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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조선에서 삼단(三端)의 변통을 요구하여 원세개(袁世凱)로 하여금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

조선에서 全權을 三等使로 바꾸되 전에 의정한 三端의 변통을 요구하기에 袁世凱로 하여금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 발신자
    北洋大臣 李鴻章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90년 2월 11일 (음)(光緖十六年二月十一日) , 1890년 3월 1일 (光緖十六年二月十一日)
  • 문서번호
    2-1-3-88 (1504, 2731b-2733a)
2월 11일, 北洋大臣 李鴻章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삼가 비밀리에 답장합니다.
2월 2일 다음과 같은 直字 986호 公函을 받았습니다.
조선에서 전에 議定한 出使 三端의 개정을 요청하였는데, 현재 조선에서는 全權을 三等使로 바꾸길 원합니다. 아마도 대략 전환을 허락해 주더라도 여전히 上國의 體制를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전에 논의한 三端은 본래 조선 국왕이 승낙한 후 咨文을 보내 대신 상주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 때문으로 지시대로 따르겠다고 상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겉으로는 따르고 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하여, 朴定陽이 미국에 도착하자 먼저 주미공사를 찾아가 만나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주미공사 張蔭桓이 이에 대해 문책을 하자 조선 外署에서는 袁世凱에게 서신으로 답장을 하였습니다. 비록 (서신에는) 朴定陽이 죄를 범하고 章程을 어겼으니 귀국하면 논의해서 죄를 주겠다는 말이 있었으나, 朴定陽이 귀국한 지 오래되고 袁世凱가 여러 차례 견책하였음에도 엄한 견책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높은 관직에 발탁하려고 하니, 그 뜻은 아마도 朴定陽을 장려하여 章程 위반을 권장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 놀음처럼 처리하니 너무 교활하여 오만하여 가증스럽습니다.
지금 袁世凱가 이 사안에 대해 여전히 처리를 독촉하자, 朴定陽도 조금은 두려움을 느껴서인지 병을 핑계로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서로 버티고 있는 와중에 유럽에 사신으로 파견된 朴齊純이 갑자기, “全權을 三等使로 바꾸면 三端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대개 이를 통해 이전의 논의를 모두 바꿔보려고 시험하는 것 같습니다. 洪鈞은 이전의 전보에서 서양에는 (상국 사신이 속국 사신을) 인솔하여 가서 만나는 전례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另約三端’의) 第一端에 “중국공사를 통해 함께 (해당 국가의) 외무부로 가겠다고 요청하며 그 이후에는 구애받지 않는다”고 명확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사신이 처음 외국에 도착하면 사람과 지역이 생소하니 외무부에 가서 신임장을 제출할 때 중국공사가 함께 인솔하여 가서 대신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군주를 만날 때는 모름지기 인솔하여 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原議에서는 본디 반드시 인솔하여 가서 만난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광서) 14년 12월 조선에서 第一端의 삭제를 요청하였습니다. 저(李鴻章)는 먼저 중국공사를 만나되 가령 (중국공사가) 함께 갈 필요는 없다고 한다면 즉시 그렇게 융통해도 좋다고 허락하였으니 실로 조선의 교섭 체제에 대해 조금도 장애가 없습니다. 제2·3端 또한 上國의 體制를 대략 존속하는 데 불과합니다. 지금 조선 국왕은 이전의 논의를 모두 폐기하자고 여러 차례 袁世凱에게 주선을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제 의견을 고집하기에는 불편하므로, 응당 먼저 조선에서 어떻게 고칠지 스스로 적절히 논의한 다음 다시 검토해보자고 하였습니다. 이미 2월 3일 袁世凱에게 전보로 朴齊純이 찾아와 물으면 논의한 후, 보고하여 검토·처리하겠다고 지시하였습니다. 袁世凱는 朴齊純, 鄭秉夏와 직접 논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답장하였는데, 지금까지 후속 보고는 없습니다. 주고받은 전보 2건을 초록하여 검토해보시도록 올립니다.
제가 헤아려보건대, 조선 군신은 일을 뒤집는 경우가 자주 있고 교활한 짓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全權을 三等使로 바꾸겠다”는 것도 아직 믿을 수 없습니다. 三等公使는 萬國公法에 따르면 역시 타국 군주에게 신임장을 제출할 수 있으니, 全權과 이름은 다르지만 실제로는 동일합니다. 가령 중국공사의 뒤를 따르는 것과 여러 사안을 중국공사와 논의하는 것에 대해 기꺼워하지 않는다면 上國의 體制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에 논의한 ‘另約三端’도 본래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내놓은 것으로 중국에 있어 결코 지나치게 높인 것도 아니고 조선에 있어 결코 지나치게 낮춘 것도 아닙니다. 조선 국왕이 소인들의 선동을 듣고서 이미 승낙한 일을 다시 뒤집고자 하니 어떻게 이런 일 처리가 있겠습니까? 朴齊純은 일찍이 駐天津 商務委員을 역임하였는데, 성품과 행동이 교활합니다. 그는 “중국과 조선의 논의가 확정되지 않으면 결단코 덮어놓고 가지는 않겠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혹은 이런 핑계를 대며 유럽행을 늦추는 것도 문제를 진정시키고 사람을 안정시키는 방법일 것입니다. 袁世凱와 조선이 논의하여 틀이 잡히면 다시 전보를 보내 지시를 요청한 후 따르는 것 외에, 마땅히 먼저 비밀리에 답장해야 할 것입니다. 中堂과 王爺 大人께서 평안하기를 송축합니다.
 
抄電의 照錄
별지: 「李鴻章이 袁世凱에게 보낸 답장 전보」:조선이 三等使로 바꾸고 전에 정한 三端의 변통을 요청하니, 응당 어떻게 고칠지 적절히 논의하라.
 
 1. 「李鴻章이 袁世凱에게 답한 電報」
조선의 升用道 袁世凱에 대한 답장. 2월 3일 酉刻
이전 전보에서 朴齊純이 “全權(使臣)을 三等使로 바꾸고, 三端의 개정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살펴보니 광서 14년 9월 무렵, 咨文을 보내 전권을 삼등으로 바꾸는 일을 상의한 적이 있는데, 조선은 승인하지 않겠다고 답장하였다. 이후 洪鈞의 전보에서 서양에서는 속방의 사신 파견을 인정하지 않으며, 종래 (속방의 사신을) 인솔하여 가는 전례가 없다고 하였다. 이 해 12월 조선에서 鄭秉夏를 파견하여 너(袁世凱)를 찾아, “중국공사가 조선공사를 인솔하여 外務部로 가는 章程의 第一端을 삭제하는 일을 대신 간청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응당 먼저 중국공사를 찾아가 논의하여 처리해야 하며, 가령 중국공사가 함께 갈 필요가 없다고 하면 융통을 허락한다고 답장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조선의 이런 요구를) 논박하여 물리치라는 諭旨도 있었다. 지금 조선에서 만일 三等使로 강등하여 파견하겠다는 것에 관한 확실한 문서가 있다면, 전에 논의한 三端을 응당 어떻게 바꿔야 上國의 體制를 잃지 않을 것인지 검토해야, 비로소 전에 적절히 협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신 諭旨의 뜻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며, 일괄하여 (조선의 요청을) 말살해버리기는 곤란할 것이다. 박제순이 다시 물어오길 기다려 우선 그와 적절히 논의한 다음 전보를 답장을 보내 (내 지시를 받고) 처리하도록 하라.
3일 酉刻.
별지: 「袁世凱가 이홍장에게 보낸 답장 전보」:조선이 三等使로 (외국공사를) 바꾸고 중·한 사절 체제를 變通하는 일은, 마땅히 기회를 보아 적절히 논의하겠습니다.
 
 2. 「袁世凱가 이홍장에게 답한 전보」
升用道 袁世凱가 보낸 전보. 2월 4일 酉刻에 도착.
3일에 보내신 전보를 삼가 읽었습니다. 朴齊純이 오면 기회를 보아 적절히 논의하겠습니다. 鄭秉夏가 곧 外職을 마치고 漢城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가 오면 박제순과 비교할 때 더욱 말이 잘 통할 것입니다.
袁世凱 올림.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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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삼단(三端)의 변통을 요구하여 원세개(袁世凱)로 하여금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 자료번호 : cj.k_0002_0030_0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