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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李昰應)을 유도하여 구금해서 조선의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주일본 공사 여서창이 보낸 전보 등 첨부 문서

宜說法誘擒李昰應, 速敉韓亂.
  • 발신자
    署理北洋大臣 張樹聲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7월 6일 (음)(光緒八年七月初六日) , 1882년 8월 19일 (光緒八年七月初六日)
  • 문서번호
    4-3-02(511, 796b-805a)
七月初六日, 署北洋大臣張樹聲函稱:
 
本月初一夜肅寄直字二十四號一函, 諒達鈞鑒. 初二日奉直字六百八十七號密函. 仰承籌度朝事, 垂示機宜至周, 且悉欽服, 非可言喻. 李昰應身爲戎首, 罪不容誅, 第朝鮮經此内變, 幹濟人材, 芟夷殆盡, 一線國脈, 惟在國王尚存. 若操之過蹙, 以其恣睢之性, 或將激生他變, 屆時縱可别爲興繼, 而如今王之賢, 既不易得, 亦慮元氣愈傷, 愈費扶植. 吳·丁兩提督東行, 樹聲與之熟思審處, 審竊料大軍抵境, 震以天威, 李昰應或不敢肆其頑梗, 即宜設法誘捦, 奏請聖裁. 昰應既得, 其黨易渙, 國王藉天朝鎮撫之力, 庶可徐圖善後. 萬一李昰應深閉固拒, 則天戈所指, 義不旋踵. 至於進兵機要, 手揮目送, 尤當旁瞩日人, 總須紥住江口, 與水軍聯爲一氣. 然後或節節進紥, 以立不敗之地, 或鼓行而前, 以取迅雷之勢, 是在相機而行, 非可遥爲控制. 日兵既在彼岸, 見我軍前進, 或横生議論, 或亦步亦趨, 皆難保其必無. 惟朝鮮爲中國屬邦, 政治雖向由自主, 而國亂理當爲之代平, 日本不能干預, 竝經詳細函屬馬道與吳筱軒等, 妥商因應. 昨又抄錄鈞函, 飛致該提督等遵照. 目下部勒一切, 猶幸遵循指畫, 未致背馳, 而事機得失, 所關者大, 自審庸劣無狀, 又復衰病侵尋, 縱竭蹶勉交, 日深履薄臨深之懼. 所有關係茲事各件及凡百調度, 雖經隨時抄錄馳達少荃中堂,주 001
각주 001)
소전(少荃)은 이홍장의 호(號)이다. 앞서도 나왔지만 이홍장(李鸿章, 1823~1901)은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출신으로 이중당(李中堂) 또는 이합비(李合肥)로도 불리며, 자는 잠보(渐甫) 또는 자불(子黻)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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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其核復, 惟相距過遠, 呼應不及, 隕越時虞, 今蒙朝命促行, 實爲大局之幸. 此後接到軍前禀報, 遵當一面密呈鈞署, 一面函達少荃中堂也. 賜示蒓齋密電加字法,주 002
각주 002)
순재(蒓斋)는 여서창(黎庶昌. 1837~1898)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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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即密存照辦, 昨接蒓齋來電, 因碼號未明, 不能查悉. 復由電詢今晚始接復. 謹照錄呈閲馬道由朝鮮寄到筆談一册竝錄上察覽. 肅復, 祗叩鈞綏.
 
照錄
별지: 「出仕日本黎大臣來電」: 1) 執大院君, 誅亂黨而後, 與日人辦理交涉. 2) 日本已派夏本武揚爲駐華公使.
 
1) 「出使日本黎大臣來電(七月初三日到)」.
總相送寘.주 003
각주 003)
총상(總相)은 불교 용어로 공상(共相)을 가리킨다. 즉 총상은 생명과 관련된 모든 것과 그 배후를 포괄하는 시량(矢量. vector=向量)으로, 그 개별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별상(别相)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치(寘)는 치(置)와 같은 뜻이다. 전보의 맨 앞부분에 왜 이러한 표현이 들어가고,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여기서는 아마 사태의 진상을 알린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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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兵計早到仁川, 其舉動與添調未聞, 數日當有信. 毒殺王妃及世子妃, 皆大院君之謀, 此爲父篡其子. 我陸兵直當執大院君, 誅亂黨而後, 與日人辦理. 日廷已派海軍中將夏武揚爲駐華公使, 昌復查第一第四兩字, 原來碼號有誤, 第七十三碼照新法空碼無字, 亦當係碼號舛錯, 合竝聲明.
별지: 「馬建忠與魚允中威遠筆談」: 派員往探花島消息.
 
2) 「馬建忠魚允中威遠筆談. 二十七日夜十㸃鐘, 舟至漢江口下椗後, 魚允中來威遠筆談」.
忠曰: “今晚姑泊於此, 祈即遣人登岸, 至花島, 將所開各節, 打探着實, 連夜回報.”
魚曰: “謹當依教打探, 而花島不過一堡, 其管領亦屬微人, 恐難探實, 欲派一人入王京直探爲計.”
忠曰: “至花島打探者不過知其大畧, 俾僕等有所凖備. 至其詳則當入王京探聽爲是. 現已飭備舢板, 即請派人星夜, 至花島一行.”
魚曰: “本邦人外, 另有中國一人恐好.”
忠曰: “自然不消説得, 閣下不必親去, 可遣李某先去, 舢板即留浦口相候, 今晚務必回報爲妥.”
魚曰: “往囑李君, 即圖走探, 而舢板外小火輪恐好. 離岸稍遠, 去來必遲.”
忠曰: “花島離岸不過五里, 小火輪聲氣太大, 遠聞數里, 易啟驚疑, 仍乘舢板往探爲妥.”
별지: 「馬建忠與魚允中威遠筆談」: 派員往花島所探朝鮮亂事及日本出兵情形.
 
3) 「馬建忠魚允中威遠筆談. 二十七日夜兩㸃鐘, 魚允中遣人至花島探悉各節後來威遠筆談」.
忠曰: “國王現次何處? 無恙否?”
魚曰: “國王在京安, 王妃薨逝.”
忠曰: “朝臣主政者誰? 與國王意見何若?”
魚曰: “朝臣主政之爲誰, 未詳明, 當探明.”
忠曰: “初九日亂黨作亂情景如何, 倡亂者誰, 以後他處有無蠢動?”
魚曰: “亂黨即兵卒之作亂, 而爲兵糧失時而起閙, 殺相臣李最應, 宰臣金輔鉉, 閔謙鎬等五人,주 004
각주 004)
민겸호(閔謙鎬, 1838~1882)는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의 친동생으로, 대원군의 처남이고, 고종의 외삼촌이며, 민비의 친척 오라버니이자, 민영환(閔泳煥)・민영찬(閔泳瓚) 형제의 아버지였다. 형조판서, 이조판서, 어영대장, 병조판서, 판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민씨 세도의 지도자였다. 선혜청 제조 겸 병조판서로 재직 중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토(堀本禮造)를 초빙해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차별 대우를 받던 구식 군인의 급료 지급을 미루다가 14개월만에 지급하였는데 모래섞인 쌀을 급여로 지급하여 군인들의 불만을 야기, 임오군란 때 난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민겸호 집안의 하인이 혜청 창고지기가 되어 지출을 담당하였었다. 그 하인은 겨를 섞어서 미곡을 지급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하였던 것이다. 민겸호는 주동자인 김춘영(金春永) 등을 잡아 포도청으로 넘겨 형살(刑殺)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문제로 집을 습격당하였으며, 난의 진상이 밝혀지자 파직되었다. 김보현(金輔鉉, 1826~1882)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1848년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59년(철종 10) 이조참의・부제학을 거쳐 그 이듬해 규장각직, 예방승지(禮房承旨)・개성부유수 등을 지냈으나,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관직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다시 척족 민씨의 일파가 되어 형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당상을 지냈다. 선혜청당상 재임 중에는 모리행위가 심하여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은 선혜청당상이던 민겸호와 당시 경기도관찰사이던 김보현에게 그 책임을 돌렸고, 대궐 안에 난입한 난군들에 의하여 민겸호와 함께 중희당(重熙堂)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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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以游民衝火天然亭日本使館, 殺日本六人, 日人奔避至仁川, 兵卒追至, 又殺日本六人後, 乃鎮定. 更無他處之蠢動.”
忠曰: “日本兵舶何日入港? 現泊何處? 兵數若干, 已登岸否? 國王曾派人與之商論否? 日使井上馨至否? 其指名查辦者何事?”
魚曰: “日本兵舶一隻, 於二十四日來到, 而旋去. 今日又一隻入港, 兵九十餘名, 分二處[花島, 甲串津]登陸, 見鎮將. 以王京城内外俱設使館之意要請而外, 他情形未及詳知, 尚無查辦之舉云.”
忠曰: “兵卒因兵糧失時作亂, 其詳細究曾探悉否?”
魚曰: “兵卒因減斛與倉吏口角, 吏訴于倉堂,주 005
각주 005)
여기서 창당(倉堂)은 선혜청(宣惠廳)을 가리킨다. 선혜청은 조선 후기의 관청으로 대동법의 시행에 따라 대동미(大同米)와 대동포(大同布)・대동전(大同錢)의 출납을 맡아 보았는데, 1608년 경기지방의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처음 설치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선혜청의 책임자는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었던 당상 민겸호(閔謙鎬, 1838~188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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捉囚兵士, 兵士乃群起作鬧, 而被殺宰臣, 則果非人望. 然此事必有根委, 想現未妥帖, 一鎮吏所傳不可凖信, 明當派心腹至王京親友處, 密探耳.”
忠曰: “明日派誰入京, 由僕作書與前日大副官, 何如?”주 006
각주 006)
전일대부관(前日大副官)은 아마 이전에 마건충과 협력하여 「조・미조약」을 체결하면서 전권부관(全權副官)으로 서명하였던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 김홍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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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曰: “大人有書, 則必公諸時人而後爲答, 實狀難得矣.”
忠曰: “然則僕不作書. 所派之人必須探明着實起亂根由, 與現在貴國辦理情形, 即速回浦, 以便禀報於北洋大臣.”
魚曰: “謹當依教. 頃者派人至花島探信, 使之聲言大人領兵舶來港, 爲本邦遮護調處云云. 彼鎮吏皆歡呼, 即欲走告地方, 令明日來謁船. 上咨文之事, 可對伊説及若何?”
忠曰: “此事俟地方官來時再行斟酌. 惟現在亂黨, 貴朝廷已查辦否?”
魚曰: “兵士之殺日人, 果如所傳, 則殺人者死, 亦當懲辦而後, 可與日人辦理事宜. 此尚未舉, 尤是大失着也.”
忠曰: “日人辦理事, 須俟貴國查辦之後, 再行斟酌. 所以明日僕即欲請貴國王親派一妥當大員前來, 計議此事, 不可再行遲緩.”
魚曰: “明日派人送王京後, 再有奉議, 而日人許請亦示調處無妨.”
忠曰: “自應相機應答.”
魚曰: “兩國相持, 必賴從中調處而後, 乃無齟齬失當之機.”
별지: 「二十八日六点鐘, 魚允中自超勇來函」: 朝鮮亂事刱亂另有其人, 朝臣涉於外交者全被殺戮.
 
4) 「魚允中超勇來函」.
二十八日六㸃鐘, 魚允中自超勇來函, 更探本邦情形, 則國勢一翻, 有堪痛哭者, 剏亂之人另有其人, 朝臣之涉於外交者, 殆無孑遺. 至仁川府使鄭君亦飲藥而死, 其他可知, 即當往謁而抅于耳目, 未克遂. 誠乘暮當晉叙, 亦乞飭三艦, 俾勿露允中聲息若何, 方使人下陸哨探計耳. 此白.
별지: 「二十八日七点鐘, 仁川府將校成箕連來船筆談」: 朝鮮亂事與仁川府情形.
 
5) 「二十八日七㸃鐘, 仁川府將校成箕連來船筆談」.
忠曰: “仁川府鄭君現在何處?”
成曰: “猝得身病而死, 已八日矣.”
忠曰: “現在仁川府新派何人?”
成曰: “新官任縈鎬.”
忠曰: “任君是否國王派來與李興宣君相識否?”
成曰: “府使今日來到, 聞與興宣君相親云.”
忠曰: “國王現在王京否? 王妃爲何而薨?”
成曰: “朝鮮有民撓事.”
忠曰: “東洋人死若干名?”
成曰: “京中死者七名, 仁川死者六名.”
忠曰: “東洋兵已登陸否?”
成曰: “昨日百名入仁川府, 見其死埋處, 還爲入船.”
忠曰: “即速回仁川, 請府使來舟一晤.”
成曰: “府使知得貴船有何事來臨啟聞, 後來.”
忠曰: “兵船三艘, 廵洋至此耳.”
별지: 「二十八日十点鐘二刻, 花島别將金宏臣素服來謁筆談」: 朝鮮亂事, 王妃·執政等逝世各情形.
 
6) 「二十八日十㸃鐘二刻, 花島别將金宏臣素服來謁筆談」.
忠曰: “君素服爲誰?”
金曰: “王妃卒逝.”
忠曰: “王妃因病薨乎? 抑爲人所逼乎? 須以實對.”
全曰: “今月初十日, 亂民大作, 驚怕而薨.”
忠曰: “亂民之作共有多少?”
金曰: “在鎮其多少不知.”
忠曰: “假如現着人送信於國王可能達到否?”
金曰: “少旋地方官仁川府使來到矣. 下問伏望.”
忠曰: “仁川府使姓任向來可爲國王信任否?”
金曰: “仁川府使以地方官應行之事, 信任未可知.”
忠曰: “王京城門可任人出入否?”
全曰: “此事問於仁川官, 則庶可下燭.”
忠曰: “李興宣君現在何處? 聞興寅君已卒然否?”
金曰: “興宣君在本宅, 興寅君果卒逝.”
忠曰: “興寅君卒於何日? 病乎?”
金曰: “興寅君今月初十日, 以民亂驚愕卒.”
忠曰: “他人皆驚懼至死, 國王何以獨能無恙?”
金曰: “亂民不犯國王.”
별지: 「二十八日晨十一点鐘, 近籐真鋤來謁晤談節畧」: 朝鮮亂事起因及日使至韓, 欲先探明, 再行議事.
 
7) 「二十八日晨十一㸃, 近籐真鋤來謁晤談節畧」.
忠曰: “初九日執事可與其事乎?”
近籐曰: “朝鮮亂兵突然衝入使館, 我兵捍護死者七人, 復偕花房公使走奔至仁川, 則亂兵又來. 我兵捍護死者六人, 因即乘間避入朝鮮民船, 行至次日, 幸遇英國量水船, 即乘回日本.”
忠曰: “吃驚不少, 但亂兵因何起事?”
近籐曰: “昨日訪聞謂減糧起事, 但未得其詳.”
忠曰: “王妃何故暴卒? 大臣死者數人, 究因何故?”
近籐曰: “聞李昰應因兵作亂, 往見王妃, 進以酖酒, 謂: ‘必飲此方保無亂.’ 其大臣之死未知何故. 現李昰應大權獨攬, 其爲猖獗.”
忠曰: “如此國王且恐不能自主. 花房公使來否?”
近藤曰: “花房公使今明可至, 後即往王京, 探明緣由, 再行議事. 昨日已由僕發信至王京, 告以公使不日可至云.”
忠曰: “我北洋大臣曾接我駐紥東京公使來電. 因即派船至此, 探訪一切, 細觀作亂之由, 適在各國議和之後, 甚爲可疑, 擬即派人探明起事根由, 再行查辦. 現在最急者, 當設法將國王脱於亂黨之手爲要耳. 俟花房公使來此, 僕當往顧一商耳.”
별지: 「二十八日十二点鐘, 招魚允中來船筆談」: 大院君因失權積憾, 隱養無賴爲亂事主謀.
 
8) 「二十八日十二㸃, 招魚允中來船筆談」.
忠曰: “亂黨起事之由, 可略知一二否?”
魚曰: “當不避煩猥而陳之. 國王由支派入承正統, 其私父曰: ‘大院君’, 素是悖戾爲恎, 貪財好色, 及於國王入承之時, 攬國權專恣, 奪人貨, 嗜殺人, 又與日本無端拒絶, 幾有搆兵之事. 伊時國王不過坐擁虚位, 且紳耆亦皆袖手聽命, 而一種趨附之徒, 實繁其數. 及國王年長, 總攬朝綱, 一二臣亦協賛之, 奪其權, 而一切弊政亦有存革, 與日本尋舊好, 屢欲聯各國, 以維繫國脈. 彼大院君憾於失權, 隱養無頼, 期尋禍亂者久矣. 或密藏火藥於王宫而放火者數次. 又以暴發藥焚殺藎臣, 國王以事涉倫常, 不欲處之予法, 只剪其黨與, 誘之威之者屢矣. 於昨年秋果嘯聚黨與, 刻日舉事, 有告之者. 幸得收捕亂黨, 而亦不窮覈. 彼大院君恃其處於不死之地, 期欲舉事, 而其誘惑衆心者曰: ‘斥邪也. 絶外交也.’ 無知小民妄相恃爲前茅者亦有之. 昨年逆謀之舉, 欲分三號, 一號直擊王宫也, 一號殺一切異趣之朝臣也, 一號殺日人也. 今日之事, 即昨年之餘智, 一言以蔽, 今日即本邦興亡之秋也. 大院君若在, 則人誰敢舉論外交? 聞今者, 亂黨先殺大臣, 宰臣之國王素信任者, 繼入王宫, 國王及妃嬪皆奔避, 而彼大院君乃刼殺王妃, 逼返太王妃, 國王則雖不見廢, 幽閉不與外朝相接, 搜殺大小文武之異趣, 而涉於外交者無遺. 人民皆奔避山谷, 國中一變. 若於今日不亟亟調處, 日人必大發報復, 生民塗炭, 宗社將覆, 彼大院君又必廣招砲兵, 必欲决計扼守, 而國内生靈不保, 將何以則國可存, 而亂可熄乎?”
忠曰: “此等情節, 執事從何訪聞確實?”
魚曰: “前説係在本國耳聞者. 後論更着人探訪, 畧得大概.”
忠曰: “現人入京何時可返?”
魚曰: “明天可還.”
忠曰: “似較遲耳. 明日僕等擬派威遠前往天津, 將所有情節禀明北洋大臣, 火速調兵前來, 撲滅亂黨, 如何?”
魚曰: “感德, 感德.”
忠曰: “但無貴國王親筆, 竝無臣民哀懇公狀, 特恐師出無名, 則若之何?”
魚曰: “國王親筆不可得. 現在幽閉中, 臣民公狀亦難猝辦. 現任職行走者必皆懾眼, 一切輔諸國王之臣民, 非死則逃何以能寫公狀?”
별지: 「二十八日午後六点鐘, 馬建忠與新任仁川府使任榮鎬威遠舟次筆談」: 朝鮮速派心腹大員前來仁川, 籌商一切.
 
9) 「二十八日午後六㸃鐘, 與新任仁川府使任榮鎬威遠舟次筆談」.
忠曰: “執事何日出自王京? 情景何若?”
任曰: “二十二日夜除本職, 二十六陛辭, 昨日向暮到邑, 息閙已久.”
忠曰: “執事可知日本現派大兵來此? 貴國將何以處之?”
任曰: “府使十年山野起廢之人, 姑未聞小邦之政, 而令此兩大人遠臨, 感悚如何如何.”
忠曰: “執事山居十年, 何以一旦起用, 果爲何人起用?”
任曰: “壬申春以後, 三遭内外艱, 昨秋始關服, 今忽爲小邦國太公所起用.”
忠曰: “日本已派兵舶來, 此我國亦陸續起兵到此, 以觀變動. 執事即宜派人星夜至王京密告執政, 謂:其作速從長計議, 派一妥當心腹大員至此, 與僕等籌商一切, 或可先事預防未可知也.”
任曰: “大人之教甚感, 甚感. 小邦何以有此洪福, 下官當報于朝廷, 火速下來.”
忠曰: “此官須爲朝廷心腹之人, 方可辦事. 限明晚當至.”
任曰: “不可不三晝夜後, 似可得抵. 北去王京八十里强.”
忠曰: “前者委派大副官來此議約, 往返不過一晝夜, 三晝夜太遲, 遲則恐失事機, 以後有不可言者.”
任曰: “不意今日有此機會, 而何可坐失. 府使今夜水出去分, 鷄鳴似可登岸, 然則再明似可下來, 豈非三晝夜耶?”
忠曰: “今即派小火輪, 送至浦頭, 作速派人. 今晚走至王京, 明晨可到, 趕即派人下來. 明日傍晚可至浦頭矣.”
任曰: “謹奉教. 日人屢次問府使之來, 今回路暫訪如何?”
忠曰: “明晨去訪未晚也.”

  • 각주 001)
    소전(少荃)은 이홍장의 호(號)이다. 앞서도 나왔지만 이홍장(李鸿章, 1823~1901)은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출신으로 이중당(李中堂) 또는 이합비(李合肥)로도 불리며, 자는 잠보(渐甫) 또는 자불(子黻)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순재(蒓斋)는 여서창(黎庶昌. 1837~1898)의 자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총상(總相)은 불교 용어로 공상(共相)을 가리킨다. 즉 총상은 생명과 관련된 모든 것과 그 배후를 포괄하는 시량(矢量. vector=向量)으로, 그 개별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별상(别相)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치(寘)는 치(置)와 같은 뜻이다. 전보의 맨 앞부분에 왜 이러한 표현이 들어가고,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여기서는 아마 사태의 진상을 알린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민겸호(閔謙鎬, 1838~1882)는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의 친동생으로, 대원군의 처남이고, 고종의 외삼촌이며, 민비의 친척 오라버니이자, 민영환(閔泳煥)・민영찬(閔泳瓚) 형제의 아버지였다. 형조판서, 이조판서, 어영대장, 병조판서, 판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민씨 세도의 지도자였다. 선혜청 제조 겸 병조판서로 재직 중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토(堀本禮造)를 초빙해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차별 대우를 받던 구식 군인의 급료 지급을 미루다가 14개월만에 지급하였는데 모래섞인 쌀을 급여로 지급하여 군인들의 불만을 야기, 임오군란 때 난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민겸호 집안의 하인이 혜청 창고지기가 되어 지출을 담당하였었다. 그 하인은 겨를 섞어서 미곡을 지급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하였던 것이다. 민겸호는 주동자인 김춘영(金春永) 등을 잡아 포도청으로 넘겨 형살(刑殺)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문제로 집을 습격당하였으며, 난의 진상이 밝혀지자 파직되었다. 김보현(金輔鉉, 1826~1882)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1848년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59년(철종 10) 이조참의・부제학을 거쳐 그 이듬해 규장각직, 예방승지(禮房承旨)・개성부유수 등을 지냈으나,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관직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다시 척족 민씨의 일파가 되어 형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당상을 지냈다. 선혜청당상 재임 중에는 모리행위가 심하여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은 선혜청당상이던 민겸호와 당시 경기도관찰사이던 김보현에게 그 책임을 돌렸고, 대궐 안에 난입한 난군들에 의하여 민겸호와 함께 중희당(重熙堂)에서 피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여기서 창당(倉堂)은 선혜청(宣惠廳)을 가리킨다. 선혜청은 조선 후기의 관청으로 대동법의 시행에 따라 대동미(大同米)와 대동포(大同布)・대동전(大同錢)의 출납을 맡아 보았는데, 1608년 경기지방의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처음 설치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선혜청의 책임자는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었던 당상 민겸호(閔謙鎬, 1838~1882)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전일대부관(前日大副官)은 아마 이전에 마건충과 협력하여 「조・미조약」을 체결하면서 전권부관(全權副官)으로 서명하였던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 김홍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張樹聲, 李昰應, 李昰應, 蒓齋, 蒓齋, 大院君, 夏武揚, 馬建忠, 魚允中, 魚允中, 馬建忠, 魚允中, 魚允中, 李最應, 金輔鉉, 閔謙鎬, 井上馨, 魚允中, 魚允中, 成箕連, 任縈鎬, 李興宣君, 興宣君, 金宏臣, 李興宣君, 興寅君, 興宣君, 興寅君, 興寅君, 近籐真鋤, 花房, 李昰應, 花房, 花房, 魚允中, 任榮鎬
지명
仁川, 漢江, 花島, 花島, 花島, 花島, 花島, 仁川, 花島, 甲串津, 花島, 花島, 東京, 天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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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李昰應)을 유도하여 구금해서 조선의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주일본 공사 여서창이 보낸 전보 등 첨부 문서 자료번호 : cj.d_0003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