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외무성에서 일본과 조선이 8개 조약을 체결했다고 주일본공사 여서창(黎庶昌)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첨부한 수행원 요문동(姚文棟)의 절략(節略)
일본 외무성에서 일본이 이미 조선과 8개 조 조약을 체결하였다고 알려 왔습니다.
8월 17일, 주일본 공사 여서창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7월 16일, 삼가 창자(昌字) 제15호 서신을 올렸는데, 이미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뒤이어 25일 학생을 선발하고 일본어와 일본문을 학습시키는 문제에 관한 답장 자문은 삼가 이미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이 일 처리가 성과가 나오기를 기다려 다시 자문을 갖추어 총리아문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문제에 대해 여기서는 최근 소식이 많지 않은데, 단지 마건충 도대가 대원군을 유인하고 사로잡아 경사로 보낸 일만을 알 뿐입니다. 이번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원조하러 간 것은 명분은 반란의 진압이지만 실질은 일본의 요구를 미리 막는 것인데, 어찌 알았겠습니까? 서력 9월 3일, 즉 (8월) 21일에 외무성이 공사관에 사람을 보내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보낸 전보를 알려주었는데, 조선 문제는 이미 타결이 되었고, 모두 8개 조항이 합의되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조선 정부가 20일 이내에 흉당을 체포・처벌하며, 일본 관리가 함께 심문한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일본인에게 위로금 5만 원을 지급한다는 것, 셋째는 군사비용 50만 원을 배상하되, 5년에 나누어 완료한다는 것, 넷째는 일본군이 1년 동안 유수(留戍)하며, 그 주둔 숙소는 조선이 건설해 준다는 것, 다섯째는 조선 국왕이 관원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지참하고 가서 사과한다는 것, 여섯째는 원산(元山)・동래(東萊)・인천(仁 川) 항구의 [항간리정(巷間里程)을] 50리로 늘리고, 2년 후에는 100리로 확장한다는 것, 일곱째는 11년 후 양화진(楊華津)을 통상항구로 만든다는 것, 여덟째는 일본인의 내지 유람을 허용하며, 증명서를 가진 모든 사람은 조선 관리는 전부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합의를 살펴보면 응당 대원군이 사로잡힌 이후인데, 이 조약을 조선 국왕이 주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가운데 군사비용 배상이나 통상항구 확장, 군대 주둔 등의 조항은 너무 요구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데, 조선 정부가 이렇게 쉽사리 사태를 마무리한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은 처음에는 중국의 군대를 보내 원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류큐 문제라는 옛 선례가 있어 의심이 쌓인 덕분에 자못 중국이 가운데 끼어들어 방해하고 난처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였으나, 중국 군대가 도착한 이후 피차간에 서로 예의를 지키며 왕래하고 또한 일본이 조선 정부에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깊이 간여하지 않음을 보게 되자, 아마 중국의 의도는 화평을 유지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되자 일본 국민의 의심도 점차로 풀리게 된 것 같습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이미 8월 9일에 출발하여 중국에 가기로 결정하였고, 같이 따라가는 서기관(書記官) 요시다 지로(吉田二郎), 서기생(書記生) 와타나베 요이치(渡邊與一)와 두 사람이니, 총리아문의 대인들께 알려주시길 빕니다. 조선 정치가 어떻게 처리되는 지에 관해서도 아울러 수시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편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수행원 요문동(姚文棟)의 절략」: 일본은 정탐을 몰래 길림에 보내 오장경 부대의 허실을 탐색하였으며,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또한 만주를 엿볼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수행원 요문동(姚文棟)의 절략(姚隨員節畧)」
삼가 비밀 보고를 올립니다.
듣기에 일본이 파견한 정탐 소네 도시토라(曾根俊虎), 마치다 지쓰이치(町田實一), 시미즈 겐이치로(淸水元一郎), 아즈마 지로(東次郎) 4명이 조선에서 몰래 길림(吉林)으로 들어간 다음 오대징(吳大澂)이 편련한 부대의 허실(虚實)을 탐색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 일본인이 이야기한 바로 스스로 아주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이 메이지 시대에 사람을 보내 중국 내지를 몰래 유람하게 한 일은 이미 한 두차례가 아닙니다. 앞의 네 사람 역시 이미 누차 이 일을 맡은 바 있으며, 그 가운데 소네(曾根)는 대략 작가로서의 명성이 있어 『청국탐시지략(淸國探視誌略)』, 『북청기행지략(北淸紀行誌略)』, 『청국근세란지(淸國近世亂誌)』 등을 펴내기도 하였는데, 이 책들은 모두 정탐 활동을 하였을 때의 기록입니다. 이들은 중국에 도착한 다음 중국 복색으로 갈아입고, 중국어에 두루 능통하여 가리거나 혼동시키기 쉬움을 믿고 결코 증명서를 휴대하지 않고 단지 한 두 명의 중국인을 고용하여 동행시킨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산동이나 복건 등의 내지에 있을 때 못된 무리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종용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일본인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것이 결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정탐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봉급은 보통보다 몇 배나 우대하는 액수로, 귀국한 다음에는 또한 승진이나 발탁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풍조가 점차 활발해져서 일본 국내에서는 공공연하게 정탐이라는 명목이 있어, 멀쩡한 사람들도 탐내는 바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번에 파견된 저명한 네 명 외에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몇몇 사람이 있는데, 중국의 어디로 파견될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복장을 바꾸고 잠행하는 것은 양국 사이의 조약에서 허용한 바가 아니며, 하물며 반란을 선동한다든가 하는 일은 더욱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대인께서 총리아문에 서신으로 알려 청하고자 하는데, 비밀리에 연해 각 성과 길림 등지에 지시하여 몰래 현지 조사를 실행하여 이를테면 통상항구가 아닌 곳에 몰래 가장하고 유람하거나 증명서를 휴대하지 않은 외국인을 발견하게 되면 즉시 현장에서 처형하여 장래 이런 못된 풍조가 계속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지의 그물이 느슨해지고, 이 또한 외국인이 중국을 경시하는 빌미의 하나가 됩니다. 이런 의견이 타당한지 아닌지 엎드려 결정을 내려주시길 간청합니다. 수행원 요문동(姚文棟)이 삼가 보고를 올립니다.
또한, 일본인들은 망령되이 비단 조선을 넘겨다볼 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엿보는 뜻을 보이고 있으니, 소네(曾根)의 『북청기행지략』에 실린 바에 의하면, 봉천(奉天)・길림(吉林) 두 성에 관한 책으로 시마 히로타카(島宏毅)의 『만주기행(滿洲紀行)』, 후루카와 노리타카(古川宣譽)의 『요동일지(遼東日誌)』도 있는데, 역시 모두 이곳을 정탐한 사람들이 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