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응(李昰應)의 귀국을 불허하고 관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내용의 상유(上諭)를 초록하여 보낸다고 예부(禮部)가 총리아문에 보내는 문서
조선 변란의 수괴 이하응의 귀국을 불허하고 오장경이 통솔하는 관군은 잠시 조선에 주둔하라는 내용의 상유를 초록하여 보냅니다.
8월 19일, 예부(禮部)에서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광서 8년 8월 12일, 내각(內閣)에서 다음과 같은 상유(上諭)를 받았습니다.
조선은 우리 대청(大淸)의 속국(屬國)으로 대대로 번봉(藩封)의 위치를 지켜왔고 평소 공순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조정에서는 조선을 내복(內服)과 동등하게 보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였다. 일전에 장수성이 상주하기를, 조선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갑작스레 6월에 왕궁을 포위 공격하여 왕비가 피해를 입고, 대신이 피살되고, 일본 공사관 역시 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마땅히 유지를 내려 장수성으로 하여금 수륙의 각 군대를 마련하여 조선에 보내 소탕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홍장의 정우(丁憂) 휴가 기한이 만료되면 불러서 천진으로 보내 함께 조사하고 처리하도록 하였다. 곧이어 제독 오장경, 정여창과 도원 마건충 등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 도성으로 진군하여 난당 백 수십 명을 잡아들이고 그 수괴를 죽여서 그들을 위협에서 풀어주었다. 열흘 만에 변란이 모두 평정되고 인심은 크게 안정되었다. 조선의 여론을 탐문해 보니 모두가 병졸들이 봉록을 요구한 데서 발단이 되었지만, 이를 자극하여 큰 변란으로 만든 것은 모두 이하응의 주모(主謀)에서 나왔다고 한다. 오장경 등을 통해 그를 천진으로 압송하고, 유지를 내려 이홍장, 장수성에게 넘겨 그 사정을 규명한 다음 상주하게 하였다. 이하응은 국왕이 어렸을 적에 권력을 전횡하고 백성들을 학대하여 그 악행의 행적이 분명하다. 국왕에게 권력을 돌려준 후에 나날이 원망이 깊어졌고, 작년에 그 아들인 이재선이 반역을 계획한 사건도 있었다. 이번에 난군이 처음 봉기하였을 때 먼저 그의 집에 찾아가 하소연하였으나 올바른 말로써 저지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사후에는 멋대로 정사를 농단하고 위세와 복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도 유독 난당의 죄행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쳤다. 이홍장 등이 유지에 따라 꾸짖으며 심문하였으나 여전히 계속해서 다방면으로 숨기고 꾸미며 실토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무리를 지어 악행을 저지르고 앞장서서 재앙을 일으킨 책임은 실로 백 마디 말로도 회피하기 어렵다. 그가 위세를 쌓아두고 종사가 위태로워지도록 주모한 죄는 본디 마땅히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해야 한다. 다만 이하응이 조선 국왕의 존친(尊親)이라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만일 끝내 그를 중벌로 다스린다면 도리어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스스로 몸 둘 바를 없게 할 수 있다. 이에 특별히 성대한 은혜를 베풀어 잠시 너그러이 감면해 주고자 하니, 이에 따라 이하응에 대해서는 그 치죄를 면제하지만, 직예성 보정부 지방에 안치하여 영원히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며, 직예총독이 생활물자를 우대하여 지급하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엄격히 제한하도록 하여, 조선에서 재앙의 발단을 없애고 조선 국왕을 윤기(倫紀)의 변고로부터 지켜주도록 하라. 오장경이 통솔하는 관군은 그대로 잠시 조선에 주둔하여 군사적 통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 조선의 사후처리에 대해서는 이홍장 등이 마음을 다해 협의하고 처리하여 조정이 법을 참작하고 사정에 의거하여 번복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지극한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이와 같은 유지를 받았습니다. 응당 공손히 유지를 초록하여 총리아문에 알려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