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부대가 조선에 도착하여 상륙한 상황 등에 관해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게 보낸 문서와 조선 국왕이 보낸 자문 문서 등
조선 국왕의 자문에 대해 적당하게 답장하고 육군 부대가 조선에 도착하여 상륙한 상황을 상주한 주접・편문의 원고를 베껴 보냅니다.
7월 14일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광서 8년 7월 13일 천진의 해관에서 조선 국왕으로부터 받은 자문을 받아서 적당하게 상황에 맞춰서 답장 자문을 보냈다는 주접을 역참을 통해 상주하였습니다. 또한 육군이 조선에 도착해서 상륙한 대략의 정황을 부주(附奏)로 올렸습니다. 응당 베껴써서 자문으로 보내야 할 것이니, 이에 귀 아문에 자문을 보냅니다. 삼가 검토해서 시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첨부: 주접과 부편의 초고[상세한 내용은 15일 군기처에서 전달한 문서를 보라].
첨부문서 :
별지: 「조선 국왕이 보낸 자문」: 조선 난사 상황.
(1) 「조선국왕이 보내온 자문(朝鮮國王來咨)」
삼가 생각건대, 조선은 왕년에 일본과 조약을 맺어 통상을 시작하였고, 올해 정여창, 마건창 두 대인이 임무를 맡아 배를 이끌고 도착하여, 미국・영국・독일 등과 차례차례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것은 미혹함에서 벗어나 생각이 탁 트이게 하는 북양대신의 큰 성의가 아님이 없으니, 어찌 감히 제 마음을 애써 털어놓아 원하는 바를 이루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청수관(淸水館)에 머문 지 6, 7년으로 우애를 돈독히 쌓고 서로 교예(教藝)와 학기(學技)를 교류하면서 당연히 아무런 흠이나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번 달 9일 조선 병민(兵民)이 처음에는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하였다가 갑작스럽게 분노를 터트려, 앞뒤로 선동하고 호응하며 1만 명이 움직여 주택을 파괴하면서 존귀하고 비천함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 기세의 흐름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서 마침내는 (별기군의) 군사 훈련장[教塲]에 난입하여 일본군 교관 이하 3명을 살해하고, 길 위에서 다시 4명을 더 살해하였습니다. 조선 백성 가운데 피살된 사람의 숫자도 아주 많았고, 청수관을 겁략한 다음, 바람을 타고 불을 질러, 건물 안의 사람들을 악착같이 살해하여 총칼이 이르는 곳에 즉시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조선 백성 가운데 사망한 사람이 2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10일에는 뭇 군인들이 상신(相臣) 이최응(李最應)을 덮쳐 살해하고, 나아가 왕궁을 침범하여 곳곳에서 함성을 지르고 돌격하여, 왕비가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고, 재신(宰臣) 김보현(金輔鉉), 민겸호(閔謙鎬)가 동시에 피살당하였습니다. 그날의 상황에서는 난당을 진휘(鎮撫)하는 것이 시급하였는데, 실로 국태공이 친히 총칼을 무릅쓰고 대의로 질책하고 지극한 뜻으로 깨우친 것에 힘입어, 마침내 무지한 병정들이 모두 감동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려 곧장 해산하였습니다. 재앙은 비록 창졸간의 일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게 이렇게 모두 순종하였으니, 어찌 감히 반드시 아뢰는 생각 속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의리를 깃들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유를 이상과 같이 늘어놓아 알리면서, 총독 대인이 조선의 사정을 제대로 살펴 황상께 대신 상주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아울러 총리아문에도 알려주신다면 대단히 다행이겠습니다. 이 때문에 자문을 보내면서, 대신 상주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별지: 「북양대신 장수성이 조선 국왕에게 보낸 답장 자문」: 조선의 난사에 대해 중국은 이미 수・륙 양군을 파견하여 보내 원호(援護)하기로 하였습니다.
(2)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자문의 초고(咨復朝鮮國王文稿)」
답장 자문을 보냅니다.
6월 11일, 다음과 같은 귀 국왕의 6월 19일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생략. 바로 앞 1의 내용과 동일]
본 서리 북양대신은 이상과 같은 자문을 전달받았습니다. 조사해 보건대, 조선의 6월 초9일 사건은 본 서리 북양대신이 일찍이 그 대강의 상황을 듣고 계속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 바로 조정에 상주하여 알리고 우선 북양수사(北洋水師)를 통령(統領)하는 제독 정여창과 이품함 도원 마건충을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윤선 군함을 운행하여 6월 25일 인천에 도착하여 모든 사정을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윽고 황상께서 번복에 대단히 심각한 변란이 발생한 것을 염려하셔 육군과 수군을 보내 지원하도록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본 서리 대신은 이미 이에 따라 군함을 불러 모으고 광동수사제독 오장경을 상주・파견하여 먼저 정예 부대를 통솔하여 신속하게 조선에 건너가도록 하였으며, 현재 선후하여 이미 귀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자문을 받아보건대, 국태공이 당일 스스로 총칼을 무릅쓰고 순식간에 반란을 진압하고 흉도를 해산하였다고 합니다. 본 서리 대신은 몹시 이에 감탄하고 위안을 느껴 바로 황상께 대신 상주를 올려 전달하였으니 또한 반드시 황상께서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귀 국왕은 천조(天朝)의 봉식(封植)을 받아 동쪽 영토를 지켜왔는데, 이번에 내란이 일어나 위로는 왕궁을 침범하고 게다가 일본인을 해치기까지 하였으니 응당 스스로 분별하여 조사・처리하고 기강을 바로잡아, 영원히 강산을 분봉한 천조의 은총이 바뀌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오장경 제독 등이 천자(天子)의 명을 받아 가서 진무(鎮撫)하려 하니, 그 부대가 한성의 교외에 도착하면 귀 국왕은 응당 나와서 조명(朝命)을 받들어야 할 것이며, 국태공 역시 환락과 우환을 같이 하는 처지로 정성을 다해 보조해야 하므로, 역시 응당 몸소 중국 군부대에 와서 사후 처리 문제를 오장경 제독 등과 함께 상세하게 상의하여, 작은 나라를 어여삐 여겨 환난을 구휼하는 황상의 지극한 뜻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사정을 대신 상주하고, 아울러 총리아문에도 자문으로 통지하는 것 외에, 응당 귀 국왕에게 답장 자문을 보내야 하니, 번거롭더라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광서 8년 7월 13일 답장 자문을 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