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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조선에서 군기(軍器) 제조를 배우러 온 기술자 등은 이미 기기(器機)와 제조(製造)를 학습하도록 하였다고 북양대신(北洋大臣)이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낸 문서와 첨부 명단

조선에서 軍器 제조를 배우기 위해 다시 天津에 파견해 온 기술자 등은 이미 機器·製造 兩局에 보내 학습하도록 하였습니다.
  • 발신자
    北洋大臣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1년 12월 3일 (음)(光緖七年十二月初三日) , 1882년 1월 22일 (光緖七年十二月初三日)
  • 문서번호
    2-1-2-11 (381, 536)
12월 3일, 北洋大臣 李鴻章이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다.
 
광서 7년 6월 1일 조선 국왕이 3월 9일에 보내온 자문 1건을 받았습니다. 이후 9월 1일에 副司直 李應浚이주 001
각주 001)
이응준(李應浚. 1832?~?)은 조선 후기의 역관(譯官)이다. 李鴻章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대미수교 방침을 통고받기 직전 조선 측에 學徒 인솔을 빙자한 隊員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 기회를 빌려 조약 체결에 관하여 협의하려고 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領選使의 파견을 결정하고, 이 사실을 통보하기 위하여 역관 李應浚을 天津으로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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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보고를 하였습니다.
처음에 趙龍鎬의 출발 일정을 윤월 20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정 며칠 전에 조용호가 생각지 못하게 사망하여 다시 金允植으로 바꿔서 선발하였으니, 아마도 몇십일 늦어질 것입니다.
11월 28일 다시 吏曹參議 金允植이주 002
각주 002)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으로 서울 출신이다. 1865년 출사하고,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암행어사 등직을 역임하다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정부의 개항 정책에 따라 영선사(領選使)로서 학도와 공장(工匠) 38명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들을 기기국(機器局)에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위하여 북양대신 이홍장과 7차에 걸친 회담을 하였고, 그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김윤식은 청에 체류 중이던 이때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하여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오장경(吳長慶)·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청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다음 그해 9월 재차 청으로 가서 학도·공장들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지만, 또한 각종 기기를 도입, 기기창(機器廠)을 설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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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조선 국왕의 9월 26일 자문 1건 및 天津으로 보내 軍器 제조를 학습할 위원, 학도, 통역과 수행원의 이름 및 인원 수를 기재한 명단을 받았습니다. 조선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天津에 보내 기계 제조를 학습하고 연병과 무기 구매를 추진하는 사안은 전에 이미 各局 위원들에게 절략과 장정을 적절히 논의하도록 지시하고 그에 관한 상주를 올려 황상의 유지를 청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 국왕이 적절하게 편리한 바를 헤아려 스스로 짐작하여 처리하게 하라는 상유를 받은 바 있습니다. 지금 [다시] 선발·파견된 吏曹參議 金允植이 위원·기술자 등을 인솔하여 天津에 와서 먼저 무기 제조의 학습을 하겠다고 하니, 조선이 시대의 어려움을 잘 깨닫고 武備을 강구하여 自强할 계책을 도모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미 본 북양대신은 保定省城에서 金允植 등 4명을 직접 불러서 만나 모든 사항에 대해 자세히 물었고, 데리고 온 기술자·학도들을 같이 天津에 보내 機器·製造 兩局에 나누어 파견하여, 議定한 章程에 따라 정성스럽게 학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各局 委員에게 기술자들을 독려하여 진심으로 가르침으로써 반드시 技藝를 속성하여 귀국한 다음 서로 傳授할 수 있도록 꾀하였습니다. 또한 金允植 등에게는 각 기술자와 학도들을 단속하여 局의 규정을 삼가 지키고 製造를 講求하되, 밖에 나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조금이라도 나태하거나 그르치는 문제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삼가 奏摺을 갖추어 상주하고 아울러 조선 국왕에게 咨文으로 답장하는 것 외에, 마땅히 原 咨文 및 명단을 초록하여 자문으로 알려야 할 것입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귀 아문에서는 삼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별지: 「첨부 명단」:조선에서 군기 제조를 배우기 위해 선발·파견한 人員 명단.
 
1. 첨부문서: 명단 초록[자세한 내용은 12월 4일 軍機處에서 鈔交한 李鴻章의 鈔摺을 참고할 것]

  • 각주 001)
    이응준(李應浚. 1832?~?)은 조선 후기의 역관(譯官)이다. 李鴻章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대미수교 방침을 통고받기 직전 조선 측에 學徒 인솔을 빙자한 隊員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 기회를 빌려 조약 체결에 관하여 협의하려고 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領選使의 파견을 결정하고, 이 사실을 통보하기 위하여 역관 李應浚을 天津으로 파견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으로 서울 출신이다. 1865년 출사하고,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암행어사 등직을 역임하다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정부의 개항 정책에 따라 영선사(領選使)로서 학도와 공장(工匠) 38명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들을 기기국(機器局)에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위하여 북양대신 이홍장과 7차에 걸친 회담을 하였고, 그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김윤식은 청에 체류 중이던 이때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하여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오장경(吳長慶)·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청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다음 그해 9월 재차 청으로 가서 학도·공장들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지만, 또한 각종 기기를 도입, 기기창(機器廠)을 설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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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군기(軍器) 제조를 배우러 온 기술자 등은 이미 기기(器機)와 제조(製造)를 학습하도록 하였다고 북양대신(北洋大臣)이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낸 문서와 첨부 명단 자료번호 : cj.k_0002_0020_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