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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조선 난당의 수괴가 이하응이며 일본과 맞설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하다는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의 서신과 관련 필담 자료 등

조선 난당은 국왕의 생부인 이하응이 수괴이며, 또한 일본은 교활하여 반드시 병력이 거기에 맞서는 수준이어야 비로소 쉽게 막아낼 수 있습니다.
  • 발신자
    署理北洋大臣 張樹聲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6월 25일 (음)(光緖八年六月二十五日) , 1882년 8월 8일 (光緖八年六月二十五日)
  • 문서번호
    4-1-12(485, 768b-772b)
6월 25일,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23일 보내신 직자(直字) 제684호 비밀 서신을 오늘 받고, 훈시 하나하나를 읽어보니, 정말이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이 지금 위난 중에 있어 중국에서 군대를 보내 토벌하고, 조선을 대신해서 외교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독 정여창은 어제 일찍 출항해서 연대(煙臺)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 도대 마건충의 답장 전보를 받았는데, 이날 북행해서 연대로 가는 여정에 오른다고 합니다. 저는 해당 도대가 제독 정여창과 연대에서 만날 수 있으니, 다시 천진으로 오면 길을 돌게 되는 일이 많아고 생각하여, 당장 모든 방침을 제독 정여창이 확실히 파악하도록 지시한 다음, 아울러 마건충에게 상세하게 서신으로 알려, 직접 연대로 가서 정여창과 함께 신속하게 조선으로 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중국은 조선의 관계에서 그 어려움을 모른 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저는 먼저 육군을 동원하여 파견하는 것이 지금 형세로 보아 부득이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회군(淮軍) 경자영(慶字營)이 등주(登州)에 주둔하고 있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하룻밤이면 조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21일 경군통령제독(慶軍統領提督) 오장경(吳長慶)에게 서신을 보내 즉각 천진으로 와서 만나서 상의하자고 약속하였는데,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조선 내부에 난당이 있다는 것만 알고 일본이 이를 구실로 개입해서 공을 차지하는 것을 우려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선 배신 김윤식, 어윤중과 진해관도 주복의 필담 문답을 보니, 그 어조와 뜻이 매우 기이하여, 선뜻 말하기 어려운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복에게 김윤식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추궁하도록 누차 지시하였더니, 비로소 감추어오던 내막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즉 그 나라의 난당은 실제로는 이하응이 수괴였으니, 즉 조선 국왕의 생부로서 집안 내부에서 변고가 발생한 것이고, 이 화근이 양성된 것이 이미 오래였고, 그를 선동하는 무리도 역시 많아, 처리가 비교적 까다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주복과 김윤식의 필담, 그리고 김윤식이 주복에게 보낸 서신을 함께 초록하여 올리니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하응이 만약 뚜렷하게 반역을 저질렀고, 그 기세가 바야흐로 크게 늘어나고 있다면, 진실로 조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암중에 모든 국면을 조종하고 있다면, 조선은 이 사람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후환이 도무지 그칠 날이 없으며, 또한 조선 국왕이 스스로 마무리할 수도 없습니다. 설사 난당이 잠시 평정되더라도, 전에 보내 주신 지시처럼 일본 쪽에서 한바탕 교활한 수작을 부리는 것을 피할 수도 없으니, 또한 반드시 일본과 맞먹는 병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쉽사리 조정하고 우리의 뜻에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계책을 마련하자면, 계속 육군을 동원하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하응 문제의 경우, 군신・부자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라서 적절한 처리를 하자면 특별히 예의(禮意)를 절충하여 중국에서 반역의 무리를 토벌하여 순리의 편을 들어주는 대의(大義)를 제대로 펼쳐야만 난당이 구실을 삼아 선동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장경 제독은 그래도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어 단지 용맹함을 장기로 삼는 경우가 아니니, 반드시 상황을 보아가면서 적절히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단지 새로 구입한 두 척의 쾌선(快船)과 연선(練船)인 양위호(揚威號)만 있어 실로 동원하는 데 부족할까 염려됩니다. 진해호(鎭海號)는 바야흐로 선창에 들어가 수리중이고, 조강선(操江船)은 본래 비교적 작은 데다가 또한 이홍장 중당을 안휘성으로 호송하러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이외에 문선(蚊船)이 있는데, 크기가 작고 대포만 큰데다가 한 척에 겨우 대포 1문뿐으로 항구를 지키는데 쓰이는 용도입니다. 장수성은 이미 강해관(江海關)의 소우렴(邵友濂) 도대(道臺)에게 전보로 부탁하여 남양대신(南洋大臣)에게 보고를 올려 등영주(登瀛洲), 어견(馭遣) 군함 두 척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오장경이 천진에 와서 협의를 마치면 즉각 남양대신에게 연대로 보내달라고 전보 자문을 보내고, 아울러 초상국(招商局)에도 지시하여 윤선(輪船)의 적재를 준비하여 모자랄 경우 대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때가 되면 한편으로는 계획대로 처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접을 갖추어 상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일 공사관의 여서창에게도 역시 지시에 따라 전보로 부탁하여 수시로 전보를 보내 알려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삼가 답장을 보내며, 편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광서 8년 6월 22일, 진해관도 주복과 조선 영선사 김윤식의 문답 필답」: 이하응은 통상・수호를 반대한다는 구실로 도당을 불러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며, 중국은 속히 1천 명을 파견해야만, 반란을 진압하고 아울러 일본의 협박과 간섭을 막을 수 있습니다.
 
1) 「광서 8년 6월 22일, 진해관도 주복과 조선 영선사 김윤식의 문답 필담(光緒八年六月二十二日, 津海關道周馥與朝鮮領選使金允植問答筆談)」
주복: “어제 여서창 공사가 전보로 알리길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가 보낸 서신을 받았는데, 그날 왕궁도 동시에 습격당하였다고 하며, 이번 조선에 가는 것은 전쟁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스스로 가진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는 점을 중국 정부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어조가 매주 평정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인의 계책은 확실히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정여창 제독은 현재 이미 다수의 군함을 준비하고 있는데 해양도(海洋島)나 연대(煙臺) 등 각처에 분포하고 있으며, 스스로 세 척을 먼저 이끌고 출발하여 일제히 조선에 도착하면 즉각 상세한 상황을 얻고 돌아와서 총독에게 보고하면 당연히 방법이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김윤식: “스스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즉 스스로를 지키는 권리입니까? 말은 비록 차분하지만, 그 계책은 확실히 예측하기 어려우니, 군함이 이미 각처에서 준비하고 있어 세부 상황을 파악하면 즉각 신속하게 출발할 수 있다고 하여 정말로 다행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복: “권리는 세력에 달려 있으며,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다만 이모(李某)주 001
각주 001)
여기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직접 언급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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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종래 일본인과 몰래 좋은 관계에 있었다는 것 같은데, 이번 거동에서는 공개적으로 일본인을 축출하면서, 은밀히 권력을 찬탈하고자 꾀하니, 일본인의 힘을 빌어 그 사사로이 양위를 받으려는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 군대가 가서 그 죄를 밝히고 토벌하는 것은 약자를 돕고 올바름을 지탱하는 정의로운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과 관련하여, 일본이 혹시라도 이(李)의 무리를 괴뢰로 삼고, 정의를 간사함으로 무고(誣告)하고, 원수를 은인으로 여기게 하여 우리 군대가 손을 써서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일본과 이(李)의 무리가 시비를 뒤섞어 버린다면, 그때 조선의 신민 가운데 정의를 펼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도와준다면 훨씬 쉽게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김윤식: “이(李)의 무리와 일본인이 사이가 좋다는 것은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통상・수호의 조치는 오로지 조선 국왕이 힘써 주장한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 역시 일찍이 호의로 대응하였습니다. 그런데 전국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외교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이모(李某)가 이를 빌미로 삼아 도당을 불러 모으고 인심을 끌어들이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아마도 일본과 음모를 꾸릴 겨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됨은 몹시 사납고 어그러졌지만, 또한 재간이 있으며, 이미 권력을 반역으로 찬탈하였다면 나아가 이웃나라에 아첨하여 호의를 얻고 자기 권력을 굳히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현재는 조선에서 득세하였지만, 각국에서 본다면 실로 잔폭하고 무도한 민적(民賊[獨夫])에 지나지 않아,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아닙니다. 만약 상국에서 그 죄를 드러내어 토벌하려 한다면, 명분이 없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으며, 오합지졸인 그의 무리들이 어찌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분노를 느끼고 있으니, 결코 그를 도울 리 없습니다.”
주복: “듣기에 이최응(李最應)은 일본과 친밀하다는데, 그렇습니까?”
김윤식: “이 사람은 아무런 주장도 없으며 그의 아들 이재긍(李載兢)은 나이는 적지만 식견을 갖추고 있으며 외무에도 자못 밝습니다. 그의 아들이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일본인을 좋게 대하였고, 여기서 그가 일본과 친밀하다는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지금 그 아들은 이미 죽었고, 이최응은 어디를 따를지 몰라 오로지 척외・척양만을 주장할 뿐인데, 아마 이것은 그 동생(대원군)의 위세를 보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복: “내란을 평정하려면 육군이 있어야만 하는데, 대략 어느 정도의 정예 부대가 있으면 가능하겠습니까?”
김윤식: “제가 본 바로는 저쪽은 새로 권력을 잡았으나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다만 1천명 정도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며, 또 실제 싸울 필요도 없으니, 난당을 탄압하고 왕경(王京)에 주둔하면서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우선 정부에 문서를 보내 놀라지 말라고 깨우쳐주면, 반드시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한성(漢城)에 들어가면 곧바로 그의 저택을 포위하고, 강목왕비(康穆王妃)의 명으로 그 죄를 들어 지목하여 죽음을 내린다면, 명분이 올바르고 언사도 순리에 맞으니, 나라를 위해 해악을 제거하는 하나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주복: “탐방해서 돌아오길 기다려 직예총독에게 비밀리에 보고하고, 군대를 통솔하는 고위 장령에게 알려 이런 취지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다만 최근 10여 일 가운데, 일본 군함은 이미 육군을 탑승시킨 다음 출발하였는데 과연 일본이 능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장차 조선에서 권력을 찬탈하는데도 간여할지도 모릅니다.”
김윤식: “만약 이모(李某)가 권력을 잡았다면, 일본인이 온다고 해도 반드시 먼저 화해를 요청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아마도 소규모 전투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다음에는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는 실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상륙하자마자 직접 한성에 들어가 반란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빌어 국사가 간여하게 되는 일은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누가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중국이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인의 뒤에 서 있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비록 배상금을 물더라도, 조선은 일찍이 이런 사무를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만약 일본인의 요구에 따르면 장차 그 한계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군함이 출발할 때 이런 사무를 잘 아는 사람을 초빙하여 옆에서 도와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비록 서양인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김윤식은 만약 국왕을 폐위하는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그 13세의 어린 손자를 내세워 장숙왕(莊肅王[憲宗])의 계보를 잇게 할 것이며, 이것은 작년에 반역의 무리가 심문을 받을 때 털어 놓은 공초(供招)에서도 나온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별지: 「광서 8년 6월 22일, 조선 영선사 김윤식이 진해관도 주복에게 보낸 서신」: 이하응은 일찍부터 권력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며왔습니다.
 
2) 「광서 8년 6월 22일, 조선 영선사 김윤식이 진해관도 주복에게 보낸 서신(光緒八年六月二十二日, 朝鮮領選使金允植致津海關道周馥書)」
보내주신 글을 잘 받았습니다. 흥선군 이하응(李昰應[昰는 夏의 古字입니다])은 조선 국왕의 본생부(本生父)입니다. 국왕께서 강목왕비의 명을 받아 강목왕통(康穆王統)을 입승(入承)하였는데, 흥선군은 그 부친입니다. 흥인군(興寅君)은 흥선군(興宣君)의 형입니다. 흥선군은 평소에 음모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시도하였는데, (권력을 내놓은 1873년) 갑술년 이래 무리를 모아 음모를 쌓았고 그 형적이 누차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두 차례 왕궁에 불을 질렀고, 혹은 사람을 시켜 국척신신(國戚信臣)의 집에 불을 놓기도 하였는데, 모두가 그가 시킨 것이라 지목하였지만, (국왕의 생부로) 죽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또한 10년 동안 권력을 휘둘렀던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어 아무도 이를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못된 무리들은 그 수가 아주 많은데, 뚜렷하게 그를 옹호하면서 조정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역적의 수괴가 된 이재선(李載先)은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여러 범인이 공초에서 누차 흥선군의 음모를 드러냈지만, 국왕께서는 이를 듣고자 하지 않으셨고 단지 잔당만을 주살하였을 뿐입니다. 생각건대, 작년 반역의 무리를 몰래 세 무리를 나눴는데, 천자호(天字號) 무리는 왕궁을 침범하고 국왕을 폐위하는 일을 맡았으며, 지자호(地字號) 무리는 국왕이 믿는 신하 및 외교에 관련된 관료들을 모두 죽이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봉자호(蜂字號) 무리는 일본인을 쫓아내는 일을 맡았습니다. 일의 기밀이 미리 누설되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지만, 지금 일본 공사를 내쫓은 거동을 보니, 작년에 세웠던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정도로 분명합니다. 만약 난당을 곧바로 흐트려 말살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일은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국왕께서는 왕위를 계승한 이래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였고, 조심스럽게 마음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뚜렷하게 드러난 실덕(失德)도 없습니다. 다만 시국이 크게 변해 외교를 거부하기 어려워졌으므로, 천조의 명을 받들어 조약 체결을 성사시켰으니, 이는 실로 종사를 보전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흥선군은 척화를 의리(義理)로 삼고, 수호(修好)를 매국(賣國)이라 비난하여, 큰 소리를 이를 성토하면서 민심을 선동하여 오늘날의 변고를 낳았습니다. 세 번째 무리의 목표는 이웃 나라 사신의 축출이었고, 첫 번째 무리의 목표는 외교와 관련된 관료를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국왕의 죄상을 밝혀 폐위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는 칼자루입니다. 또한 엎드려 이홍장 중당께서 천조(天朝)의 자소지인(字小之仁)을 체현하여 조선을 보호하면서 내지와 다름없이 대우해 주신 것에 대해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경우라면 응당 감격하여 그 은혜를 뼈에 새길 터인데, 이 흉악한 무리를 돌아보면 이유없이 모욕하고 무리를 지은 못된 무리를 사주하여 누차 국왕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으니, 그럴 때마다 엄격히 징벌하자 원독(怨毒)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해내의 한 모퉁이에서 문을 닫아걸고 살면서, 이것이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꺼려하지 않는 속셈 같습니다. 만약이라도 일단 국왕을 폐위하는 변고가 생긴다면, 설사 곧장 사신을 파견하여 주청하면서 거짓을 날조하여 우리 국왕을 불인불효(不仁不孝)의 죄목으로 얽어맬 것이니, 이를 말하고 생각함에 이르러 정말로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인께서 이런 뜻을 미리 아뢰어 조선 국왕은 아무런 죄가 없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인륜의 변고를 당하게 되었음을 밝혀주십시오. 그래도 흥선군은 국왕의 생부입니다. 그래서 꺼리면서 감히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의 형적이 크게 드러나고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어찌 여전히 몰래 품고 숨기면서 모든 원망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탐방 소식이 돌아오기 전에는 그래도 몰래 읽어보시고 공개하지 않아 주시길 바랍니다.

  • 각주 001)
    여기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직접 언급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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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난당의 수괴가 이하응이며 일본과 맞설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하다는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의 서신과 관련 필담 자료 등 자료번호 : cj.k_0003_001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