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반란은 이하응(李昰應)이 사주한 것이므로 보정부(保定府)에 안치하여 화근의 실마리를 없애야 한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내는 초록(抄錄)
조선의 반란은 실로 이하응이 사주한 것으로, 응당 그를 보정(保定) 성성(省城)에 안치하여 귀국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화근의 실마리를 없애야 합니다.
8월 13일, 군기처에서 이홍장의 다음과 같은 주접을 베껴서 보내왔습니다.
상유에 따라 함께 조선 반란 수괴 이하응을 심문한 상황에 대해 삼가 주접을 갖추어 상세하게 답장으로 아뢰니, 황상께서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신 등은 누차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았습니다.
(장수성과) 함께 이하응에 대해 조선 변란의 연유 및 저명한 난당을 심문하고 찾아내어 상세하게 상주하고, 유지를 기다려 그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
신 등은 연일 유지에 따라 함께 이하응을 불러 만나서, 조선의 변란 연유와 저명한 난당의 성명을 따져 물었으나, 그의 말은 대부분 교활하게 미루는 것이었고, 결코 사실을 토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심문한 사정과 앞으로 처리할 방향에 대해 먼저 서신으로 총리아문에 알리고 한편으로는 다시 진해관도 주복, 후선도 원보령과 마건충 등에게 재차 상세하게 심문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후 주복 등은 다음과 같이 보고해 왔습니다.
공동으로 이하응을 불러 심문하면서 거듭하여 따졌더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습니다.
본인[이하응]은 계유년 이전 10년간 보정을 하면서 각 부대 군병의 봉록은 매달 제때 지급하였는데, 민겸호가 재정 부문을 장악한 이래 최근에는 군대 봉록을 10여 개월이나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올 6월 초에야 겨우 한 달분을 지급하였는데, 쌀은 질이 나쁘고 되가 작아, 군병들이 받기를 거부하자, 민겸호는 이를 안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잡아들여 구금하고 남살하였기에, 각 부대에서 분노하여 소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반란 소식을 듣고 한성에 들어와 몸을 던져 난군을 타이르고 깨우쳤습니다.
국상(國相)과 재신(宰臣) 등 3, 4인을 살해하였으므로, 자기 형인 이최응은 군대 봉록을 관장하지도, 군대를 관할하지도 않았는데 왜 피살되었느냐고 그에게 힐책하였더니, 말하기를 “이최응은 집정한 지 수년 동안 저절로 인심을 잃었고, 당일 군민에게 공갈을 일삼아 이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하응에게 당신이 능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면, 응당 반란 수괴가 누구인지, 무기를 들고 먼저 왕궁에 들어간 것이 어떤 부대인지, 병졸들이 당신을 빙 둘러싸고 호소하였다면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터라고 힐문하였더니, “초9일 군병들이 우리 집에 몰려와 호소하였는데, 수백 수천의 사람이라 그 우두머리를 알 수 없고, 왕궁을 포위하여 핍박하는 데에는 5개 영의 부대 모두가 움직였으며, 누가 앞서고 누가 뒤따랐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초9일 이후 당신이 국사 전반을 관장하고, 기무아문을 폐지하고, 무위영을 바꾸었는데, 어찌 난당을 체포하여 처리하였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지 힐문하자, “국사 전반을 관장한 것은 국왕의 부탁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난당의 성명을 갖은 수를 써서 토해내게 하려 하였지만 절대로 지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살펴보건대 조선 영선사 김윤식이 주복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하응은 평소 무리를 모아 평소 음모를 통해 권력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꾸며왔고, 갑술(1874)년 이래 그런 형적이 누차 뚜렷하였는데, 작년 반란 음모의 수괴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입니다. 체포된 여러 범인의 자백으로 흥선군의 음모임이 밝혀졌지만, 국왕은 이를 듣고자 하지 않고 단지 잔당만을 주살하였을 뿐입니다. 이번 반란이 일어나게 된 근원은 흥선군이 군심(軍心)을 격변(激變)한 데서 비롯되었고, 그는 스스로 국태공으로 자칭하면서 국권을 총람하였습니다.
조선의 시독(侍讀) 어윤중이 주복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역시 “국정은 현재 대원군에게 넘어갔고, 반란 수괴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윤식은 또한 주복과 나눈 필담에서도 “흥선군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 동안 백성을 해치고 학대하며, 국왕이 나이가 들어서도 정권을 돌려줄 뜻이 없어, 온 나라가 모두 옳지 않다는 마음을 품었으며, 민비가 마음속으로 불평을 품고 그 친척들을 등용하여 흥선군의 권력을 나누려고 하자, 이때부터 더욱 분노와 증오가 심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건충이 조선 병조판서 조영하와 나눈 문답 필담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국왕이 들어가 대통을 이었는데 대원군이 크고 작은 국사를 총괄해서 다루게 되었고, 국왕이 대소의 사무를 직접 총람하기를 바라게 되자 그때 서로 상당이 오랫동안 대치하기도 하였지만, 이후 국정이 비로소 국왕으로부터 나오게 되자 왕비께서 국정 대부분에 간여하게 되었습니다. 민겸호가 군대의 봉록을 나누어 지급하는 날, 쌀이 한 되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해 군졸들이 서역들과 다투게 되자, 민겸호는 군졸 5명을 붙잡아 처형하려고 하였고, 군인들이 이하응에게 달려가 호소하자 대원군이 말로 이들을 자극하여 이번 변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초9일 군졸들이 민겸호와 김보현을 때려죽였고, 대원군이 대궐에 들어와 각 부대 군졸을 타이르고, 곧바로 국사를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이하응이 말하는 것은 저렇고, 조선의 여러 신하가 서술한 것은 이러하므로, 서로 참고하며 따져 확인해 보니, 이번의 변란은 난군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완성한 것은 이하응이라는 점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보고를 올리니 검토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신 등과 주복 등이 올린 보고를 다시 검토해 보니 이하응의 말은 신 등이 불러서 심문하던 때의 대답과 대략 동일하며, 조선의 여러 신하가 서술한 바와 광동수사제독 오장경이 보내온 서신을 조선의 사후 여론으로 검증해 보니 모두 다른 의견이 없었습니다. 이번 변란의 연유는 비록 군졸의 봉록 요구로부터 일어났습니다만, 그런데 이하응은 조선 국왕의 생부로서 과거 국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보정을 하면서) 전권을 휘둘러 백성을 학대하였고, (국왕이 성년이 되어) 억지로 정권을 되넘긴 것은 결코 그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근래 원망이 더욱 심해져 작년에는 왕궁에 몰래 불을 지른 적이 있고, 아들 이재선이 먼저 역모를 꾸민 일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난군은 그의 집에 몰려가서 호소하였는데, 만약 옳은 말로 권도하였다면 어찌 갑작스러운 대란으로 번졌겠습니까? 조선의 관리나 백성이 모두가 이하응이 자극하여 변란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실로 이유가 없는 바가 아닙니다. 설사 이것은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손 치더라도 난군이 왕궁을 포위하여 습격하여 왕비가 희생되고 대신이 피살되는 등 반란의 흉흉한 불길은 이미 도저히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하응이 사후에 능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면, 어찌 오로지 바야흐로 싹트려고 하는 시점에서만은 난리를 막을 수 없었는가 하는 점을 보면, 어린아이라도 그가 좋지 않은 속셈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위기를 틈타 권력을 찬탈한 다음 한 달여 동안 멋대로 권력을 남용하고, 심복을 배치하였으며, 반란을 일으켜 윗사람을 침범한 무리에 대해서는 어느 한 사람 잡아서 처치한 일이 없습니다. 『춘추(春秋)』의 대의에 따르면, 궁정에 돌아가서도 (왕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던 (경대부) 조순(趙循)의 뜻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신 등이 유지를 전하면서 힐책함에 이르러서도 그는 여전히 두려워 소리를 지르며 피살된 상신(相臣)・재신(宰臣)에게 죄를 돌리고 절대로 군졸들이 그들을 멋대로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생각하지 않았고, 난당의 성명까지도 시종일관 절대로 지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죄에 대한 판정은 너무 확실하고 말을 바꾸는 데도 궁색하니, 무리를 만들어 악행을 저지른 사정이나 신하로서 역란(逆亂)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대의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만 들어도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입이 백 개라도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조정에서 장령에게 지시하여 군대를 보내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종사에서 벌어진 골육지쟁의 변고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조영하 등이 천진에 와서 직접 알린 바에 의하면, 조선 국왕은 황상께서 은혜를 베풀어 굽혀서 대원군을 용서해 주시길 간절하게 바라며, 만약 반드시 법을 집행하여 엄격하게 징벌해야 한다면 이하응은 확실히 피할 수 없는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조선 국왕으로서는 또한 스스로 처리하기 난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하응이 쌓아놓은 위세가 국왕을 위협하고 그 무리가 아주 많을뿐더러, 이미 국왕, 왕비 및 조정의 여러 신하 등과 오랫동안 서로 혐오하게 되어, 만약 다시 풀어주어 조선에 돌아가게 한다면 간교한 무리가 선동하고 복수할 대상을 찾게 되어 거듭 내란의 싹을 키워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번거롭게 중국이 군대를 보내 토벌한다면 관대한 은전은 도리어 거듭 맞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물며 가난하고 약한 작은 나라가 어찌 다시 지금과 같은 변고를 다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하응이 돌아가지 않으면 오히려 그 왕실을 보전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으며, 부자 관계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하응이 일단 돌아가게 되면 결국 부자 관계를 해치게 되고 반드시 왕실에도 해를 끼치게 되며, 나라에도 재앙이 될 뿐입니다.
엎드려 『조선사략(朝鮮史略)』을 살펴보건대, 원대 고려왕은 누세에 걸쳐 부자간에 서로 다루었기에 연우(延佑, 元 仁宗代, 1314~1320) 연간, 고려왕 왕원(王謜, 즉 忠宣王)은 상왕이 되어 그 아들 왕도(王燾, 즉 忠肅王)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는데, 서로 모함하며 원수가 되자, 원 황제는 충선왕을 토번(吐蕃)에 유배시켰으니, 왕의 부친을 안치한 것은 모두 전례가 있습니다. 또 왕원 연간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재위시기(世祖代, 1264~1294)인데, 왕도의 아들 충혜왕(忠惠王) 왕정(王禎) 역시 원 황제에 의해 (광동성) 게양현(揭陽縣)으로 유배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고려는 국내가 안정되어 있었지만, 헛되어 소인들의 모함으로 저 멀리 궁벽한 황무지의 땅으로 쫓겨갔던 것입니다. 지금 이하응은 왕실의 큰 기업(基業)을 후손에게 전할 존엄함은 없고, 사직을 거의 위기에 빠뜨린 죄악만 있으니, 충선왕이나 충혜왕과 비교해도 그 사정이 더욱 심각합니다.
하지만 대원군 처벌 문제가 왕실과 국가, 부친과 아들 사이에 관련되는 것이라, 부득불 두 가지를 함께 살펴 아울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조정의 관대함으로 특별하게 명조(明 詔)를 반포해 주셔서, 다만 그가 국태공(國太公)을 잠칭(潛稱)하고 스스로 전권 정치를 행한 것, 군인들이 호소하러 갔을 때 타일러서 배척・금지하지 못한 것, 그리고 들어가 국정을 총괄하게 된 이후 난당을 토벌・체포하지 못한 것이 실로 망령된 잘못임을 질책하되, 특별하게 은혜를 베풀어 신 등에게 지시하여 이하응을 북경 부근의 보정(保定) 성성(省城)에 안치하고 영원히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생활물자를 우대하여 지급하되,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여 엄격하게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다음, 여전히 조선 국왕에게 계절마다 관원을 파견하여 살펴보고 물어볼 수 있게 허락해 주어 그 사사로운 감정을 위로해 준다면, 조선에 화란(禍亂)의 근원을 없애주면서도 또한 국왕이 윤리적인 난처함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며, 황상의 훌륭하고도 인자스러운 명성이 해외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삼가 어리석고 얕은 소견을 아뢰어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염려에 대비하고자 함이니, 이것이 타당한지 아닌지 엎드려 황상의 채택과 시행을 기다립니다. 이홍장을 심문한 절략과 김윤식 등의 서신 등 문건은 군기처에 자문으로 보내 검토받는 것 외에, 지금까지 신 등이 유지를 받들어 함께 이하응을 심문한 상세한 상황을 함께 주접으로 작성하여 역참을 통해 상주하고, 엎드려 황태후, 황상이 살펴보시고 훈시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삼가 주를 올립니다.
광서 8년 8월 12일, 군기대신은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았습니다.
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