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만주 중남부의 자연지리와 환경
3. 만주 중남부의 자연지리와 환경
1) 자연지형과 기후환경의 특성
고구려는 4세기 이후 만주 각지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4세기 전반에 요동평원으로의 진출 시도는 실패했지만, 전연의 내분을 틈타 북류 송화강 중류의 원부여 중심지를 장악하고(333~336년), 이 무렵 요하 중상류 동안(東岸) 지역으로도 진출했다. 광개토왕대에는 후연의 내분을 틈타 요동평원-요동반도 일대를 석권하고, 목단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읍루(挹婁: 肅愼)를 예속시켰다.
지도 1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4세기 이후 진출한 요동반도-요동평원 일대, 요하 중상류 동안 지역, 북류 송화강 유역, 목단강 유역 등은 고구려 발흥지인 압록강 중상류를 중심으로 방사상(放射狀)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분포 양상으로 인해 고구려는 만주 각지로의 진출을 거의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다.
만주는 지리적으로 서북의 대흥안령산맥, 동북의 소흥안령산맥, 동남쪽의 장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일컫는다(지도 1 참조). 만주 한복판에는 송료대평원(松遼大平原)주 024이 남북으로 기다랗게 펼쳐져 있는데, 요하와 송화강의 분수령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평탄하다. 만주를 흔히 광활한 대평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대흥안령산맥은 해발고도가 1,500~2,000m에 이르지만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며, 소흥안령산맥도 남단의 평정산은 해발고도가 1,429m에 이르지만 좌우로 충적평원과 침식구릉이 넓게 발달했다. 대흥안령산맥과 소흥안령산맥은 교통에 있어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만주와 중원(中原)대륙의 경계를 이루는 요서 지역에는 연산산맥(燕山山脈)이 발해만 해안까지 뻗어 있고, 요하 하류에는 넓은 늪지대가 발달하여 육로로 내왕하기가 쉽지 않다.주 025
이로 인해 청동기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만주 지역은 대흥안령산맥 너머의 몽골초원이나 소흥안령산맥 너머의 시베리아 지역 등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중원대륙과는 원활하게 교류하기 힘들었다. 만주 지역의 신석기문화나 청동기문화가 중원대륙과는 상이한 반면, 한반도 지역을 비롯해 몽골초원이나 시베리아 지역과 공통성을 많이 갖고 있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만주 남쪽에 동서로 뻗은 장백산맥은 해발 1,500~2,000m의 준봉이 즐비하며, 서북쪽으로 장광재령산맥(張廣才嶺山脈), 용강산맥(龍崗山脈),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 대흑산맥(大黑山脈) 등이 동북-서남 방향으로 겹겹이 뻗어 있다. 지질구조상 장백산맥-장광재령산맥 일대는 험준한 침식 중산지대, 용강산맥-길림합달령산맥 구간은 침식 저산지대, 길림합달령산맥-대흑산맥 구간은 침식 구릉지대를 이룬다. 대흑산맥 서북쪽의 송료대평원은 오랜 퇴적으로 형성된 충적평원지대이다(劉明光 주편, 1998).
이처럼 장백산맥과 송료대평원 구간은 장기간의 침식과 퇴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각 산맥 사이에는 오랜 침식에 따른 하천 지형이 발달했다. 장백산맥-장광재령산맥 사이에는 목단강이 동북쪽으로 흘러 동류 송화강으로 합류한다. 용강산맥-길림합달령산맥 구간의 경우, 동북쪽에는 휘발하가 북류 송화강으로 흘러들고, 서남쪽에는 혼하가 요하로 유입한다. 길림합달령산맥-대흑산맥 구간에는 요하 중상류의 지류들이 서쪽으로 흘러 요하에 합류한다.
그런데 만주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어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은 몽골초원에 가까운 서북 방향으로 갈수록 연강수량이 줄어든다. 길림합달령산맥 동남쪽은 연 강수량이 700mm 이상이지만, 그 서북쪽으로는 대흑산맥을 따라 연강수량 600mm선이 지나가고, 송료대평원 중앙으로는 연강수량 500mm선이 관통하는데, 연강수량 500~600mm선은 전업농경의 한계선에 해당한다(劉明光 주편, 1998).
대흥안령산맥과 장백산맥 사이에는 중국에서 가장 넓다는 송료대평원이 펼쳐져 있지만,주 026 기후상 농경지구에서 초원-사막지구로 전환되는 점이지대인 것이다. 이로 인해 만주 서북부 지역은 산맥이나 하천과 같은 자연지형이 아니라 연강수량에 의해 주민집단의 분포구역이 달라졌다. 가령 송료대평원을 관통하는 연강수량 500mm선을 기준으로 그 서북방에는 오환과 선비 등 동호계의 유목민, 그 동남쪽에는 부여나 고구려 등 예맥계의 농경민이 거주했던 것이다.주 027
장광재령산맥 동쪽의 만주 동북부 지역은 연강수량은 600mm 이상이지만, 7월 평균기온이 20˚C 이하로 낮고, 연간 동토일수(凍土日數)도 160일 이상이다(劉明光 주편, 1998). 연강수량은 비교적 풍부하지만, 여름철 기온이 낮고 동토일수가 길어 농사짓기에 열악한 기후조건인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는 주로 사냥과 물고기잡이를 하는 읍루계의 수렵민이 거주했다.
이처럼 만주 지역은 기후에 따라 비교적 온난하고 강수량이 풍부한 중남부에는 예맥계의 농경민, 강수량이 적은 서북부에는 동호계의 유목민, 날씨가 추운 동북부에는 읍루계의 수렵민이 거주했다. 이 가운데 농경지대인 중남부 지역은 해발고도에 따라 기후가 조금씩 달라진다. 남쪽의 장백산맥-용강산맥 일대는 해발고도가 높아 연평균기온이 낮고 무상일수도 적다. 반면 서북쪽으로 갈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면서 연평균기온은 높아지고 무상일수도 많아진다.
가령 장백산맥의 주맥이 지나가는 정우현(靖宇縣)은 연강수량이 800~900mm에 이르지만, 연평균기온은 2.4˚C이고, 7월 평균기온도 21˚C이다. 무상일수도 평균 120일인데, 서부 지역은 100일에 불과하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8b). 반면 용강산맥 서북쪽의 유하현(柳河縣)은 연평균기온 5˚C, 무상일수는 평균 126~140일이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a). 대흑산맥 서북방의 농안현(農安縣)은 연평균강수량은 507.7mm에 불과하지만, 위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연평균기온은 4.6˚C, 무상일수는 평균 145~158일에 이른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6c).
만주 중남부 가운데 장백산맥과 송료대평원 사이의 침식 저산지대와 침식 구릉지대가 농경에 가장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4세기 이후 고구려가 진출했던 지역에 해당한다. 반면 고구려가 연강수량 500mm 이하인 송료대평원 서북방 일대를 영역화했던 양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지역 가운데 주로 연강수량 600mm 이상으로 전업농경이 가능한 장백산맥과 송료대평원 사이의 침식 저산지대와 구릉지대로 진출했던 것이다.
2) 요하 유역과 요동반도 일대
고구려는 일찍부터 요동평원을 중심으로 하는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요하는 송료대평원 한복판을 가르면서 20여 개의 크고 작은 지류와 합류하여 큰 물줄기를 이루며 요동만으로 흘러든다. 전체 길이 1,430km, 유역 면적 5만 9,074km²로서 예로부터 중국 6대 하천으로 일컬어졌다.주 028 요하 유역은 크게 상류 지역과 중하류 지역으로 나뉘며, 상류 지역은 다시 발원지에 따라 서요하와 동료하로 양분된다(지도 7 참조).주 029

지도7 | 요하 유역의 지형과 고구려 성곽 분포도(여호규, 1999)
- [蘇子河 유역] 1. 新賓 永陵鎭古城 2. 二道河子舊老城 3. 羅家堡子城 4. 頭道砬子山城 5. 三道堡東山城 6. 溫家窯山城 7. 阿伙洛村山城 8. 白旗堡古城 9. 河西村古城 10. 五龍山城
[渾河와 그 주변] 11. 撫順 高爾山城 12. 勞動公園古城 13. 鐵背山城 14. 馬和寺山城 15. 南章黨山城 16. 城子溝山城 17. 西山山城 18. 淸原 山城子山城 19. 瀋陽 石臺子山城 20. 新民 高台子山城
[太子河 유역] 21. 新賓 太子城 22. 杉松山城 23. 本溪 下堡山城 24. 有官山城 25. 邊牛山城 26. 瀋陽 塔山山城 27. 燈塔 白巖城 28. 遼陽 姑嫂山城 29. 鞍山 古道關石城 30. 遼陽 遼東城址
[遼河 하구 주변] 31. 海城 英城子山城 32. 營口 馬圈子山城 33. 盖州 高麗城山城 34. 營口 太平堡古城
[鐵嶺 지역] 41. 鐵嶺 催陣堡山城 42. 靑龍山古城 43. 開原 馬家寨山城 44. 古城子山城 45. 龍潭寺山城 46. 西豊 城子山山城
[東遼河 유역] 51. 遼源 龍首山城 52. 工農山城 53. 城子山山城 54. 懷德 老邊崗遺蹟
[요동반도 일대] 61. 大連 大黑山城 62. 庄河 城山山城 63. 岫岩 娘娘山城 64. 鳳城 鳳凰山城 65. 丹東 虎山山城
[서북한 지역] 71. 백마산성 72. 용골산성 73. 능한산성 74. 농오리산성 75. 철옹성 76. 안주성 77. 청룡산성 78. 황룡산성 79. 흘골산성
- [蘇子河 유역] 1. 新賓 永陵鎭古城 2. 二道河子舊老城 3. 羅家堡子城 4. 頭道砬子山城 5. 三道堡東山城 6. 溫家窯山城 7. 阿伙洛村山城 8. 白旗堡古城 9. 河西村古城 10. 五龍山城
[渾河와 그 주변] 11. 撫順 高爾山城 12. 勞動公園古城 13. 鐵背山城 14. 馬和寺山城 15. 南章黨山城 16. 城子溝山城 17. 西山山城 18. 淸原 山城子山城 19. 瀋陽 石臺子山城 20. 新民 高台子山城
[太子河 유역] 21. 新賓 太子城 22. 杉松山城 23. 本溪 下堡山城 24. 有官山城 25. 邊牛山城 26. 瀋陽 塔山山城 27. 燈塔 白巖城 28. 遼陽 姑嫂山城 29. 鞍山 古道關石城 30. 遼陽 遼東城址
[遼河 하구 주변] 31. 海城 英城子山城 32. 營口 馬圈子山城 33. 盖州 高麗城山城 34. 營口 太平堡古城
[鐵嶺 지역] 41. 鐵嶺 催陣堡山城 42. 靑龍山古城 43. 開原 馬家寨山城 44. 古城子山城 45. 龍潭寺山城 46. 西豊 城子山山城
[東遼河 유역] 51. 遼源 龍首山城 52. 工農山城 53. 城子山山城 54. 懷德 老邊崗遺蹟
[요동반도 일대] 61. 大連 大黑山城 62. 庄河 城山山城 63. 岫岩 娘娘山城 64. 鳳城 鳳凰山城 65. 丹東 虎山山城
[서북한 지역] 71. 백마산성 72. 용골산성 73. 능한산성 74. 농오리산성 75. 철옹성 76. 안주성 77. 청룡산성 78. 황룡산성 79. 흘골산성
서요하는 대흥안령산맥 서남단의 송림지대(松林地帶: 克什克騰旗白岔山)에서 발원한 시라무렌하(西拉木倫河)를 중심으로 칠로도산맥(七老圖山脈)-노로아호산맥(老魯兒虎山脈)에서 발원한 남쪽의 노합하(老哈河)·교래하(敎來河), 대흥안령산맥 동쪽 산기슭에서 발원한 북쪽의 오이길무렌하(烏爾吉木倫河)·호호이하(呼虎爾河)·신개하(新開河) 등이 합류하면서 큰 물줄기를 이룬다. 서요하는 처음에는 동쪽으로 흘러가다가 쌍료(雙遼) 부근에서 방향을 꺾어 남쪽으로 흐른다. 서요하 일대는 요하 유역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넓고, 평지와 저지대도 많이 형성되어 있다.
다만 서요하 유역은 연평균강수량 500mm 이하로 사막지대와 함께 늪지·초원지대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로 인해 선비(鮮卑)나 거란(契丹) 등 주로 유목민이 거주했다. 고구려도 395년에 이곳까지 진격하여 거란 8부의 하나인 패려(稗麗: 匹絜部)를 정복했고, 654년에도 거란의 신성(新城)을 공격한 바 있다.주 030 그렇지만 고구려가 서요하 일대를 영역화한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고구려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서요하 유역을 공격했지만, 직접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요하의 또 다른 발원지인 동료하는 요원분지(遼源盆地)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가다가 대흑산맥을 가로질러 송료대평원과 만나게 된다. 송료대평원에서 활처럼 둥그스름하게 유로(流路)를 꺾으며 서요하와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유유히 흘러나간다. 동료하는 서요하에 비해 유역 면적이 좁다. 또한 요원분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광활한 송료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구간인데, 대평원을 따라 축조된 노변강유적(老邊崗遺蹟)은 고구려 후기의 천리장성(千里長城) 유적으로 추정된다.
요하 중하류 지역도 서쪽과 동쪽의 자연지형이 확연히 구별된다. 서쪽 지역에는 동서 방향의 과이심사막(科爾沁沙漠)이나 남북 방향의 의무려산맥(醫巫閭山脈) 등이 요하 서안까지 뻗어 있어서 지류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반면 동쪽 지역에는 대흑산맥, 길림합달령산맥, 용강산맥, 천산산맥 등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이들 지류 연안에는 오랜 침식과 퇴적으로 형성된 하곡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지역이 연평균강수량 600mm 이상, 7월 평균기온 23~24˚C로 농사짓기에 충분하다. 특히 각 지류 연안의 하곡평지는 폭 1~2km, 길이 수십 km로 지형적 특성이 압록강 중류의 하곡평지와 유사하다.
이처럼 요하 중하류 가운데 동쪽 지역이 서쪽 지역보다 농경에 적합하며, 지류 연안에는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 연안과 유사한 하곡평지가 발달해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일찍부터 요하 동쪽의 지류 연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요동평원의 중국 세력이나 서요하·대릉하(大凌河) 방면의 유목민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고구려가 일찍부터 진출을 시도했던 요하 중하류 동안 지역은 길림합달령산맥 서남단을 기준으로 두 지역으로 세분할 수 있다.
길림합달령산맥 서남단 위쪽의 요하 중류 지역에는 대흑산맥과 길림합달령산맥에서 발원한 구하(寇河), 청하(淸河), 시하(柴河), 범하(汎河) 등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송료대평원을 가로질러 요하로 유입된다. 이 지역에는 길림합달령산맥의 지맥이 요하 동안(東岸) 가까이 뻗어 있기 때문에 각 지류는 대부분 길림합달령산맥이나 그 지맥 구간을 흐른다. 특히 요하 본류가 철령(鐵嶺)을 중심으로 활처럼 휘어져 흐르며, 길림합달령산맥의 지맥도 철령 부근에서는 요하 직전까지 뻗어 있다. 이로 인해 철령 일대는 송료대평원 가운데 폭이 가장 좁은 병목 구간으로 요하 하류의 요동평원과 그 북쪽의 경계를 이룬다.주 031
길림합달령산맥의 지맥은 해발 500m 이하로 험준하지 않은 편이며, 각 지류 연안에는 폭 1~2km, 길이 수십 km의 하곡평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더욱이 하곡평지가 각 지류의 발원지 직전까지 펼쳐져 있고, 야트막한 구릉을 통해 다른 지류 연안의 하곡평지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는 각 지류를 잇는 교통로뿐 아니라 길림합달령산맥을 넘은 다음 송화강이나 혼하 유역을 거쳐 압록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교통로가 많이 발달했다.
특히 이 지역은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요하 상류나 요서 지역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주 032 요서 지역의 유목민이나 요동평원의 중국 세력이 송화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중간지대이기도 하다. 이에 고구려는 4세기 초·중반에 이 지역으로 진출한 다음, 곳곳에 성곽을 축조했다. 특히 송료대평원에는 성곽을 축조하지 않은 반면, 송료대평원에서 각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포곡식산성을 축조했다. 이러한 산성은 각 지류 연안로의 길목을 봉쇄하는 군사방어적 성격과 아울러 그 안쪽의 하곡평지 일대를 통치하기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여호규, 2002b; 지도 7 참조).
길림합달령산맥 서남단 아래쪽의 요하 하류 지역에도 길림합달령산맥~용강산맥에서 발원한 혼하, 천산산맥에서 발원한 태자하 등이 서남쪽으로 흘러 요하로 유입되고 있다. 혼하·태자하 중상류는 해발 500~1,000m의 산악지대로 비교적 험준하기 때문에 하천 연안의 충적평지가 계속 이어지지 않고, 분지를 이루며 단속적(斷續的)으로 발달되어 있다. 태자하 중상류의 경우, 상류에만 하곡평지가 발달되어 있고, 중류는 하안단애(河岸斷崖)로서 접근조차 힘든 정도이다. 반면 혼하·태자하의 하류 구간에는 송료대평원 가운데 흔히 ‘요동평원(遼東平原)’이라 불리는 대평원이 형성되어 있다. 요하 하류 지역은 지형상 요동평원과 동부 산간지대로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태자하 상류, 소자하 유역, 혼하 상류 일대에는 고구려 초기 중심부와 요동평원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발달했다. 다만 고구려가 요동평원을 장악한 것은 400~402년경이고, 427년에 평양 천도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평양 지역을 기준으로 요동평원과 그 주변의 성곽을 축조하고, 군사방어체계와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했다. 요하 하류 일대는 거대한 늪지대여서 특정 지점으로만 건널 수 있었다. 요동반도의 천산산맥도 해발 1,0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즐비할 정도로 험준한데, 오랜 침식으로 협곡이나 분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고 산맥을 관통하는 횡단로가 발달했다.
이에 고구려는 요하 도하로(渡河路)나 천산산맥 횡단로를 고려하면서 이 지역의 군사 방어나 지방통치를 도모했는데, 성곽의 분포 양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지도 7). 요하 도하로는 신민(新民) 고대산(高臺山)-심양(瀋陽)의 북로(北路), 대안(台安) 손성자(孫城子)-안산(鞍山)의 중로(中路), 반산(盤山)-고평(高平)-우장(牛莊)-해성(海城)의 남로(南路) 등 세 갈래가 있었다(王綿厚, 1986; 王綿厚·李建才, 1990). 이 가운데 북로를 통해 요하를 도하한 다음 심양을 거쳐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길목에는 심양 탑산산성(塔山山城)이 자리 잡고 있다. 중로를 도하한 다음 천산산맥으로 진입할 경우에는 북쪽의 요양이나 남쪽의 해성을 통과하는 두 경로가 있는데, 북쪽에는 요동성, 남쪽에는 영성자산성이 있다. 남로를 도하하여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경로에는 마권자산성, 고려성산성 등이 위치했다.
이들 성은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으로 향하는 교통로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천산산맥 횡단로는 본계(本溪)-봉성로(鳳城路: 細河-草河路), 해성(海城)-수암로(岫岩路: 沙鐵河-大洋河路), 개주(蓋州)-장하로(莊河路: 大淸河-碧流河路) 등 세 경로가 있다. 본계-봉성로의 진입 코스는 남과 북 두 갈래로 나뉘는데, 북쪽의 심양-본계로에는 탑산산성(蓋牟城)과 변우산성(磨米城), 남쪽의 요양-본계로에는 요동성·백암성·고수산성이 각각 위치했다. 해성-수암로의 길목에는 영성자산성(安市城), 개주-장하로의 길목에는 고려성산성(建安城) 등이 각각 위치했으며, 대청하에서 수암으로 나아가는 산간로 입구에는 마권자산성이 위치했다(여호규, 1999; 임기환, 2015; 양시은, 2016).
이처럼 고구려는 요하 도하로와 천산산맥 횡단로를 따라 성곽을 축조해 군사방어와 지방통치를 도모했다. 특히 천산산맥 횡단로에는 입구뿐 아니라 초하(草河) 연안(本溪-鳳城路), 대양하(大洋河) 연안(海城-岫岩路), 벽류하(碧流河) 연안(蓋州-莊河路) 등에도 성곽을 조밀하게 축조했다(孫進己·馮永謙, 1989b; 王禹浪·王宏北, 1994; 王綿厚, 2002). 고구려가 요하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으로 향하는 지역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고려하여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여호규, 1999).
요하는 유역 면적이 넓고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하구에서 800km 떨어진 쌍료시(雙遼市: 鄭家屯)까지 선박 항행이 가능했다. 20세기 전반에도 요하 수운의 거점인 영구항(營口港)에는 해성, 요양, 심양, 신민, 법고(法庫), 철령, 개원(開原), 창도(昌圖), 정가둔(쌍료) 등에서 운송한 각종 물산이 집하되었다고 한다(仲摩照久 편, 1930). 고구려도 요하 수로를 활용했을 텐데, 238년 조위의 군대가 공손씨(公孫氏) 정권을 공격할 때 배가 ‘요구(遼口)’에서 요하와 태자하를 거슬러 양평성(襄平城: 요양)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주 033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王綿厚·李建才, 1990).
3) 북류 송화강과 목단강 유역
고구려사와 관련해 만주에서 요하 다음으로 중요한 하천이 송화강이다. 송화강의 유역 면적은 55만 7,200km²로서 요하의 약 10배에 이른다. 송화강도 요하처럼 대흥안령산맥 동북단에서 발원한 눈강(嫩江)과 백두산에서 발원한 북류 송화강 등 두 개의 발원지를 갖고 있다. 눈강을 기준으로 한 송화강의 유로는 2,309km이고, 북류 송화강을 기준으로 한 송화강의 유로는 1,927km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사와 직접 연관되는 것은 북류 송화강이다. 북류 송화강의 유로는 958km인데 백두산에서 발원해 서북 방향으로 흘러 송원시(松原市) 일대에서 눈강과 합류한다. 송화강의 상류인 정우현이나 무송현(撫松縣)은 만주 남부에 위치하여 연강수량은 상당히 많지만, 해발고도가 높아 연평균기온은 낮고 무상일수도 적은 편이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8b;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8a).
다만 장광재령산맥과 용강산맥 구간을 지나면서 북류 송화강의 주변 지형은 침식 저산지대로 바뀌고, 길림(吉林) 지역을 지나면 평탄한 충적평지로 변모한다. 이에 따라 연강수량은 줄어들지만. 해발고도가 낮아지면서 연평균기온은 점점 높아지고, 무상일수도 많아진다. 북류 송화강 중류의 반석시(磐石市)는 해발 200~1,000m로 평원과 산지의 점이지대를 이루는데, 연평균강수량은 680~850mm이고, 연평균기온은 4.1˚C, 무상일수는 130~145일에 이른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b).
북류 송화강 하류의 지류인 이통하(伊通河) 유역에 위치한 장춘시(長春市)는 해발 185~ 406m 전후의 저지대인데, 연평균강수량은 593.5mm로 적지만, 위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연평균기온은 4.6˚C, 무상일수는 142~159일에 이른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c). 이에 따라 북류 송화강 지역은 장광재령산맥과 용강산맥에서 대흑산맥에 이르는 침식 저산지대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농경이 크게 발달했고, 고구려도 주로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류 송화강 유역은 고구려 중심부와의 관계를 놓고 보면 크게 상류인 휘발하 유역과 북류 송화강 본류 연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휘발하 유역은 고구려 초기 중심부에서 송화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늦어도 4세기 전반 부여의 중심지를 점령할 무렵에는 이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추정된다.
휘발하 유역에서는 고구려성으로 거론되는 성곽 총 12기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산성이나 보루성, 차단성이다. 송화강 중하류나 두만강 유역에서 평지성이 다수 확인되는 것과 뚜렷이 대조되는 현상이다. 전체적으로 휘발하 유역에는 중심지에 위치한 유하 나통산성(羅通山城)을 중심으로 각 권역에 위치한 중형산성이 유기적인 연관 관계를 이루며 분포한다(지도 8).

지도8 | 북류 송화강-목단강 유역의 지형과 고구려 성곽 분포도
- [북류 松花江 중류와 拉法河 유역] 1. 吉林 龍潭山城 2. 東團山山城/南城子古城 3. 三道嶺子山城 4. 架子山城 5. 三家子古城 6. 蛟河 六家子東山山城 7. 拉法小砬子山城 8. 新街古城 9. 福來東古城 10. 橫道河子南山山城
[輝發河 유역과 飲馬河 상류] 11. 磐石 後虎嘴子山城 12. 炮臺山城 13. 大馬宗嶺山城 14. 城子溝關隘 15. 紙房溝關隘 16. 輝南 小城子古城 17. 輝發城 18. 釣魚臺古城 19. 柳河 羅通山城 20. 釣魚臺古城 21. 東豊 城址山山城 22. 淸原 南山子山城
[북류 松花江 상류] 23. 靖宇 楡樹川古城 24. 撫松 大方頂子城址
[牧丹江 유역] 25. 敦化 城山子山城 26. 橫道河子古城 27. 大甸子古城
[飮馬河-伊通河 유역] 28. 德惠-農安 老邊崗遺蹟
- [북류 松花江 중류와 拉法河 유역] 1. 吉林 龍潭山城 2. 東團山山城/南城子古城 3. 三道嶺子山城 4. 架子山城 5. 三家子古城 6. 蛟河 六家子東山山城 7. 拉法小砬子山城 8. 新街古城 9. 福來東古城 10. 橫道河子南山山城
[輝發河 유역과 飲馬河 상류] 11. 磐石 後虎嘴子山城 12. 炮臺山城 13. 大馬宗嶺山城 14. 城子溝關隘 15. 紙房溝關隘 16. 輝南 小城子古城 17. 輝發城 18. 釣魚臺古城 19. 柳河 羅通山城 20. 釣魚臺古城 21. 東豊 城址山山城 22. 淸原 南山子山城
[북류 松花江 상류] 23. 靖宇 楡樹川古城 24. 撫松 大方頂子城址
[牧丹江 유역] 25. 敦化 城山子山城 26. 橫道河子古城 27. 大甸子古城
[飮馬河-伊通河 유역] 28. 德惠-農安 老邊崗遺蹟
북류 송화강 본류 유역은 다시 최상류인 정우현-무송현, 중류인 길림시 교하시(蛟河市), 하류인 덕혜시(德惠市)-농안현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상류인 정우현과 무송현은 고구려가 연변 지역이나 두만강 하류 방면으로 나아가던 교통로의 경유지로 주목하기도 한다(이성제, 2009; 이성제 기획, 2010). 다만 정우현과 무송현에서는 겨우 2기의 고구려 성곽이 확인되었는데, 정우 유수천고성은 둘레 약 1.5km인 산성이며, 무송 대방정자성지는 소형 평지성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분포한 성곽의 수가 매우 적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류 송화강 중류의 길림시 일대는 부여의 도성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4세기 전반에 이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길림 지역은 지질상 침식 저산-구릉지대와 충적평지의 경계지대로서 동남쪽으로는 구릉성 산지가 펼쳐지고 서북방으로는 광활한 충적평지가 이어진다.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탄하며 넓다”는 『삼국지』 부여전의 기사는 이러한 지형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고구려는 북류 송화강 유역으로 진출한 다음, 길림 등 중류 일대를 가장 중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북류 송화강 중류의 길림시와 교하시 일대에는 총 13기의 성곽이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특히 부여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길림시 동쪽 일대에는 용담산성, 동단산성, 남성자고성 등이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이 가운데 평지성인 남성자고성은 부여의 도성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진출한 다음 계속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지도 8).
북류 송화강 하류의 농안현과 덕혜시 일대에는 송료대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지만, 연강수량은 500~600mm로 전업농업의 서쪽 한계선을 이룬다. 이 지역에서는 천리장성 유적으로 추정되는 노변강유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고구려성이 발견된 바 없다. 다만 문헌사료상 농안 서남쪽 일대에 고구려 후기 부여성이 위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농안 일대는 기후상 농경지구에서 초원-사막지구로 전환되는 점이지대에 해당하는데, 고구려가 이러한 자연환경을 활용해 농안 일대를 서북방 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부여성을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송화강의 수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송화강은 수량이 매우 풍부하여 11월 10일~4월 15일의 결빙기 이외에는 운항할 수 있었다. 특히 20세기 전반에는 흑룡강(黑龍江)과의 합류 지점에서 북류 송화강의 길림까지나 눈강 유역의 치치하얼(齊齊哈爾)까지 대소 기선이 운항했고, 상류 약 96km를 제외하면 전 유역에 걸쳐 목선(木船)이 항운했다고 한다(仲摩照久 편, 1930).
실제 475년에 물길(勿吉) 사신이 배를 타고 동류 송화강과 눈강(難河)을 거슬러 조아하(洮兒河: 太濔河)에 도착한 다음, 육로로 북위의 화룡(和龍: 朝陽)에 도착한 바 있다. 이때 물길의 사신인 을력지(乙力支)는 “백제와 함께 모의해 물길(水道)을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취하고자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주 034 5세기 중·후반에 송화강 수로가 활발하게 활용되었음을 반영한다.
고구려도 북류 송화강 유역으로 진출한 다음, 송화강 수로를 적극 활용했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 북방의 두막루(豆莫婁), 오락후(烏洛侯), 실위(室韋), 물길 등은 동류 송화강이나 눈강의 지류 연안에 분포했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송화강-눈강 수로를 통해 이들과 교섭했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말경에 고구려가 눈강 하류 일대의 남실위(南室韋)에 철을 수출했다고 하는데,주 035 송화강-눈강 수로를 이용해 무거운 철을 운송했을 것이다(여호규, 2018).
북류 송화강 동쪽에는 목단강이 서남에서 동북 방향으로 흘러 동류 송화강에 유입된다. 목단강과 북류 송화강 사이에는 동북-서남 방향의 험준한 장광재령산맥이 분수령을 이루고, 목단강과 두만강 유역 사이에는 노야령산맥이 분수령을 이룬다. 이로 인해 목단강 유역은 부여의 중심지였던 북류 송화강 유역이나 북옥저의 중심지였던 두만강 유역과 구별되는 별도의 문화권을 이루었는데, 대체로 읍루계 주민집단이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장광재령산맥-위호령산맥(威虎嶺山脈)이나 노야령산맥-목단령산맥(牧丹嶺山脈) 일대에는 차별침식에 따른 협곡이 발달하여 북류 송화강에서 목단강 유역을 경유해 두만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교통로가 발달해 있다. 지금도 장춘-연길의 간선 교통로로 활용되고 있는데, 고구려도 이러한 자연지형을 고려해 이 지역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다만 목단강 상류의 중심지인 돈화(敦化) 지역에 상당히 넓은 충적평원이 펼쳐져 있지만, 해발고도가 높고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상당히 춥고, 무상일수도 아주 짧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5).
목단강 유역에서는 상류의 돈화 지역에서만 고구려 성곽이 확인되고 있다. 돈화 지역은 목단강 하류 방면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송화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을 연결하는 가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목단강 하류 방면의 물길이나 말갈 등 읍루계 주민집단을 통제하거나 이들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돈화 지역에 군사방어망을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북류 송화강 방면과 두만강 방면을 모두 장악한 다음, 두 지역을 상호 연계시키기 위해 가교에 해당하는 돈화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고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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