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왕이 원세개(袁世凱)를 파견하여 친군(親軍)을 훈련하도록 요청하였는데 다른 관원을 파견하도록 하였다고 북양대신(北洋大臣)이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낸 문서
조선 국왕이 자문을 보내 袁世凱를 계속 파견하여 親軍을 훈련하도록 요청하였는데, 袁世凱가 휴가를 청해 귀국하였으므로 吳長慶提督에게 지시하여 다른 관원을 파견해 살피도록 하였습니다.
1월 26일, 北洋大臣 李鴻章이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다.
광서 11년 1월 23일, 조선 국왕이 광서 10년 12월 15일에 보낸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조선은 종래 武備가 없었고 모든 병사들은 조련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임오년 겨울 袁世凱 司馬에게주 001
각주 001)

親軍 左·右營 및 沁營주 002 병사들을 훈련해달라고 청하였는데, 3년 동안 자못 성과가 있었습니다. 현재 時事가 우려스러운 바가 많은 때라 危亡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앞뒤로 3營을 증설하여 宿衛에 보태고자 합니다. 다만 이 3영은 혹은 民丁에서 모집하거나 혹은 훈련 기법이 서로 달라 가지런하게 정돈하기 쉽지 않습니다. 귀 대신께서 袁世凱에게 지시하여 다시 조련함으로써 左·右 兩營처럼 통일적인 교습으로 시작과 끝이 같게 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귀 대신께서 기꺼이 도와주셔서 성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문서를 갖춰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살펴봐 주십시오.사마(司馬)는 중국 고대의 관직이지만, 계속 그 지위가 내려가다가 수(隋)대에 폐지되었고, 당대에는 절도사(節度使)의 속료 가운데 행군사마(行軍司馬)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후대에 부동지(府同知)를 사마(司馬)로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사람들이 袁世凱를 ‘袁世凱사마(袁世凱司馬)’라고 부른 것은 아마 그가 오장경 부대에서 사마(司馬) 직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실제 그는 임오군란에서 공을 세운 이후 이홍장의 추천으로 ‘분성보용동지(分省補用同知)’ 직함을 받았으므로 ‘사마’라는 명칭이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袁世凱는 지금 이미 귀국하여 잠시 휴가를 청하고 있으니, 응당 吳長慶提督에게 지시하여 다른 관원을 보내 훈련을 감독시키겠다고 답장을 보내겠습니다. 나누어 문서를 보내는 것 외에, 마땅히 귀 아문에 자문을 보내야 하니, 번거롭지만 살펴봐 주십시오.
- 각주 001)
- 각주 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