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이 난당의 반란 경위에 관해 보낸 자문(咨文)과 상황을 살펴 답장해야 한다는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초록(抄錄) 및 관련 첨부 문서
박영기(朴永祈) 등이 조선 국왕이 난당의 반란 경위를 설명하는 자문을 직접 전달하였는데, 분명히 이하응이 시킨 일로, 상황을 살피면서 답장하여 우리의 의도대로 끌려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7월 15일, 군기처에서 장수성의 다음과 같은 주접을 베껴서 보내왔습니다.
조선 국왕의 자문(咨文)을 받아, 상황을 살펴보면서 답장 자문을 보내면서 삼가 신속하게 주접으로 알리니,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진해관도 주복(周馥)이 다음과 같이 구두보고를 하였습니다.
7월 11일 조선 의주(義州)의 소통사(小通事) 박영기(朴永祈), 백문빈(白文彬)이 해관에 도착해서, 조선 국왕이 북양통상대신 아문에 보내는 공문 1통을 직접 전달하였는데,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니 모두 의주부(義州府)에 거주하며, 조선 국왕의 자문은 역로(驛路)를 통해 의주로 전달되었기에, 다시 이 통사(通事)들이 천진으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한성의 상황을 물어보니, 모두 잘 모르는 듯하였습니다.
아울러 자문을 올려보내 왔습니다. 신은 바로 열어 읽어보니 그 안에서 6월 초9일 난당이 반란을 일으킨 대략의 상황을 서술하였지만, 사건이 일어난 발단에 대해서는 그 말을 얼버무려 병사와 백성이 갑작스럽게 분노를 터트렸다고 하면서, 반란을 진압한 공로는 모두 대원군 한 사람에게 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국태공은 바로 이른바 대원군 이하응입니다. 이하응은 처음에는 외교를 거절하는 주장으로 무리를 선동하여 그 사사로움을 드러내고, 일단 대권을 독람하게 되자, 은근히 우리 조정이 죄를 밝혀 토벌할까 두려워 이렇게 꾸며댄 말로 자기 지위를 굳히려는 계책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 자문은 당연히 이하응이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보내온 자문은 국왕이 보낸 것으로 내세우고 있어, 또한 갑작스레 매정하게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신은 당장 자문을 갖추어 답장하면서 기회를 틈타 문구를 조절하여 잠시나마 그들이 두려움을 풀게 하였으니, 만일이라도 그들이 우리 의도대로 끌려오게 할 수 있다면 혹은 애써 힘쓰지 않아도 획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조선 국왕이 보낸 온 자문과 신의 답장 자문 원고를 그대로 베껴 목록과 함께 살펴보실 수 있도록 올립니다. 광동수사제독 오장경 등에게 몰래 알려 상황을 참작하면서 배치하도록 한 것 외에, 삼가 주접을 갖추어 신속하게 상주합니다. 제 처리가 타당한지 아닌지 황태후와 황상께서 살펴보시고 훈시를 내려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첨부합니다. 자문을 가져온 조선 통사는 육로로 돌아가야 하므로 일정이 지체되니, 신은 당장 자문을 이미 곧장 (군함을 통해) 오장경 등에게 부쳐 가까이에서 받아볼 수 있게 함으로써, 신속하게 상황을 참작하면서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을 아울러 아뢰면서 상주합니다.
광서 8년 7월 15일, 군기대신은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았습니다.
[내용 없음]
이상.
조록: 삼가 조선 국왕이 보낸 온 자문을 그대로 베껴 살펴보실 수 있도록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