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난당의 우두머리 이하응(李昰應)을 천진으로 압송하였다는 상주(上奏)
조선 난당의 우두머리 이하응을 획치하여, 이미 천진으로 압송하였음을 상주합니다.
7월 23일 군기처에서 장수성의 다음과 같은 주접을 베껴서 보내왔습니다.
조선을 지원하기 위한 육・해군 장병을 이끌고 한성에 진입하여 반란의 우두머리 이하응을 획치하고, 신속하게 천진으로 압송하였음을 주접을 갖추어 아뢰니, 황상께서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조선 난당이 폭동을 일으켜서, 신은 황상의 유지에 따라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육・해군 각 부대를 동원하여 앞뒤로 조선에 파견하고, 거기에 도착하여 상륙한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누차 상주하여 아뢴 바 있습니다. 6월 20일 등영주(登瀛洲) 군함이 천진으로 돌아왔는데, 광동수사제독 오장경, 통령북양수사기명제독 정여창, 이품함 후선도 마건충의 자문과 보고 등 각 건을 전달해 왔습니다. 조사컨대, 마건충은 7월 8일 남양부에 도착하였고, 오장경은 부장(副將) 장광전(張光前)을 보내 부대를 이끌고 그를 따라가게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바야흐로 다양한 조건을 내걸어 조선을 협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마건충은 장광전에게 소총수 200명을 선발하도록 약속하고, 초9일 오후 가벼운 무장으로 신속하게 진군케 하여 10일 한성에 진입하였습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미 화를 내면서 한성을 벗어나 인천으로 돌아갔습니다. 마건충은 이하응을 만나, 먼저 좋은 말로 상대하여 그 의심과 근심을 풀었습니다. 또한 마건충은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갑작스레 결렬을 선택하여 혹시 대국에 장애를 줄까 봐, 11일 인천으로 달려가서 중국은 조선을 위해 먼저 내환(内患)을 제거하여 국왕이 자주할 수 있게 한 다음, 다시 일본과 연락하여 각 문제를 협의할 것이라고 거듭하여 설득하였는데,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조금 지체하였다가 돌아올 생각인 것 같습니다.
7월 12일 마건충은 한성으로 되돌아갔고, 오장경은 이미 대군을 이끌고 한성 성외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정여창 역시 후방에서 배치를 적절하게 한 다음 해군 병사 100명을 이끌고 한성에 진입하였습니다. 오장경은 아울러 군영(軍營) 이동을 위해 파견된 하남후보도(河南候補道) 위륜광(魏綸光), 부장(副將) 하증주(何增珠)가 병용(兵勇) 3개 초를 이끌고 뒤를 이어 진입하게 한 다음, 마건충을 따라 먼저 한성에 진입한 장광전(張光前)이 이끄는 1개 영과 함께 성내에 주둔하였습니다. 피차 밀접하게 논의하고 준비하고, 향도(嚮導) 역할을 맡은 조선 배신(陪臣) 김윤식과 어윤중 등이 탐방하여 확인해 보니, 이하응은 일본 공사와 마찰을 일으켜 세력이 고립되고 기세가 누그러들어 본래 이틈을 탈만 하였고, 또한 일본군이 이미 모두 한성 밖으로 나가 간섭할 염려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난당은 모두 숙위(宿衛)하는 도감(都監) 옆에 모여 있었던 데다가, 1개 영에 5천 명의 인원이고 심복들이 대거 웅크리고 있으면서 조정의 동정을 엿보고 있었고, 밤낮으로 무기를 만들고 있어서 그 재앙을 추측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진행한다면, 기밀이 누설되어 또 다른 변고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마건충과 정여창은 밤을 타서 오장경의 군영에 도착한 다음 비밀리에 기밀 사항을 결정하였습니다. 13일 사각(巳刻, 오전 9~11시), 오장경은 부대를 이끌고 직접 한성에 들어가 먼저 이하응과 만나 예로써 응대하였고, 신각(申刻, 오후 3~5시)에 이하응이 답방(答訪)을 위해 군영에 찾아왔습니다. 정여창과 마건충은 모두 먼저 성외(城外)에 모여 필담(筆談)으로 왕복하면서 해질 무렵까지 시간을 끌다가, 먼저 계책을 부려 이하응을 지키며 따르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정여창이 직접 소대(小隊)를 이끌고 가마에 이하응을 태우고 길에 나서서, 밤을 도와 비를 무릅쓰고 급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리하여 14일 새벽 무렵 남양 해구에 도착하였고, 즉시 등영주 군함을 태운 뒤 해당 군함의 선장[管駕官] 엽백윤(葉伯鋆)으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천진으로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오장경은 위륜광, 장광전, 하증주 등에게 기율을 엄격히 유지하여 한성을 지키도록 지시하여, 순찰을 돌면서 진압하고 주야로 방범 활동을 유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고시를 붙여 인심을 가라앉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난당의 수괴들을 토벌하였습니다. 사후 대책의 경우 국왕과 상의하였는데, 조선 국왕은 오장경에게 서신을 보내, ‘난군(亂軍)이 머무는 곳은 주로 왕심리・이태리 두 마을로 모두 궁궐과 가까운 데다가, 사납게 조정을 원수로 삼고 있어, 천조(天朝)의 대규모 병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박멸할 수 없으니, 청컨대 부대를 정비하고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우두머리를 잡아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오장경은 이미 병력을 나누어 파견하고 친히 포위 공격을 주도하여 난당을 각기 체포・처리하였습니다. 이것은 7월 10일에서 15일 사이의 보고에 의한 것으로, 이하응의 획치를 계획하고, 난당의 체포를 배치한 실제 상황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이번 조선의 내란은 재앙이 내부에서 싹터 전국이 들끓어 오르게 되었고, 병사들이 궁정에서 멋대로 난동을 부려 관료・사대부들에게 두루 피해가 미쳤습니다. 이하응은 위사(衛士)들의 마음을 얻어내고, 국왕의 존친이라는 지위를 이용하면서 점차 권세를 강화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평소 충분(忠憤)을 품고 있던 김윤식(金允植)과 같은 경우도 한성에 가까이 접근하였을 때 오장경 등이 이하응이 내란의 수괴라고 하자 그래도 그를 감싸려는 말을 하였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일본의 병력이 옆에서 틈을 보고 있어 견제가 많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누차 총리아문 왕대신의 서신과 이홍장의 전보 서신을 받았을 때 모두 ‘반드시 먼지 이하응을 사로잡고 국왕이 그 정권을 되찾게 해야만 이 일은 해결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신은 황상의 계획을 이어받아 결국 날마다 오장경 등과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전력으로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감히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오장경, 정여창, 마건창 등은 조선이 위기 속에서 놀라고 의심하는 가운데 모두 어려움과 힘듦을 피하지 않고 신속하게 일 처리에 나서 그 무리가 놀라 동요하지 않게 하면서도 반란 수괴를 제대로 확보할 수 있었으니, 모두 조정의 대책이 주도면밀하고 장령 등이 최선을 다한 결과로서, 실로 조선의 위기가 사라지고 안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난당의 체포・처리 및 일본과 각종 사무를 협의하는 일은 이홍장이 천진에 도착하면 그 일을 주지함으로써 반드시 번복을 편안하게 안정시킴으로써 우러러 황상의 근심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란 진압에 종사한 문무 관원・장령 등은 바다 건너 원정을 가서 탁월한 공적을 세웠으니 그 공적을 기록하여 표창할 만합니다. 응당 난당이 크게 진압되기를 기다려 이홍장이 검토하고 상주하여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청할 것입니다. 이하응은 배를 타고 건너오면서 힘들고 지친 데다가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며칠간 조리를 한 다음 즉시 관원을 파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겠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는 엎드려 황상의 유지를 기다려서 지시가 내려오면 그에 따르겠습니다. 조선 난당 수괴 이하응을 획치하여 천진으로 압송한 지금까지의 사정에 대해 삼가 주접을 갖추어 역참을 통해 신속하게 상주하오니, 황태후・황상께서 살 펴보시고 지시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삼가 주를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