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난당의 처벌 상황에 대해 보고하며 중국 군대가 지속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의견과 조선 정부가 사후 처리 문제를 의논할 것이라고 이홍장(李鴻章)이 총리아문에 보내는 초록(抄錄)
1) 관군이 조선 난당을 체포・처벌한 상황을 보고하며, 일본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중국 군대는 응당 계속 남아서 군사적으로 통제해야 합니다. 2) 조선과 일본이 이미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선 정부는 관원을 천진에 파견하여 사후 처리 문제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8월 초1일, 군기처에서 다음과 같은 이홍장의 주접을 베껴 보내왔습니다.
관군이 조선 난당을 체포・처벌하여 대세가 대략 안정되었으며, 조선은 관원을 천진에 파견하여 사후 처리 문제를 논의할 것임을 삼가 주접을 갖추어 알리오니, 황상께서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신은 7월 23일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들었다는 군기대신의 자기(字寄)를 받았습니다.
장수성이 오장경 등이 관군을 통솔하고, 조선의 한성에 이르러 이하응을 획치하여 현재 이미 천진으로 압송하였다고 상주하였는데, 잠시 이하응을 안치하고, 이홍장이 천진에 도착한 다음 장수성과 함께 이하응에게 조선 변란의 원인 및 저명한 난당을 심문하여 알아내어 상세하게 상주한 다음, 유지를 기다려 그에 따라 처리하라. 오장경은 현재 부대를 파견하여 왕심리・이태리 두 마을을 공격하려는데, 해당 제독 등에게 신중하게 진격하여 난당의 수괴를 신속하게 체포・제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방범 대책을 적절하게 마련하여 인심을 가라앉히고 반란군 측이 안심하게 하도록 지시하라. 오장경이 통솔하는 각 부대가 군사적 배치 인원이 부족하다면 현재 이미 추가로 동원된 총병 황금지가 부대를 이끌고 파병될 수도 있으니, 이홍장은 수시로 상황을 살펴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하라.
이상. [이상과 같은 상유를 받았는데] 천하를 다스리며 번방(藩邦)을 안정시키고자 하시는 황상의 지극한 뜻을 우러러보건대,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연대에 이르렀을 때 제독 정여창, 도대 마건창의 16일, 18일 보고를 받아보았는데, 이하응을 획치하여 배에 탑승하게 한 이후 마건충은 조선 국왕에게 요청하여 조선 정부가 종전의 화호를 되살리길 원한다는 뜻을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에게 서신으로 전달하고, 즉각 전권대신 이유원, 부관 김홍집을 인천에 속히 파견하여 협의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의 난당은 왕심리・이태리 두 마을에 모여 사는 사람이 대략 수천 명으로, 대대로 병적(兵籍)에 속하면서 발호하여 통제하기 쉽지 않았고, 이하응과 한패가 되어 누차 변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이하응이 비록 이미 구금되었지만, 그 장자인 이재면이 대장(大將)으로 새로 군사권을 장악하여 여전히 그 무리가 그를 떠받들어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5일 저녁 먼저 이재면을 남별궁으로 유인하여 구금하고 수병 수십 명이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 오장경 제독이 부장 장광전, 하승오, 총병 오조유가 이끄는 친병(親兵) 경자 3개 영(慶字三營)이 왕심리 난당에 가서 소탕하여, 소굴을 모두 수색하고 소총으로 시가전을 벌여 해가 뜰 무렵에 이르기까지 150여 명을 생포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집 뒤로 도주하였는데 우리 군대의 부상자는 겨우 2명이었습니다. 이태리 쪽은 오장경 제독이 직접 출정하여 포획에 나섰는데, 부대의 주둔지와 가까워 이미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단지 20여 명을 사로잡았을 뿐입니다. 이 전투에서 생포한 사람은 모두 170여 명이었는데, 심문을 거쳐 수괴로서 죄상이 비교적 분명한 사람 10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 정부에 넘겨 적절하게 석방하게 하여, 위협에 굴복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법으로 사형당하지 않음을 알게 함으로써 반란군 측의 의지를 잠재적으로 쇠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중국 부대의 위엄이 벼락처럼 큰 두려움을 주었으므로 난당의 무리가 놀라 달아나고 소굴이 이미 모두 파괴되었고, 사방에 흩어져 버티더라도 수시로 체포를 계속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재면은 자기 위치에 불안을 느껴 즉각 이날로 군사권을 내놓겠다고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조선 난당이 이미 토벌・해산되고 조선의 국세가 대략 안정된 대략의 상황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조선의 내란을 진압할 때, 시종일관 감히 간섭하지 못하고, 그대로 여전히 공법을 삼가 준수하였습니다. 다만 조선과 조약을 협의할 때는 공사관을 불태우고 공사를 쫓아낸 것을 언급하면서 이를 구실로 위협하여 여러 요구를 제시하였고, 조선은 스스로 관원을 한성에서 80리 떨어진 인천에 보내 이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습니다. 마건충은 조선과 일본은 오랫동안 조약을 맺었던 나라여서, 그 교섭 안건에 대해 중국이 분명하게 나서 주지하기 어려웠으나, 허가해도 좋을 일과 허가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미리 지시하였는데, 또한 마침 한성에서 오장경과 함께 반란을 진압하느라 다른 일을 돌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대신 이유원 등은 이미 17일에 일본과 협의를 마치고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조약의 내용 8개 조를 검토해 보면, 그래도 아주 심한 유폐는 없는 편입니다. 다만 일본의 각 비용을 전보(填補)하는 것이 50만 원에 이르러 액수가 비교적 큽니다. 조선 국왕은 내우외환으로 일 처리가 위급하다고 하여 그 신하에게 특별하게 명령을 내려 신속하게 일을 마무리함으로써 우방과의 마찰을 없애고자 꾀하였으므로 마침내 부득불 달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만, 다행히 중국의 육・해군 병력이 크게 위세를 보여주었으므로 일본이 은연중에 꺼리는 바가 있어, 느닷없이 영토 할양이나 광산 채굴, 육로 통상 등을 억지로 강요하여 조선이 따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조선과 일본의 조약이 이미 체결되어 잠시나마 갈등의 요소를 막은 대략의 상황입니다.
저는 천진에 도착한 다음 장수성을 만나 상의하여 조선의 일은 대략 적절하게 안배가 되었으므로 황금지의 3개 영을 추가로 투입하는 것은 당연히 잠시 파견을 늦추어서 조금이라도 수고와 비용을 줄이고자 하였습니다만, 이하응은 이미 북경으로 출발하였다가 이윽고 잠시 이곳에 안치하라는 상유를 받았으므로, 장수성을 거쳐 관원을 파견하여 쫓아가 되돌아오게 하였으니, 그가 천진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응당 장수성과 함께 상세하게 심문하고 다시 상주한 다음 처리하고자 합니다. 지금 조선 국왕은 국세의 쇠락에 비추어 힘써 떨치고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이미 전권대신 조영하, 부관 김홍집, 종사관 이조연 등을 파견하여 마건창과 정여창을 동반하게 하였고, 25일 천진에 도착한 다음 만나서 모든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조선의 사후 처리 문제는 중요한 것에 관계되고, 실마리도 상당히 복잡하므로 저는 이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상의하여 차근차근 적절하게 추진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군함과 육군이 아직 철수하기 전이어서, 우리 부대가 잠시 조선에 계속 주둔하면서 군사적으로 통제하여 조선 국왕이 은연 중에 믿을 수 있는 도움이 되어야 하므로, 현재 오장경을 그대로 남겨 두어 각 부대를 통솔하면서 계속 난당을 체포・처벌하게 하였고, 아울러 정여창이 돌아가 함께 협의하면서 상황을 보아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여창 등이 올린 보고 2건, 마건충이 기록한 필담과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제물포) 조약의 각 조항을 베껴 총리아문에서 검토할 수 있도록 보내는 것 외에, 지금까지 관군이 조선의 난당을 체포・처벌하고 조선이 관원을 천진에 파견하게 된 사정에 대해 응당 서리 직예총독 장수성과 함께 연명으로 주접을 갖추어 역참을 통해 상주하니, 황태후・황상께서 살펴보시고 지시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삼가 주를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