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난당의 수괴가 이하응이며 일본과 맞설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하다는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의 서신과 관련 필담 자료 등
朝鮮亂黨以國王本生父李昰應爲首, 又日本狡展, 必須兵力相當, 始易就範.
六月二十五日, 署北洋大臣張樹聲函稱:
本日接奉廿三日直字六百八十四號密函, 訓示一一, 祗誦之下, 欽佩莫名. 朝鮮際此危亂, 中國不能不以天討·天誅爲代謀伐交之舉. 丁提督汝昌於昨早出口, 至煙臺東渡, 接馬道建忠復電, 亦於是日北行, 取道煙臺. 樹聲以該道既可與丁提督在煙臺相遇, 再來津門, 殊多迂折, 當將一切機宜指示丁提督領悉, 竝詳細函告馬道, 囑其徑由煙臺與丁提督迅速東行矣. 中國之於朝鮮, 誼難膜視, 此次之事, 樹聲先以調派陸兵, 恐勢不能已, 淮軍慶字各營,주 001
각주 001)

駐紮登州, 下船渡海, 一日夜可抵朝鮮. 當於二十一日專函約該軍統領吳筱軒提軍長慶,주 002영(營, battalion)은 군대의 편제 단위로, 연(連)의 상급이다. 회군(淮軍)의 1개 영은 약 500명 정도의 규모이다. 회군(淮軍 또는 淮勇)은 태평천국 토벌을 위해 이홍장이 1862년 증국번이 창설한 상군(湘軍)의 편제에 따라 안휘성 남부(淮南) 지방에서 조직한 향용(鄕勇)이었다. 회군은 상해에서 태평천국군을 격파한 후 화북의 염군과 섬서 회교도 반란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이홍장이 직예총독에 취임하자 함께 직예로 이동하였다. 회군은 서구식 무장을 갖춘 강력한 군대로서 이홍장의 사적 군대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그의 세력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각주 002)

刻日來津晤商, 日內計當可到. 然其時猶但知朝鮮內有亂黨, 慮日本借端干預居功而已. 惟閲該國陪臣金允植·魚允中與津海關周道筆談, 詞意甚危, 似有難言之隱. 比屬周道與金允植往復追詢, 始據盡露底藴, 知其國向日亂黨實李昰應爲首, 即該國王本生之父, 患在蕭牆주 003, 釀禍已久, 煽黨亦衆, 辦理較爲費手. 謹將周道與金允植筆談, 竝金允植復周道書, 錄呈鈞鑒.주 004 竊惟李昰應如果顯爲悖逆, 勢熖方張, 諒非該國遽能自定. 如猶在暗中主持布置, 則朝鮮不去此人, 後患終無底止, 亦非該國王所能自了. 即便亂黨暫平, 而日本一邊, 誠如來諭, 必不免一番狡展, 亦必須有兵力相當, 始易調停就範. 綜籌統計, 是續調陸師, 事無可止. 至李昰應一節, 事關君臣父子之間, 辦理之宜, 尤須折衷禮意, 以伸天朝討逆助順大義, 免爲亂黨藉口煽惑. 吳筱軒尚有經緯, 非僅有勇猛爲長, 必可相機妥辦. 現在此間祗有新購兩快船及揚威一練船, 實恐不敷調撥, 鎮海一船方入隖修理, 操江船本較小, 又送少荃中堂歸皖未回, 此外蚊船, 則船小礮大, 且一船祗有一礮, 係屬守口之用. 樹聲已電囑江海關邵道,주 005 禀明南洋,주 006 預備登瀛洲馭遣兵輪兩號, 一俟筱軒到津商妥, 即電咨南洋調赴煙臺, 竝飭招商局亦預備輪船裝運, 以防不敷, 屆時即當一面照辦, 一面具摺奏明. 黎蒓齋處亦遵示電囑, 隨時發電知照矣. 肅復, 祗敂鈞祺.오장경(吳長慶, 1829~1884)은 자가 소헌(筱軒)으로 안휘성 노강현(盧江縣) 출신이다. 시호(諡號)는 무장(武壯)이다. 부친 오정향(吳廷香)은 우공(優貢)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는데, 태평천국군이 안휘성에 침입하자 단련을 창설하여 이에 대항하다 순직하였고, 오장경은 그 뒤를 이어받아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봉기의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함풍(咸豊) 11년 증국번의 지시를 받아 노강(盧江)을 수복하자, 그가 이끄는 5백 명의 부하로 회군(淮軍)의 경자영(慶字營)을 창립하도록 허락받았다. 이후 태평천국과의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워 출세길을 달렸으며, 태평천국이 진압된 다음 염군이 기세를 떨치자 이홍장을 따라 이를 진압하고 강남에 주둔하였다. 광서 6년에 절강제독(浙江提督), 뒤이어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으로 발령받았으나, 청불전쟁 때문에 산동 군무를 방판(幇辦)하라는 지시를 받아 등주(登州)에 주둔하게 되었다. 때마침 광서 8년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오장경은 군대 3천 명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임오군란의 평정에 공을 세운 오장경은 계속 한성에 주둔하다가 2년 후 귀환하였다. 이후 광서 10년 금주(金州)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곧 병사하였다. 그는 그의 부대를 따라 들어온 상인들이 조선에 진출하게 되면서 조선 화교의 시조로 떠받들어지게 되며, 이후 고종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吳武壯公祠)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照錄淸摺.
별지: 「光緒八年六月二十二日, 津海關道周馥與朝鮮領選使金允植問答筆談」: 李昰應藉口反對通商修好, 嘯聚黨徒滋事, 中國速派千人, 卽可鎭壓竝防杜日人要挾干預.
(1) 「光緒八年六月二十二日, 津海關道周馥與朝鮮領選使金允植問答筆談」
周: “昨黎星使電報, 接日本外務卿井上馨來信,주 007 言彼日王宫同時被擊, 此去非意在打仗, 不過保自有權利, 屬告中國, 語氣甚平正云云. 然倭人之計, 固難測也. 丁雨亭軍門現已預備師船多號, 分佈海洋島·煙臺各處, 自帶三船先發, 一齊到岸, 即可得詳細情形, 回告制軍, 當有辦法.”
金: “自有權利, 是自護之權利耶. 語雖平正, 計固難測, 師船已預備在各處, 探細後即發甚快, 不勝感幸.”
周: “權利在勢, 亦無窮盡. 惟李某向與日人密好, 若此舉陽逐日人, 陰謀纂奪, 借日人之力, 以遂其攘位之私, 我兵聲罪致討, 濟弱扶傾義也. 而牽涉日人, 日人或以李黨爲傀儡, 誣正爲邪, 昵仇爲恩, 使我師不能撒手討賊. 日人與李黨是非淆亂, 彼時必得有貴國臣民伸大義者, 襄助一切, 更易爲力也.”
金: “李黨之與日人相好, 斷無是理, 通商修好之舉, 惟寡君力主, 故日人亦嘗善待之. 舉國愚見皆以外務爲非, 故李某藉此爲嘯聚徒黨, 收拾人心之資, 恐未暇與日人陰謀也. 其爲人狠戾自用, 亦有才幹, 既已逆取權柄, 更思媚結隣好, 以固其權, 未可知也. 但現雖得志於國中, 以四海觀之, 實爲獨夫, 不足畏也. 苟自上國聲罪致討, 不患無辭, 彼烏合亂黨, 何敢攖鋒, 日人亦應同憤, 必無助彼之理.”
周: “聞李山響與日人親密,주 008 然耶?”
金: “此人没主張, 其子載兢, 年少有識見, 頗諳外務, 其子存時亦善待日人. 此所以有與日人親密之語, 今其子已亡, 山響莫適所從, 惟以斥倭, 斥洋爲主, 蓋亦顧畏其弟之威焰也.
周: “平內亂非陸師不可, 約用精旅, 幾何能了?”
金: “以愚所見, 彼方新得柄, 人心未定, 不過一千足以辦事, 亦不必打仗, 以彈壓亂黨·鎮守王京爲辭, 先致書於政府曉諭勿驚, 則必不敢動. 既入京城, 便可圍住其第, 以康穆王妃命數其罪, 而賜之死, 則名正言順, 爲國除害, 此一機會也.”
周: “俟探回, 當密陳制軍, 知會統兵大員, 照此意行之. 惟此十餘日中, 日人兵船已去, 且載陸兵, 未知日人能爲除亂黨否也. 抑將干預貴國篡奪事也.”
金: “若李某得柄, 日人之來, 必不肯先行乞和. 或恐有些少打仗之事, 繼此以往, 日人所爲, 實難預料. 因以上岸直進, 藉名討亂, 以至干預國事, 誰能保其必無耶? 所以願中國速派兵丁, 毋在日人之後者也. 雖以賠給之言, 敝邦不曾經慣此等事務, 若任其所求, 將不知限紀, 兵船出去時, 邀往識解此務之人, 從旁調停似好, 此則雖洋人, 似無不可耳.”
彼若有廢立之舉, 則必立其十三歲幼孫, 入承莊肅王嗣, 往年逆黨所招, 亦有此言.
별지: 「光緒八年六月二十二日, 朝鮮領選使金允植致津海關道周馥書」: 李昰應早有簒奪權柄陰謀.
(2) 「光緒八年六月二十二日, 朝鮮領選使金允植致津海關道周馥書」
來教謹悉. 興宣君
李昰[古夏字]應是寡君之本生父也. 寡君奉康穆王妃命入承康穆王統, 興宣君乃私親也. 興寅君乃興宣之兄也. 素日詭謀, 即圖奪權柄之計, 而自甲戌以來, 結黨蓄謀, 形跡屢著, 再次放火於王宫, 或使人衝火於國戚·信臣之家, 指目皆歸, 而以其處不死之地, 且十年秉政之餘, 氣焰尚畏, 不敢誰何. 而不逞趨附之徒, 實繁有黨, 顯然擁護與國爲敵. 昨年逆魁李載先, 即興宣之子也. 諸囚供案屢發興宣之陰謀, 而寡君置之不欲聞, 止誅餘黨. 盖昨年逆黨私立三號, 一天字號, 犯宫廢立之事也. 一地字號, 芟滅國王信臣及干涉外務之人也. 其一蜂字號, 即逐出日人之事也. 因事機先泄, 不得遂意, 今聞逐使之舉, 與犯宫同時竝作, 是其去年餘謀皎然易知. 若亂黨不即散滅, 嗣後事將無所不至矣. 寡君自嗣位以來, 至誠事大, 小心寅畏, 失德未有彰聞. 惟以時局大變, 外交難拒, 禀天朝之命, 成議約之事, 實爲保宗社·安生民之苦心. 而彼乃以斥和爲義理, 修好爲賣國, 昌言討罪, 鼓煽衆心, 釀成今日之變故. 三號之目, 一則逐隣使也. 一則滅干涉外務之臣也. 此其聲罪廢置, 濟其私欲之欛柄也. 且伏念李中堂體天朝字小之仁, 庇護小邦, 無異內服. 凡有人心宜當感激銘骨, 而顧此凶黨, 無端詬罵, 嗾其群不逞之徒, 屢疏毁斥寡君, 隨發嚴惩, 怨毒愈深. 盖其意欲閉海一隅, 流毒生民無所顧憚之計也. 萬有一若至廢置之變, 必即遣使奏請, 搆揑成文, 歸吾君於不仁不孝之科, 言念及此, 尤所以痛心而疾首者也. 伏願大人預陳此意, 以明寡君之無罪, 不幸處此人倫之變也. 猶以爲君之私親也. 故諱不敢言, 今形迹大露, 國事至此, 尚何懷隱, 而不盡暴寃乎? 探信回來之前, 尚祈默覽勿宣是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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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영(營, battalion)은 군대의 편제 단위로, 연(連)의 상급이다. 회군(淮軍)의 1개 영은 약 500명 정도의 규모이다. 회군(淮軍 또는 淮勇)은 태평천국 토벌을 위해 이홍장이 1862년 증국번이 창설한 상군(湘軍)의 편제에 따라 안휘성 남부(淮南) 지방에서 조직한 향용(鄕勇)이었다. 회군은 상해에서 태평천국군을 격파한 후 화북의 염군과 섬서 회교도 반란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이홍장이 직예총독에 취임하자 함께 직예로 이동하였다. 회군은 서구식 무장을 갖춘 강력한 군대로서 이홍장의 사적 군대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그의 세력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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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오장경(吳長慶, 1829~1884)은 자가 소헌(筱軒)으로 안휘성 노강현(盧江縣) 출신이다. 시호(諡號)는 무장(武壯)이다. 부친 오정향(吳廷香)은 우공(優貢)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는데, 태평천국군이 안휘성에 침입하자 단련을 창설하여 이에 대항하다 순직하였고, 오장경은 그 뒤를 이어받아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봉기의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함풍(咸豊) 11년 증국번의 지시를 받아 노강(盧江)을 수복하자, 그가 이끄는 5백 명의 부하로 회군(淮軍)의 경자영(慶字營)을 창립하도록 허락받았다. 이후 태평천국과의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워 출세길을 달렸으며, 태평천국이 진압된 다음 염군이 기세를 떨치자 이홍장을 따라 이를 진압하고 강남에 주둔하였다. 광서 6년에 절강제독(浙江提督), 뒤이어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으로 발령받았으나, 청불전쟁 때문에 산동 군무를 방판(幇辦)하라는 지시를 받아 등주(登州)에 주둔하게 되었다. 때마침 광서 8년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오장경은 군대 3천 명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임오군란의 평정에 공을 세운 오장경은 계속 한성에 주둔하다가 2년 후 귀환하였다. 이후 광서 10년 금주(金州)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곧 병사하였다. 그는 그의 부대를 따라 들어온 상인들이 조선에 진출하게 되면서 조선 화교의 시조로 떠받들어지게 되며, 이후 고종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吳武壯公祠)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張樹聲, 汝昌, 建忠, 樹聲, 長慶, 金允植, 魚允中, 金允植, 李昰應, 金允植, 金允植, 李昰應, 李昰應, 周馥, 金允植, 李山響, 載兢, 山響, 莊肅王, 金允植, 周馥, 興宣君, 李昰[古夏字]應, 康穆王, 興宣君, 興寅君, 興宣, 李載先
- 지명
- 煙臺, 煙臺, 煙臺, 登州, 煙臺, 海洋島, 煙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