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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독(朝獨) 조약 체결을 마쳤는데 마건충(馬建忠)에게 조선에서 독일의 술수를 방비하도록 지시하였다고 서리 북양대신(北洋大臣)이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내는 문서

조·독조약은 모두 조·미조약에 따라 조약을 체결하는데, 아울러 馬建忠에게 朝鮮에 도착한 다음 [브란트 독일 공사의 술수를] 몰래 방비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 발신자
    署北洋大臣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5월 4일 (음)(光緖八年五月初四日) , 1882년 6월 19일 (光緖八年五月初四日)
  • 문서번호
    2-1-1-68(435, 687a-687b)
5월 4일, 署理北洋大臣 張樹聲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다.
 
5월 1일에 4월 30일자 直字 675호 공식 서신을 받고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브란트(Maxvon Brandt, 巴蘭德)주 001
각주 001)
브란트(Max August Scipio von Brandt, 1835~1920)는 독일 외교관으로 동아시아에서 33년을 보냈는데, 일본에서 지낸 10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를 모두 중국에서 보냈다. 그는 1861년 프러시아와 중국의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뒤 주일 공사를 지내다가 1875년부터 주중국 공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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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가 천진에 도착한 후 조·미조약의 내용을 변경하려고 하였지만 저희가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4월 27일 서신으로 전달하였습니다. 이후 독일 공사가 朝鮮에 가기 때문에 馬建忠 등을 파견하여 함께 朝鮮에 가서 도움을 주게 하였다는 내용 또한 공문을 갖추어 자문으로 올렸으니, 이미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이번 일에서 브란트 공사는 먼저 洋務委員 羅豐祿에게주 002
각주 002)
나풍록(羅豐祿, 1850~1903)은 자가 직신(稷臣)으로 복건성(福建省) 민현(閩縣) 출신이다. 복건선정학당(福建船政學堂)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 가서 유럽 공사관의 통역으로 일하였으며, 1880년 귀국하여 이홍장의 막료로서 일하면서 주로 영문 비서, 영어 번역 및 통역 업무를 담당하였다. 1882년 4월 4일 김윤식과 이홍장의 회담 때도 참여하였다. 그는 1883년에는 수사영무처(水師營務處) 도원(道員)으로 승진하였고, 1896년 이후에는 유럽에 공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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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하여 개정하고자 하는 조약 원고를 검토하도록 보내왔습니다. 제가 개정을 허락하지 않고 거절하자 다시 와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4월 28일 브란트 공사가 본서로 찾아와 만나서 상의할 때 다시 종전 주장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저는 거듭하여 변론하였고 그는 결국 할 말이 없어져 英·美가 이미 정한 조약에 따라 한 글자도 바꾸지 않겠다고 바랐기에, 馬建忠을 파견해서 그 성사를 돕게 하였습니다. 이에 브란트는 매우 기뻐하며 헤어질 때 여러 차례 감사의 뜻을 표명하였습니다. 지금 브란트는 우선 煙臺로 가서 대기하고 있으며 馬建忠 등은 4일에 출발하기로 정하였습니다. 브란트가 천진에서 하였던 행동을 헤아려보면 아마도 다른 파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프랑스 통역 프랑뎅(Hippolyte Frandin, 法蘭亭)주 003
각주 003)
프랑뎅(Hippolyte Frandin, 1852~?)은 프랑스 외교관으로 1875년 중국에 와서 이후 통역으로 일하였고 1883~1884년에는 영사관의 업무를 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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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혹시 서로 마찰을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저 사람은 본디 속을 알기 어려우므로, 정말 뛰어난 계책을 주신 대로 응당 馬建忠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여 朝鮮에 도착한 이후 조심하며 방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건충은 임기응변에 능하니 그의 술수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 선박 格音達[不明]호 문제는, 제가 광동에 있을 때주 004
각주 004)
장수성(張樹聲)은 1877(光緖 3)년부터 양광총독(兩廣總督)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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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모든 상황을 살펴보시도록 자문으로 올린 바 있습니다. 아울러 여러 차례 독일 영사와 논쟁할 때 사실에 근거하고 조약에 기초하여 따져보니, 저들의 요구는 하나도 들어맞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 뜻을 따라줄 수 없었습니다. 어제 廣東巡撫 裕寬이주 005
각주 005)
유관(裕寬)은 자는 택생(澤生)이며, 만주정백기인(滿洲正白旗人)이다. 1879년부터 1883년까지 광동순무(廣東巡撫)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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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온 서신을 받았는데, 현재 독일 영사도 조약과 들어맞지 않음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치를 따지지 않고 사정을 봐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아마도 방법을 찾아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 공사가 천진에 있을 때 朝鮮에 가는 것과 관련하여 논의·결정한 내용을 전날에 咨文으로 전달한 다음, 이번에 서신을 보내 자세히 알려드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황상의 유지를 받아 연일 찾아가서 확인하느라 이로 인해 조금 늦어졌습니다. 이에 비밀리에 답장합니다. 삼가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 각주 001)
    브란트(Max August Scipio von Brandt, 1835~1920)는 독일 외교관으로 동아시아에서 33년을 보냈는데, 일본에서 지낸 10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를 모두 중국에서 보냈다. 그는 1861년 프러시아와 중국의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뒤 주일 공사를 지내다가 1875년부터 주중국 공사를 지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나풍록(羅豐祿, 1850~1903)은 자가 직신(稷臣)으로 복건성(福建省) 민현(閩縣) 출신이다. 복건선정학당(福建船政學堂)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 가서 유럽 공사관의 통역으로 일하였으며, 1880년 귀국하여 이홍장의 막료로서 일하면서 주로 영문 비서, 영어 번역 및 통역 업무를 담당하였다. 1882년 4월 4일 김윤식과 이홍장의 회담 때도 참여하였다. 그는 1883년에는 수사영무처(水師營務處) 도원(道員)으로 승진하였고, 1896년 이후에는 유럽에 공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프랑뎅(Hippolyte Frandin, 1852~?)은 프랑스 외교관으로 1875년 중국에 와서 이후 통역으로 일하였고 1883~1884년에는 영사관의 업무를 대리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장수성(張樹聲)은 1877(光緖 3)년부터 양광총독(兩廣總督)을 지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유관(裕寬)은 자는 택생(澤生)이며, 만주정백기인(滿洲正白旗人)이다. 1879년부터 1883년까지 광동순무(廣東巡撫)를 지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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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독(朝獨) 조약 체결을 마쳤는데 마건충(馬建忠)에게 조선에서 독일의 술수를 방비하도록 지시하였다고 서리 북양대신(北洋大臣)이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내는 문서 자료번호 : cj.k_0002_0010_0010_0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