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반란 후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상인들로부터 자본을 모아 조선에게 빌려줄 자금을 비밀리에 마련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관련 문서
조선은 반란 이후 대단히 빈곤하여, 일본인의 농락을 막기 위해 당정추(唐廷樞)와 마건충에게 중국 상인으로부터 자본을 모아 조선에 빌려줄 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비밀리에 계획하도록 지시하고자 합니다.
주 001
8월 초8일, 북양대신 이홍장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8월 초3일에 보낸 서신은 이미 도착하였을 줄 압니다. 곧바로 초2일 다음과 같은 제693호 공함(公函)을 받았습니다.
독일의 브란트 공사가 조선과 새로 체결된 조약에 변동이 있는지 물어와서, 조약에 결코 아무런 변경이 없다는 점을 조약을 체결한 각국에 조회하여 의심을 풀게 하라고 조영하(趙甯夏)등에게 지시를 전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도대 마건충에게 조영하 등에게 전달하여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조영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현재 국왕에 의해 전권대관으로 파견되어 왔는데, 원래 이미 조약을 체결하거나 아직 체결하지 않는 각국이 중국에서 따로 논의할까 염려되어, 지금 영국・미국・독일에 보내고자 하는 조회의 원고를 감정해 주시도록 올립니다. 각기 그 원고를 다듬게 해주시면 다시 검토하시도록 올린 다음 밀봉하여 각국 공사에게 보내 참고하게 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받아서 검토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국왕에게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조영하 등은 이번 달 초에 직접 조선이 응당 처리해야 할 사후 대책 6조를 제출하면서 지시와 교정을 부탁해 왔습니다. 어제 돌아갈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제 소견이 미치는 바에 따라 필담을 나누면서 그 요점을 지적하였는데, 이것이 적절한지 몰라 삼가 조영하가 올린 사후 대책 6조 및 초6일 문답절략을 그대로 초록하여 올리니 검토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선은 대단히 빈척(貧瘠)하고, 이번 변란을 거치면서 나라에 한 달을 버틸 저축도 없어 절대적으로 염려스럽습니다. 도대 마건충의 비밀 보고에 의하면, 일본은 전에 은 50만을 빌려주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조선의 군신이 협제(脅制)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하나부사는 뒤이어 대신 광산 개발을 해 줌으로써 상환액을 공제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김홍집 등이 절대 안 된다고 힘써 버텼지만, 앞으로 곧장 세관(稅關, 즉 海關)을 설치하고 인원을 고용해야 하는데 일체 창설 경비도 실로 마련할 방법이 없습니다. 조영하 등이 우리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일은 당연히 만부득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홍장은 작은 나라를 아끼고 염려하는 조정의 인덕을 우러러 느끼고 있어, 이 일을 못 본 척 책임을 미루어 그들이 일본에 농락되는 것을 보기 어려웠으므로, 필담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 간청에 기초하여 잠시 상의하는 것을 허용하여, 초상국(招商局)의 도원 당정추(唐廷樞)와 마건충이 비밀리에 계획하여 만약 조선에서 필요한 액수가 크지 않다면 혹은 여력이 있는 중국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빌려주고, 해마다 조선의 관세와 광산 이익 등으로 나누어 상환하게 하면 이 역시 큰 대가를 치르지 않고 혜택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총리아문의 견해는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조영하 등은 오늘 수로를 통해 출발하여 북경으로 가서 국왕의 표주(表奏) 및 총리아문과 예부에 보내는 자문을 제출할 예정이니, 그다음 신속하게 천진으로 돌아오면 모든 문제를 계속 상의하고, 다시 수시로 상세하게 알려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삼가 비밀리에 답장을 보냅니다. 편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8월 초1일, 조영하 등이 직접 제출한 조선 사후 처리 대책 6조」: 조선의 사후 대책 6조는 민지(民志)를 안정시키고, 인재를 등용하고, 군제(軍制)를 정돈하고, 재용(財用)을 정비하고, 율례(律例)를 변경하고, 상무(商務)를 확대한다는 내용입니다.
1) 「8월 초1일, 조영하 등이 직접 제출한 조선 사후 처리 대책 6조(八月初一日, 趙寧夏等面呈朝鮮善後六條)」
(1) 민지(民志)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선은 벽루(僻陋)한 데다가, 문을 달아 걸고 스스로 지키다 보니 방만하고 나태한 것이 풍속이 되어 버렸고, 나아가 사족(士族)이 완고하고 무식하여 상하 간의 감정과 뜻이 서로 어긋나 통하지 않았으므로, 뜻을 잃은 무리가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여 외국을 원수로 간주하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깨우치고 타일러 이들을 안정시키고 복종시키는 것이 아마 오늘날의 급선무일 것입니다.
(2) 인재를 등용해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원칙은 응당 인재 등용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데, 조선은 평소 가문의 지위[門地]를 중시하고 오로지 과거시험만을 숭상하여, 이 길이 아니면 진용(進用)될 수 없었습니다. 초야에는 비록 뛰어난 선비가 있어도 종신토록 누렇게 마른 낙엽과 같은 신세였고, 승평의 시기가 길다 보니 과거의 것을 그대로 따르며 고치지 않아, 과거시험의 습속은 최근 날로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만약 빨리 이런 폐해를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관리는 잡다하고 남아돌며, 봉록은 아주 엷습니다. 무릇 관리가 된 사람은 일단 요행히 그 길에 접어들면 안으로는 아침에 바꿨다가 저녁에 고치고 헛되이 청현(淸顯)하다는 명성만 훔치고, 밖으로는 아랫사람을 수탈하여 권귀(權貴)에 아첨하면서 탐오(貪污) 때문에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모든 사무를 돌보지 않게 되어 권한이 서리들에게 넘어가는데, 서리들은 세습적으로 문서 사무를 담당하면서 권력을 지닌 요직의 사람에게 아부하여, 국가의 명맥(命脈)을 좀먹으면서 백성을 기름을 뽑아냅니다. 이것은 오로지 인재 등용이 제한되어 제대로 된 방안을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3) 군제(軍制)를 정돈해야 합니다: 조선의 군제는 3개 영, 즉 훈련영(訓練營), 금위영(禁衛營), 어영(御營)이 있는데 모두 중고(中古) 시대에 건립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훈련영이 제일 나은데, 이것은 임진왜란 이후 척계광(戚繼光)의 군사 훈련 방식을 모방하여 조련한 것입니다. 10년 이전 훈련국의 병정을 골라 따로 무위영을 설치하여 국왕을 숙위하는 친병으로 삼았는데, 국가재정의 부족 때문에 3개 영의 봉록을 오랫동안 지급하지 못하였습니다. 작년 겨울 군제를 변경하고자 내외의 각 영을 합쳐서 둘로 만들어 무위영, 장어영(壯禦營)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에 대한 통제나 기율이 정리되지 않아, 다시 일본 교관을 초빙하고 300명을 골라 먼저 양창대(洋鎗隊)로 교육하였습니다. 이에 각 영의 병사들이 그 대우가 고르지 않음에 대해 불만을 품고 신식 교련 방법을 적대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월의 반란 이후 숙위병(宿衛兵)과 신식 방법의 교련을 폐지하고 다시 삼영(三營)의 옛 체제로 돌아갔습니다. 현재 중국의 군대가 난군을 징벌하였고, 잔당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아직 후환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때의 급무는 먼저 군제를 정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으며, 해안 방어[海防]이나 육상의 관문[關卡] 역시 시의에 맞게 대비해야 합니다.
(4) 재용(財用)을 정리해야 합니다. 조선은 승평의 시기를 보낸 지 오래되어, 비용이 날로 함부로 이용되어 금고의 저축은 텅 비고, 개인 축재를 하거나 횡령하는 사례가 달이 가고 해가 지날수록 증가하여 지금은 그 최고점에 이르렀습니다. 쌀을 팔거나 사들이는 정책은 헛되이 서리들의 배만 불려, 백성들은 도리어 뼈에 사무치는 원망을 품게 되고, 조운(漕運)의 경우 나라에서 하나를 거두면 백성은 그 두 배를 징수당하는 고통을 입게 됩니다. 이점이 가장 시급하게 개혁해야 할 부분입니다. 외교(外交)를 이야기하자면, 만약 신속하게 이익을 끌어내고 손해를 막는 방법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장치 이익은 모두 남에게 돌아가고 앉아서 조선만 피해를 보는 상황이 초래될 것입니다. 상공업 진흥을 위한 상국(商局)은 불가불 개설해야만 하며, 다른 화폐 없이 오로지 동전(銅錢)만 통용되고 있어 항상 쪼들리고 모자람을 걱정해야 하므로, 금・은 화폐나 지폐도 아마 아울러 통행시켜 그 폐단을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광무(礦務) 역시 이재(理財)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므로, 기술자를 초빙하여 채굴을 시작하는 일 역시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5) 율례(律例)를 바꾸어야 합니다. 무릇 시정을 할 때는 반드시 먼저 백성에게 믿음을 얻어야 하므로. 금지되고 막은 것을 크게 풀어 백성에 폐해가 되는 것을 없애야 하며, 그런 연후에야 백성은 생업을 즐기면서 이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법이 반드시 지켜지려면 응당 귀하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요행(僥倖)의 길을 엄격하게 차단하되, 조금도 어지럽힘이나 굽힘이 없어야 하며, 궁전 출입 제도를 정비하여 친근함을 이용하려는 경박한 무리를 배척해야 합니다. 무릇 허명에 얽매여 실질적인 피해를 가져오는 규칙・조례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철저하게 폐지하고 힘써 간편함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공・사의 의복은 명목이 너무 번잡하고 뒤섞여 있어 조정 관리들이 의례를 갖추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고, 제조나 양식이 부적절하여 아랫사람들은 일을 맡아 임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고 일을 망치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아마도 응당 중국 제도를 참작하여, 이를 변통하는 방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6) 상무(商務)를 확대해야 합니다. 조선은 이미 각국과 통상을 하게 되었는데, 온 나라의 사람들 모두 상무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아주 어둡습니다. 생각건대 백성을 깨우쳐 이익으로 유도하는 데에는 금지와 방어 조치를 없애고 상국(商局)을 설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조선은 과거 나라에서 상품을 전매하는 제도가 없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기강이 날로 이완되면서, 세력가나 국왕의 은총을 받는 무리가 제멋대로 이를 자행하여 상로(商路)를 막고 백성의 생업을 해치고 있으니, 먼저 이런 풍습을 제거한 다음에야 상국을 설치할 수 있고, 금지와 방어 조치를 없앨 수 있습니다. 현재 부두를 축조하고 세관(稅關)을 건설해야 하는 기한이 이미 다 되었으나, 사변 후에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지금 당장 급박한 근심으로, 마땅히 적당한 사람의 고용을 요청하여 그 권한을 맡긴 다음에야 자주(自主)의 권익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별지: 「8월 6일, 이홍장과 조영하・김홍집 등의 필담」: 중국・조선의 수로 통상 및 조선 사후 대책 6조에 대해 각기 논의하였습니다.
2) 「8월 6일, 이홍장과 조영하・김홍집 등의 필담(八月初六日, 與朝鮮大臣趙甯夏, 金宏集等筆談)」
이홍장: “전에 대원군을 만났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까?”
조영하: “별로 다른 얘기는 없었고, 대략 이중당 대인을 만난 얘기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다만 신속하게 귀국시키는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홍장: “출발하여 북경으로 가기 전에 다시 대원군을 만날 수 있습니까?”
조영하: “내일 출발하고자 하니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또 일전에 이미 다시 올 수 없다고 언급해둔 바 있습니다. 또 내일 북경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감히 오늘 배견・인사를 요청한 것은 북경에서 가서 표주를 올린 다음, 이중당 대인에게 통상 분야의 각 문제에 대한 분부를 받고자 해서입니다. 먼저 천진으로 돌아와 엎드려 그 요청이 허용될지 헤아려 보았는데 잘 알 수 없어, 이렇게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이홍장: “표주를 제출한 다음 청원서[呈文]을 갖추어 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천진으로 돌아와 통상 요무에 대해 보고하고 상의할 것이 있다면, 아마 수행하는 사람을 북경에 남겨서 삼가 답장 자문을 기다리게 한다면, 허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영하: “삼가 분부하신 대로 예부에 청원서를 올리겠습니다.”
이홍장: “내일 출발하는데 수로로 가는지 아니면 육로로 가는지 정해졌습니까?”
조영하: “육로는 진흙탕 길이라 몹시 힘들다고 합니다.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홍장: “육로는 진창길이고 오래 비가 온 다음이라 물로 막힌 곳도 많아 당연히 배편으로 가는 게 편할 겁니다. 또 최근 한성으로부터 받은 소식이 있습니까?”
조영하: “없습니다.”
이홍장: “오장경 제독이 7월 25일에 보낸 서신을 받았는데, 국왕은 이미 스스로를 탓하는 죄기조(罪己詔)를 내렸고, 자리를 차지한 무능한 신하들을 분별하여 해임하고, 아울러 내외 각 관에 우수한 인재를 보증하여 추천하면 파격적으로 등용하겠다고 지시하여 뭇사람이 탄복하며 기뻐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해이해지지 않는다면 이로부터 떨쳐 일어나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터입니다. 또 민비가 공격을 받아 한성에서 180여 리 떨어진 민 모의 집에 피하여 숨었었는데, 이미 군대를 파견하여 귀환을 호송하였다고 합니다. 민씨는 특히 대원군과 원수가 되었고, 왕비가 귀환하였으니 앞으로는 내변이 일어나는 일이 없겠습니까?”
조영하: “국왕께서 죄기조를 내리고 보증하여 추천하면 등용하겠다고 하신 일은 제가 한성에 있을 때 이미 알고 있었던 일입니다. 왕비의 귀환은 지금 처음 듣게 되었는데 놀랍고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아마 내변이 없을 것입니다.”
이홍장: “왕비가 여전히 생존하였다면, 귀하 등은 듣지 못하였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외척을 즐겨 끌어들여 등용한다는데, 민씨는 민영익을 제외하고 또한 공정하고 밝은 인재가 있습니까? 민영익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 확실합니까? 과연 다시 등용될 수 있겠습니까? 또 왕비와 이재면은 평일에 서로 혐오하는 일이 없었습니까? 사실대로 알려주길 바랍니다.”
조영하: “왕비께서 여전히 살아 있다고 외간에 확실히 의심스러운 소문이 있었습니다. 민씨 집안에는 따로 뛰어난 인재는 없으며, 민영익이 머리를 깎은 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변장하느라 그런 것이지, 승려가 되지는 않았으며, 바야흐로 모친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현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재면은 대원군의 아들이니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는 자연스럽게 분별될 것입니다.”
이홍장: “민영익은 왕비의 조카이고, 민겸호는 왕비의 삼촌이 맞습니까?”
조영하: “민영익은 왕비의 조카이고, 민겸호는 민씨 성으로 따지면 왕비가 14촌 여동생입니다. 대원군으로 이야기하자면, 민겸호의 외삼촌 숙부입니다. 또 왕비는 민씨로 민씨 일족에서 보면 민겸호는 친척 오빠뻘입니다. 대원군으로 이야기하자면 부인의 동생이고, 왕비로 이야기하자면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입니다. 또 왕비의 부친 민치록(閔致祿)은 아들이 없어, 족형(族兄) 민치문(閔致文)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들였는데, 민승호 역시 아들이 없어, 족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민겸호는 민승호의 친동생입니다. 민승호, 민겸호는 모두 대원군의 처조카입니다.”
이홍장: “대원군은 난군이 민겸호를 살해하였을 때 통쾌하다고 한 것이 확실히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돌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대원군의 부인이 한 번이라도 나서서 구하려 하지 않는 것 역시 이상한 일입니다.”
조영하: “비단 민겸호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친형 역시 난군에게 피살되었으나 구할 수 없었습니다. 부인이 어떻게 간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중국에서 이미 허락하여 조선은 각국과 수륙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따로 조항을 두지 않으면 안 되어서 따로 논의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마건충 도대에게 물어서 조선의 문제에 대해 참고하여 연구하여 몇 가지 조항을 적절하게 정해 줌으로써 저희가 따라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또 내년에 각국과 조약을 비준・교환한 다음 상무가 바야흐로 시작되는데, 별도의 통합적인 장정[統共章程]에 대해서는 역시 중국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전례를 모방하고자 그 원고를 한 부 얻어서 시행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대단히 다행이겠습니다.”
이홍장: “조선과 중국의 수륙무역 통상 조항은 마건충 도대 등을 독려하여 한참 마련하는 중이며, 이를 상주한 다음 총리아문에 조칙이 내려져 시행을 검토하고 통보하게 될 것입니다. 각국과의 조약 교환 이후 아마도 통합적인 장정을 상의하여 확정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중국과 서양 사이에 마련된 통합적인 장정 역시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조선 역시 이제 막 통상을 시작한 참이고 각국과의 조약 교환이 대체로 이미 이루어졌으니, 단지 조약에 따라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만약 따로 장정을 만든다면 각국이 변통을 요구하여 도리어 조약 본래의 면모를 잃게 될 우려도 있습니다.”
조영하: “지당하신 말씀이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홍장: “앞에 보여준 6조 가운데 민지(民志)를 안정시킨다,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두 조항은 전적으로 국왕이 주지하고 보신(輔臣)이 도와야 합니다. 군제 정돈은 특히 중요한데, 일본 교관은 언제 초빙하였고, 교련한 양창대 3백은 어떤 모델의 양창을 쓰고, 어디에서 구매하였습니까? 반란 이후 분실된 부분은 없습니까?”
조영하: “군제가 가장 중요한데, 일본 교관은 초빙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부사 공사가 데리고 온 수행원 육군 소위로, 재작년에 왔는데, 작년 봄에 군졸을 모집하여 100명을 교련하였으며, 양창은 일본에서 구입하였습니다. 나머지 200명은 올봄에 다시 모집한 것입니다. 반란 이후 인원과 양창 모두 분실되었습니다.”
이홍장: “일본 교관은 월급이 있었습니까?”
조영하: “조선 동전[高麗錢]으로 5백 량, 은으로 환산하면 70량에 가깝습니다.”
이홍장: “양창은 전장총[前膛槍]입니까 아니면 후장총[後膛槍]입니까?”주 002
조영하: “후장총입니다.”
이홍장: “이후에도 계속 일본인을 교련으로 초빙할 것입니까?”
조영하: “원래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려 뜻하던 것은 아니었고, 그때 호리모토[掘本, 일본 교관 이름]가 마침 왔기에, 대략 어떻게 교련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어떤 논의를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중국에 교관 초빙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아뢸 때도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중당 대인의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
이홍장: “여기서 교사를 적당하게 파견하는 것은 물론 안될 것은 없습니다. 일본인이 교련한 부대는 1인당 월봉으로 쌀을 얼마나 지급하였습니까?”
조영하: “합쳐 계산하면 대략 은 3량 정도입니다.”
이홍장: “재용 정리 조항에서, 관리의 부정・횡령은 반드시 응당 고쳐서 정돈해야 할며, 동전만 통용하는 것은 실로 불편함이 많으니 금・은을 반드시 같이 시험삼아 통용해야 하는데, 응당 서양 기술자를 초빙하고 국내의 광산을 조사하여 만약 금・은・주석・구리 등의 광물이 발견되면 신속하게 채굴하여 재료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폐는 유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지폐가 현재 가치가 많이 떨어진 것은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은행(銀行)과 은호(銀號)도 신속하게 조선과 중국의 부유한 상인을 끌어들여 가능한 한 빨리 개설하면, 각국과의 통상도 편하고 이익이 될 것입니다.”
조영하: “개혁하고 정돈하는 일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동전만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많으니, 따라서 금・은 화폐도 시험 삼아 통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지폐의 통용은 일본과 같은 폐해가 있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어, 편리할지 아닐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감히 질문을 올렸던 것입니다. 서양 기술자를 초빙하고 국내의 광산을 조사・채굴하는 문제는 이미 마건충 도대와 상세하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 점 역시 이중당 대인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지, 어떻게 처리하고 상인을 불러야 할지 알려주신 바에 따라 개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홍장: “지폐는 현은(現銀)의 부족 때문에 대신 통용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국가의 이익이 되는 것 같고, 또한 통용되는 것이 많고 오래되었으니, 상민이 은으로 바꾸고 그것을 내놓지 않는다면 반드시 가치가 떨어지고 신용을 잃게 되며 국가 역시 편리함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율례를 바꾼다는 조항에서 무릇 금지하고 막아서 상민에게 해로운 것은 반드시 적절하게 참작하여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이 생업에 안주하면서 이익을 추구하게 해야 하며, 국가는 그 편의에 따라 세금의 이익을 징수하니 공・사 양쪽의 이익입니다. 일본의 복장 변경은 서양인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바인데, 본국의 일반 서민에게까지 따지면 모두 다 바꾸어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조선이 만약 중국의 제도를 참작하여 관복을 변경한다면 안 될 것도 없지만, 갑작스럽게 변혁을 진행한다면 조정 관료들의 비용은 더욱 쪼들리게 될 것이니, 이것은 비교적 작은 문제라서 응당 늦추어야 합니다. 단 육・해군 장교나 병사는 반드시 좁은 소매의 짧은 옷으로 바꾸어야 훈련이나 전투에 도움이 될 것이니,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조영하: “조선에서 법으로 금지하여 일반 백성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신속하게 제거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안주하면서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상무를 진흥시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의복을 변통하는 조항은 응당 천천히 추진해야 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은 분에 넘치는 꾸밈이 아주 많아, 관직에 있는 사람이 입는 공복은 명목이 십수 가지나 되며, 그 밖의 일상 복장 역시 일곱, 여덟 개 명목으로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공무에 참석할 수 없으니, 이렇게 하면서 어찌 나라 꼴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관원은 이 때문에 누구나 이마를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일반 사대부나 서민 역시 명목이 많아 몹시 번거로워합니다. 또한 수십 명이 함께 모이면 입고 있는 복장이 모두 제각각이고, 양식 또한 지나치게 번거롭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일정한 공례를 가지고 먼저 변통한 다음에 지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단 육・해군 장교나 병사의 옷 역시 즉시 제도를 바꾸어,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홍장: “이 문제는 응당 조선의 군신이 스스로 정해서 처리해야 하겠지만, 서양식 복식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조영하: “어찌 서양식 복식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불가불 중국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이홍장: “상무(商務) 확대 조항은 이미 전에 분명하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부두 건설이나 관문 배치 등은 응당 신속하게 준비해야 하며, 국왕이 자문으로 요청해 오면, 인원을 파견하고 사람을 고용하는 문제는 당연히 적절하게 처리할 것입니다.”
조영하: “국왕께선 응당 신속하게 사람을 고용하는 문제로 자문을 보낼 것입니다. 나라에 한 달을 버틸 비축이 없는데, 어떻게 적절하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중당께서 이 문제로 신경을 쓰시게 해서, 정말로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이홍장: “귀하의 뜻은 국채(國債)를 빌리고자 하는 것 같은데, 얼마나 되는 액수를 빌리고, 어떻게 이자를 지불하고, 어떻게 본금을 상환할지의 문제는 다시 마건충 도대와 상의하십시오.”
조영하: “더욱 상의한 다음, 다시 아뢸 작정입니다.”
- 각주 001)
- 각주 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