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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조선의 사변은 일본과 관련된 자들이 일으킨 것이므로 이하응(李昰應)을 석방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를 청하고자 한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관련 필담 등 첨부 문서

조선의 사변은 조신(朝臣) 가운데 일본과 무리 지은 자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므로, 이하응을 석방하여 돌려보내 인심을 수습시키라는 상유를 청하려고 합니다.
  • 발신자
    北洋大臣 李鴻章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4년 10월 28일 (음)(光緖十年十月二十八日) , 1884년 12월 15일 (光緖十年十月二十八日)
  • 문서번호
    4-7-16(902, 1509a-1513b)
10월 28일,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10월 24일, 이번 조선에서 발생한 변란의 이유가 여전히 이하응의 잔여 세력 때문인지 아닌지를 물으시는 비밀 유지를 받았습니다. 이미 전보를 보내 대신 상주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번에 발생한 변란은 모두 신하 가운데 일본과 무리 지은 자들이 일으킨 것으로서 이들은 모두 대원군의 무리가 아닙니다. 조선인들은 대원군이 돌아오기를 심히 바라고 있으니, 응당 석방하여 돌려보낸다는 상유를 청하고 오장경, 정여창 등에게 넘겨주어 데리고 가게 하여 조선인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듯합니다.”주 001
각주 001)
이홍장이 총리아문에 발송한 전보의 원문은 『李鴻章全集』21 電報1, 문서번호 G10-10-60, p.364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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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조선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군대를 보내 평정하던 당시부터 중국 문무 관원으로 조선 경성에 주재하는 자가 많아, 조선 내정이 흥쇠하게 된 연유를 점차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종전 이하응이 10년 동안 국정을 장악하던 동안에 비록 그가 행한 조치 가운에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권력을 부리는 데 있어서 여전히 자유자재로 하였으니, 그 재능과 기세는 실로 조정의 관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갑술년(1874년)에 이르러 왕비가 그 친정인 민씨를 끌어들여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이하응은 정권을 돌려주고 퇴거하였는데, 때때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왕비 및 민씨 일족을 원수 보듯이 하면서 재앙과 변고가 계속되어, 마침내 광서 8년 6월의 사변(임오군란)이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관군이 가서 변란을 평정하자마자 부득불 이하응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안치시켜 재차 그가 선동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주청하였습니다. 저는 응당 조선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 삼가 정치를 강구하고 다른 나라와의 외교를 연결하여 자강을 도모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조선 국왕이 어리석고 관대하여 민씨들은 정권을 좌우하고, 신하 가운데 일본과 무리 짓는 자들을 편들면서 우롱되었고, 일본인들은 곁에서 부추기기를 조선은 자주이며 다른 나라의 속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여전히 상국을 섬기는 예에 따르는 듯하였지만, 속으로는 점차 두 마음을 품고 경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올해 프랑스-베트남의 사건이 급박해지자 조선의 군신들 가운데 소문에 미혹된 자들이 더욱 늘어나 일본과 결탁하여 스스로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무릇 조선에서 돌아온 자들이 말하기를, 조선에서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사민(士民)은 모두 이하응의 귀국을 바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현재와 같은 변란의 때에는 특히 마땅히 인심을 수습하는 방법을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경군(慶軍) 영무처(營務處)의 원세개는 오랫동안 조선에 있어서 여론과 사정에 익숙합니다. 어제 그가 보낸 가서(家書)에서도 또한 이하응을 군대와 함께 돌려보낸다면 몰래 군영 중에 안치시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주 002
각주 002)
원세개가 원보령(袁保齡)에게 보낸 가서(家書)는 광서 8년 10월 18일 발송된 것으로 원문은 『袁世凱全集』1, 문서번호 1-37. pp.34-35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서신에서 원세개는 갑신정변에서 일본의 의도가 조선의 병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일본의 병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청군 출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편, 인심의 수습책으로서 이하응의 귀국과 군영 안치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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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道員) 원보령(袁保齡)주 003
각주 003)
원보령(袁保齡, 1841~1889)은 하남(河南) 항성(項城) 출신으로 조운총독(漕運總督) 원갑삼(袁甲三)의 삼자(三子)이자 원세개의 당숙이다. 동치(同治) 연간 거인(擧人) 출신으로 내각중서(內閣中書), 시독(侍讀) 등을 역임하고 『초평월비방략(剿平粵匪方略)』, 『초평염군방략(剿平捻軍方略)』, 『목종실록(穆宗實錄)』 등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발탁되어 1881년부터 천진(天津)과 여순구(旅順口)의 해방(海防) 업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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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극력으로 종용하면서 말하기를, 아비를 자식 곁으로 보내는 것이 도의에 비교적 순응된다고 하였으니, 견식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살펴보건대 이하응을 구금한 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10월에 경사에 가서 황상을 직접 뵙고 이하응을 석방하여 돌려보내는 은혜를 간구하여 조선을 구제하는 방법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사변이 갑자기 발생하였기에 거듭 헤아려보니, 이하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그가 방법을 마련하여 보호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우선 보정에서 이하응을 돌보고 있는 도원(道員) 심능호(沈能虎)주 004
각주 004)
심능호(沈能虎, ?~?)는 절강성(浙江省) 해염현(海鹽縣) 출신으로 이홍장이 염군(捻軍)을 진압할 때 종군하였으며, 직예통영도(直隸通永道)를 역임하였다. 이후 초상국(招商局)의 회판(會辦), 총판(總辦)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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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비밀리에 당부하여 그의 개인적인 의사를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보내온 보고서와 이하응과의 문답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못 나라를 지키고 위기에서 지탱하려고 하며, 삼가 중조(中朝)를 섬기겠다고 자임하고 있었습니다. 이하응은 65세이지만 정력이 여전히 강건하여 바야흐로 일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좌절을 겪으면서 그의 의지와 기개가 평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를 풀어주어 돌려보내면 반드시 감격하여 보답하려고 할 것입니다. 26일 전보로 보내신 상유에서는 이하응이 돌아가면 조선 국왕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하셨지만, 이는 광서 8년 당시의 사정입니다.주 005
각주 005)
이홍장이 말하는 26일의 전보 상유는 『李鴻章全集』21 電報1, 문서번호 G10-10-067, p.366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상유에서는 이하응이 귀국하면 도리어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이홍장에게 오대징(吳大澂)과 함께 면밀히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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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민비가 이미 피살되었고 민씨 일당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하응은 조선에 대해서 별다른 원한이 없으며, 국왕과의 부자 관계를 고려하였을 때 의외의 위기에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도원 심능호가 올린 보고서와 이하응과 필담한 기록을 올리니 총리아문에서 대신 황상께 올려 처리하도록 은혜를 베푸실지 엎드려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삼가 신속히 보냅니다.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조록.
별지: 「이홍장이 받은 후보도 심능호의 품문」: 이하응은 자못 시무를 알고 시국에 밝으며, 스스로 이홍장 중당의 뜻을 모두 준수하여 조선을 보호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1) 「이홍장이 받은 후보도 심능호의 보고서(候補道沈能虎來禀)」
삼가 보고합니다.
25일 오각(午刻)에 23일 저녁에 지시를 내리신 비밀 서신을 받아 공손히 몇 차례 읽어보고 그 내용을 모두 확인하였습니다. 지시에 따라 즉시 대원군을 찾아가서 좌우를 막고 풍문과 관련하여 필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급하게 묻기를,
“국왕이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일본이 품고 있는 악한 의도를 일찍부터 우려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서계(書契)를 왕래할 때는 지금껏 피차간 모두 정부에 전달하여 상주하게 하였는데, 병인년(丙寅年, 1866년) 일본에서 보내온 공문에 ‘칙(勅)’을 사용하고 ‘황(皇)’과 ‘짐(朕)’을 칭하면서 이르기를 “지금부터 관백(關白)을 없애고 짐(朕)이 만기(萬機)를 친히 총람(總攬)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주 006
각주 006)
병인년 일본이 보내온 공문이란 그 내용을 미루어 보아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가 조선 예조참판에게 일본의 왕정복고 소식을 전하는 대수사서계(大修使書契)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해당 서계는 메이지 원년, 즉 1868년인 무진년에 발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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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년에서부터 계유(癸酉, 1873년)년까지 8년간 제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그 서계를 모두 물리쳤습니다. 그 당시 또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주 007
각주 007)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1842~1919)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메이지 초기 외무성에서 대조선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메이지 정부에서 추진한 對조선 외교의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 1870년부터 1874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부산에 파견되었으나, 조선 측의 완강한 거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1876년 강화도 사건의 담판을 위해 파견된 특명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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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머물고 있던[그 지역은 조선과 일본이 서로 교역하는 곳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정해졌습니다. 일본에서 200명의 병사를 보내 지켰고, 조선에서는 식량과 옷감을 지급하였습니다. 동치 병자년(丙子年, 1876년)부터 통상하면서 경성에 주재하게 되었으므로 조선이 지급한 것을 수령하지 않았습니다] 동래백(東萊伯)[동래백(東萊伯)은 중국의 지부(知府) 직책과 같습니다.] 정현덕(鄭顯德)과 훈도(訓導) 안동준(安東晙)이 준엄한 말로써 질책하기를 “우리나라는 중국을 받들어 섬겨왔다. 지금 보내온 서계는 격식에 위배되니 결코 접수할 수 없다. 만일 전과 같은 서계라면 우리 정부에 올려보내고 이전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이 검을 뽑아 위협하였지만, 우리는 계속 거부하였습니다. 제가 계유년에 정권을 돌려주자 비로소 일본과 결탁하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갑술(甲戌, 1874)년에는 안동준을 참(斬)하였고, 병자(丙子, 1876)년에 일본 관원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주 008
각주 008)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는 사쓰마 출신으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메이지 유신 후 개척장관(開拓長官)으로 훗카이도(北海道) 경영에 종사하였다. 1876년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에 임명되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1888~1889년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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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을 이끌고 오자, 왕비가 그 서계(書契)를 접수하였으며, 작년에는 또한 정현덕(鄭顯德)을 참(斬)하였습니다. 간당(奸黨)은 일본을 의지하고 중국(中國)에 저항하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일 정무(政務)를 떠나지 않았다면 범람하는 서계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고, 조선과 일본의 교린은 옛날과 같았을 것입니다. 어찌 국운이 쇠퇴할지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골수에 병이 들었는데, 조선 국왕이 또한 인자하기만 하고 떨쳐 일어서려는 생각이 부족하며, 계획하기만 좋아하고 결단력이 없으며, 또한 왕비가 정사에 간여하고 간당이 주위에서 아첨하기만 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현재 왕비가 없고, 저는 비록 연로하여 힘이 없지만, 큰 소리로 국왕을 보필할 수 있습니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듯 엎드려 중국 황제의 위엄과 이홍장 중당의 비호에 힘입어 구름과 안개를 열어젖히고 국가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그의 말뜻을 엿보면 여전히 일을 담당할 만한 힘이 있는 듯합니다. 여기에 그와 나눈 문답 10장을 비밀리에 올리니 살펴봐 주십시오. 그가 답한 제3조는 반드시 다른 나라와 교제하여 일본을 제어한다는 내용인데, 그 뜻이 미국에 있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상국이 구제해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류큐[琉球]와 같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못 시무(時務)에 대해 견식이 있고 시국(時局)에 밝습니다. 그는 줄곧 중당 대인의 지시를 마치 군령장(軍令狀)처럼 모두 준수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습니다. 또한 제가 조선에 아직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물었는데, 그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13명의 이름을 4쪽에 적었습니다. 삼가 합쳐서 올리니 살펴봐 주십시오. 삼가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엎드려 살펴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별지: 「후보도 심능호와 조선 대원군의 필담」: 이하응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에 대해 서술하였습니다.
 
2) 「후보도 심능호와 조선 이하응의 필담(候補道沈能虎與朝鮮李昰應筆談)」
심능호: “근래 들리기로는 조선에 변고가 발생하여 민영익이 피격을 당하였으나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 달 18일, 일본 병사들이 국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대신(大臣) 윤태준 등 6명을 살해하였다고 합니다. 재상들은 권력을 상실하고 외서(外署)는 모두 일본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군대가 입궁하고자 하였지만, 조선인들이 왕명을 전하며 저지하였고, 일본인들이 곧이어 왕을 옹위하여 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 다른 풍문에 따르면 왕비는 이미 사망하였으며, 왕은 어디에 숨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병사들이 입궁하여 일본 병사들을 죽이고, 우리 군의 통령(統領), 장령(將令) 등이 입궁하여 보호하려고 하자 일본 병사들이 먼저 총을 쏴서 결국 교전하였다고 합니다. 대략 왕은 무사한 듯합니다. 공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가국(家國)의 문제에 대해 세세하게 헤아려 보신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이 같은 변고의 때에 나라를 다스리는 길이란, 마치 의사가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나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국난을 평정하고 조정을 도우시겠습니까? 어떻게 신중하게 인재를 쓰고 현명한 자와 간악한 자를 구별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상국을 섬기고 이웃 나라와의 교제를 돈독히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자강을 도모하고 외적을 막으시겠습니까? 공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시는 분이니, 너무 과격하지도 또한 너무 타협적이지도 않은 방법을 적절히 마련하고 계실 것입니다. 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으니, 나랏일이 곧 집안일이기 때문입니다. 조목별로 나누어 말씀해 주십시오.”
대원군: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백성들을 구제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삼가 마땅히 의사를 부르고 약을 써서 적절함을 도모토록 해야 합니다. 통상에 있어서는 신의(信義)가 우선이니 또한 마땅히 진심으로 방법을 마련하여 제가 이전에 말한 척화(斥和)가 잘못된 말이었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는 모두 상국을 받들고 중당 대인에게 의지한 연후에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형이 이것을 보증해 주고, 위에는 푸른 하늘이 있으니, 아우가 어찌 감히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 제 처지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 나랏일이 곧 집안일로서 어찌 감히 재차 가르침을 청하겠습니까?
첫 번째는 종사를 안정시키는 것은 백성을 정돈한 후의 일입니다. 이는 위세에 의지하여 행하게 되면 자연스레 실마리가 마련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 조정의 기강과 관계된 일입니다. 선비들이 숨고 사람을 피하고 있는데, 만일 제가 정무를 처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하나하나 그 재능을 드러낼 것입니다. 또한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가려서 사람을 쓰되, 이 또한 천조(天朝)의 위세에 의지하여 행할 뿐입니다.
세 번째, 상국을 받들어 섬기는 것에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200여년 동안 소국을 어여삐 여겨주시는 은혜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필시 다른 나라와의 교제가 있은 연후에야 일본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스스로 행할 뿐 다른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중당 대인을 의지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이 또한 스스로 도모해야 하는 계획이니, 어찌 재차 가르침을 기다리겠습니까? 오로지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중당 대인의 지시를 준수할 것입니다. 상국에서 처리하시는 까닭에 아우된 자로써 과거의 원한을 논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이를 봄에 이미 맹세하였으니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송나라 범충선(范忠宣)이 아들을 경계시킨 일을 줄곧 지키고 있습니다.주 009
각주 009)
범충선(范忠宣)은 북송의 유명한 재상 범순인(范純仁, 1027~1101)을 말하는데, 충선(忠宣)은 그의 시호이다. 범충선(范忠宣)이 아들을 경계시킨 일이란, 『명심보감(明心寶鑑)』 「존심편(存心篇)」 등에 나온다. “범충선공이 자제들을 훈계하며 말하였다. ‘사람이 지극히 우매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데는 밝고 비록 지극히 총명하더라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둡다. 너희는 다만 언제나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질책하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范忠宣公戒子弟曰,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爾曹但常以責人之心責己, 恕己之心恕人, 則不患不到聖賢地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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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형이 아직도 아우를 믿지 못합니까? 저는 마땅히 상국을 받들고 이웃 나라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조선을 안무하고 국왕을 보호하여 정무(政務)를 분명하게 할 것입니다. 형이 백 마디 말로써 그것을 보증한다면, 저는 군령장(軍令狀)을 갖출 뿐입니다.”
심능호: “이번의 변고를 겪었는데도 국왕이 여전히 떨쳐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국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정돈하려고 하면 또한 일본의 간여로 장애가 생길텐데 그것은 어찌 하실 것입니까?”
대원군: “국왕이 떨쳐 일어날지 아닐지 감히 억측할 수 없지만, 제가 만일 조선으로 돌아가, 황상의 위엄을 받들고 중당 대인에게 의지한다면 도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특별히 대답할 수 있는 바는 오로지 인심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10년 동안 과연 백성에게 해를 입힌 바가 없었는데, 이를 보고 믿게 된 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현재 상무를 통해 백성을 부유케 할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민씨의 힘으로 조화롭게 규합할 리 만무합니다. 조선의 일에 대해 만일 상국에서 시급히 구제하지 않는다면 필시 류큐[琉球]처럼 될 것입니다. 조선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이 비록 집안일과 나랏일이기는 하지만 중당 대인께서 제시하는 지시를 일관되게 준수할 것이며, 저는 두 손을 모아 받들겠습니다.”
심능호: “현재 헤아려 보면 고관 가운데 아직 가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사람들 가운데 능히 대경대법(大經大法)을 지키고, 정도를 지키며 아부하지 않고, 뜻을 세우고 굳게 지키는 자가 있습니까? 아울러 능히 시무(時務)를 알고 정체(政體)에 통달한 자가 있습니까?”
대원군:
신응조 중당[81세, 조정에서 물러나 나오지 않는 사람], 경학과 문장에 뛰어남.
강로 중당[76세. 현재 유배 중], 자못 견해가 있음.
김병덕 중당[60세, 현재 재상], 세상과 타협하지 않음. 조정을 떠나고자 하지만 떠나지 않으며 충효(忠孝)가 모두 온전한 인물. 송나라 이강(李綱)주 010
각주 010)
이강(李綱, 1083~1140)은 자(字)가 백기(伯紀)이며 복건 소무(福建 邵武) 출신이다.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1126) 금군(金軍)이 남하하자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서 개봉(開封) 방어를 지휘하고 금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하동(河東), 하북선무사(河北宣撫使), 중서우복야(中書右僕射) 겸 중서시랑(中書侍郎)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속적으로 금군에 대한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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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할 수 있을 만한 인물로 일컬어짐. 단 나이가 많고 병이 많으며, 그간 생사 여하를 알지 못함.
재상 김병주[김병덕과 사촌, 58세], 병을 칭하여 고향으로 물러남. 아주 견고하고 확실함이 장점.
김병시[병덕, 병주와 사촌, 53세], 단아하여 쓸만함.
조영하, 40세, 신중하고 명민함이 장점. 남에게 은혜를 베품.
조강하[조영하의 형 44세], 쓸 만함.
김유연, 66세 강직하고 쓸 만함.
한장석, 50여 세, 단아하고 문재가 있음.
이건창, 33세 문장이 뛰어남.
성이호, 60여 세, 쓸 만함.
[김학진, 김명진] 쓸 만함.
그 나머지 산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음. 이들은 마음을 다하여 널리 찾아야 할 것임.

  • 각주 001)
    이홍장이 총리아문에 발송한 전보의 원문은 『李鴻章全集』21 電報1, 문서번호 G10-10-60, p.364에 수록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원세개가 원보령(袁保齡)에게 보낸 가서(家書)는 광서 8년 10월 18일 발송된 것으로 원문은 『袁世凱全集』1, 문서번호 1-37. pp.34-35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서신에서 원세개는 갑신정변에서 일본의 의도가 조선의 병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일본의 병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청군 출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편, 인심의 수습책으로서 이하응의 귀국과 군영 안치를 제시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원보령(袁保齡, 1841~1889)은 하남(河南) 항성(項城) 출신으로 조운총독(漕運總督) 원갑삼(袁甲三)의 삼자(三子)이자 원세개의 당숙이다. 동치(同治) 연간 거인(擧人) 출신으로 내각중서(內閣中書), 시독(侍讀) 등을 역임하고 『초평월비방략(剿平粵匪方略)』, 『초평염군방략(剿平捻軍方略)』, 『목종실록(穆宗實錄)』 등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발탁되어 1881년부터 천진(天津)과 여순구(旅順口)의 해방(海防) 업무를 담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심능호(沈能虎, ?~?)는 절강성(浙江省) 해염현(海鹽縣) 출신으로 이홍장이 염군(捻軍)을 진압할 때 종군하였으며, 직예통영도(直隸通永道)를 역임하였다. 이후 초상국(招商局)의 회판(會辦), 총판(總辦)으로 활동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이홍장이 말하는 26일의 전보 상유는 『李鴻章全集』21 電報1, 문서번호 G10-10-067, p.366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상유에서는 이하응이 귀국하면 도리어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이홍장에게 오대징(吳大澂)과 함께 면밀히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병인년 일본이 보내온 공문이란 그 내용을 미루어 보아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가 조선 예조참판에게 일본의 왕정복고 소식을 전하는 대수사서계(大修使書契)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해당 서계는 메이지 원년, 즉 1868년인 무진년에 발송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1842~1919)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메이지 초기 외무성에서 대조선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메이지 정부에서 추진한 對조선 외교의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 1870년부터 1874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부산에 파견되었으나, 조선 측의 완강한 거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1876년 강화도 사건의 담판을 위해 파견된 특명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는 사쓰마 출신으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메이지 유신 후 개척장관(開拓長官)으로 훗카이도(北海道) 경영에 종사하였다. 1876년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에 임명되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1888~1889년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9)
    범충선(范忠宣)은 북송의 유명한 재상 범순인(范純仁, 1027~1101)을 말하는데, 충선(忠宣)은 그의 시호이다. 범충선(范忠宣)이 아들을 경계시킨 일이란, 『명심보감(明心寶鑑)』 「존심편(存心篇)」 등에 나온다. “범충선공이 자제들을 훈계하며 말하였다. ‘사람이 지극히 우매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데는 밝고 비록 지극히 총명하더라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둡다. 너희는 다만 언제나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질책하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范忠宣公戒子弟曰,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爾曹但常以責人之心責己, 恕己之心恕人, 則不患不到聖賢地位也)’.” 바로가기
  • 각주 010)
    이강(李綱, 1083~1140)은 자(字)가 백기(伯紀)이며 복건 소무(福建 邵武) 출신이다.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1126) 금군(金軍)이 남하하자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서 개봉(開封) 방어를 지휘하고 금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하동(河東), 하북선무사(河北宣撫使), 중서우복야(中書右僕射) 겸 중서시랑(中書侍郎)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속적으로 금군에 대한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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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변은 일본과 관련된 자들이 일으킨 것이므로 이하응(李昰應)을 석방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를 청하고자 한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관련 필담 등 첨부 문서 자료번호 : cj.k_0003_0070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