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조선의 반란 수괴를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일본대신의 서신과 여서창 등과 일본대가사 주고 받은 첨부 서신
조선에 병변(兵變)이 발생하였고, 일본은 반란 수괴를 징벌하러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현재 조선 국왕은 무탈하며,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7월 13일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6월 4일 삼가 서신 한 통을 보냈는데, 이미 모두 살펴보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중략]주 001 고베(神戶)에서 일을 맡은 중서(中書) 마건상은 통역 업무를 겸임하고 있는데, 스스로 기쁘게 업무를 감당해 내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포형(胞兄)의 병세가 위중하여 세 차례 휴가를 청하여 상해로 가서 살필 수 있게 해주시길 요청하였는데, 그 말속에 슬픈 마음이 절절하여 부득이하게 한 달 동안 다녀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중략] 17일 외무성은 외무대보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를 보냈는데, 일본 주조선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보내온 다음과 같은 전신을 가지고 와서 알려주었습니다.
서력 7월 13일 조선의 난당 수백 명이 갑자기 공사관을 포위해서 공격하였고, 7시간 동안 저항하는 동안에도 구원 병력이 도착할 수 없었습니다. 해당 공사 등 20여 명이 포위를 뚫고 탈출해서 도망쳐 인천에 도달하였고, 또다시 그곳에서 병사들에게 포위 공격을 받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2명, 다친 사람이 여러 명입니다. 다시 도망쳐 해변에 이르러 작은 배 하나를 구해서 남양(南陽)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영국 측 해선을 만나서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여서창은 좋은 말로 그를 위로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다음 날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는 즉시 도쿄를 떠나 직접 현장에 가서 이 일의 처리를 독려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며칠 동안 여론이 분분하여 신속한 처리를 바라는 뜻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군량을 조달해야 한다는 등 전국적으로 떠들썩합니다. 다행히 (일본) 정부로서는 이번 난을 주창한 무리가 일본인들만 곤경에 처하게 한 것은 아니고, 왕궁과 집정에게도 미쳤으니, 그 뜻이 조선 조정의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만 적절한 징벌 처리만을 원하는 뜻을 보인다는 것은 그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리 무기 등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조금도 멈추고 있지 않습니다. 20일 외무성은 영문 서신 한 건을 보내왔는데, 이 사건의 경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이전에 누차 보고드린 대략과 같습니다. 21일 총리아문에서 도원 마건충을 파견하여 군함을 이끌고 가서 조정한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바로 외무경에게 서신으로 알렸고, 외무성에서 답장 서신이 있었으니, 살펴보실 수 있도록 지금 함께 옮겨적어 올립니다. 조선과 미국・영국이 조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논자들은 모두 중국의 속방으로 별 탈이 없는 것을 다행이라 할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을 살펴보니, 당파(黨派)가 화합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조짐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어 미국・영국과 체결한 조약이 비준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자뭇 나오고 있습니다. 즉 한 구석에 있는 조선이 우리 조정에서 대책을 마련하는데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응당 이홍장 중당이 휴가가 끝나면 즉각 출발하도록 독촉해서만 동방의 사무는 비로소 그래도 경영할 여지가 있을 것이고, 바야흐로 옛날 법도만을 곧이곧대로 지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신문지에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전보로 보내 알려 온 내용을 실었는데, 조선 수도의 변란으로 국왕은 무사하지만, 왕비와 세자비, 대신 등 13인이 죽었고, 현재 대원군 집정으로 돌아갔으며, 또 일본 학생 두 명이 죽었고, 체포되어 죽은 사람이 세 명이라고 하니 정말 대란(大亂)이라고 할 만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조선 국왕이 어떤 대처방안을 내놓았는지 듣지 못하였고, 초상국(招商局)에서 파견한 윤선 회원(懷遠)호는 난민(難民)을 실고 20일 요코하마에 도착해서 23일 하코다테(箱館)로 출발하였습니다. 중요한 소식이 있으면 수시로 전보로 알리는 것 외에, 대신께 대신 안부를 전해 주시길 엎드려 빕니다. 이상입니다. 편안하시길 빕니다.
첨부문서:
별지: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에게 보낸 영문 서신」: 일본이 군함을 조선에 파견한 것은 호위를 위함이고, 파견되어 하는 일은 국체(國體)를 보전하는 일입니다.
(1)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가 출사일본대신 여서창에게 보낸 영문 서신(譯外務卿英文信函)」
알립니다.
지금 일본의 주조선 공사관이 최근 습격받은 상황을 살펴보실 수 있도록 보내는데, 그 대략의 상황은 귀 공사께서 이미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정부가 이미 착수한 사안과 아울러 실행하고자 계획하는 사항에 대해 모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습격은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이해의 편의를 위해 부친 전보의 번역을 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하나부사가 보고한 바가 만약 확실하다면, 일본 공사관이 공격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국과 통호(通好)에 우호적인 조정의 신하도 난당의 공격을 받았고 왕궁에도 이어졌으니, 이것이 각국과의 이해와도 관계된 사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확인된 바는 겨우 이 정도이지만, 그 나머지 실상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달려 있으니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번 뜻밖의 사건은 일본 공사관 및 조선 조정 모두 예상치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후에 이 일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여부와 상관 없이 우리 공사와 직원이 백성들의 흉폭한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망쳐서 해안가에 이르러서도 다시 누차 조선의 병사에게 공격을 받았고,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도망쳤습니다. 다행히 영국의 측량선 플라잉 피시호(號)를 만나서 나가사키로 수송해 주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공사관 관원이 도망쳐 화를 피한 것 외에 호리모토(堀本) 중위 등 일본인 9명의 소재를 알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이 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부산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재차 이러한 사건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정부는 군함 세 척을 파견하려고 하였고, 이미 조선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하나부사 공사는 이미 다시 지시를 받고 조선 수도로 복귀해서 조선 조정에게 그들의 백성이 이렇게 흉폭한 난동을 피운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아울러 일본의 교섭 이익, 그 자신 및 일본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별도로 육군 부대 약 300명을 조선에 파견하는데, 일본 정부는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은 부대 병력의 관리관 및 함장 등은 이미 모두 적대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단지 보호 업무와 일본 거류민만 맡고, 아울러 조선인의 침범으로부터 국체를 보전하려는 뜻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우리 정부가 전적으로 우호를 돈독히 하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절대 다른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특별히 실상을 알려드립니다. 현재 군함 파견 및 소규모 육군 부대의 파견은 거짓으로 꾸밀 일이 아니며, 외국인이 일본 정부의 실제 뜻을 깨우치지 못해서 이 조치를 오해할까 걱정됩니다. 응당 귀 공사께서 조속히 이 서신에 담긴 뜻을 귀 정부에 전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혹 그 외에 알고자 하는 것은 본 대신이 대신 처리할 수 있다면 마땅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서창 흠차대신 각하.
이노우에 가오루. 도쿄외무성(東京外務省). 1882년 8월 2일, 즉 광서 8년 6월 19일.
별지: 「주조선 공사 하나부사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전보」: 조선의 난사로 일본이 피해를 입은 상황.
(2) 「주조선 공사 하나부사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전보(高使花房電報)」
이번 달 23일 오후 5시, 조선인 수백 명이 돌연히 몰려와서 공사관을 공격하여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고, 총을 쏘며 불을 질러 공사관을 태웠습니다. 그들에게 저항한 지 7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조선 관군은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 속으로 뚫고 돌파해서 왕궁으로 달렸지만, 성문은 닫혀있어서 하는 수 없이 인천으로 후퇴해서 휴식을 취하던 중 인천부(仁川府)의 병사가 돌연히 다시 들이닥쳐서 우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체포되어 2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일본인 사상자는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포위를 뚫고 제물포(濟物浦)에 도달하여 배 한 척을 구해서 떠났고, 26일 남양(南陽) 앞바다에서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시호를 만나 그 배로 나가사키까지 태워주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비록 부상자는 있었지만, 아직은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아울러 23일 왕궁 및 민태후(閔太后), 민씨 대감의 저택을 습격하였다고 합니다. 인천에 이러한 폭거가 있었으므로, 부산 및 원산도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호위함 이와키(磐城)호가 현재 인천에 정착하고 있는데, 생각건대 부산 역시 군함 한 척을 파견해서 보호 방안을 마련하는 것 외에, 현재 조선 수도의 정부가 어떤 상황인지 조선 국왕에게 일은 없는지를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의 일은 많은 수의 호위함과 호위병을 파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본 공사는 회신을 기다리고 있으며, 곤도(近藤) 서기관, 미즈노(水野) 대위 등 24명은 모두 나가사키에 대기하고 있으며 호리모토(堀本) 중위 외 8명의 소재는 알지 못합니다.
나가사키에서 7월 30일(음력 6월 16일) 오후 12시 30분, 하나부사 요시모토.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 전(殿).
별지: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이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서신」; 조선 흉도가 난동을 일으켜 일본 공사관이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 정부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신속하게 난당을 사로잡아 처리함으로써 화목한 우의를 보전하기를 희망합니다.
(3)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이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서신(覆外務卿井上馨函)」
답장을 보냅니다.
어제 귀 외무경이 보낸 영문 서신 한 통을 받아서 바로 번역해 본 대신이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 조선의 흉도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서 귀국의 공사관을 공격하였으나 미리 막아내지 못하였으니, 실로 우호 관계에 큰 장애가 생겼습니다. 이러한 거동은 우리 정부 역시 결코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이것이 조선 조정의 뜻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본 대신은 이미 보내온 서신의 좋은 뜻을 우리 정부에 전달해 보고하였습니다. 다만 조선이 신속하게 장차 이 난당을 철저히 체포・처벌해서 우의를 온전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본 대신이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이상으로 회신을 마칩니다. 복되시길 바랍니다.
광서 8년 6월 21일, 흠차대신 여서창.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 각하.
별지: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이 일본 서리 외무경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에게 보낸 서신」: 조선 난당이 난동을 일으켜 일본 공사관이 피해를 입었으므로, 중국은 마건충으로 하여금 군함을 이끌고 가서 조정하도록 파견하였습니다.
(4)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이 일본 서리 외무경 요시다 기요나리에게 보낸 서신(致署外務卿吉田淸成函)」
삼가 올립니다.
본 대신은 어제 다음과 같은 북양대신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총리아문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조선에서 현재 이러한 폭거가 있어서 군함 2~3척을 대동해서 도대 마건충을 파견해서 귀국을 위해 이 일을 조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귀 정부에 전달해서 의심을 품지 않게 해주시길 부탁합니다. 이때문에 응당 귀 외무경에게 서신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복되시길 빕니다.
광서 8년 6월 21일, 흠차대신 여서창.
서리 외무경 요시다 기요나리 각하.
별지: 「일본 서리 외무경 요시다 기요나리가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에게 보낸 서신」: 일본은 조선의 난사에 대해 이미 대책을 마련하였으며, 중국의 조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5) 「일본 서리 외무경 요시다 기요나리가 출사 일본대신 여서창에게 보낸 서신(署外務卿吉田淸成覆函)」
답장을 보냅니다. 방금 귀 대신이 보낸 서신을 받았습니다. 어제 북양대신이 보낸 전보를 받았습니다.
총리아문이 보내온 다음과 같은 서신을 받았습니다.
조선에서 현재 이러한 폭거가 있어서 군함 2~3척을 대동해서 도대 마건충을 파견해서 귀국을 위해 이 일을 조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귀 정부의 우의의 두터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우리 쪽은 이미 결정된 입장이 있고, 타당하고 신중하게 처분할 것이므로, 귀 정부를 번거롭게 하고, 다른 나라를 위해 신경 쓰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안으로 답장을 보냅니다. 복되시길 바랍니다.
메이지(明治) 15년 8월 6일, 서리 외무경 요시다 기요나리.
흠차대신 여서창 각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