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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일본이 조선에 추가 병력을 파병하였으므로 천진의 연군(練軍)을 추가로 동원하기를 청하며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

日本添兵赴鮮, 爲有備無患, 計增調黃金志所統天津練軍前往.
  • 발신자
    署理北洋大臣 張樹聲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7월 23일 (음)(光緖八年七月二十三日) , 1882년 9월 5일 (光緖八年七月二十三日)
  • 문서번호
    4-2-40(537, 866a-866b)
七月二十三日, 軍機處交出張樹聲抄片稱:
 
再, 臣於本月初八日馳奏, 援護朝鮮, 陸師拔隊起程, 暨附片請暫留鄂軍四營各縁由, 欽奉諭旨:
將來如需添調援師, 宋慶一軍素稱得力, 堪以調往. 著該督隨時酌辦.
等因. 欽此. 仰見聖明, 選將簡兵, 訓示周至, 曷勝欽服? 現在李昰應業經就獲, 而其亂黨皆宿衛之軍, 所居枉尋·利泰兩村, 又皆與王京密邇, 人數衆多. 吳長慶撥派各營, 守護京城, 分捕亂黨, 所部六營, 僅餘兩哨留駐南陽海口, 其餘已全數進紮王京內外. 惟海口至京百數十里, 其間踰山過江, 頗多險要, 中權後勁,주 001
각주 001)
춘추시대 명렬전모(名列前茅)의 고사와 관련된 표현이다.(『左傳』 宣公12年條) 초(楚)가 정(鄭)을 공격하자, 진(晉)은 정(鄭)을 도우러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곧 정이 항복하였고, 초가 물러났다. 이때 초를 추격할 것인지 논의가 벌어졌고, 철수를 주장한 사회(士會)는 ‘초의 선봉은 띠풀로 기를 삼아 신호하여 만일에 대비하고, 중군은 경중을 가늠하고, 후군은 대열의 끝을 굳게 지킨다.”라고 하였다. 즉 띠풀로 만든 깃발에 따라 중군과 후군이 제각각의 임무를 하며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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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涉空虚, 現兵不敷分布. 玆准吳長慶咨請添調陸兵前來. 臣查李昰應既獲, 朝鮮戡亂之事, 有國王爲政, 雖漸可措手, 而越境遠討, 備預亦不可不嚴. 大軍後路尚虚, 且登瀛洲兵船, 由南陽開行時, 據稱又見有日本來船一艘, 添載陸兵赴朝, 自應酌量增調, 以期有備無患. 宋慶一軍多百戰之將, 誠爲勁旅. 惟目前朝鮮事努, 但須與吳長慶各營稍助聲勢, 宋慶所部人數較多, 似可暫緩調往. 記名縂兵黄金志所統天津練軍, 鎗械精利, 操練整齊, 臣已飭調三營. 今黄金志統帶乘坐招商局輪船, 即日東渡, 仍聽吳長慶節制調遣, 俟李鴻章到津察看情形, 如須添調重兵, 再令宋慶一軍前往, 以資得力, 謹附片陳明. 伏乞聖鑒. 謹奏.

  • 각주 001)
    춘추시대 명렬전모(名列前茅)의 고사와 관련된 표현이다.(『左傳』 宣公12年條) 초(楚)가 정(鄭)을 공격하자, 진(晉)은 정(鄭)을 도우러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곧 정이 항복하였고, 초가 물러났다. 이때 초를 추격할 것인지 논의가 벌어졌고, 철수를 주장한 사회(士會)는 ‘초의 선봉은 띠풀로 기를 삼아 신호하여 만일에 대비하고, 중군은 경중을 가늠하고, 후군은 대열의 끝을 굳게 지킨다.”라고 하였다. 즉 띠풀로 만든 깃발에 따라 중군과 후군이 제각각의 임무를 하며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張樹聲, 宋慶, 李昰應, 吳長慶, 吳長慶, 李昰應, 宋慶, 吳長慶, 宋慶, 黄金志, 黄金志, 吳長慶, 李鴻章
지명
枉尋, 利泰, 南陽, 天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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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에 추가 병력을 파병하였으므로 천진의 연군(練軍)을 추가로 동원하기를 청하며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 자료번호 : cj.d_0003_0020_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