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압록강 중상류 주변의 자연지리와 환경
2. 압록강 중상류 주변의 자연지리와 환경
1) 함경도 지역과 두만강 유역
고구려는 1세기에 국가체제를 확립한 다음, 먼저 함경도-두만강 방면으로 진출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시조 동명성왕대에 태백산(백두산) 동남의 행인국(荇人國)과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대무신왕대에 개마고원의 개마국(蓋馬國)과 구다국(句茶國)을 점령했다고 한다. 태조왕대에는 개마고원을 넘어 함흥평야의 동옥저를 복속하고, 118년 화려성(華麗城) 공격을 시발로 동예로 진출해 2세기 말에는 영흥만 일대의 동예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다.
고구려가 가장 먼저 함경도-두만강 방면으로 진출한 것에는 후한의 지배력이 이 지역으로 거의 미치지 않거나 덜 미친 국제정세가 크게 작용했다. 또한 이 일대는 압록강 중상류처럼 산간지대이면서 만주와 한반도의 접경지대라는 지정학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함경도 지역은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관북지방이라 불리며 한반도 전체의 지역 구분에서는 북부지역에 속한다. 함경도 지역은 다시 함경산맥을 경계로 북부 고원지대와 함경도(관북) 해안지대로 구분되는데, 두 지역은 지형이나 기후 모두 큰 차이가 있다(지도 10 참조).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고원지대는 함경산맥, 낭림산맥, 마천령산맥 등으로 둘러싸여 평탄한 고원대지를 이룬다. 함경산맥이 바다에서 오는 습기를 차단하여 연강수량이 600mm 안팎에 불과하며, 하천의 침식작용이 활발하지 않아 융기지형인 고위평탄면이 잘 남아 있다(권혁재, 2003). 연평균기온은 2~5˚C로 한반도에서 가장 낮고, 무상일수도 120일 내외로 240일인 남해안지역의 절반에 불과하다(권혁재, 2003; 박병익, 2008).
이러한 생활에 불리한 자연환경 때문에 이 지역의 인구밀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낮고(김종욱, 2008), 강력한 정치체가 등장하기도 힘들었다. 이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 이 지역으로 진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고구려가 북옥저 정복에 앞서 복속한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 동옥저 진출에 앞서 점령했다는 개마국과 구다국 등은 북부 고원지대와 그 주변 산간지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산맥 동남쪽의 함경도(관북) 해안지대는 동해안을 따라 평야가 기다랗게 펼쳐질 뿐 아니라, 기후도 북부 고원지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 원산 지역을 개마고원과 비교하면, 연평균기온은 9˚C나 높고 연강수량도 600mm나 많다. 이는 함경도 해안지대가 동해에 면하여 습윤하고, 낭림산맥과 함경산맥 등이 한랭한 북서계절풍을 막아주기 때문이다(강석오, 1971). 함경도 해안지역은 북부 고원지역에 비해 사람이 살기에 훨씬 좋은 자연환경인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조의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거주한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으로 길어 천리나 된다. … 토지가 비옥하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는데, 오곡에 적합하여 농사를 잘 짓는다”라는 기사는 이러한 자연환경을 잘 반영한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는 고조선시기에 임둔(臨屯)이라는 정치체가 등장했고, 한나라도 고조선을 멸망시킨 다음 이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 또한 고구려가 진출하기 이전에는 북옥저, 동옥저(남옥저), 동예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함경도 동해안지역은 남북으로 기다랗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기후 차이가 많이 난다. 가장 남쪽의 영흥 이남은 온도가 높고 연강수량도 1,000mm 이상으로 온난습윤한 반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온도가 낮아지고 강수량도 감소한다. 특히 길주 이북의 함북 해안지역은 5~6월에도 짙은 안개가 많이 끼어 냉해(冷害) 피해를 자주 입는다. 이에 이 지역을 기후에 따라 마천령산맥 북쪽의 함북 해안지대, 북청-단천 일대의 함남 북부 해안지대, 함흥 이남의 함남 남부 해안지대 등 세 개의 소지역으로 세분한다(강석오, 1971; 지도 4 참조).주 010

지도4 | 함경도 해안지대의 소지역 구분(임덕순, 1992b)
이러한 소지역 구분은 북옥저, 동옥저(남옥저), 동예 등의 분포지역과도 깊이 연관된다. 함경도 해안지대의 북부와 중부 기후구는 백두산에서 동해안으로 뻗어 내린 마천령산맥을 경계로 구분되는데, 북옥저와 동옥저(남옥저)의 경계도 대체로 이 일대로 추정된다. 다만 동옥저의 중심지는 함흥평야, 동예의 중심지는 영흥-안변 일대로 정평과 영흥 사이의 산줄기가 경계를 이루지만, 양자 모두 함경도 해안지대의 남부기후구로 분류된다.
동옥저(남옥저)와 동예의 중심부가 같은 기후구에 속한 것인데, 이와 관련해 남부기후구가 다시 함흥평야와 안변 지역 사이의 정평-영흥을 경계로 세분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함남 남부 해안지대에는 영흥만을 따라 함흥평야, 영흥평야, 안변평야 등이 펼쳐져 있는데, 각 평야는 해발고도가 낮은 구릉성 산줄기로 구분되므로 이들을 합쳐 함남평야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이 지역의 기후는 정평과 영흥을 가르는 산줄기를 경계로 북쪽의 정평-함흥 일대와 남쪽의 영흥-안변 일대가 뚜렷이 대조될 정도로 차이가 난다(지도 4 참조).
가령 영흥 이남 지역이 연평균기온 10.5˚C, 무상일수 190일, 연강수량 1,000~1,300mm 등으로 온난습윤한 반면, 정평 이북은 그 남쪽보다 연 평균기온이 1˚C 낮고, 연강수량도 800mm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영흥 이남은 가을보리의 파종이 가능하지만, 정평 이북은 그루갈이가 힘들다(강석오, 1971).주 011 동옥저(남옥저)와 동예의 경계선인 정평과 영흥 사이의 산줄기가 함남 남부기후구의 소지역 구분선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옥저(남옥저)와 동예의 분포 권역은 기후에 따른 지역 차이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함경도의 북부 고원지대와 해안지대는 험준한 함경산맥 때문에 북청-풍산의 후치령(1,335m), 신흥-풍산의 금패령(1,676m), 함흥-부전호의 부전령(1,445m), 함흥-장진의 황초령(1,200m) 등 고개를 통해서만 내왕할 수 있었다. 마천령산맥도 혜산-무산의 허항령(1,401m)과 최가령(1,572m), 혜산-길주의 남설령(2,150m) 등을 통해 내왕할 수 있었다(권혁재, 2003). 험준한 함경산맥과 마천령산맥으로 인해 빈번하게 교류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함경남도 해안지역도 홍원-단천 구간은 함경산맥과 마천령산맥의 지맥이 동해안까지 뻗어 있어 함관령(480m), 남갈령(318m), 마운령(418m), 마천령(873m) 등을 넘어야 했다. 함경북도 동남해안에는 화산의 분출로 이루어진 칠보산 지루(地壘)가 분포하여 내륙의 단층곡(斷層谷)인 길주-명천지구대를 따라 교통로가 발달했으며, 이곳을 흐르는 어랑천과 남대천 연안에는 어랑평야와 길주평야가 펼쳐져 있다(강석오, 1971).
다만 함경도 해안지대의 고개는 해안지대와 개마고원 사이의 고개에 비해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내왕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에 따라 일찍부터 함경도 해안지대를 따라 교통로가 발달했다. 245년 조위(曹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했을 때 고구려 동천왕은 개마고원을 넘어 함흥평야의 동옥저(남옥저)로 피신했는데, 조위의 군대가 계속 추격하자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까지 피신했다.주 012 동해안 교통로는 발해 시기에는 책성부(柵城府: 琿春)를 출발하여 신라의 천정군(井泉郡: 안변)에 이르는 신라도(39驛: 1,170리)로 이용되었다.
고구려는 3세기 후반부터 지방통치조직을 본격적으로 정비했는데, 함경도 해안지대의 교통로를 적극 활용했다. 가령 〈광개토왕릉비〉 수묘인 연호조에는 매구여민(賣句余民: 북옥저의 중심지였던 혼춘 일대), 동해고(東海賈: 청진 일대), 돈성(敦城: ‘東北 新城’으로 길주 일대), 우성(于城: 동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 일대), 비리성(碑利城: 동예의 중심지였던 안변 일대) 등을 순차적으로 기술했는데, 함경도 해안지대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하여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김영하, 1985; 임기환, 1987; 여호규, 2008).
다만 고구려가 함경도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던 초기에는 한의 영향력이 함흥평야의 동옥저 지역까지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먼저 동쪽으로 압록강 상류 연안과 함경북도 해안을 따라 두만강 방면의 북옥저로 진출한 다음, 후한의 유화책을 틈타 남쪽으로 개마고원을 넘어 함흥평야의 동옥저를 점령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탓에 고구려인들은 함경도 앞바다를 국내성을 기준으로 동쪽 방면인 함경북도 해안지대와 남쪽 방면인 함경남도(동옥저=남옥저) 해안지대로 각각 구분하여 ‘동해’와 ‘남해’로 부르기도 했다(여호규, 2008).
두만강 유역은 북한의 함경산맥과 중국의 노야령(老爺嶺)산맥 사이에 위치하는데(지도 1 참조), 두만강 하류와 혼춘하(琿春河) 유역, 지류인 포이합통하(布爾哈通河) 유역, 두만강 중상류 본류 연안 등으로 세분된다(지도5 참조).주 013 두만강 하류와 혼춘하 유역에는 혼춘시(琿春市) 일대에 혼춘분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혼춘하 상류 방면으로 100여 km 이상 하곡평지(河谷平地)가 이어진다. 포이합통하 유역은 알하하(嘎呀河) 유역, 포이합통하 본류와 소지류 연안, 해란강(海蘭江) 유역 등으로 세분되는데, 강 연안을 따라 비교적 넓은 하곡평지가 발달해 있다. 반면 두만강 중상류 본류 연안은 남쪽의 함경산맥과 북쪽의 남강산맥(南崗山脈)이 강변까지 뻗어 있어 하곡평지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지도5 | 두만강 유역의 지형과 고구려 성곽 분포도(여호규, 2017)
- [두만강 하류-琿春河 유역] 1. 琿春 水流蜂山城 2. 溫特赫部城 3. 圖們 亭巖山城 4. 琿春 石頭河子古城 5. 薩其城 6. 干溝子山城 7. 桃源洞南山城 8. 農坪山城 9. 營城子古城 10. 城墻砬子山城 11. 通肯山城
[嘎呀河 유역] 21. 圖們 滿臺城山城 22. 汪淸 河北古城[江北古城] 23. 廣興山城 24. 東四方臺山城
[布爾哈通河 유역] 31. 圖們 城子山山城[磨盤村山城] 32. 延吉 河龍古城[土城村古城] 33. 興安古城 34. 臺巖古城 35. 龍井 土城屯古城 36. 三山洞山城 37. 偏臉山城 38. 白石砬子山城 39. 城子溝山城 41. 安圖 楡樹川古城 42. 五虎山城 43. 大砬子山城 44. 五峰山城 45. 城門山城
[海蘭江 유역] 51. 龍井 仲坪古城 52. 金谷山城 53. 東興古城 54. 養參峰山城 55. 和龍 楊木頂子山城 56. 八家子山城 57. 松月山城
[두만강 본류 중상류] 61. 龍井 船口山城 62. 淸水山城 63. 朝東山城 64. 회령 운두산성 65. 和龍 三層嶺山城 66. 土城里古城 67. 古城里古城
- [두만강 하류-琿春河 유역] 1. 琿春 水流蜂山城 2. 溫特赫部城 3. 圖們 亭巖山城 4. 琿春 石頭河子古城 5. 薩其城 6. 干溝子山城 7. 桃源洞南山城 8. 農坪山城 9. 營城子古城 10. 城墻砬子山城 11. 通肯山城
[嘎呀河 유역] 21. 圖們 滿臺城山城 22. 汪淸 河北古城[江北古城] 23. 廣興山城 24. 東四方臺山城
[布爾哈通河 유역] 31. 圖們 城子山山城[磨盤村山城] 32. 延吉 河龍古城[土城村古城] 33. 興安古城 34. 臺巖古城 35. 龍井 土城屯古城 36. 三山洞山城 37. 偏臉山城 38. 白石砬子山城 39. 城子溝山城 41. 安圖 楡樹川古城 42. 五虎山城 43. 大砬子山城 44. 五峰山城 45. 城門山城
[海蘭江 유역] 51. 龍井 仲坪古城 52. 金谷山城 53. 東興古城 54. 養參峰山城 55. 和龍 楊木頂子山城 56. 八家子山城 57. 松月山城
[두만강 본류 중상류] 61. 龍井 船口山城 62. 淸水山城 63. 朝東山城 64. 회령 운두산성 65. 和龍 三層嶺山城 66. 土城里古城 67. 古城里古城
두만강 유역은 만주 동부에서 가장 온난하며, 연강수량도 600~700mm 전후로 농경에 크게 모자라지 않다. 다만 두만강 유역은 지형의 기복이 심하고,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가 교차하여 지역에 따라 기후 차이가 심하다.
동해에 근접한 혼춘 지역은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겨울에는 그다지 춥지 않고 여름철에도 덥지 않다. 1월 평균기온은 영하 11.9˚C로 두만강 유역에서 가장 높고, 7월 평균기온은 20.3˚C로 가장 낮으며,주 014 연교차도 32.3˚C로 연변 지역에서 가장 적다. 연강수량은 654.1mm에 이르며, 무상일수는 126~156일로 상당히 길다. 다만 동해안에서 불어오는 습한 해풍 때문에 흐린 날씨가 많고 일조시수가 적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e). 이처럼 혼춘 지역은 여름철 기온이 낮고 흐린 날씨가 많아 냉해 피해를 입기 쉬운데, 1960~1995년까지 저온 냉해 피해를 여섯 차례나 입었다. 이로 인해 혼춘 지역에서는 고온이 필요한 벼나 옥수수보다 저온에 강한 콩이나 조를 많이 재배한다(전경 외, 1995).
포이합통하 본류와 그 지류인 해란강 유역에 위치한 연길(延吉), 용정(龍井), 화룡(和龍) 등은 중온대성 대륙성기후로 연강수량은 혼춘보다 적지만, 7월 평균기온은 연길이 21.3˚C, 용정이 21.6˚C, 화룡이 20.8˚C로, 20.3˚C인 혼춘보다 높다. 해발고도가 높은 포이합통하 상류의 안도(安圖)는 20.4˚C, 알하하 유역의 도문(圖們)은 21.1˚C, 왕청(汪淸)은 20.6˚C로 7월 평균기온이 혼춘보다 높다. 이들 지역은 여름철 농작물의 생육조건이 혼춘에 비해 좋은 것이다(전경 외, 1995). 더욱이 포이합통하 본류나 해란강 유역에는 하곡분지나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어 일찍부터 거주지와 농경지로 활용되었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6d;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c;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f).
고구려는 이러한 자연지형과 기후환경을 활용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방 통치를 도모했을 것이다. 두만강 유역의 성곽 가운데 고구려시기 축조설이 제기된 성곽은 총 43기인데(지도 5), 모두 고구려 성곽으로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 멸망 직전에 책성(柵城) 욕살(褥薩: 都督)을 역임한 이타인(李他仁)이 “12주(州) 고려(高麗)를 관장하고, 37부(部) 말갈(靺鞨)을 통할했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고구려 말기에 두만강 유역에는 치소성(治所城)이 12개 존재했고, 그 외곽에 말갈이 산재했다고 이해된다.
실제로 고고자료를 통해 고구려 치소성 8~9기를 상정할 수 있다. 평지가 가장 넓게 발달한 혼춘분지나 포이합통하-해란강 일대에는 평지성이 조밀하게 분포한 반면, 그 주변에는 포곡식 산성이 주로 분포한다. 반면 외곽인 혼춘하 중상류나 알하하 중상류에서는 치소성이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가 하곡평지가 넓게 발달한 두만강 하류의 혼춘분지 및 포이합통하-해란강 일대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방통치를 도모하며, 그 주변의 말갈을 통제했던 것이다(여호규, 2017). 혼춘분지와 포이합통하-해란강 일대는 기후상 뚜렷이 구분될 뿐 아니라, 두 지역의 경계에는 노야령산맥의 지맥이 두만강 연안까지 뻗어 있어 지형상으로도 구분된다.
이 가운데 두만강 하류의 혼춘분지는 북옥저의 중심지로 고구려가 1세기경에 진출했고, 5세기에는 책성을 설치했다. 반면 고구려의 포이합통하 유역 진출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고구려가 백두산 북쪽 경로를 거쳐 포이합통하 유역으로 진입했다거나(이성제, 2009), 도문 성자산산성을 3세기 후반의 동북 대진(大鎭)인 신성(新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임기환, 2012). 고구려가 포이합통하 유역을 경유해 두만강 하류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헌사료나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가 동해안 일대의 신성(新城: 敦城)이나 해곡(海谷: 東海賈)을 경유해 두만강 유역으로 나아간 것으로 확인된다. 함경도 해안지대를 경유하는 경로가 국내성과 두만강 유역을 잇는 간선 교통로였던 것이다(여호규, 2008).
이에 포이합통하 유역 일대를 광개토왕이 410년(영락 20년)에 정벌했다는 동부여로 비정하기도 한다(김현숙, 2000). 혼춘분지 일대와 포이합통하 유역이 지형이나 기후상 별도의 권역을 이룬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은 견해이지만, 명확한 논거가 제시된 상태는 아니다. 고구려의 포이합통하 유역 진출 시기는 두만강 유역에 대한 지방제도의 정비, 읍루계(물길-말갈) 주민집단에 대한 통제, 두만강 유역과 북류 송화강 유역을 잇는 간선 교통망과 군사방어체계의 구축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므로 향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
고구려는 한의 현도군을 요동 방면으로 몰아내면서 국가적 성장을 이룩했다. 현도군은 고조선 멸망 다음 해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는데, 압록강 중상류의 주민집단이 기원전 75년경에 제1현도군을 압록강 서북쪽의 소자하(蘇子河)로 몰아냈다. 고구려는 유리명왕대에 태자하(太子河) 상류의 양맥(梁貊)을 복속시킨 다음, 소자하 유역의 제2현도군을 공격했다.주 015 태조왕대인 1세기 중반에는 제2현도군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며 국가체제를 확립했고, 1세기 말경에는 제2현도군을 점령한 다음 요동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여호규, 2015).

지도6 |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의 지형과 고구려 성곽 분포도(여호규, 2014)
- [압록강-혼강 유역] 1. 국내성지/산성자산성 2. 망파령관애 3. 패왕조산성 4. 관마장관애 5. 대천초소 6. 석호관애 7. 이도구문관애 8. 노변장관애 9. 칠개정자관애 10. 와방구산성 11. 성장립자산성 12. 북구관애 13. 오녀산성 14. 하고성자고성 15. 마안산성 16. 고검지산성 17. 흑구산성 18. 전수호산성 19. 자안산성 20. 적백송고성 21. 관전 소성자산성 22. 동산산성
[태자하 상류] 23. 태자성 24. 삼송산성
[혼하-소자하 유역] 25. 영릉진고성 26. 백기보고성 27. 이도하자구노성 28. 두도립자산성 29. 하서촌고성/궤자석산성 30. 오룡산성 31. 철배산성 32. 고이산성 33. 노동공원고성 34. 청원 산성자산성
- [압록강-혼강 유역] 1. 국내성지/산성자산성 2. 망파령관애 3. 패왕조산성 4. 관마장관애 5. 대천초소 6. 석호관애 7. 이도구문관애 8. 노변장관애 9. 칠개정자관애 10. 와방구산성 11. 성장립자산성 12. 북구관애 13. 오녀산성 14. 하고성자고성 15. 마안산성 16. 고검지산성 17. 흑구산성 18. 전수호산성 19. 자안산성 20. 적백송고성 21. 관전 소성자산성 22. 동산산성
[태자하 상류] 23. 태자성 24. 삼송산성
[혼하-소자하 유역] 25. 영릉진고성 26. 백기보고성 27. 이도하자구노성 28. 두도립자산성 29. 하서촌고성/궤자석산성 30. 오룡산성 31. 철배산성 32. 고이산성 33. 노동공원고성 34. 청원 산성자산성
이로써 고구려는 태자하 상류, 소자하 유역과 혼하 상류, 압록강 하류 등 천산산맥(千山山脈) 동부 산간지대를 석권하고, 요동평원이나 서북한 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고구려는 2세기~4세기에 후한, 조위, 서진, 전연, 후연 등과 요동 지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했는데, 이때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가 빈번하게 전쟁로로 활용되었다. 고구려 말기에도 이 지역은 당과의 격전장이 되었다.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는 고구려사의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인 것이다.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는 태자하-소자하 분수령 지대에서 요동반도로 뻗은 천산산맥 동쪽의 산간지대를 지칭하는데, 용강산맥(龍崗山脈)의 서남쪽 지맥과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의 서남 구간으로 둘러싸여 비교적 험준한 지형을 이룬다. 이 지역은 연강수량이 800mm(압록강 하류 일대는 1,000mm) 이상으로 만주에서는 가장 다우(多雨)지역이다. 연 평균기온도 고구려 초기 중심부인 환인-집안과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다(劉明光 주편, 1998).
이 지역의 자연환경은 압록강 중상류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로 인해 두 지역 사이에는 일찍부터 활발한 교섭이 이루어졌는데, 전국 연나라의 요동 진출로 정세가 급변하던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에 ‘맥(貊)’이라 통칭할 수 있는 주민집단이 형성되었다. 1세기~3세기에 압록강 중상류의 주민집단을 대수맥(大水貊), 압록강 하류의 주민집단을 소수맥(小水貊), 태자하 상류의 주민집단을 양맥(梁貊)이라 부르는 등 모두 ‘맥(貊)’이라고 지칭한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는 기원전 3세기 중반까지도 청동기문화단계에 머물다가, 연-진-한 교체기인 기원전 3세기 말경에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이때부터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는 고구려의 모체를 이룬 주민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의 ‘맥’집단으로부터 분화하여 국가적 성장을 이룩한 다음,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의 다른 주민집단을 복속시켜 나갔다(여호규, 2014).
이처럼 압록강 중상류와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 사이에는 일찍부터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천산산맥을 비롯하여 노령산맥, 용강산맥, 길림합달령산맥 등이 교차하며 험준한 산간지대를 이루지만, 오랜 침식작용으로 각 산맥 사이에 하곡(河谷)이 형성되었고, 그곳에 평지나 분지가 발달했다. 각 수계(水系)를 가르는 분수령 지대에는 해발고도가 낮고 경사가 완만한 지형이 다수 발달했는데, 이곳은 각 하천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가령 혼하 지류인 소자하는 한대(漢代)에 남소수(南蘇水)라 칭해졌다. 용강산맥 서남단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약 119km를 흘러 혼하 본류로 흘러드는데, 해발 500~1,000m의 산간지대를 통과한다. 발원지 일대는 비교적 험준하지만, 차별침식에 따른 협곡이 곳곳에 형성되어 이웃한 혼강 유역과 연결되는 산간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신빈현(新賓縣) 소재지에서 영릉진(永陵鎭)을 거쳐 목기진(木奇鎭)에 이르는 중류 구간에는 넓고 평탄한 하곡평지가 약 50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소자하 중류 구간은 동남쪽으로 혼강 유역, 서남쪽으로 태자하 유역과 접하는데, 양자의 수계를 가르는 분수령 지대에는 차별침식에 따른 협곡이나 완경사면이 곳곳에 형성되어 산간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반면 하류 구간은 하천 연안로가 발달하기 힘들 정도로 험준하다. 이처럼 소자하는 해발 500~1,000m 산간지대를 통과하기 때문에 평탄한 하곡평지도 펼쳐져 있지만, 험준한 절벽이나 협곡 구간이 많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소자하 연안의 교통로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자하 서남쪽의 태자하는 한대(漢代)에 대량수(大梁水)로 불렸다. 태자하도 소자하처럼 용강산맥의 서남단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약 413km를 흘러 해성시(海城市) 부근에서 혼하(渾河)와 합류한 다음 요동만으로 흘러든다. 태자하는 용강산맥의 서남단에서 발원했고, 상류 구간은 천산산맥의 동북단을 통과하기 때문에 상당히 험준하다. 특히 본계현(本溪縣)과 본계시(本溪市) 소재지 사이의 구간은 하천 연안로가 발달하기 힘들 정도로 곳곳에 험준한 절벽이 형성되어 있다.
다만 태자하 상류의 북태자하와 남태자하 연안에는 곳곳에 비교적 평탄한 완경사면이 펼쳐져 있고, 두 하천이 합류하는 북전(北甸) 일대에는 상당히 넓은 하곡분지가 발달해 있다. 고구려 초기의 양맥은 이러한 태자하 상류의 하곡분지와 완경사면을 터전으로 삼아 생활을 영위했다. 또한 태자하 상류는 동쪽으로는 혼강 연안, 북쪽으로는 소자하 연안과 접하는데, 분수령 일대에는 차별침식에 따른 협곡이나 완경사면이 발달해 산간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는 비교적 험준한 지형이지만, 오랜 침식작용으로 곳곳에 상당히 넓은 하곡평지와 완경사면이 발달했다. 또한 각 수계를 가르는 분수령에도 차별침식에 따른 협곡과 완경사면이 형성되어 산간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고구려도 이러한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의 현도군을 요동 방면으로 몰아내면서 이 지역으로 진출했다.
고구려 건국지인 혼강 유역과 제2현도군이 위치했던 소자하 사이의 교통로는 현재 육도하(六道河)-횡도하자(橫道河子) 애구(隘口)-차로구(岔路溝)를 경유하는 환인 서북로와 부이강 상류에서 소자하 상류로 나아가는 환인 동북로 등을 설정할 수 있다. 두 갈래의 교통로는 영릉진 일대에서 합쳐져 소자하와 혼하 하류 방면을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간다. 영릉진 일대는 소자하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것이다. 이에 한(漢)은 이곳에 제2현도군을 건설하여 압록강 중상류를 통제하려고 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유리명왕대에 태자하 상류의 양맥(梁貊)을 복속시킨 다음, 소자하 유역의 제2현도군을 공격했다.주 016 고구려가 현재 교통로와 달리 혼강 유역에서 소자하 유역으로 곧바로 진입하지 않고, 양맥이 거주하던 태자하 상류를 경유하여 제2현도군을 공격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시기에 혼강에서 태자하를 거쳐 소자하 유역으로 나아가는 교통로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현재 환인 서북로의 육도하 상류에는 고구려 성곽이 확인되지 않지만, 태자하 상류의 평정산(平頂山) 일대로 나아가는 경로에는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이 분포한다. 또한 평정산 일대에는 영릉진으로 나아가는 산간로도 있다.주 017 고구려시기에는 환인 서북 방면을 통해 소자하 유역으로 나아갈 경우 태자하 상류 일대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주 018 아니면 현재의 환인 서북로와 함께 태자하 상류를 경유하는 경로도 이용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가 제2현도군에 앞서 양맥을 공격한 것은 이러한 교통로상의 조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가 1세기 중·후반에 국가체제를 확립한 이후 각 지배세력과 제2현도군의 개별적인 교섭을 봉쇄하자, 한이 제2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곽을 쌓아 조복과 의책 등의 위세품을 두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평상시에는 환인 서북로보다 제2현도군 동쪽의 소자하 상류를 경유해 부이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환인 동북로가 더 활발하게 활용되었다고 파악된다.
고구려는 1세기 말경에 제2현도군을 혼하 방면으로 몰아낸 이후, 태자하 상류와 소자하 유역 등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 일대를 석권했다. 이에 따라 태자하 상류나 소자하 유역은 고구려가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고구려는 혼강 유역에서 소자하 유역을 경유해 혼하 연안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가장 활발하게 활용했는데, 이 경로를 따라 한의 제3현도군이나 요동군을 공격하며 요동 진출을 시도했다.
중국 측도 이 경로를 따라 고구려를 침공했다. 121년에 한군이 제3현도군 동쪽의 변새(邊塞)를 출발하여 소자하 유역으로 진입한 다음, 고구려에 복속해 있던 소자하 유역의 예맥거수를 살해한 바 있다.주 019 244~245년에는 조위의 관구검이 제3현도군을 출발하여 혼하와 소자하 연안로를 경유하여 혼강으로 비정되는 비류수(沸流水)까지 진군했다가 비류수전투에서 대패하자, 태자하 상류의 양맥지곡(梁貊之谷)으로 퇴각하여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다시 비류수 유역과 정현(赬峴: 小板岔嶺)을 거쳐 도성인 환도성까지 진격한 바 있다.주 020
342년에는 전연이 남도와 북도 두 갈래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함락했다.주 021 남도와 북도의 경로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남도와 북도의 분기점은 혼하-소자하 합류 지점으로 비정된다. 남도는 혼하-소자하 합류 지점에서 동남쪽 협곡(南陜)으로 진입하여 목저성이 위치한 소자하 연안을 거쳐 혼강 유역의 부이강(富爾江)-신개하(新開河)를 따라 고구려 도성으로 나아가는 경로로 비정된다. 북도는 합류 지점에서 비교적 평탄한 혼하 상류와 휘발하(輝發河) 유역을 우회하여 혼강 유역으로 진입한 다음 고구려 도성으로 나아가는 경로이다(여호규, 2014).
이상과 같이 고구려가 태자하와 소자하 유역을 장악한 이후, 이 지역은 중국 측과의 전쟁로로 자주 이용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이 지역에 성곽을 축조하여 군사방어를 강화하면서 지방통치를 도모했다(지도 6 참조).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양곡(梁谷)’과 ‘양성(梁城)’에서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징발했다고 한다. 양맥이 거주하던 태자하 상류 일대를 ‘양곡’과 ‘양성’이라는 두 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하고, 거점성인 ‘양성’을 축조한 사실을 보여주는데, 태자하 상류의 태자성(太子城)이 ‘양성’으로 비정된다(임기환, 1998; 여호규, 1999).
소자하 유역의 경우에도 제2현도군의 치소였던 영릉진고성을 재활용하는 한편, 그 남쪽에 포곡식산성인 비아랍성(費阿拉城: 二道河子舊老城)을 축조하여 평지성·산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또한 335년(고국원왕 5)에 혼하 북안에 신성(新城: 撫順 高爾山城)을 축조하여 요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는 한편, 소자하 연안에는 남소성(南蘇城)과 목저성(木底城) 등을 축조하여 군사방어를 강화하고 지방통치를 도모했다. 남소성과 목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남소성은 혼하-소자하 합류 지점 동쪽의 철배산성(鐵背山城), 목저성은 목기진 서쪽의 하서촌고성(河西村古城)으로 비정된다(孫進己·馮永謙, 1989b; 여호규, 2014).
압록강 하류 방면은 태자하 상류나 소자하 유역과 마찬가지로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에 속하지만, 요동평원 진출보다는 서해로의 진출과 관련된 수로로 활용되었다. 전술했듯이 압록강 하류의 수로는 20세기 전반까지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는데, 고구려가 손오나 후조와 교섭할 때 압록강 하구의 안평구를 활용했다. 안평구는 한의 요동군 속현인 서안평을 지칭하는데, 애하(靉河)와 압록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단동 애하첨고성으로 비정된다(曹汛, 1980).
애하첨고성 북쪽의 애하는 ‘대수(大水)’로 불린 압록강에 대비하여 ‘소수(小水)’라고 일컬어졌는데,주 022 원고구려인과 동일한 계통의 소수맥(小水貊)이 거주했다(여호규, 2002a). 고구려가 2세기 초에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를 석권한 다음 145~146년에 서안평현을 공격했는데, 이 무렵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 방면을 장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311년에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현을 완전히 점령한 다음 서북한의 낙랑군과 대방군까지 점령했다(313~314년).
서안평현이 위치했던 압록강 하구 일대는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에서 압록강 수로를 통해 서해 방면으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요동 지역과 서북한 지역을 연결하는 육로상의 요충지이다. 이에 고구려는 서안평을 점령한 다음 압록강 수로상의 요지인 이곳을 계속 사용하는 한편,주 023 애하·압록강 합류 지점 동쪽에 박작성(泊灼城: 寬甸 虎山山城)을 축조하여 군사방어 기능을 보완했다. 이러한 전통은 발해시기까지 이어져 서경압록부(西京臨江市)를 출발해 압록강 수로와 서해를 거쳐 산동반도에 위치한 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는 조공도(朝貢道)를 형성했다.
이처럼 압록강 하구 일대는 국내성시기에는 압록강 수로를 통해 서해로 나아가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다만 평양 천도 이후에는 요동 지역과 서북한을 연결하는 육로상의 요충지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특히 7세기에는 압록강을 수와 당의 침공을 막기 위한 천연해자로 활용했는데, 『한원(翰苑)』 권30 번이부 고려전에 인용된 『고려기』의 “압록수는 너비가 300보로 … 그 나라는 이 강을 천연 해자(天塹)로 믿고 있다”라는 기사는 이를 반영한다. 이에 고구려는 압록강 남안에 의주 백마산성을 축조해 압록강 하류 일대의 군사방어를 강화했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는 1세기 말경에 제2현도군을 점령한 다음,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를 석권해 나갔다. 특히 고구려는 111년 후한과의 외교 교섭을 통해 요동고새를 국경선으로 확정하고, 요동 동부 산간지대를 확고하게 장악했다. 실제 고구려는 120년대 이후 태자하 상류나 소자하 유역, 압록강 하류 방면의 소수맥, 원산만 일대의 동예 등을 예속시켜 나갔다. 고구려가 후한의 요동군이나 낙랑군을 여러 방면에서 환상(環狀)으로 포위하며 강하게 압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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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22)
- 각주 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