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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내란 및 일본의 조선 출병에 대한 정여창의 보고에 대해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관련하여 첨부한 보고 문서

정여창이 조선의 내란 및 일본의 조선 출병 사실을 직접 보고하였습니다.
  • 발신자
    署理北洋大臣 張樹聲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7월 2일 (음)(光緒八年七月初二日) , 1882년 8월 15일 (光緒八年七月初二日)
  • 문서번호
    4-3-01(505, 788b-792b)
7월 2일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지난달 28・29일 삼가 직자 22・23호 서신 두 통을 (총리아문에) 보냈는데, 분명 이미 선후하여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오늘 저녁 무렵 정여창 제독이 조선에서 위달호(威達號) 군함을 타고 천진으로 항해하여 돌아와 모든 것을 직접 구두보고를 하였습니다. 정여창 제독과 마건충 도대는 6월 27일 조선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일본은 단지 군함 1척만 (우리 측보다) 앞서 항구 안에 미리 도착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난당(亂黨)이 일을 일으킨 이유는 이하응(李昰應)이 군대의 봉급 삭감을 구실로 삼아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제창하였기 때문으로, 왕비를 독살하고, 상신(相臣)과 재신(宰臣)으로 피살된 사람이 5명이고, 외교 사무에 관련된 문무 관신(官紳)이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국왕은 궁내에 감금되어 내외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같은 날 피해를 당해 한양에서 피살된 사람이 7명, 인천에서 피살된 사람이 6명이며, 조선 백성들은 모두 산속으로 도피하였습니다.
항구에 상륙하여 소식을 탐방해 보니, 가까운 관청이나 항구 근처의 각 관리가 배에 몰려와 서 호소하는 것이 대략 서로 들어맞았습니다. 이하응은 군주의 측근을 깨끗이 한다는 명문으로 대권을 훔쳐잡았지만 그래도 감히 사나운 모습으로 국왕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새로 국정을 넘겨받아 밖으로는 중국에서 문책하는 군사를 보낼까 두려워하고, 안으로는 각 도에서 일어나 는 의거(義擧)를 막기 위함으로, 지금은 바야흐로 심복들을 불러들여 등용하고 각처의 수신(守臣)으로 삼아 그 지원 세력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세력이 아직 굳건하지 못한 틈을 타서 대규모 병력으로 군림하면 뭇사람의 마음은 십중팔구 돌아설 것입니다만, 넘볼 수 있는 틈을 찾아 이하응을 사로잡은 다음에야 조정의 일에 비로소 착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함은 앞뒤로 모두 3척이 도착하였고 육・해군 병사가 1,200명으로 육군은 아직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정여창 제독이 도착하였을 때 일본 군함의 제독은 먼저 사절을 보내 성의를 보이고 대포의 포신을 올려 예의를 표시하였으며, 피차간에 인사를 나눈 다음 그 상황을 살펴 보니 아직은 공공연하게 중국과 충돌을 낳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난당 역시 반드시 일본과 소통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니, 지금 이때 우리 군사가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위엄을 세워 잠재적인 우환을 미리 제거하는 계책으로 삼는 데 모든 게 달려 있습니다. 다행히 총리아문에서 신속하게 대계를 세우고 조정에서 내려주는 군사 지시를 받들어 신속하게 일 처리에 나선다면 당연히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여창 제독으로 하여금 내일 아침 즉시 윤선(輪船)을 출발시켜 오장경의 군대와 함께 동쪽으로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이노우에 가오루는 아직 조선에 도착하지 않았으며, 정여창 제독이 돌아올 때 본 선박에 혹시 그가 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건충 도대의 보고와 정여창 제독이 올린 「일본이 현재 조선에 보낸 군함・상선 및 육・해군 병력 목록」은 모두 그대로 베껴 참고하시도록 올립니다. 이만 마칩니다. 편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마건충 도대가 조선에서 보내온 보고」.
 
(1) 「마건충 도대가 조선에서 보내온 보고(馬道建忠自朝鮮來禀)」 (6월 28일 발송, 7월 1일 저녁 도착)
삼가 보고를 올립니다.
저[도대 마건충]는 전 25일 연대의 배 위에서 삼가 보고서를 한 번 올렸는데, 이미 살펴보셨을 줄 압니다. 곧바로 다음 날 세 시쯤 윤선이 출발하여 동쪽으로 향하였고, 27일 밤 9시쯤 한강의 월미도(月尾島)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는데, 일본 군함 1척이 이미 항구 안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어윤중이 초용(超勇) 쾌선(快船)에 타고 있어 즉시 사람을 보내 우리 배로 오게 한 다음 사람을 파견하여 연안 근처 화도(花島)의 별장(别將)이 있는 곳에 보내 확실한 상황을 탐방하게 함으로써, 기회를 살펴 조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윽고 돌아와 보고한 각 내용에 의하면 아마도 사세(事勢)가 아직은 몹시 급박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뒤이어 다음 날 아침 다시 어윤중이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조선의 상황을 더욱 탐색해 보니 국세가 한번 뒤집혀 정말로 통곡할 만한 일이고, 반란을 창도한 사람은 따로 있으며, 외교에 관련된 조정의 신하는 거의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천 부사 역시 약을 받아먹고 죽었으니, 나머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뒤이어 신임 인천 부사가 군교(軍校) 및 화도별장(花島别將)을 파견하여, 선후하여 제 배에 와서 필담을 나누었습니다. 이들 군장(軍將)은 모두 흰색 소복을 입고 있었으며 문답을 나눌 때 비록 반란을 창도한 사람이나 왕비와 각 대신이 피해를 당한 사실을 직접 지적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이 토해놓는 말에는 이미 어윤중이 서신에서 보내온 말과 딱 들어맞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어윤중에게 전달하여 배로 와서 필담을 나누자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요새 다시 사람을 시켜 탐방하여 대강의 윤곽을 파악하였습니다. 초9일의 일은 국왕의 생부 흥선군 이하응이 무리를 이끌고 난을 주도하여 직접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겁살하고, 대왕대비[太王妃]를 핍박하였습니다. 국왕은 비록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감금되어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며, 취향이 다른 대소 문무 관원을 수색하여 죽이는데, 외교에 관련된 사람은 거의 몰살당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산속으로 도망쳐 피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공사관의 참찬 곤도 마스키(近籐真鋤)주 001
각주 001)
곤도 마스키(近藤眞鋤, 1839~1892)는 1870년 영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5년 후에는 관리관(管理官)으로서 부산관리청(釜山管理廳)에 부임하고, 다음 해 부산영사보(釜山領事補)가 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부산항 재류영사 겸 판사(在留領事兼判事)가 되었다. 1882년에는 경성재근서기관겸판사보(京城在勤書記官兼判事補)가 되었는데, 임오군란을 만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과 함께 인천으로 도피하고 영국 측량선의 구조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 8월 다시 조선에 온 곤도는 하나부사와 함께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이후 갑신정변 때에는 교섭을 위해 외무권대서기관(外務権大書記官)이 되어 이노우에 가오루 전권대사와 함께 조선에 와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1888년 조선 주재 대리공사가 되었으며, 1891년 신병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음 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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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와서 방문하였는데, 또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하응은 병사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왕비를 보러 가서 독약을 먹여 시해하였습니다. 지금은 대권을 홀로 틀어잡고 극히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제가 엎드려 조사해 보건대, 이번 달 21일 등에 조선 영선사 김윤식이 진해관도 주복에게 보낸 서신 및 필담 등에서 이르기를 “이하응이 무리와 결탁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도모하여 반역의 흔적이 오랫동안 뚜렷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다시 어윤중이나 군장 및 곤도의 말을 들어보면, 초9일의 변란은 이하응이 군주의 측근을 깨끗이 한다는 명분을 빌어 국왕의 지지 세력을 제거하고 서서히 국왕의 지위[藩位]를 엿보고 있다는 점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릇 조선 국왕 이희(李熙)는 분명히 우리 중국 대황제께서 책봉하여 조선의 주인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지금 이하응이 감히 국왕이 사사로이 모시는 귀한 신분이라는 점을 믿고, 왕비를 죽이고, 국왕을 감금하였으니, 그 방자하게 아무것도 꺼리지 않는 마음을 이미 대략 살필 수 있습니다. 감히 급작스레 국왕을 폐위하지 못하는 것은 인심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병력을 모이지 않았음을 헤아려 조금 일이 지체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중국이 대략 관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속하게 쳐서 진압하지 않는다면, 그 폐해는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총독께서 지닌 권력으로 독단을 내려, 한편으로는 상주를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군 6개 영을 동원하도록 지시하시도록 제가 간청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즉 천진에 있는 위원(威遠), 누운(漏雲), 태안(泰安) 군함 및 초상국 윤선을 동쪽으로 보내 신속한 우레와 같은 기세를 타고 직접 왕경인 한양으로 치달아 반역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으면, 저들 반란의 무리는 제대로 배치가 정해지지 않아 두루 방어하기 어려워서 마치 썩은 마른나무처럼 부러질 것입니다. 당연히 거꾸로 계산해 보아, 만약 반드시 국왕의 옥새가 찍힌 문서나 신민(臣民)의 연명 고발장[公狀]이 있어야만 군사를 파견하도록 황상께 주청할 수 있다고 한다면, 즉 내외가 격절(隔絶)되어 있고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여 조영하(趙甯夏) 등에게 편지를 보내고, 김홍집(金宏集) 등으로 하여금 지지하는 신민(臣民)을 모아 후원을 요청하는 연명 고발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라면, 조영하 등은 이미 존망(存亡)을 점치기 어려운 상태이고, 현재 이하응은 대권을 독차지하여 연도의 관문이나 성문 내외에 진실로 그 심복들을 두루 배치하지 않음이 없으니, 기밀이 누설되어 여러 신하의 죽음을 재촉하게 될 뿐 아니라 반란의 무리가 미리 소문을 듣고 미리 방비하게 될 것이므로, 장래 문제 처리는 반드시 더욱 성과를 거두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제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않고 신속한 군사의 파견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다만 인천, 남양 등의 항구는 한성과의 거리가 겨우 100리이고, 도처가 모두 산이라서 난당이 쉽게 잠복할 수 있으니, 진군할 때 반드시 걸음걸음마다 영루(營壘)를 만드는 것처럼 신중하게 차근차근 전진하여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하면, 선발대가 능히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병력의 숫자는 적어도 6개 영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6개 영을 급히 조달할 수 없다면, 가까이에 있는 어떤 군대에든 요청하여 신속하게 출발할 수 있는 부대를 골라 먼저 창・포대(槍・砲隊)를 각 1개 영씩 신속하게 조선에 보내도록 지시하여 먼저 해안을 점령하게 하면, 이후에 각 영이 모두 집합하였을 때 나아갈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또한 총리아문과 서신으로 상의하여 남양(南洋)의 군함 2척을 전보로 조달함으로써 군량을 운반하게 하고 아울러 위세를 부풀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각 부대에서 사용할 탄약 역시 군계소(軍械所)에 지시하여 각기 뽑아서 운반하게 해 옴으로써 군수 지원을 편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일이 아주 다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첫째는 난당이 날로 늘어나 신속한 박멸이 어려워질까 걱정해서이고, 둘째는 일본의 하나부사 요시모토나 이노우에 가오루가 며칠 안에 군함을 이끌고 한강에 대규모로 집합하게 되는데, 만약 그때 중국이 아무런 거동도 보이지 않는다면 저들은 반드시 대규모 병력을 한성으로 먼저 보내 스스로 조사와 처벌을 실행하게 될 터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 국내는 반드시 먼저 그 피해를 입고 앞으로도 일본이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사나운 이웃 국가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드러낼 것이며, 중국의 지원이 미치지 못해 혹시라도 속국이 이를 한심(寒心)하게 여기게 되면 번복(藩服)은 장차 이로부터 더욱 쇠락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위세 역시 이 때문에 조금은 훼손될 터이니, 시기를 놓치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본래 군함을 타고 천진으로 돌아가 직접 훈시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으나,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이 곧장 도착할 것이라 여기에 머무르면서 기회를 엿보아 대응하고 유도하여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게 하면서 우리 군대를 기다리고, 또한 계속하여 조선 국내의 상세한 상황을 염탐하고자 합니다. 이에 정여창 제독이 윤선을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 총독께 개괄적으로 보고를 올리고 상의할 터이며, 이 보고서에서 다하지 못한 말은 모두 그가 대신 직접 구두로 아뢸 것입니다. 이상으로 조선국 사정이 위급하여 응당 신속하게 군사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삼가 보고서를 갖추어 아뢰면서, 정말로 절박하게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각 부대가 조선에 도착한 다음에도 제가 여전히 군중에 남아 도울지 아니면 곧장 천진으로 돌아갈지에 대해서도 모두 총독의 지시를 기다려 삼가 따르고자 합니다.
 
첨부합니다.
보고서를 마치기도 전에 일본 군함 2척이 다시 도착하였는데, 위에 많은 수의 군인을 싣고 있으며, 계산해 보면 정여창 제독이 천진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반드시 6일이 걸리니, 이 동안 단지 두 척의 (중국) 군함만 정박하고 있는 것은 성세(聲勢)가 몹시 단촐하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도착할 때 혹시라도 우리를 가볍게 협박할 뜻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니, 각 부대에게 신속하게 조선에 도착하도록 지시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요컨대, 오늘날의 일은 하루가 빠르면 하루의 공로를 더욱 거두고, 하루가 늦어지면 하루의 폐해를 거듭 입게 됩니다. 제가 번봉을 고휼(顧卹)하고 국체를 보전하기 위한 시각에서 부지불식간에 너무 말을 급박하게 하였으니, 엎드려 살펴 양해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에 삼가 보고서를 올리면서 편안하시길 청하면서 엎드려 살펴봐 주시기를 빕니다.
 
다시 첨부하여 보고합니다.
저녁 6시 무렵 신임 인천 부사 임영호(任榮鎬)가 배에 와서 필담을 나누었습니다. 물어보니 십년 동안 산야에 머물다가 대원군[國太公]에게 기용된 사람이라 이하응의 무리임을 알았으므로, 사람을 파견하여 밤을 도와 한성으로 가서 집정(執政)에게 비밀리에 고하여 신속하게 고위 관원을 이곳으로 파견하여 일본 문제를 함께 논의하자고 지시하였습니다. 지금의 집정은 바로 이하응입니다. 만약 사람을 파견하여 보내겠다면 반드시 그 심복일 것이고, 지금 한성의 소식이 불통인데 그 무리가 오게 되면 조금이라도 그 동정을 엿볼 수 있고, 또한 일본과의 문제를 조정한다는 구실을 빌어 달콤한 말로 속여 은혜를 베푸는 척하면 혹시라도 의심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며, 장래에 일 처리도 역시 좀 더 쉬워질 것입니다. 이 때문에 또 보고를 올리며, 다시 편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정여창 제독이 구두로 보고한 일본 군함이 선후하여 조선에 도착한 시기와 인원수 목록」.
 
(2) 「정여창 제독이 구두로 보고한 일본 군함이 선후하여 조선에 도착한 시기와 인원수 목록(丁提督面呈日本兵船先後到朝日期·人數淸摺)」
일본이 현재 조선의 인천에 보내 정박시킨 군함과 상선 및 육・해군 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함 곤고(金剛)[4톤반 大砲 1문, 2톤 邊砲 6문. 수병 200명. 6월 27일 인천 도착]. 해군 장교 2명[東海鎮守府 司令長官, 海軍少將 正五位勲三等 仁禮景範. 船主 海軍大佐 從五位勲五等 相浦紀道]
군함 나이신(乃申)[砲位는 金剛 함과 같음. 수병 200명. 6월 28일 인천 도착]. 해군 장교 1명[船主提守備 西拏盖阿]
상선(商船) 우마지(馬路)[육군 800명 탑승. 28일 인천 도착]
29일, 위원(威遠)함이 회항할 때 멀리서 일본 함선 1척이 다시 항구에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각주 001)
    곤도 마스키(近藤眞鋤, 1839~1892)는 1870년 영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5년 후에는 관리관(管理官)으로서 부산관리청(釜山管理廳)에 부임하고, 다음 해 부산영사보(釜山領事補)가 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부산항 재류영사 겸 판사(在留領事兼判事)가 되었다. 1882년에는 경성재근서기관겸판사보(京城在勤書記官兼判事補)가 되었는데, 임오군란을 만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과 함께 인천으로 도피하고 영국 측량선의 구조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 8월 다시 조선에 온 곤도는 하나부사와 함께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이후 갑신정변 때에는 교섭을 위해 외무권대서기관(外務権大書記官)이 되어 이노우에 가오루 전권대사와 함께 조선에 와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1888년 조선 주재 대리공사가 되었으며, 1891년 신병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음 해 사망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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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내란 및 일본의 조선 출병에 대한 정여창의 보고에 대해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관련하여 첨부한 보고 문서 자료번호 : cj.k_0003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