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왕의 자문을 받고 적당히 답장을 하였다고 군기처(軍機處)가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낸 주접(奏摺) 초록(抄錄)과 관련 조선국왕의 자문(咨文) 등 첨부 문서
조선 국왕의 자문 3건을 받고 이미 적당하게 답장을 하였습니다.
10월 14일, 軍機處에서 李鴻章의 다음과 같은 주접 초록을 보내왔다.
조선 국왕의 자문 세 통을 받고 이미 적절하게 답장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삼가 주접을 갖추어 올리니 살펴봐 주십시오.
10월 8일 조선에서 보낸 陪臣 副護軍 李載德, 金奭準 등이 조선 국왕의 자문을 가지고 와 올렸는데, 保定省城으로 가서 李昰應에게 인사를 드리고 아울러 대신 상주하여 은혜를 베풀어 그를 석방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李載德 등에게 保定으로 가도록 하고, 아울러 署直隸總督 張樹聲에게 자문을 보내 속하에게 지시하여 그들을 적절하게 돌보고, 아울러 그 省問을 허락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황상께 대신 상주하여 신속히 그 석방 지시를 내려달라고 한 사안은 이미 여러 차례 받은 諭旨와 현저하게 어긋납니다. 臣은 李載德 등과 직접 만나, 이후 조선 국왕은 이전의 유지를 각별히 준수하는 데 힘쓰고 다시 번거롭게 요청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답장 자문 내에서 감히 대신 상주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분명히 밝혀 기회를 보려는 그 행동을 끊었습니다. 臣은 또한 별도로 출발한 배신 趙甯夏, 金允植 등을 비밀리에 만나 조선 국왕의 私情 때문에 대원군을 대신하여 은혜를 간청할 수밖에 없겠지만 조선 臣民은 그의 석방이 도리어 내환을 낳을 것으로 자못 두려워하고 있다고 타일렀습니다.
또 같은 날 領選使 吏曹參判 金允植이 조선 국왕의 자문 2건을 가져와 올렸습니다. 하나는 전에 파견하여 天津 機器·製造 各局에서 학습하던 생도가 전후로 병에 걸려 귀국하여 남은 인원이 거의 없으므로 그 사업의 撤回를 허용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별도로 작은 기계를 도입하고 조선에 공장을 설치하여 스스로 제조를 하겠다고 합니다.
臣이 살펴보건대 해당 학도와 위원 등이 모두 돌아가고 싶어하니, 만일 억지로 오래 잡아 놓으면 전념하지도 못해 진보와 이익이 더욱 적을 것이므로 응당 그 편의를 들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장래에 작은 기계를 대신 구매해주고 적당하게 기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敎導하는 사안은 이미 金允植에게 수시로 局員과 적절하게 상의한 다음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의 사안은 吳長慶에게주 001
각주 001)

알려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인데,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천 명을 선발하였습니다. 臣은 각기 적당하게 헤아려 답장 자문을 보내었고 아울러 조선 국왕에게 제때에 맞추어 무기를 고르고 병사를 훈련시킴으로써 자강을 꾀하여 조정에서 藩服을 보살펴주는 지극한 뜻에 부합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오장경(吴長慶. 1829~1884)은 자가 소헌(筱轩)으로 안휘성 노강현(庐江县) 출신이다. 시호(諡號)는 무장(武壯)이다. 부친 오정향(吴廷香)은 우공(優貢)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는데, 태평천국군이 안휘를 침범하자 단련을 창설하여 이에 대항하다 순직하였고, 오장경은 그 뒤를 이어받아 태평천국의 반란과 염군의(捻軍) 봉기를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함풍(咸豊) 11년 증국번의 지시를 받아 노강(庐江)을 수복하자 그가 이끄는 5백 명의 부하로 회군(淮軍)의 경자영(庆字营)을 창립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후 태평천국과의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워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태평천국이 진압된 다음 염군(捻軍)이 기세를 떨치자 이홍장을 따라 이를 진압하고 강남에 주둔하였다. 광서 6년에 절강제독(浙江提督), 뒤이어 광동수사제독(廣东水师提督)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청불전쟁 때문에 산동 군무를 방판(幇辦)하라는 지시를 받아 등주(登州)에 주둔하게 되었다. 때마침 광서 8년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오장경은 군대 3천 명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임오군란의 평정에 공을 세운 오장경은 계속 한성에 주둔하다가 2년 후 귀환하였다. 이후 광서 10년 금주(金州)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곧 병사하였다. 그는 그의 부대를 따라 들어온 상인들이 조선에 진출하게 되면서 조선 화교의 시조로 떠받들어지게 되며, 이후 고종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吳武壯公祠)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조선 국왕의 자문 및 臣의 답장 자문 각 세 건을 초록하여 삼가 살펴보시도록 올립니다. 총리아문 및 예부에 각기 자문을 보내 알리는 것 외에, 마땅히 주접을 갖추어 아뢰니 皇太后·皇上께서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삼가 주를 올립니다.
광서 8년 10월 14일에 軍機大臣은 다음과 같은 유지를 받았다.
해당 아문에 알려라. 목록은 함께 발송하라.
이상.
첨부문서:삼가 조선 국왕이 보낸 자문과 臣의 답장 자문 세 건을 삼가 초록하여 올리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별지: [첨부문서]
1. [省略]주 002
별지: 「조선 국왕이 보낸 자문」:대신 상주하여 天津 機器, 製造 兩局의 학도를 귀환시켜주십시오.
3. 「조선 국왕이 보낸 자문」
자문으로 알립니다.
살펴보건대, 올해 7월 2일 領選使 吏曹參判 金允植이 署理北洋大臣 張樹聲의 지시를 받아 [吳長慶의] 부대를 따라 조선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조선에 군란의 변고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창졸간에 귀국하게 되었고, 학도의 학습 사안 등은 모두 정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천조의 큰 은혜를 입어 亂逆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그는 마땅히 다시 天津에 가서 學徒들의 習業을 돌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學徒 가운데 봄부터 水土가 맞지 않아 병이 생겨 귀국한 사람이 잇따라 현재 남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변란을 들은 이후 각자 집안을 걱정하며 뜻을 지키지 못하므로 성과를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응당 가까운 시일에 철회하고 별도로 작은 기계를 구매하여 국내에 공장을 설치한 다음 학도들로 하여금 옛 학업을 복습하며 製造의 기반으로 삼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다시 영선사 金允植을 파견하여 모든 문제를 보고·상의하여 學徒를 철회하고자 합니다. 번거롭더라도 귀 대신께서는 이 사유를 황상께 대신 상주해주셔서 특별히 윤허가 내려진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이에 자문을 보내니, 살펴보시고 대신 상주해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광서 8년 9월 27일 발송, 10월 8일 도착.
별지: 「조선 국왕의 자문에 대한 답장」:金允植이 조선의 학도 전원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용하고자 합니다.
4. 「조선 국왕의 자문에 대한 답장」
답장 자문을 보냅니다.
귀 국왕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領選使 吏曹參判 金允植이 귀국한 후, 學徒 가운데 水土가 맞지 않아 병이 생겨 귀국한 사람이 잇따라 현재 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변란을 들은 이후 각자 집안을 걱정하며 뜻을 지키지 못하므로 성과를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응당 가까운 시일에 철회하고 별도로 작은 기계를 구매하여 국내에 공장을 설치한 다음 옛 학업을 복습하며 製造의 기반으로 삼게 해야 할 것입니다. 번거롭더라도 황상께 대신 상주해 주셔서 특별히 윤허를 내려주십시오.
살펴보건대, 光緖 7년 11월 무렵 金允植이 기술자와 학도 등을 인솔하여 天津에 와서 기계 제조를 학습하였습니다. 본 대신은 이미 상주한 다음 그들을 機器·製造局으로 보내었고, 議定한 章程에 따라 정성껏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 學徒들은 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대다수가 水土가 맞지 않아 병이 생겨 귀국하였기에 현재 남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헤아리건대 金允植이 학도 全數를 데리고 귀국하는 일을 허락하여 體恤의 뜻을 드러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조선의 武備가 소홀한 것은 器械가 不利한 것에 말미암고 器械의 不利함은 工技를 배우지 않아서입니다. 반드시 별도로 작은 기계를 구매하여 국내에 공장을 설치하고, 적절한 관원을 파견하여 엄격하고 성실하게 통솔하여 製造를 강구해야 합니다. 軍에서 사용하는 洋槍·炸礟 등의 利器는 수시로 修整하고 첨가함으로써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本 署大臣은 이미 天津의 機器·製造局의 潘駿德道臺와 王德均道臺에게 金允植과 함께 잘 상의하여 대신 구매하도록 하였으니 아마도 友誼를 다 할 것입니다. 주접을 갖추어 정상에 따라 대신 상주하고, 아울러 總理衙門과 禮部에 각각 咨文을 보내는 외, 이에 마땅히 답장 자문을 보내니 귀 국왕께서 살펴봐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별지: 「조선 국왕의 자문」:조선은 이미 병정을 선발하였으니 吳長慶에게 관원을 파견하여 교습해 주도록 자문으로 요청합니다.
5. 「조선 국왕이 보내 온 자문」
답장 자문을 보냅니다.
살펴보니 조선은 지금까지 벽지에 자리 잡아 별일이 없었기에 무비의 점검이 해이해졌습니다. 현재 각국과 서로 통교하여 港口에서 많은 일이 생기고 있으니 불우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지금 청조의 대군[즉 吳長慶의 부대]이 주둔하고 있으니, 가르침을 받을 바탕이 생겼기에 이미 담당 관원에게 지시하여 民丁을 선발한 다음 吳長慶提督에게 자문으로 관원을 파견하여 교습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올해 9월 23일 吳長慶提督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장 자문을 받았습니다.
慶字軍 營務處의 袁世凱를 파견하여 1營 5백 명을 고른 다음 新建親軍이라고 명명하고 總兵 王得功을 독려하여 정성껏 훈련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연이어 提督 朱先民을 파견하고 總兵 何增珠를 독려하여 추가로 1營 5백 명을 골라 훈련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현재 매일 독려하며 훈련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 조선 군제는 아마 날로 새로워지는 효과를 얻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귀 대신께서 藩服을 항상 염려해 주시는 황상의 지극한 뜻을 떠받든 데 의지한 것이니 진실로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에 병사를 선발하여 훈련하게 된 사유를 우선 자문으로 알리니, 귀 대신께서는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광서 8년 9월 27일 발송, 10월 8일 도착.
별지: 「조선 국왕의 자문에 대한 답장」:吳長慶이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 병사를 교습하도록 하였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6. 「조선 국왕의 자문에 대한 답」
답장 자문을 보냅니다.
귀국 왕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대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가르침을 받을 바탕이 생겼기에 이미 담당 관원에게 지시하여 民丁을 선발한 다음 吳長慶提督에게 자문으로 관원을 파견하여 교습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귀 국왕께서 시대의 어려움을 잘 살펴보시고 武備를 강구하여 自强의 계획을 도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기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吳長慶提督은 오랫동안 大敵을 상대해 봐서 지모와 용맹함이 모두 충분하고, 거느린 장수들도 槍炮 조종법에 매우 익숙하여 戰守에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파견하여 훈련을 독려하게 되었으니 필시 진심으로 대신 노력해줄 것입니 다. 本 署大臣은 藩服을 염려하는 聖朝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귀국의 軍政이 날로 진전되고 제때에 정돈되어 나라를 보호하고 외세를 막는 방도가 모두 여기에 기초하기를 바랍니다. 이에 마땅히 답장 자문을 보내니 귀 국왕께서는 살펴봐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광서 8년 10월 14일, 軍機大臣은 다음과 같은 유지를 받았다.
알았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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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오장경(吴長慶. 1829~1884)은 자가 소헌(筱轩)으로 안휘성 노강현(庐江县) 출신이다. 시호(諡號)는 무장(武壯)이다. 부친 오정향(吴廷香)은 우공(優貢)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는데, 태평천국군이 안휘를 침범하자 단련을 창설하여 이에 대항하다 순직하였고, 오장경은 그 뒤를 이어받아 태평천국의 반란과 염군의(捻軍) 봉기를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함풍(咸豊) 11년 증국번의 지시를 받아 노강(庐江)을 수복하자 그가 이끄는 5백 명의 부하로 회군(淮軍)의 경자영(庆字营)을 창립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후 태평천국과의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워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태평천국이 진압된 다음 염군(捻軍)이 기세를 떨치자 이홍장을 따라 이를 진압하고 강남에 주둔하였다. 광서 6년에 절강제독(浙江提督), 뒤이어 광동수사제독(廣东水师提督)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청불전쟁 때문에 산동 군무를 방판(幇辦)하라는 지시를 받아 등주(登州)에 주둔하게 되었다. 때마침 광서 8년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오장경은 군대 3천 명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임오군란의 평정에 공을 세운 오장경은 계속 한성에 주둔하다가 2년 후 귀환하였다. 이후 광서 10년 금주(金州)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곧 병사하였다. 그는 그의 부대를 따라 들어온 상인들이 조선에 진출하게 되면서 조선 화교의 시조로 떠받들어지게 되며, 이후 고종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吳武壯公祠)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 각주 002)
- 각주 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