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서리 공사가 중국이 조선을 정벌하려고 한다는 신문 내용이 사실인지를 물었다고 사일대신(使日大臣)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신문지 기사 번역 첨부 문서
조선 署理公使 李鶴圭가 직접 찾아와 중국이 조선을 정벌하려고 한다는 新聞의 내용이 사실인지 물었습니다.
7월 21일, 出使大臣 黎庶昌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다.
6월 19일 昌字 제66호 公函과 첨부문서 2건을 삼가 보냈으니 이미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조선 署理公使 李鶴圭가 얼마 전 官署로 찾아와 물었습니다.
일본신문을 보니 중국이 조선을 정벌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撤棧주 001
각주 001)

및 朴定陽의 처치, 李善得(Charles W. Legendre)의 고용 등 세 가지 문제와 관련되었다는데 사실인지 명확히 알려주시길 요청합니다.‘撤棧’은 청 상인의 行棧 이전 문제를 가리킨다. 조선과 청은 1882년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章程(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후 ‘章程’)을 통해 상대국 수도에서의 공식적인 무역을 인정하였다. 章程 4조에 따르면 ‘조선 상인은 北京에서 章程에 따라 교역하고, 중국 상인은 조선의 楊花津과 漢城에 들어가 行棧을 개설(朝鮮商民, 除在北京例准交易與中國商民準入朝鮮楊花津·漢城開設行棧)’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에서는 서울에서 무역하는 청 상인의 증가 및 이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 다른 나라들의 동일한 권리 요구 때문에 청 측에 行棧을 용산으로 이전[撤棧]하도록 요청하였다. 청에서도 최초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으나, 한·러 밀약설, 朴定陽의 미국 파견 등 조선·청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이주에 대한 청 상인들의 부정적 반응으로 인해 기존의 논의를 철회하였다. 청 상인과 조선 상인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1887년 이후 청 상점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연속적으로 발생하였고, 아울러 1890년 1월에는 서울 육의전 및 시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 특히 청 상인의 이전을 호소하면서 영업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저는 “신문에 실려 있는 바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병력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일입니까? 우리 쪽에서 반드시 전보를 보내 여러 차례 알리고 타일렀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략 깨우친 것 같았는데, 다음날 다시 서신 한 통을 받았는데, “밤새 생각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北洋衙門에 전보를 보내 물어봐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날 마침 李 中堂大人께서 7일에 보낸 서신을 받았기에, 제가 다시 통역관을 보내서 “서신 중에 결코 조선을 정벌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절대 이러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알리자 그가 비로소 마음을 풀었습니다. 저는 조선의 어리석음이 매우 안타깝고, 또한 이학규의 나약하고 겁많은 점도 걱정스럽습니다. 이에 신문을 譯抄하여 올립니다.
6월 28일 萬壽聖節의 빈객은 마침 서력 8월 중순이라 대부분 고향으로 피서를 가기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지는 않을 것이니 예식은 충분히 치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일들이 수습되기를 기다렸다가 또한 고향 근처로 가서 열흘가량 쉬고자 합니다. 『申報』를 보니 북경·천진 일대에 해를 거듭하여 큰 홍수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재해가 끊이지 않으니 재해구제 조치가 더욱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본도 올해는 비가 또한 많이 내려 물에 잠기거나 손상된 곡식이 적지 않아 추수에 흉작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현재 각 관공서는 휴가철이며 도쿄에는 별달리 사안이 많지 않습니다. 청컨대 中堂大人께 대신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모두 편안하시기를 청합니다.
첨부문서 照錄
별지: 「신문지 기사 번역」:중국이 장차 朴定陽 등의 사안 때문에 조선을 정벌하여 그동안 여러 차례 속국의 분수를 벗어난 것을 징계하려 한다.
1. 「신문지 기사 번역」
지금 조선을 정벌하고자, 현재 四川提督 宋慶이 李 中堂大人의 명령을 받아 旅順 항구에서 밤낮으로 병졸을 훈련하고 칼과 대포를 정비하는데 마치 실전에 임한듯한 모습이라며, 다양한 소문이 쏟아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조선은 중국의 조치에 따르지 않고 朴定陽을 미국으로 出使시켰고, 또 京城에서의 撤棧 문제를 袁世凱와 상의하지 않고 李 中堂에게 바로 照會를 보냈으며, 중국과 상의하지 않고서 李善德을 고용하는 등 종종 屬國의 分限을 넘어섰다. 이 때문에 李 中堂이 크게 노해서 가을에 말이 살찔 때를 기다려 조선을 정벌하고자, 宋公으로 하여금 병기를 이렇게 준비시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병사를 훈련하여 조선을 정벌하기에는 그 시기가 아직 이르다. 지금 李 中堂은 병선을 시험하고 병기를 검열하고자 이번에는 福建船廠에서 제조한 철갑선 군함 龍咸號의 기기와 속력을 시험하기 위해, 北洋의 여러 항구를 두루 순시한 다음 旅順에 이르러 閱兵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宋公이 전심으로 병사를 훈련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조선은 오늘날 겉으로는 독립을 부르짖는데, 실상은 우리 중국에 예속되어 내치와 외교가 우리 눈치를 살피지 않음이 없어온 조정의 신료들이 전전긍긍한다. 이와 같은 약소국에다 무엇하러 훈련된 병사와 잘 다듬은 무기를 쓰겠는가? 李 中堂께서 한번 엄령을 내리고 袁 觀察이 한 번 입을 열면, 조선 백성은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온 나라가 중국의 臣民이 될 것이다. 오늘날 宋公의 연병은 이것 때문이 아니라, 대개 북쪽 국경을 방어하며 러시아가 엿보는 것을 대비하는 것이다.” 여러 소문이 분분하지만, 진실과 거짓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온건주의자인 曾國藩이 작고한 후 李 中堂이 조선을 더욱 抑壓主義로 대하였기에 주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살펴보건대 四川提督 宋公은 태평천국의 반란을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웠다. 올해 나이는 74세이지만 정신은 멀쩡하다. 올해 3월 22일 皇上을 알현하였을 때 皇上께서 여전히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지, 旅順에 주둔하면서 洋人이 두렵지는 않은지를 물으셨다. 그는 “신은 단지 外人을 鎭撫해야 함을 알 뿐이며, 두려운 바는 모릅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은 신이 자랑하는 일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지난날 남·북에서의 전투와 정벌의 공적을 아뢰었다. 皇上께서 크게 기뻐하셨으니, 대개 宋公 역시 오늘날 중국의 일대 호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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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撤棧’은 청 상인의 行棧 이전 문제를 가리킨다. 조선과 청은 1882년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章程(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후 ‘章程’)을 통해 상대국 수도에서의 공식적인 무역을 인정하였다. 章程 4조에 따르면 ‘조선 상인은 北京에서 章程에 따라 교역하고, 중국 상인은 조선의 楊花津과 漢城에 들어가 行棧을 개설(朝鮮商民, 除在北京例准交易與中國商民準入朝鮮楊花津·漢城開設行棧)’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에서는 서울에서 무역하는 청 상인의 증가 및 이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 다른 나라들의 동일한 권리 요구 때문에 청 측에 行棧을 용산으로 이전[撤棧]하도록 요청하였다. 청에서도 최초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으나, 한·러 밀약설, 朴定陽의 미국 파견 등 조선·청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이주에 대한 청 상인들의 부정적 반응으로 인해 기존의 논의를 철회하였다. 청 상인과 조선 상인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1887년 이후 청 상점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연속적으로 발생하였고, 아울러 1890년 1월에는 서울 육의전 및 시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 특히 청 상인의 이전을 호소하면서 영업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