하여장(何如璋)의 뒤를 이어 제2대 주일본 공사로 파견되었다. 3년간 일본에 머물렀다가, 모친상으로 귀국하여 3년간의 정우(丁憂) 기간을 보내고 1884년 다시 일본으로 파견되면서 총 6년간 주일본 공사를 지냈다. 성사(星使)는 천절팔성(天節八星)이 사신사(使臣事)를 주지한다고 생각해서 제왕의 사자를 가리켜 사성(使星)이나 성사(星使)라고 부른 데서 나온 명칭이다. 즉 황제의 명으로 외국에 파견된 외교관을 의미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균람(鈞覽)에서 람(覽)은 검토하다, 열람한다는 뜻이고, 균(鈞)은 겸양어로서 수신자가 상급자인 경우 사용하여 상대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하여장(何如璋, 1838~1891)은 자가 자아(子峨)로 광동성(廣東省) 대포현(大埔縣) 출신의 외교관으로 중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다음의 첫 번째 주일본 공사로 4년여를 근무하였다. 1880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그를 방문하였을 때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黄遵憲)에게 쓰게 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기증한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1868년 진사(進士) 출신인 하여장은 1877년 일본으로 파견되기 전에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으로 승진한 상태였으므로 하시강(何侍講)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정여창(丁汝昌, 1836~1895)은 청 말 북양해군의 제독을 지낸 군인으로 안휘성(安徽省) 노강(盧江) 출신으로 호는 차장(次章)이다. 자는 우정(禹亭)이다. 젊은 시절에 태평천국에 참여하였다가 상군(湘軍)에 투항하였고, 뒤이어 이홍장의 회군(淮軍)에 예속되어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봉기 진압에 공을 세워 기명제독(記名提督)에 올랐다. 1879년 이홍장의 추천으로 북양수사(北洋水師)의 포함을 맡게 되면서 해군에 투신하여, 1881년에는 200명의 북양수사 관병을 이끌고 영국에 가서 초용(超勇), 양위(揚威) 순양함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북양해군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나, 북양함대의 기지인 위해위(威海衛)를 침범한 일본과 싸우다가 자결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마건충(馬建忠, 1845~1900)은 강소성(江蘇省) 단도(丹徒) 출신으로 자는 미숙(眉叔)이다. 1876년 이홍장에 의해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어 변호사 등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이홍장의 지휘 아래 인도와 조선에서 외교 교섭(「조・미조약」 등의 체결)에 종사하였고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 때에는 대원군(大院君)을 중국에 연행하는 일 등을 맡았다. 조선이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과 조약을 맺는 일에도 관여하였으나, 관직은 도원(道員)에 그쳤다. 그는 철도 부설, 이금(釐金) 감면에 의한 상공업 발전을 주창한 양무파 관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서로 『적가재기언기행(適可齋記言記行)』, 『동행삼록(東行三錄)』, 『마씨문통(馬氏文通)』 등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기(祺)’는 서신용어에서 자주 쓰이는데, 행복, 길상(吉祥)의 의미이다. 따라서 ‘안(安)’의 쓰임과 비슷하다. 다만, 일반적으로 연장자에게 ‘기(祺)’를 사용하지 않고, 동급자・동년배나 친속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사용한다. 보통 동급자・동년배에게 ‘태기(臺祺)’를 사용하고, 정치 관계에서 “훈기(勛祺)”를 사용한다. 상급자(실권자)에게는 “균기(鈞祺)”를 쓴다. “기”와 결합하는 동사는 보통 “송(頌)”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이 내용은 『국역 淸季中日韓史料』 제4권에 실린 (27) 문서번호: 2-1-1-86(457, 728)과 (28) 문서번호: 2-1-1-87(458, 729a) 관련 첨부 내용이다. 재(再)는 역사 문서에서 보충 서술을 한다고 표시하는 용어로, 1) 청대 신하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주접 문서에 덧붙이는 협편(夾片)의 첫머리에 써서 주접 본문 외에 다른 사정을 보충하여 서술한다고 표시하거나, 2) 일반 문서에서 관련 사정을 보충 서술할 필요가 있을 때 첫머리에 사용하고 뒤이어 보충하는 사정을 서술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1)
    임오군란 이후인 1882년 가을 의정(議定)・반포된 이 장정의 정식 명칭은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2)
    출사대신(出使大臣)은 “흠명출사대신(欽命出使大臣)”을 가리킨다. 청 말 각국에 파견된 고위 외교 관료를 의미한다. 일본 출사대신은 주일본 중국 공사(公使)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13)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는 공사관 서기생(書記生)으로 1871년 내한하여 한일교역 교섭에 종사하였다. 그해 9월 대리공사로 부임하고, 1880년 변리공사(辨理公使)에 승진, 인천・원산의 개항을 꾀하였으며. 1882년 임오군란을 만나 스스로 공사관 건물을 불태우고 서울을 탈출하여 귀국하였으나, 다시 돌아와서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1911년 자작(子爵)을 받고 그해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張樹聲, 黎蒓齋, 建忠, 蒓齊, 建忠, 黎庶昌, 張樹聲, 花房, 黎庶昌, 張樹聲
지명
, , , , 仁川, 長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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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난당(亂黨)이 난동을 일으켜서 일본이 함대를 파견하므로 중국도 군함을 파견하여 사태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는 문서와 전보(電報) 자료 자료번호 : cj.d_0003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