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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이하응(李昰應)을 유도하여 구금해서 조선의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주일본 공사 여서창이 보낸 전보 등 첨부 문서

응당 방법을 마련하여 이하응을 유금(誘擒)하여, 신속하게 조선의 반란을 진압해야 합니다.
  • 발신자
    署理北洋大臣 張樹聲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7월 6일 (음)(光緒八年七月初六日) , 1882년 8월 19일 (光緒八年七月初六日)
  • 문서번호
    4-3-02(511, 796b-805a)
7월 6일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이번 달 1일 밤 삼가 직자 24호 서신을 보냈는데, 이미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2일에는 직자 687호 비밀 서신을 받았습니다. 조정의 일을 헤아려 준비하고 지극히 주도면밀한 지시를 내려 주시는 것을 우러러 받들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탄복하는 바입니다.
이하응은 몸소 반군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죄는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다만 조선이 이번 내란을 겪으면서 기둥이 될 인재들이 거의 모두 제거되어 한 가닥의 국맥(國脈)은 오로지 국왕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만약 지나치게 압박을 가하면 멋대로 눈을 부라리는 그 성격으로 보아 혹시라도 다른 변고[즉 국왕 시해]를 자극할 지도 모르며, 그때 가서 설사 따로 후계자를 세우더라도 지금처럼 현명한 국왕을 얻기는 쉽지 않으며, 또한 원기(元氣)가 더욱 손상되어 떠받치는 데 더욱 큰 힘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장경, 정여창 두 제독이 조선에 갈 때 저[장수성]는 이들과 심사숙고해 보니, 예상컨대 대규모 병력이 조선에 도착하여 중국의 위엄으로 뒤흔든다면 이하응은 아마 감히 그 완강함을 멋대로 하지 못할 것이니, 즉각 방법을 마련하여 그를 유인하고 감금하는 문제에 대해 황상의 결정을 주청하고자 합니다. 일단 이하응을 잡게 되면 그 무리는 쉽사리 흩어지고 국왕이 중국이 진무(鎭撫)해 주는 힘을 빌려 서서히 사후 대책을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만일 이하응이 깊이 틀어박혀 굳게 저항한다면 중국 군대의 전진은 결코 움추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진군할 때의 요령은 능숙하게 두루 살피면서 특히 일본인의 동향을 옆으로 살펴보아야 하므로, 결국 반드시 강 하구에 주둔하여 수군과 함께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런 다음 차츰차츰 진군・주둔하면서 확실한 승리의 기반을 세우는 것입니다. 혹은 북을 치면서 진군하여 신속한 우레와 같은 기세를 취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현장에서 상황을 헤아려 실행하는 것이지 멀리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군이 이미 저쪽에 상륙해 있어 우리 군대가 전진하는 것을 보면 혹은 멋대로 의론(議論)으로 시비를 걸거나, 아니면 사사건건 우리를 따르거나 모방할 수도 있는데, 모두 반드시 그런 일은 없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조선은 중국의 속방으로, 정치는 비록 종래 자주(自主)해 왔지만, 국가의 내란은 당연히 이를 위해 중국이 대신 평정해 주어야 하며 일본이 간여할 수는 없으니, 아울러 이미 도대 마건충과 제독 오장경에게 서신으로 상세하게 당부하여 적절하게 상의하여 대응하도록 하였습니다. 어제는 또한 총리아문의 서신을 베껴 그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하여 그대로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현재 이렇게 모든 문제에 대처하도록 준비하고, 또한 다행히 총리아문의 지휘를 받아 거기서 어긋나지 않게 하였으나, 사기(事機)의 득실(得失)이 관련된 바가 큰데 스스로 돌아보면 몹시 용렬(庸劣)한 데다가 또한 다시 쇠병(衰病)이 점차 진행되어 온 힘을 다해 버텨보지만 마치 깊은 연못을 앞두고 얇은 얼음을 밟고 있는 것처럼 두려움이 날로 깊어집니다.
이상의 모든 관련 사무 각 건과 온갖 조치에 대해서는 비록 수시로 베껴서 이홍장 중당(中堂)에게 신속하게 전달하여 그 검토와 답장을 요청하고 있지만,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주 001
각주 001)
당시 이홍장은 모친상으로 직예총독의 자리를 장수성에게 넘겨주고 고향인 안휘성 합비로 돌아가 상을 치르고 있었다. 광서 8년 3월 2일(1882년 4월 19일) 모친이 사망하자 이홍장은 예법에 따라 종제(終制)를 위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청 황실에서는 시국의 어려움과 북양대신 업무의 중요성을 이유로 100일의 휴가를 허가하였다.(「懇請終制摺」, 『李鴻章全集』10, pp.66-67.) 이홍장의 휴가 동안 양광총독(兩廣總督) 장수성(張樹聲)이 서리북양대신(署理北洋大臣)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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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응이 미치지 않고 제대로 되지 않을까 때로 우려하였는데, 지금 조정의 지시를 받아 신속하게 움직이게 되었으니 실로 대국(大局)을 위해 큰 행운이라 하겠습니다. 앞으로 조선에 진출한 부대의 보고를 받으면 응당 한편으로는 총리아문에 비밀 서신으로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홍장 중당에게도 알리겠습니다. 주일 공사 여서창이 보낸 비밀전보의 암호해독법[加字法]을 알려 주시면 삼가 비밀리에 보존하면서 사용하겠습니다. 어제 여서창 공사가 보낸 비밀전보를 받았는데, 암호를 알지 못해 그 내용을 해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전보로 물어서 오늘 저녁에 와서야 다시 답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삼가 마건충 도대가 조선에서 부쳐온 필담 1책을 열어보고 베껴서 살펴보실 수 있도록 올리는 바입니다. 삼가 답장을 드립니다. 편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주일본 공사 여서창이 보내온 전보」: 1) 대원군을 사로잡고 난당을 주살(誅殺)한 다음 일본인과의 교섭을 처리해야 합니다. 2) 일본이 이미 에노모토 다케아키(夏本武揚)를 주중국 공사로 파견하였습니다.
 
1) 「주일본 공사 여서창이 보내온 전보(出使日本黎大臣來電)」(7월 3일 도착)
사태의 진상을 알립니다. 일본군은 계산해 보건대 일찌감치 인천에 도착할 것인데, 그 거동이나 추가 파견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며칠 내에 당연히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왕비와 세자비 독살은 모두 대원군의 음모이니,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권력을 찬탈한 것입니다. 우리 육군이 곧바로 대원군을 사로잡고, 난당을 주멸한 이후에 일본과 (사후 처리 문제를)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해군 중장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주중국 공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제가 다시 [지난번 직예총독께 보낸 전보를] 조사해 보니 제1・제4 두 글자가 원래 암호[碼號]에 착오가 있었고, 제73번 글자는 새 방법에 따르면 비어 있어 글자가 없는 것인데, 역시 암호의 착오가 있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별지: 「마건충과 어윤중이 위원 함에서 나눈 필담」: 인원을 파견하여 화도의 소식을 염탐하게 하였습니다.
 
2) 「마건충과 어윤중이 위원 함에서 나눈 필담. 27일 밤 10시쯤, 배가 한강 하구에 닻을 내린 다음 어윤중이 와서 필담을 나누었습니다(馬建忠與魚允中威遠筆談. 二十七日夜十㸃鐘, 舟至漢江口下椗後, 魚允中來威遠筆談)」
마건충: “오늘 저녁 여기에 정박하였는데, 사람을 보내 상륙시켜 화도(花島)에 가서 다음 사항에 대해 착실하게 탐문하고, 밤을 새더라도 돌아와 보고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
어윤중: “삼가 당연히 지시한 대로 탐문하겠습니다. 다만 화도는 일개 보(堡)에 지나지 않아 그곳을 관장하는 사람 역시 지위가 낮은 사람이고 아마 사실을 탐문하기 어려울 터이므로, 한 사람을 한성으로 보내 직접 탐문할 생각입니다.”
마건충: “화도에 가서 염탐하는 것은 그 대략을 알려줄 뿐이지만, 우리가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상세한 것은 당연히 한성에 들어가 탐문하는 쪽이 옳을 것입니다. 현재 이미 삼판선[舢板]을 갖추라고 지시하였으니, 밤낮을 가리지 말고 즉시 한 사람을 화도에 보냈으면 합니다.”
어윤중: “조선 사람 외에 따로 중국 사람이 한 명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마건충: “자연히 이 점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하(어윤중)께서 직접 가실 필요도 없고, 이(李) 모를 먼저 보낼 수도 있는데, 삼판선은 포구에서 머무르며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반드시 오늘 밤에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어윤중: “이(李) 모군에게 곧장 가서 탐문하라고 부탁하겠지만, 삼판선보다는 소화륜(小火輪)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연안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오가는 것이 반드시 지체될 것입니다.”
마건충: “화도는 연안에서 불과 5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소화륜은 소리가 너무 커서 몇 리 밖에서도 들리니 쉽사리 놀람과 의심을 낳기 쉽습니다. 그래도 삼판선을 타고 가서 탐문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별지: 「마건충과 어윤중이 위원 함에서 나눈 필담」: 인원을 화도에 파견하여 염탐한 조선의 내란 및 일본의 출병 상황.
 
3) 「마건충과 어윤중이 위원 함에서 나눈 필담. 27일 밤 두시, 어윤중이 화도에 사람을 보내 각 사항을 탐문한 다음 위원함에 와서 나눈 필담(馬建忠與魚允中威遠筆談. 二十七日夜兩㸃鐘, 魚允中遣人至花島探悉各節後來威遠筆談)」
마건충: “국왕은 현재 어디에 계십니까? 무고하십니까?”
어윤중: “국왕은 현재 한성에서 안전하게 계십니다만, 왕비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마건충: “정세를 주도하는 신하는 누구입니까? 국왕과는 의견 차이가 어떻습니까?”
어윤중: “누가 정세를 주도하는 신하인지는 아직 상세하게 확인할 수 없으며, 응당 탐문해야 할 것입니다.”
마건충: “초9일 난당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은 어떠하며, 그것을 주도한 사람은 누구이고, 이후 다른 곳에서도 좋지 않은 움직임이 있었습니까?”
어윤중: “난당은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며, 병량(兵糧)을 제때 지급하지 않아 일어난 것으로, 상신(相臣) 이최응(李最應), 재신(宰臣) 김보현(金輔鉉)과 민겸호(閔謙鎬) 등 5명을 살해하고, 뒤이어 유민(游民)들이 천연정(天然亭) 부근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주 002
각주 002)
1880년 개설된 일본 공사관이 설치된 곳은 도성 밖 옛 경기중군영(淸水館) 자리로 현재의 서대문역과 독립문 사이의 중간쯤이다. 인근에는 무악재를 오가던 관원의 휴식 공간으로 서지(西池)라는 연못과 그 부속 건물로 천연정(天然亭)이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천연정은 일본 공사관을 가리키는데, 반란군이 불을 지른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몰려오자 하나부사 일본 공사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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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6명을 살해하였으며, 일본인이 인천으로 도피하자 병졸들이 쫓아가 다시 6명을 살해한 다음에야 진정이 되었습니다. 다른 곳의 좋지 못한 움직임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마건충: “일본 군함은 언제 입항하였습니까? 지금 어디에 정박하고 있습니까? 병력의 수는 얼마고, 이미 상륙하였습니까? 국왕이 사람을 파견하여 이들과 논의한 적이 있습니까? 일본 사신 이노우에 가오루는 도착하였습니까? 지명해서 조사・처리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어윤중: “일본 군함 1척은 24일에 도착하였다가 곧 돌아갔습니다. 오늘 다시 1척이 입항하였는데, 병력은 90여 명으로 두 군데[花島와 甲串津]에 상륙하였고, 진장(鎮將)을 만났습니다. 한성 성 내외에 모두 사관(使館)을 설치하겠다는 뜻을 요청한 것 외에 다른 상황은 아직 상세하게 알 수 없으며, 아직 조사・처리하겠다는 거동은 없다고 합니다.”
마건충: “병졸들이 병량(兵糧)을 제때 수령하지 못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 상세한 내막을 결국 탐지해냈습니까?”
어윤중: “병졸들이 작은 되로 미곡을 지급하는 문제[減斛]로 창리(倉吏)와 말다툼을 벌였는데, 창리가 창당(倉堂)에 호소하자 병사들을 잡아 가두었고, 이에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들고 일어나 소동을 피웠습니다. 피살된 재신(宰臣)은 분명 사람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따로 근본 원인이 있을 터인데, 생각건대 현재로서는 아직 분명한 것은 모릅니다. 일개 진리(鎮吏)가 전하는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려우니 내일 다시 심복을 한성의 친우가 있는 곳에 파견하여 비밀리에 탐문해 보고자 합니다.”
마건충: “내일 누구를 한성에 파견한다면, 제가 서신을 써서 전일(前日)의 대부관(大副官, 김홍집)에게 전달하는 게 어떤지?”
어윤중: “대인께서 서신을 써주시면 반드시 현재의 실세에게 공개해서 그런 다음에야 답변을 얻게 되는데, 그러면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건충: “그렇다면 서신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파견된 사람은 반드시 반란이 일어난 근본 원인과 현재 조선에서의 처리 상황을 탐문하고 신속하게 항구로 돌아와서 북양대신에게 곧장 보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윤중: “삼가 당연히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얼마 전 화도에 파견하여 소식을 탐문하게 한 사람에게 대인이 군함을 이끌고 내항한 것은 조선을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분명히 밝히게 하였습니다. 진리(鎮吏)들은 모두 환호하고 즉시 지방관에게 달려가 알리고자 하였으므로, 그에게 내일 배로 와서 방문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자문(咨文)을 올리는 일은 그에게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마건충: “이 일은 지방관이 왔을 때 다시 상황을 보아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현재 난당에 대해 귀 조정에서는 이미 조사・처리하였습니까?”
어윤중: “병사들이 일본인을 살해한 일은 과연 소문대로이니, 살인한 사람은 죽여야 하는데 물론 당연히 징벌 처리를 받은 다음이겠고, 일본인과 이 문제의 처리를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아직 처리하지 않은 것은 특히 큰 잘못입니다.”
마건충: “일본인 문제의 처리는 반드시 조선에서 조사・처리한 다음에 가서야 다시 사정을 봐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 제가 귀 국왕께 적당한 고위 관원을 파견해 보내 이 일을 논의하자고 요청할 생각이며, 더 이상 지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윤중: “내일 한성으로 사람을 파견해 보낸 다음, 다시 의논을 받들겠습니다만, 일본의 허락 요청에 대해서 조치를 보여주어도 될 것 같습니다.”
마건충: “당연히 상황을 보아서 응답하면 될 것입니다.”
어윤중: “양국이 서로 대치한다면 반드시 중간에서 중재한 다음에야 비로소 서로 어긋나서 좋지 못한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
별지: 「28일 6시쯤 어윤중이 초용함에서 보내온 서신」: 조선의 내란에는 그 반란을 제창한 사람이 따로 있으며, 외교에 관련된 조정의 신하가 거의 피살당하였습니다.
 
4) 「28일 저녁 6시쯤 어윤중이 초용함(超勇艦)에서 보내온 서신(二十八日六㸃鐘, 魚允中超勇來函)」
조선의 상황을 더욱 탐색해 보니 국세가 한번 뒤집혀 정말로 통곡할 만한 일이고, 반란을 창도한 사람은 따로 있으며, 외교에 관련된 조정의 신하는 거의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천 부사 정지용(鄭[志鎔]) 역시 약을 먹고 죽었으니,주 003
각주 003)
당시 인천 부사는 정지용(鄭志鎔)인데, 임오군란을 소식을 알지 못한 채 한성에서 탈출해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인천도호부를 찾아오자 환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후 대원군의 소환을 받자 자결하였다고 일컬어진다. 『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6월 22일 7번째 기사에는 “인천 부사 정지용이 일본과의 화통을 반대하여 장계를 올리고 자살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1934년에 일본 당국에 의해 인천도호부의 옛 자리(현재의 문학초등학교)에 “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가 세워졌는데, 해방 이후 매몰되었다가 2002년 발견되어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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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즉시 가서 방문하려다 남의 이목이 피하고자 가지 못하였습니다. 해가 진 다음 찾아뵙겠습니다만, 또한 세 척 군함에서 제 움직임이 어떤지를 노출하지 않도록 지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을 시켜 상륙하여 소식을 염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상입니다.
별지: 「28일 7시쯤 인천부 장교(將校) 성기연(成箕連)이 배에 와서 필담을 나누었습니다」: 조선의 내란 및 인천부 상황.
 
5) 「28일 7시쯤 인천부 장교 성기연(成箕連)이 배에 와서 필담을 나누었습니다(二十八日七㸃鐘, 仁川府將校成箕連來船筆談)」
마건충: “인천 부사 정[지용]은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성기련: “갑작스레 신병을 얻어 죽은지 이미 8일이 지났습니다.”
마건충: “현재 인천부에는 새로 누가 파견되었습니까?”
성기련: “신임 관원은 임영호(任縈鎬)입니다.”
마건충: “임영호 군은 국왕이 파견한 것입니까? 대원군[李興宣]과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성기련: “부사께서는 오늘 도착하였는데, 듣기에 대원군[興宣君]과 서로 친하다고 합니다.”
마건충: “국왕은 현재 한성에 있습니까? 왕비는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성기련: “조선에 백성의 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건충: “일본인[東洋人]은 몇 명이 죽었습니까?”
성기련: “한성에서 죽은 사람이 7명이고, 인천에서 죽은 사람이 6명입니다.”
마건충: “일본군[東洋兵]이 이미 상륙하였습니까?”
성기련: “어제 1백 명이 인천에 들어왔는데, 일본인이 죽어 묻힌 곳을 찾아본 다음 다시 배로 돌아갔습니다.”
마건충: “즉시 인천으로 돌아가 부사에게 배로 와서 만나자고 요청해 주십시오.”
성기련: “부사께서는 귀 함선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보고를 들어 안 다음에 오실 것입니다.”
마건충: “군함 3척이 순양하다가 여기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별지: 「28일 열 시 반쯤 화도의 별장(别將) 김굉신(金宏臣)이 소복을 입고 방문하여 나눈 필담」: 조선 내란 및 왕비와 집정 등의 서거 상황.
 
6) 「28일 열 시 반쯤 화도(花島)의 별장 김굉신(金宏臣)이 소복을 입고 방문하여 나눈 필담(二十八日十㸃鐘二刻, 花島别將金宏臣素服來謁筆談)」
마건충: “소복을 입은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김굉신: “왕비께서 갑작스레 서거하셨습니다.”
마건충: “왕비는 병으로 서거하였습니까? 아니면 남의 핍박을 받아서입니까? 반드시 사실 대로 답하십시오.”
김굉신: “이달 초 10일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났을 때 놀랍고 두려워서 서거하신 것입니다.”
마건충: “난민들의 소동은 모두 몇 사람이 참여하였습니까?”
김굉신: “이곳 진에 있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건충: “가령 지금 사람을 시켜 국왕에서 소식을 보내면 능히 전달될 수 있습니까?
김굉신: “조금 있으면 지방관 인천 부사가 도착하실 것입니다. 그때 질문하시길 바랍니다.”
마건충: “인천 부사 임영호는 종래 국왕의 신임을 받았습니까?”
김굉신: “인천 부사는 지방관이 응당 해야 될 일을 할뿐, 신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마건충: “한성의 성문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습니까?”
김굉신: “이 일을 인천의 관리에게 물으시니, (답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양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마건충: “대원군[李興宣君]은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듣기에 흥인군(興寅君)은 이미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김굉신: “대원군은 본택에 있고, 흥인군은 확실히 갑작스레 서거하였습니다.”
마건충: “흥인군은 갑작스레 언제 서거하였습니까? 병이 있었습니까?”
김굉신: “흥인군은 이번 달 10일 민란으로 놀라 갑작스레 서거하였습니다.”
마건충: “다른 사람은 모두 놀랍고 두려워 사망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국왕께서는 왜 홀로 무고하였습니까?”
김굉신: “난민은 국왕(國王)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별지: 「28일 아침 11시, 곤도 마스키(近籐真鋤)가 찾아와서 만나 나눈 담화 절략」: 내란의 원인 및 일본 사신의 조선 도착에 대해 먼저 탐방하고 나서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7) 「28일 아침 11시, 곤도 마스키(近籐真鋤)가 찾아와서 만나 나눈 담화 절략(二十八日晨十一㸃, 近籐真鋤來謁晤談節畧)」
마건충: “초9일 귀하께서는 그 일에 같이하고 있었습니까?”
곤도(近籐真鋤): “조선 난병(亂兵)이 갑작스레 공사관에 쳐들어와서, 우리 병사가 막다가 사망한 사람이 7명, 다시 하나부사 공사와 함께 인천으로 도피하였는데 난병이 다시 쫓아 와 우리 병사가 막다가 사망한 사람이 6명이었고, 이 때문에 틈을 타서 조선 백성의 배를 타고 움직이다가 다음 날 다행히 영국의 측량선[量水船]을 만나, 얻어 타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마건충: “적지 않게 놀랐을 터인데, 난병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을 일으켰습니까?”
곤도: “어제 탐문하여 들어보니 병량 삭감 때문에 일으켰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마건충: “왕비는 무슨 연고로 갑작스레 서거하였습니까? 대신도 여러 명 죽었다는데, 도대 체 무슨 연고입니까?”
곤도: “듣기에 이하응은 병사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왕비를 보러 가서 독주[酖酒]를 내놓고 “반드시 이것을 마셔야만 비로소 반란이 없음을 보증할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대신의 죽음이 무슨 연고 때문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현재 이하응은 대권을 홀로 틀어잡고 극히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마건충: “이렇다면 국왕 또한 아마 자주(自主)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부사 공사는 도착하였습니까?”
곤도: “하나부사 공사는 오늘내일이면 도착할 수 있을 터인데, 그다음에는 한성에 가서 (군란의) 연유를 탐색한 다음 다시 논의를 진행할 것입니다. 어제 이미 제가 한성에 서신을 보내, 공사가 며칠 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마건충: “우리 북양대신께서는 이미 도쿄에 주재하는 공사가 보낸 전보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군함을 파견하여 모든 것을 탐방하게 하였는데, 반란의 연유를 세밀히 살펴보니 마침 각국과 조약을 맺은 다음이라 (혹시 그것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닌지)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반란이 발생한 근본 이유를 찾아보고, 다시 조사・처리하고자 합니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응당 방법을 강구하여 국왕을 난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핵심입니다. 하나부사 공사가 여기에 도착하면 제가 응당 가서 만나보고 상의하겠습니다.”
별지: 「28일 밤 12시, 어윤중을 배로 불러서 나눈 필담」: 대원군은 권력을 잃은 것에 분노가 쌓여 몰래 무뢰배를 양성하여 반란의 주모자로 삼았습니다.
 
8) 「28일 밤 12시, 어윤중을 배로 불러 필담을 나누었습니다(二十八日十二㸃, 招魚允中來船筆談)」
마건충: “난당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대략 한두 가지라도 알아냈습니까?”
어윤중: “응당 번쇄함을 피하지 않고 아뢰겠습니다. 국왕께서는 방계[支派] 출신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그 생부[私父]를 대원군이라 부르는데, 평소 성품이 어긋나고 모질며, 재물과 여색을 탐하였는데, 국왕의 대통을 잇게 되자 국권을 독람하여 전횡하면서 제멋대로 남의 재물을 빼앗고 살인을 좋아하며, 또한 일본을 아무 이유 없이 거절하여 거의 전쟁이 날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국왕께서는 단지 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데 지나지 않았고, 신기(紳耆)들 역시 모두 수수방관하며 그 명을 받들어,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크게 늘었습니다. 국왕이 성년이 되어 조정의 정치를 총괄하게 되자 한두 신하가 역시 국왕을 도와서 그 권력을 빼앗고, 모든 폐정(弊政) 역시 남기거나 제거하는 바가 있었으며, 일본과도 옛 화호(和好)를 복구하고, 누차 각국과 연락하여 국맥(國脈)을 유지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 대원군은 권력을 잃은 것에 분노가 쌓여 무뢰배들을 몰래 키워 화란(禍亂)을 꾀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혹은 왕궁에 몰래 화약(火藥)을 감추어 방화한 일도 여러 차례나 있었습니다. 또한 폭발약으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분살(焚殺)하였지만, 국왕께서는 윤상(倫常)에 관련된 일이라, 그를 법으로 처단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 무리만 제거하거나 유도하고 위압한 일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작년 가을에는 과연 무리를 불러 모아 곧장 거사하려 하였으나, 이를 밀고한 사람이 있어, 다행히 난당을 잡아들일 수 있었지만, 역시 이 문제를 끝까지 추궁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대원군은 자신이 죽지 않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믿고 거사를 벌리려고 하면서 뭇사람을 유혹하여 말하길, “척사(斥邪)를 위해서, 외교(外交)를 끊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무지한 백성 가운데 망령되이 이를 믿고 그 앞잡이가 되려는 사람 또한 있습니다. 작년의 역모 사건 같은 경우는 세 무리로 나누어, 한 무리는 왕궁을 직접 습격하고, 다른 한 무리는 자신과 경향이 다른 조정의 신하를 모두 죽이고, 또 다른 한 무리는 일본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번의 거사 역시 작년의 것을 그대로 본받았으니,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은 바로 조선의 흥망이 달린 시기입니다. 만약 저 대원군이 계속 존재한다면 누가 감히 외교를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듣기에 지금 난당은 먼저 국왕이 평소 신임하는 대신(大臣), 재신(宰臣)을 죽이고, 뒤이어 왕궁으로 쳐들어가, 국왕(國王)과 비빈(妃嬪)은 모두 도피하였는데, 대원군은 왕비를 겁살(刼殺)하고, 대왕대비가 돌아오도록 핍박하였으며, 국왕은 비록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감금되어 외조(外朝)와 접촉하지 못하며, 취향이 다른 대소(大小)의 문무 관원을 수색하여 죽이는데, 외교에 관련된 사람은 거의 몰살당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산속으로 도망쳐 피난하여, 나라가 크게 뒤바뀌었습니다, 만약 당장 신속하게 조치하지 않는다면 일본인이 반드시 크게 보복하여, 백성은 도탄에 떨어지고 종사가 무너질 것입니다. 저 대원군 또한 반드시 널리 소총수[砲兵]를 불러 모아 결사적으로 막아내려 할 것인데, 국내의 생령(生靈)이 보전되지 않으면 장차 어찌 나라가 존속될 수 있고 반란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건충: “이러한 사정에 대해 귀하께서는 어디서 확실하게 탐방하였습니까?”
어윤중: “앞의 이야기는 여기서 귀로 들은 바이고, 뒤의 이야기는 더욱 사람을 시켜 탐방한 결과 대체적인 윤곽을 얻었습니다.”
마건충: “지금 사람을 한성에 보내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까?”
어윤중: “내일이면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마건충: “아마 조금 늦는 것 같습니다. 내일 제가 위원함을 천진(天津)으로 보내, 모든 사정을 북양대신에게 보고하고, 조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난당을 박멸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윤중: “은덕에 정말 감동할 뿐입니다.”
마건충: “하지만 국왕의 친필이나 신민이 간절하게 요구하는 연명 고발장이 없어 특히 군대 파견에 명분이 없을까 두려우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윤중: “국왕의 친필은 얻을 수 없습니다. 현재 유폐 중이고, 신민의 연명 고발장 역시 갑작스레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행주(行走)를 맡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터이니, 국왕을 돕고자 하는 신민이라도 죽을 각오가 아니면 어찌 연명 고발장을 쓸 수 있겠습니까?”
별지: 「28일 오후 6시, 마건충이 신임 인천부사 임영호(任榮鎬)와 위원함에서 나눈 필담」: 조선 정부에 신속하게 심복 고위 관원을 인천에 파견하여 모든 것을 상의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9) 「28일 오후 6시, 마건충이 신임 인천부사 임영호와 위원함에서 나눈 필담(二十八日午後六㸃鐘, 馬建忠與新任仁川府使任榮鎬威遠舟次筆談)」
마건충: “귀하는 언제 한성에서 출발하였습니까? 상황은 어떻습니까?
임영호: “22일 밤 본직(本職)을 제수받았고, 26일 폐사(陛辭)를 한 다음, 어제저녁 무렵 인천에 도착하였으며, 한성은 소동이 멈춘 지 오래되었습니다.”
마건충: “귀하는 일본이 현재 대규모 병력을 여기로 파견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귀국에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임영호: “저는 10년 동안 산야에서 지새던 사람으로, 그동안 조선의 정치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는데, 이번에 두 대인께서 멀리서 왕림하시게 하였으니, 정말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마건충: “귀하께서는 산야에 10년 동안 머물렀다고 하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기용되었으며, 과연 누가 기용하였습니까?”
임영호: “임신(壬申. 1872)년 봄 이후 세 차례 내외의 큰 어려움을 겪었고, 저는 지난가을에야 비로소 상복을 벗었는데, 지금 갑자기 대원군[國太公]에게 기용되었습니다.”
마건충: “일본이 이미 군함을 파견하였고, 이제 중국 역시 계속해서 군사를 여기로 파견하여 변동 상황을 지켜볼 것입니다. 귀하께서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밤을 도와 한성에 들어가 집정에게 다음과 같이 비밀리에 알려야 할 것입니다. 신속하게 장기적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응당 한 사람의 고위 심복 관리를 이곳으로 파견하여, 나와 함께 모든 것을 상의할 수 있게 한다면, 혹은 미리 사전에 우환을 예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임영호: “대인의 지시는 몹시 감격스럽습니다. 조선이 어찌 이런 큰 복을 누릴 수 있는지, 제가 당장 조정에 화급하게 사람을 내려보내도록 보고하겠습니다.”
마건충: “올 사람은 반드시 조정이 심복이어야 비로소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내일 저녁까지 도착해야 할 것입니다.”
임영호: “아무래도 3주야는 되어야 아마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쪽으로 한성은 80리 넘어 떨어져 있습니다.”
마건충: “전번에 (조・미조약을 체결할 때) 대부관(大副官)을 위임・파견하여 이곳에 와서 조약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오가는 데 1주야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3주야는 너무 늦고, 늦으면 기회를 놓치게 되니 그 이후의 결과는 정말 말로 하기 힘듭니다.”
임영호: “뜻하지 않게 오늘 이런 기회를 얻었으니, 어찌 앉아서 그르치겠습니까? 오늘 밤 썰물 때를 지나 제가 아침 닭 무렵이면 해안에 도착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모래 아마 내려올 수 있을 터이니, 어찌 3주야가 아니겠습니까?”
마건충: “지금 소화륜(小火輪)을 파견하여 포두(浦頭)로 보내줄 터이니, 신속하게 사람을 보내 오늘 밤에 한성으로 달려가서 내일 아침 도착한 다음, 조속하게 사람을 파견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일 저녁 무렵이면 포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영호: “삼가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일본인이 누차 제 도착을 물어왔는데, 지금 돌아가는 길에 잠시 방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마건충: “내일 새벽에 방문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 각주 001)
    당시 이홍장은 모친상으로 직예총독의 자리를 장수성에게 넘겨주고 고향인 안휘성 합비로 돌아가 상을 치르고 있었다. 광서 8년 3월 2일(1882년 4월 19일) 모친이 사망하자 이홍장은 예법에 따라 종제(終制)를 위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청 황실에서는 시국의 어려움과 북양대신 업무의 중요성을 이유로 100일의 휴가를 허가하였다.(「懇請終制摺」, 『李鴻章全集』10, pp.66-67.) 이홍장의 휴가 동안 양광총독(兩廣總督) 장수성(張樹聲)이 서리북양대신(署理北洋大臣)을 맡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2)
    1880년 개설된 일본 공사관이 설치된 곳은 도성 밖 옛 경기중군영(淸水館) 자리로 현재의 서대문역과 독립문 사이의 중간쯤이다. 인근에는 무악재를 오가던 관원의 휴식 공간으로 서지(西池)라는 연못과 그 부속 건물로 천연정(天然亭)이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천연정은 일본 공사관을 가리키는데, 반란군이 불을 지른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몰려오자 하나부사 일본 공사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당시 인천 부사는 정지용(鄭志鎔)인데, 임오군란을 소식을 알지 못한 채 한성에서 탈출해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인천도호부를 찾아오자 환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후 대원군의 소환을 받자 자결하였다고 일컬어진다. 『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6월 22일 7번째 기사에는 “인천 부사 정지용이 일본과의 화통을 반대하여 장계를 올리고 자살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1934년에 일본 당국에 의해 인천도호부의 옛 자리(현재의 문학초등학교)에 “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가 세워졌는데, 해방 이후 매몰되었다가 2002년 발견되어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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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李昰應)을 유도하여 구금해서 조선의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주일본 공사 여서창이 보낸 전보 등 첨부 문서 자료번호 : cj.k_0003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