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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일 대리 공사가 만나러 오지 않은 것을 여서창 대신이 조선의 외서(外署)에 알려서 조선의 외서가 찾아볼 것이라고 지시했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내는 문서

조선의 駐日 대리 公使 金嘉鎭이 아직 만나러 오지 않은 일로 黎庶昌 大臣이 조선 外署에 알려, 조선 外署가 (金嘉鎭에게) 찾아볼 것을 서신으로 지시하였습니다.
  • 발신자
    北洋大臣 李鴻章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8년 3월 12일 (음)(光緖十四年三月十二日) , 1888년 4월 22일 (光緖十四年三月十二日)
  • 문서번호
    2-1-3-70 (1343, 2474a-2475a)
3월 12일, 北洋大臣 李鴻章이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다.
 
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升用道補用知府 袁世凱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조선에서 駐日本使臣으로 보낸 閔泳駿이 작년 10월 급히 돌아오는 바람에, 參贊 金嘉鎮이 대리하게 되었습니다. 閔泳駿이 漢城에 도착한 후 제게 부탁하기를, 黎庶昌주 001
각주 001)
여서창(黎庶昌, 1837~1898)은 자가 순재(蒓齋)로,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사람이다. 증국번(曾國藩)의 막우로 있으면서 그의 신임을 얻어 강소성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고, 光緖 년간에는 곽숭도(郭崇燾), 증기택(曾紀澤) 등을 따라 유럽에 가서 공사관 참찬을 지냈다. 1881년 주일본대신(駐日本大臣)으로 임명되어 3년간 일본에 머물렀다가, 모친상으로 귀국하여 3년간의 정우(丁憂) 기간을 보내고 1884년 다시 일본으로 파견되면서 선후로 두 차례에 걸쳐 6년간 주일본대신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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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臣에게 서신을 보내 중국과 조선은 한 집안이니 해당 參贊은 일본에 있으면서 모든 걸 잘 보살펴 주십사 요청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黎庶昌 大臣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장 서신을 받았습니다.
金嘉鎮은 두 차례 문 앞에서 片文을 건넸을 뿐, 결코 아직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다. 서로 단절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응당 저는 곧바로 조선 정부와 外署에 알렸고, (조선 정부와 外署가) 이르길 즉시 해당 參贊 金嘉鎮에게 서신으로 찾아가 만나보라고 지시하였는데, (해당 參贊이) 과연 그에 따랐는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黎庶昌 大臣에게 서신으로 답장을 보낸 것 외에, 마땅히 黎庶昌 大臣이 보내온 서신 및 제가 답장한 서신을 첨부하여 올리니 검토해 주십시오.
(이러한 보고를 받아) 마땅히 貴 아문에 비밀 咨文으로 알려야 할 것이니,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살펴봐 주십시오.
 
첨부문서:삼가 黎庶昌 駐日本大臣과 주고받은 서신 두 건을 올리니 살펴봐 주십시오.
별지: 「出使日本大臣 黎庶昌이 袁世凱에 보낸 서신」:金嘉鎭은 결코 만나러 오지 않았으며, 조선인의 가슴에는 ‘自主’라고 하는 두 글자가 가로놓여 있어, 도저히 깰 수가 없습니다.
 
1. 「黎庶昌 大臣이 보내 온 서신」
추가합니다. 전에 보내신 서신에서 조선의 金嘉鎮이 여기에 있으니 조선 公使가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음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인의 가슴에는 ‘自主’라고 하는 두 글자가 가로놓여 있어, 아주 견고하여 깰 수가 없음을 알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도착한 지 이미 2개월이 지났음에도, 직무를 인계받았을 때와 새해를 맞이하였을 때 金嘉鎮이 두 차례 문 앞에서 片文을 건넸을 뿐 전혀 만나러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밖에는 전혀 왕래가 없었습니다. 서로 단절된 상황이, 예전에 金玉均이 여기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안 좋습니다. 비밀리에 알립니다. 재차 행복을 축원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2월 4일 도착.
별지: 「袁世凱가 出使日本大臣 黎庶昌에게 보낸 답장 서신」:金嘉鎭이 아직 만나러 오지 않은 일로 조선 정부를 완곡히 힐문하였더니, 당연히 서신을 보내 만나보기를 촉구하였다고 합니다.
 
2. 「黎庶昌 大臣에게 보내는 답장 서신」
보내주신 서신과 첨부한 내용을 받아 삼가 잘 읽고 하나하나 확인하였습니다. 조선은 통상과 개방을 시작한 이래 견문이 나날이 넓어지자 현혹되는 바도 나날이 늘어난 데다가, 더욱이 서양인들은 그 사이에서 우롱하고 있습니다. 매번 중국의 강함이 서구에 미치지 못함을 보는 데다가 또한 베트남과 버마가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뒤집히는 것을 살펴보았기에, 이 때문에 줄곧 强國을 끌어들여 自衛를 도모하려는 마음을 품었고, 지금은 분수에 넘치게 自主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매년 强國과 몰래 교류하는 흔적을 누차 보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중국 시국 역시 손을 뻗고 싶어도 닿기 어려운 상황이라서, 작년 같은 경우 (조선이) 각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주재시키면서도 끝내 중국의 지시를 요청하지 않은 채 모두 ‘全權’이라는 용어를 덧붙였으므로, 諭旨를 통한 責問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李 中堂大人께서 논박하고 즉각 章程을 정하여 (조선 公使가 올리는) 銜帖‧呈文에는 (중국 公使가 상사의 지시라는 것을 상징하는) 硃筆로 照會하도록 하는 것 외에, 다시 3가지 조항(‘另約三端’)을 약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간 朴定陽 公使는 마침내 감히 이를 거스르고 ‘另約三端’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李 中堂大人께서 전보로 제게 견책할 것을 지시하시자, 처음에는 실상을 은폐하고 핑계를 대다가 결국은 모든 잘못을 朴定陽 사신 탓으로 돌리는 등 그릇된 행동은 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이어 金嘉鎮의 경우, 단지 두 차례 片文을 건넸을 뿐 결코 만나러 오지 않았다고 알려주셨는데, 이것은 ‘自主’를 억지로 꾸미려는 낡은 계책이 아닌 게 없습니다. 제가 이미 조선 정부에 완곡하게 견책하였고, (조선 정부가 답하기를) 즉시 해당 參贊에게 서신을 보내 만나보러 가도록 재촉하였으나 과연 (해당 參贊이) 그에 따랐는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능력은 부족한데 임무는 막중하여, 걱정에 고개가 수그러들고, 이 때문에 전에 누차 교체를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임기가 거의 다 되었으니, 혹여 이러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잠시 무능함을 감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각하께서 멀리 계시지 않으니 때때로 가르침을 청해 제 단점을 고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답장을 보냅니다. 삼가 평안하시기 바라며, 아울러 비밀리에 검토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2월 14일 발송.

  • 각주 001)
    여서창(黎庶昌, 1837~1898)은 자가 순재(蒓齋)로,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사람이다. 증국번(曾國藩)의 막우로 있으면서 그의 신임을 얻어 강소성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고, 光緖 년간에는 곽숭도(郭崇燾), 증기택(曾紀澤) 등을 따라 유럽에 가서 공사관 참찬을 지냈다. 1881년 주일본대신(駐日本大臣)으로 임명되어 3년간 일본에 머물렀다가, 모친상으로 귀국하여 3년간의 정우(丁憂) 기간을 보내고 1884년 다시 일본으로 파견되면서 선후로 두 차례에 걸쳐 6년간 주일본대신을 지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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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일 대리 공사가 만나러 오지 않은 것을 여서창 대신이 조선의 외서(外署)에 알려서 조선의 외서가 찾아볼 것이라고 지시했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내는 문서 자료번호 : cj.k_0002_0030_0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