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오국사신(五國使臣)을 조선에서 견책하고 다른 관원으로 바꾸어 파견한 것은 자주(自主)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문서
조선의 五國使臣 趙臣熙가 멋대로 귀국하여, 조선 정부에서 이미 견책을 가하였고 아울러 다른 관원으로 바꾸어 파견하였으니, 명확히 自主에 마음을 두고 中·韓의 使節體制를 없애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월 17일, 北洋大臣 李鴻章이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다.
2월 14일, 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升用道補用知府 袁世凱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습니다.
조선의 全權使臣 趙臣熙가 멋대로 귀국하였는데, 즉시 조선 정부에서 죄를 다스리고 아울러 관원을 파견하여 교체한 각 상황은 이미 수시로 전보를 통해 李 中堂大人께 살펴보시도록 아뢴 적이 있습니다. 조사해보니, 趙臣熙는 홍콩에 2년여 머물렀습니다. 당시 조선 국왕이 유럽행을 엄히 재촉하여 三端 章程을 따르지 않고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趙臣熙는 “먼저 三端을 개정해야 따르지 않을 수 있다”면서 버텼습니다. 조선 국왕은 여러 가지로 시도하면서 기필코 三端을 개정하려고 하였지만 끝내 바라는 대로 할 수 없었고 또한 趙臣熙를 어떻게 하지 못하자 증오와 분노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함께 홍콩에 있던 閔泳翊은 趙臣熙와 더욱 갈등을 빚었습니다. 마침 朴定陽의 章程 위반 사건이 쟁점이 되어 몇 년 동안 논쟁하며 마무리가 안 되자, 趙臣熙 또한 구실을 댈 말이 생겼고 조선 국왕은 더욱 부릴 수 있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지난가을 朴定陽이 조선에 돌아온 후 여러 차례 제게 문책을 받고, 국왕이 끝내 중국을 명확히 거부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비웃음을 사며 大局이 위태로운 것을 보자 趙臣熙는 三端의 개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전보를 보내 병을 칭하면서 국왕에게 귀국 승인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三端 개정을 힘써 추진하면서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또 趙臣熙의 병이 억지 구실이라는 것을 알기에 고집을 부리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趙臣熙는 끝내 閔泳翊에게도 통지하지 않고 일을 핑계로 홍콩에서 몰래 일본으로 갔다가 조선에 돌아왔습니다. 1월 11일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알지 못하다가 며칠 지나 그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왕은 매우 분노하여 맹세코 趙臣熙를 죽여 징계를 보이겠다고 하였는데, 제가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변호한 후에야 그 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12일 밤에는 갑자기 朴齊純을 內務協辦으로 승진시키고 아울러 趙臣熙는 병 때문에 체직을 허락하고 박제순으로 교체하여 파견한다고 傳敎를 내렸습니다. 당시 趙臣熙는 인천에 도착하기 전이었는데, 즉시 그 대리자를 파견한 것입니다. 대개 五國全權 사신은 비록 병으로 귀국하였지만, 하루라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각국에 보여주어, 그 자립의 헛된 체면을 존속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13일 趙臣熙가 수행원 南宮檍·蔡賢植·李商在 및 전에 주미 참찬에 임명된 미국인 의사 알렌주 001
각주 001)

과 함께 인천에 왔습니다. 趙臣熙는 상소를 올려 멋대로 귀국한 죄를 처벌해달라고 청하며, 인천에서 스스로를 묶고는 삼가 왕명을 기다렸습니다. 국왕은 수일 동안 마땅한 조치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데니 등과 상의하였습니다. 이후 각국인들이 趙臣熙가 명령을 내던지고 멋대로 귀국하였으며 실제로는 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얕은꾀로 속이는 계책은 남을 속이기에도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16일 왕이 다시 傳敎하기를, “어명으로 국경을 나섰으니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 비록 병세가 심하더라도 사신의 임무를 마치지 않고 경솔히 귀국하였으니, 事體를 헤아려보건대 경망스러움이 너무 심하다. 五國公使 趙臣熙에게 竄配하는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趙臣熙가 교외에 이르자 즉시 全羅道 咸悅縣을 配所로 정하여 趙臣熙는 교외에서 바로 떠났습니다. 식자들은 그를 안타깝게 여겼고, 각국인들은 여전히 험담을 하며 비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제 영국 署總領事 힐리어(Walter C. Hillier)를 만났는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알렌(1858~1932, Horace N. Allen, 阿倫, 安連)은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으로서 조선 고종 정권의 대외 정책과 관련하여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1883년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로서 중국 上海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 1884년 주한 미국공사관의 의사가 되어 조선에서 의료활동 및 선교를 시작하였다.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 왕실과 매우 가까워졌으며, 이후 왕실 의사 및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887년 주미 전권대사로 파견된 朴定陽의 고문으로서 함께 미국으로 가서 ‘另約三端’의 준수를 거부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청의 간섭을 규명하는 내용을 국무성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1890년에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에 임명되었고, 1897년에는 주한 미국 공사 겸 총영사가 되었다. 1890년 雲山광산 채굴권, 1891년 경인철도 부설권, 1897년 전력회사 설립권 등을 미국이 획득할 수 있도록 교섭하였다. 조선의 상황에 대해 The Korean Repository, Korean Tales, Things korean 등을 저술하였다.
조선의 全權 파견은 단지 아이들 놀이와 같으니, 다시금 파견하지 않도록 권유하는 것만 못합니다. 가령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3·4등 사신을 파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이러한 전권을 파견하여 무엇에 쓰겠습니까?
다만 살펴보건대 조선 국왕은 근년에 全權의 파견을 自主가 창출되는 기반이라고 보는데, 三端의 통제를 받아 특히 동력을 잃었기에 3년 동안 이 문제를 항상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잘못된 짓과 속이는 행동이 있는데 또한 이 때문에 다른 일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 결단코 3·4등 공사의 파견을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고 또 三端도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朴齊純을 파견한 것도 한때의 다급한 임시방편이므로 반드시 그가 곧장 가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애써 방법을 찾아 三端의 개정을 요청하겠지만 만일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아마도 틈을 타서 따로 아첨을 잘하고 일에는 아둔한 관원을 별도로 파견하여 가서 章程을 어기고 처리하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전에 朴齊純을 만나 출발 여부를 탐문하였는데, “모름지기 三端의 개정을 중국에 요청한 다음 가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견해도 또한 趙臣熙와 같습니다. 다만 朴齊純은 趙臣熙만큼 강경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첨부합니다. 한편 駐日 사신 金嘉鎭이 본월 21일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한성에 도착하였습니다. 국왕이 자못 총애하며 가까이합니다만 金嘉鎭 역시 소인이라 사태를 안정시킬 수 없고 문제의 실마리들이 많아 진실로 곳곳이 걱정됩니다. 삼가 조선 사신 趙臣熙가 귀국한 각 상황을 상세히 서술하여 비밀리에 아룁니다. 이에 삼가 李 中堂大人께서 살펴보시도록 올립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았으므로 마땅히 貴 아문에 비밀리에 咨文을 보내오니, 번거롭겠지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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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알렌(1858~1932, Horace N. Allen, 阿倫, 安連)은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으로서 조선 고종 정권의 대외 정책과 관련하여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1883년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로서 중국 上海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 1884년 주한 미국공사관의 의사가 되어 조선에서 의료활동 및 선교를 시작하였다.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 왕실과 매우 가까워졌으며, 이후 왕실 의사 및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887년 주미 전권대사로 파견된 朴定陽의 고문으로서 함께 미국으로 가서 ‘另約三端’의 준수를 거부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청의 간섭을 규명하는 내용을 국무성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1890년에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에 임명되었고, 1897년에는 주한 미국 공사 겸 총영사가 되었다. 1890년 雲山광산 채굴권, 1891년 경인철도 부설권, 1897년 전력회사 설립권 등을 미국이 획득할 수 있도록 교섭하였다. 조선의 상황에 대해 The Korean Repository, Korean Tales, Things korean 등을 저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