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반도 중북부의 자연지리와 환경
4. 한반도 중북부의 자연지리와 환경
1) 자연지형과 기후환경의 특성
고구려는 4세기 이후 만주 각지로 진출하는 한편, 한반도 방면으로의 남진정책도 적극 추진했다. 311년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장악한 다음, 313년에 낙랑군, 314년에 대방군을 점령하여 한반도 서북 지역을 석권했다. 4세기 후반에는 재령강-예성강의 분수령인 멸악산맥 일대에서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광개토왕대에 예성강-임진강 일대를 장악하는 한편, 내륙 지역에서는 북한강 유역으로 진출했다. 475년 백제 도성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 전역을 장악하고, 481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도성 북방까지 진군했다.
이로써 신라와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접하고, 백제와는 차령산맥 북쪽의 아산만 일대 및 금강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고구려가 만주 중남부와 더불어 한반도 중북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각지로의 진출을 시도한 반면, 한반도 방면에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차적으로 점령하면서 남진했다.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진출 양상이 달랐던 것인데, 주변국과의 역관계를 비롯한 국제정세와 함께 자연지형의 차이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반도는 동서 폭은 좁은 반면, 남북으로 기다랗다. 한반도의 산줄기는 남북으로 뻗은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이 기본 뼈대를 이루며, 여기에서 갈라진 지맥들이 서해를 향해 달리는 양상을 띤다. 고구려 발흥지인 압록강 중상류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면, 낭림산맥이나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묘향산맥, 언진산맥, 멸악산맥, 마식령산맥, 광주산맥 등이 겹겹이 놓여 있고, 그 사이로 청천강, 대동강, 재령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의 하천이 흐르는 형상이다. 고구려가 남진할 때 각 하천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맥을 하나씩 넘으며 순차적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는 지형 조건이다.
지질학상 한반도 지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태백산맥의 동쪽 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좁은 반면, 서쪽 사면은 경사가 완만하며 넓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지형을 경동지형(傾動地形)이라 일컫는데, 동해 쪽에 치우친 요곡융기(撓曲隆起)에서 기인한다.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 이래 평탄하게 되었다가 신생대 제3기 중엽부터 융기하여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신생대의 요곡운동과 단층운동으로 한반도가 융기하면서 태백산맥, 낭림산맥, 소백산맥 등 1차 산맥이 조성되고,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 형성된 것이다(권혁재, 2003).
1차 산맥의 지맥(支脈)인 2차 산맥은 구조선을 따라 진행된 차별침식에 의해 만들어졌다. 2차 산맥 발달에 영향을 준 구조선은 중생대 대보조산 운동의 결과로 발달했던 랴오둥(遼東) 방향, 중국 방향의 구조선이다. 이들 구조선은 지각변동에 의해 땅속 부분이 약해져 쉽게 침식될 수 있었다. 2차 산맥을 추가령구조곡을 경계로 북쪽의 랴오둥 방향 및 남쪽의 중국 방향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차 산맥은 융기의 중심축에 놓여 있어 연속성이 강하지만,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2차 산맥은 연속성이 약하다(권동희, 2006). 이로 인해 1차 산맥은 산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반면, 2차 산맥은 구조선을 따라 진행된 침식작용에 의해 하곡이 파이면서 곡간산지의 형태로 생겨났기 때문에 서해로 근접할수록 고도가 낮아지고 산줄기도 흩어져 분명하지 않다(김종욱, 2008). 2차 산맥인 광주산맥이나 차령산맥이 남한강에 의해 단절되는 것은 이러한 차별침식의 결과이다(권동희, 2006).주 036
이에 따라 지도 1에서 보듯이 한반도의 주요 하천은 1차 산맥인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의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2차 산맥 사이를 흐르는 양상을 띤다. 가령 청천강은 적유령산맥과 묘향산맥, 대동강은 묘향산맥과 언진산맥, 재령강은 언진산맥과 멸악산맥, 예성강은 멸악산맥과 마식령산맥, 임진강은 마식령산맥과 광주산맥, 한강은 광주산맥과 소백산맥 등의 사이를 흐른다.
다만 한반도 중부지역의 경우, 충주와 원주를 기준으로 그 동쪽에는 장년기의 험준한 산지가 많은 반면, 그 서쪽에는 고도가 낮은 노년기의 구릉지가 널리 분포한다(권혁재, 2003). 특히 서해에 근접할수록 고도가 낮아지고 산줄기도 흩어지면서 평탄하고 넓은 침식평야나 충적평야가 펼쳐진다(권동희, 2006). 이로 인해 서해안을 따라서는 해발고도가 낮고 평탄한 지형이 펼쳐지는 반면, 내륙 산간지대에는 비교적 험준한 지형이 이어진다.
한반도는 좁은 면적에 비해 지역 간의 기후 차이가 심한 편인데, 중위도 대륙의 동안(東岸)에 위치하여 대륙과 해양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산지가 많아 육지의 기복이 심하기 때문이다. 각 지역별 기후 구분은 다양한 기준으로 이루어지는데, 위도와 더불어 해안과 내륙, 산지 등 지형적 요인을 고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라우텐져(Lautensach)의 경우 개마고원과 함께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의 산줄기를 별도의 기후대로 분류하여 산지의 특성을 잘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실제 연평균기온은 위도에 따라 제주도나 남해안 일대가 높고, 북부지역으로 갈수록 낮아지지만, 내륙 산간지역도 동위도(同緯度)의 해안지역보다 낮은 양상을 보인다. 이에 따라 연평균기온의 등온선은 전반적으로 태백산맥과 함경산맥 동쪽에서는 해안을 따라 뻗어 있고, 태백산맥 일대의 산악지역에서는 남쪽으로 깊숙이 휘어 있다. 같은 위도라면 내륙이 해안보다 기온이 낮은 것이다(권혁재, 2003; 박병익, 2008). 이처럼 등온선이 내륙에서 남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양상은 여름철보다 겨울철이 더 심하다(권혁재, 2003).
이에 많은 연구자들이 한반도의 기후를 위도에 따라 남부, 중부, 북부로 구분한 다음, 다시 동해안의 동안형, 서해안의 서안형과 함께 내륙 산간지대의 내륙형 등으로 세분한다(지도 9 참조). 특히 라우텐져는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의 산줄기 일대를 개마고원과 동일한 유형의 기후대로 분류하기도 한다(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많은 지리학자들이 지형과 기후를 고려하여 멸악산맥을 기준으로 북부지역과 중부지역을 구분하는데(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멸악산맥은 그루갈이의 북한계선을 이룬다(강철성, 2008).

지도9 | 한반도의 지역 구분(왼쪽: 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오른쪽: 임덕순, 1992b)
이와 관련해 고구려가 313~314년에 낙랑군·대방군을 점령하여 멸악산맥 이북을 석권했지만, 백제와 거의 1세기 가까이 멸악산맥을 경계로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6세기 중반 나·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다음, 7세기에는 멸악산맥 남쪽의 임진강 유역에서 신라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한반도 중남부로 진출하거나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자연지리와 기후환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2) 한반도 북부지역
한반도 북부지역은 지형이나 기후상 멸악산맥 이북 지역에 해당하는데, 그루갈이가 어려운 지역이다. 북부지역은 크게 관서지방과 관북지방으로 나뉘며, 다시 관서지방은 북부 서안지역(북서 평야지역)과 북부 내륙지역(북중 산지지역), 관북지방은 함경도(관북) 해안지역(북부 동안형)과 북부 고원지대(개마고원형) 등으로 세분한다(지도 9, 지도 10 참조). 이 가운데 관북지방은 제2절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에서는 관서지방만 다루고자 한다.
관서지방의 서쪽인 북부 서안지역(북서 평야지역)은 낭림산맥의 서쪽 사면 가운데 평안북도 삭주에서 황해도의 신막을 잇는 선의 서쪽이다. 낭림산맥에서 갈라진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언진산맥, 멸악산맥의 말단부 및 이들 산맥 사이를 흐르는 청천강, 대동강, 재령강의 중하류 유역이다. 침식이 많이 진행된 노년기의 구릉지 지형으로서 서해안을 따라 청천강 하류의 안주평야, 대동강 하류의 평양평야, 재령강 유역의 재령평야 등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은 겨울철 기온은 비교적 낮지만, 여름철 기온은 높다. 다만 연 평균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큰데, 청천강 지류인 대령강 유역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연강수량이 1,300mm에 이를 정도로 비가 많이 오지만, 대동강 하류 일대는 700~1,000mm로 한반도에서 개마고원 다음으로 적다. 다만 이 지역은 평야가 넓게 발달해 있고, 여름철 기온도 높아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곡창지대를 이룬다(임덕순, 1992b; 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북부 내륙지역(북중 산지지역)은 낭림산맥 동서 사면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낭림산맥과 함께 여기에서 갈라진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언진산맥, 멸악산맥 등을 따라 높고 험준한 산지가 이 지역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아직 침식이 덜 진행된 장년기의 험준한 산간지대로 인구밀도가 낮고 주로 밭농사를 짓는다. 다만 낭림산맥 남쪽 구간은 해발고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차별침식에 따른 협곡이 발달하여 관서지방과 관북지방을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기후는 해발고도가 높고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북부 서안지역보다 대륙성이 훨씬 강하다. 여름철 기온은 해안지역과 큰 차이가 없지만, 겨울철 기온이 많이 낮아 연교차가 크게 난다. 연강수량은 대부분 지역이 1,000mm 이상으로 해안지역보다 많은 편인데, 청천강 중상류는 대표적인 다우지역이다(임덕순, 1992b; 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관서지방은 크게 북부 서안지역과 내륙지역으로 나뉘는데, 서안지역은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여 북부지역 나아가 만주-한반도 일대의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 초에 연에게 서방 영토를 빼앗긴 다음, 북서 평야지역의 중심지인 평양 일대를 도성으로 삼았다. 이때 대동강 남쪽의 재령강 유역에는 진번(眞番), 낭림산맥 산지와 영흥만 일대에는 임둔(臨屯) 등의 정치세력이 성장했는데, 기원전 2세기에 위만(衛滿)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들을 복속시켰다. 이에 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다음 그 중심부였던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하는 한편, 재령강 유역에는 진번군, 낭림산맥 산지와 영흥만 일대에는 임둔군을 설치했다(이병도, 1975; 윤선태, 2010).
기원전 82년 임둔군과 진번군 폐지 이후, 한의 지배범위는 낙랑군으로 축소되고, 영흥만 일대나 낭림산맥 산지에 대한 영향력이 급속히 약해졌다. 이에 고구려는 1세기에 함흥평야의 동옥저를 점령한 다음, 2세기에는 영흥만 일대의 동예를 거의 대부분 장악했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313~314년 낙랑군·대방군 점령에 앞서 그 외곽의 북부 내륙지역부터 먼저 장악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평야지대인 북부 서안지역으로 진출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가 이 지역의 자연지형 및 그에 따른 정치세력의 분포 양상을 활용해 서북한(관서지방) 일대를 석권했던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 천도를 단행하여 만주 중남부와 한반도 중북부에 걸친 광활한 판도를 경영하는 중심지로 삼고, 동북아 각국과 국제 교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처럼 평양 지역이 고구려의 중심부 나아가 국제 교섭의 거점으로 부상한 데에는 고조선 이래 이 지역에 축적된 선진문화와 더불어 자연환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북한 지역의 산맥 가운데 북쪽의 강남산맥과 적유령산맥 및 남쪽의 멸악산맥은 서해안 가까이까지 산줄기가 뻗어 있다. 반면 이들 사이의 묘향산맥과 언진산맥은 오랜 침식작용으로 인해 북부 서안지대에서는 구릉이나 저지대로 변모한다. 이로 인해 요동 지역이나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서북한으로 진입하려면 강남산맥-적유령산맥과 멸악산맥의 협곡로나 산간로를 통과해야 했다.
반면 청천강, 대동강, 재령강의 경우, 중상류는 묘향산맥이나 언진산맥에 의해 수계가 나뉘지만, 하류의 평야지대는 서로 이어져 쉽게 내왕할 수 있었다. 특히 재령강은 정방산-구월산 사이의 저지대를 통과해 대동강과 합류한 다음 서해로 흘러나간다. 재령강과 대동강 유역이 하나의 수로망으로 연결되었던 것인데, 20세기 초까지도 내륙수로가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가령 대동강은 평양까지 서해의 조수(潮水)가 들어와 재령강 합류 지점까지는 대형 기선, 재령강 합류 지점-이포 구간은 3,000톤급 기선, 이포-만경대 구간은 350톤급 기선, 만경대-평양 구간은 소형 기선 등이 운항할 수 있었다. 평양은 서해를 다니던 배들이 기항(寄港)할 수 있는 항구였던 것이다. 평양보다 상류 구간은 적재량 50석 내외의 목선만 운항할 수 있었지만, 가항 종점은 덕천으로 총 가항 거리는 260km에 이르렀다(朝鮮總督府, 1920). 재령강도 본류는 재령군 삼지강면 청류포(靑柳浦),주 038 서흥강은 어지둔보(於之屯洑) 하류, 서강은 신천군 삼가포(三街浦) 등이 가항종점이었다(朝鮮總督府, 1920; 朝鮮總督府, 1929; 강석오, 1971).주 039
이처럼 서북한의 평야지대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은 하나의 수로망을 이루었다. 이에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 천도를 단행하여 서북한의 평야지대를 도성의 배후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서해 해로와 연결된 평양을 거점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활한 판도를 경영하는 한편, 동북아 각국과도 활발하게 교섭했다. 이와 함께 고구려는 서북한(관서지방)의 자연지형과 교통로를 고려하여 도성 중심의 방어체계도 구축했다(지도 11 참조).

지도11 | 서북한 지역의 주요 고구려 성곽
- [압록강-청천강 유역] 1. 백마산성 2. 걸망성 3. 용골산성 4. 동림산성(통주성) 5. 능한산성 6. 니성 7. 농오리산성 8. 철옹성 9. 안주성 29. 관전 호산산성30. 단동 애하첨고성
[대동강 유역과 그 주변] 10. 숙천읍성 11. 청룡산성 12. 흘골산성 13. 평양성 14. 대성산성 15. 황룡산성
[재령강 유역] 16. 황주성 17. 휴류산성 18. 대현산성 19. 고현리성 20. 구월산성 21. 장수산성 22. 신원도시유적
[황해도 해안과 예성강 유역] 23. 수양산성 24. 태백산성 25. 치악산성 26. 봉세산성 27. 옹진고성 28. 오누이성
- [압록강-청천강 유역] 1. 백마산성 2. 걸망성 3. 용골산성 4. 동림산성(통주성) 5. 능한산성 6. 니성 7. 농오리산성 8. 철옹성 9. 안주성 29. 관전 호산산성30. 단동 애하첨고성
[대동강 유역과 그 주변] 10. 숙천읍성 11. 청룡산성 12. 흘골산성 13. 평양성 14. 대성산성 15. 황룡산성
[재령강 유역] 16. 황주성 17. 휴류산성 18. 대현산성 19. 고현리성 20. 구월산성 21. 장수산성 22. 신원도시유적
[황해도 해안과 예성강 유역] 23. 수양산성 24. 태백산성 25. 치악산성 26. 봉세산성 27. 옹진고성 28. 오누이성
먼저 고구려는 평야지대에 위치한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환상(環狀)의 위성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서쪽의 황룡산성은 서해로부터 평양으로 진격하는 적군, 서북쪽의 청룡산성은 청천강 하류에서 서해안 평야지대를 통해 남진하는 적군, 동북쪽의 흘골산성은 청천강 유역에서 내륙 방면의 대동강 중류 연안로를 따라 남진하는 적군이나 동해안에서 낭림산맥을 넘어 서진하는 적군, 남쪽의 황주성은 한반도 중부에서 북상하는 적군 등을 방어했다(지승철, 2005).
위성방어체계 바깥에는 외곽 방어성을 겹겹이 구축하여 서북한의 평야지대를 방어했다. 북쪽의 경우 청룡산성을 지나 숙천읍성, 안주성 등을 구축했다. 남쪽으로는 황주성을 지난 20km 지점에 봉산 휴류산성, 휴류산성 동남쪽에 서흥 대현산성(오곡성),주 040 서남쪽으로는 신원 장수산성(한성) 등을 축조해 2중 3중의 방어망을 구축했다. 이들 성곽은 대부분 중대형 포곡식 산성으로 지방 거점성의 역할도 수행했다. 394년과 409년에 축조했다는 국남(國南) 7성과 국동(國東) 6성을 이러한 외곽방어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최창빈, 1990).
요동 지역에서 서북한으로 진입할 경우 서해안 가까이 뻗은 강남산맥과 적유령산맥을 통과해야 했는데, 연해의 의주-곽산-박천로와 내륙의 삭주-태천-영변로 등 두 경로가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두 경로를 따라 종심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연해의 종심방어선은 압록강 대안의 백마산성을 출발해 용골산성·동림산성·능한산성 등을 거쳐 청천강 하류의 안주성에 이르러 도성의 외곽 방어선과 연결된다. 내륙의 종심방어선은 니성·농오리산성·철옹성 등을 거쳐 안주성으로 연결되거나 계속 내륙 교통로를 따라 흘골산성으로 이어진다(박창수, 1990; 남일룡, 1995; 손영종 2008).
평안도의 내륙 산간로와 관련해 국내성과 평양을 잇던 교통로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말기에는 도성인 평양과 별도인 국내성 사이에 17개 역이 있었다고 한다.주 041 이 교통로는 대동강-청천강 중상류를 거슬러 적유령산맥을 넘은 다음 독로강 유역을 거쳐 국내성에 이르던 경로로 추정되는데, 현재 만포선 철로가 지나간다. 조선 초기에 압록강 중상류를 개척하면서 이 교통로를 활용하기 시작했는데(정요근, 2008), 조선시기에도 이 교통로에 총 17개의 역참을 설치했다(조법종, 2011).
서북한에서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나아갈 경우에는 멸악산맥의 고개길을 통과해야 했는데, 수안-신계로, 서흥-신계로, 서흥-평산로, 재령-해주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산간 내륙의 수안-신계로는 재령강 유역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동강과 임진강 유역을 연결하며, 이천-평강을 거쳐 영서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흥-평산로는 해발고도가 170m에 불과한 지소고개를 통과하는데, 서북한과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최단 코스로 지금도 경의선이 지나가고 있다. 재령-해주로는 가장 평탄하지만, 서북한과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육로보다는 해로와 더 깊이 연관될 것으로 추정된다(서영일, 2006; 정요근, 2008).
각 교통로는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가령 예성강 중류의 신계에서는 서북쪽으로 멸악산맥을 넘어 수안이나 서흥, 동남쪽으로 마식령산맥을 넘어 임진강 중상류의 이천-평강이나 토산-삭령 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성강 하류를 따라 평산-개성을 지나 임진강 하류로도 진입할 수 있다. 특히 신계에서 이천-평강을 거쳐 영서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고구려가 한강 하류를 장악하기 이전에는 이 경로를 통해 영서지역으로 진출하고 신라와 교섭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계 일대는 여러 교통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수곡성(水谷城)으로 비정된다(서영일, 2000; 장창은, 2014).
한편,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을 석권한 다음, 이 지역에서 수취한 각종 물자를 한강 수로와 서해 해로를 통해 도성인 평양으로 운송했다. 그런데 중부지역에서 평양으로 나아가는 서해 해로 가운데 장산곶 일대는 해난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장산곶을 경유하지 않기 위해 멸악산맥에서 가장 평탄한 재령-해주로를 활용해 서해 해로와 재령강-대동강 수로를 연결하는 교통망을 구축하였다. 이 교통망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재령강 상류에 물류의 중간 집하장(集荷場)으로 한성 별도를 건설하여 운영하였다(여호규, 2020).
이처럼 멸악산맥 일대의 교통로는 고구려가 중부지역으로 나아가거나 백제·신라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고구려는 멸악산맥 일대의 교통로에 여러 갈래의 종심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서흥-평산로에는 서흥 대현산성과 평산 태백산성 등을 축조하여 서북한과 중부지역을 잇는 최단 교통로를 방어했다. 재령-해주로에는 신원 장수산성과 해주 수양산성을 축조하는 한편, 치악산성과 봉세산성을 축조해 연백평야 일대를 방어했다. 황해도 해안을 따라 구월산성, 풍천성, 오누이산성, 옹천고성, 수양산성 등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하여 해안방어체계를 구축했다(김경찬, 1992; 김경찬, 1996; 양시은, 2016).
3) 한반도 중부지역
한반도 중부지역은 기후나 지형상 멸악산맥에서 소백산맥-차령산맥에 이르는 지역인데, 부분적으로 그루갈이가 가능한 곳이다. 이 지역도 지리적 특징에 따라 서안지역(중서 평야지역), 내륙지역(중앙 산지지역), 동안지역(영동 해안지역) 등으로 세분된다(지도 9, 지도 12 참조). 다만 영동지방이라 불리는 중부 동안지역은 고구려 영역으로의 편입 여부가 불분명하고, 고구려 관련 유적도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이 글의 서술 대상에서 제외한다.
중부 서안지역(중서 평야지역)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도계(道界) 서쪽에 해당한다.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마식령산맥, 광주산맥, 차령산맥의 말단부 및 이들 산맥 사이를 흐르는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의 중하류와 안성천 유역이다. 이 지역의 연평균기온은 10~12˚C 내외이다. 연 평균강수량은 한강 유역은 1,300mm 내외이지만, 예성강 유역은 1,100~1,200mm이며, 해주는 1,000m에 미치지 못하지만, 농사를 짓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지역은 오랜 기간 침식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노년기의 구릉지형으로 경기만을 따라 황해도 남부의 연백평야, 한강 하류의 김포평야, 안성천 유역의 평택평야 등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임진강과 한강 중류 곳곳에도 비교적 넓은 분지가 발달해 있는데, 중부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곡창지대이다(임덕순, 1992b; 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중부 내륙지역(중앙 산지지역)은 강원도 영서지방과 충청북도 북부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태백산맥의 서쪽 사면과 마식령산맥, 광주산맥, 차령산맥 등의 산줄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은 침식작용이 덜 이루어진 장년기의 산간지대로 주로 밭농사를 지으며 인구밀도도 낮다. 연평균기온은 10~11˚C이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평강은 8.7˚C에 불과하며,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크다. 연평균강수량은 1,200~1,300mm로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임덕순, 1992b; 기상청 기상연구소, 2004).
이 지역은 농경지가 협소하지만, 하천 연안 곳곳에 상당히 넓은 침식분지가 발달했다. 각 침식분지는 산간 협곡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데, 이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산간 협곡로(현재의 중앙고속도로 노선)는 일찍부터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태백산맥은 매우 험준하여 영동지역과 왕래하기 쉽지 않은데, 북단의 추가령구조곡을 통해서 원산만 일대와 비교적 원활하게 교통할 수 있다.주 043
이처럼 중부 서안지역과 내륙지역은 자연환경에서 큰 차이가 났는데, 주민집단의 계통도 달랐다. 고구려 진출 이전에 중부 서안지역에는 주로 마한계 주민집단이 거주한 반면, 내륙지역에는 마한계와 함께 예계(위말갈) 주민집단이 잡거하는 양상을 띠었다(김창석, 2008). 이에 고구려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주민집단의 분포 양상을 고려하여 남진을 추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에 멸악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각축전을 벌이는 한편, 임진강 상류 방면에서는 원산만 일대의 동예를 동원하여 추가령구조곡의 교통로를 통해 백제를 압박했다(여호규, 2012). 광개토왕대에는 서해안을 따라 한강 하류 방면으로 진격하는 한편, 내륙에서는 신계-이천-평강을 거쳐 영서지역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를 통해 북한강 유역으로 진출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마한계 주민집단뿐 아니라 예계 주민집단도 복속시켰는데, ‘한(韓)’과 ‘예(穢)’로 구분하여 파악했다(서영일, 2006; 여호규, 2012).
고구려는 475년에 백제 한성을 함락시키고, 481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도성 북방까지 진격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비롯한 중부지역을 석권하고, 신라와는 소백산맥, 백제와는 차령산맥을 경계로 대치하였다. 근래 백제가 웅진시기에 한강 유역을 수복했다는 견해가 다수 제기되고 있다(김현숙, 2009). 그렇지만 고구려가 512년과 548년에는 차령산맥 북쪽의 아산만 일대, 487년과 550년에는 금강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서 백제와 각축전을 벌인 사실이 확인된다. 고구려가 475~551년에 중부지역을 장악한 것은 거의 명확하다(여호규, 2013).
중부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 방식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이 지역에서는 서북한이나 요동 지역과 달리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중대형 포곡식 산성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 13에서 보듯이 임진강-한강 북안에서는 소형 보루가 대거 확인되었는데, 모든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지 않고 전략적 요충지에 밀집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고구려가 중부지역 전역을 지배하지 않고, 전략적 거점만 장악했다고 보기도 한다(심광주, 2002; 임기환, 2002; 신광철, 2011; 이정범, 2015).

지도13 | 한반도 중부지역의 고구려 유적 분포도(최종택, 2016)
그런데 근래 경기 남부의 성남 판교동, 용인 보정동, 화성 청계리 등에서 고구려 고분이 대거 조사되었다(안신원, 2010; 최종택, 2011). 경기 남부와 금강 유역에서는 안성 도기동산성, 진천 대모산성, 청주 정북동 토성, 청원 남성골산성, 연기 나성리토성, 대전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 등 성곽이나 주거 유적도 다수 확인되었다(최종택, 2014; 2016). 이 가운데 안성 도기동산성, 진천 대모산성, 연기 나성리토성 등은 넓은 분지나 소규모 평야의 독립 구릉에 위치하는데, 군사방어뿐 아니라 거점성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입지조건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비롯한 중부지역을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하여 지배했다고 파악된다(노태돈, 2005; 김현숙, 2008; 최종택, 2008; 양시은, 2010). 다만 지도 13에서 보듯이 평야나 분지가 넓게 펼쳐진 중부 서안지역에는 보루성이나 성곽이 조밀하게 분포한 반면, 내륙지역에서는 춘천-홍천 일대의 고분을 제외하면 고구려 유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고구려가 중부지역 각지의 자연환경을 고려해 지방 지배를 도모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중부지역의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은 내륙 수로가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한강은 유역면적이 넓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류까지 항행할 수 있었다. 남한강의 경우 가항 종점은 상류의 영월이다. 단양-영월 구간은 중수기(重水期: 雨期)에만 항행할 수 있었지만, 단양까지는 평수(平水) 시에 상시 항행이 가능했다. 북한강의 가항 종점은 화천(본류)과 양구(소양강)인데, 춘천까지는 상시 운항이 가능했다. 홍천강도 홍천까지는 상시 항행이 가능했다(朝鮮總督府, 1920; 강석오, 1971; 한주성, 2010).
이처럼 한강 유역은 상류까지 수로망이 발달했고, 중하류인 서안지역뿐 아니라 내륙지역인 단양, 홍천, 춘천까지도 상시 항행이 가능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한강 유역이 수로망을 통해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에 20세기 초까지도 한강 수로망은 소금이나 목재 등을 운송하는 교통망으로 활용되었는데(최영준, 1987; 최영준, 2004), 고려나 조선시기에는 한강 수로를 통해 각지에서 거둔 세곡을 도성으로 운송했다(최완기, 1976; 한정훈, 2013).
이로 보아 고구려는 한강을 비롯하여 임진강이나주 044 예성강주 045 등의 수로망을 활용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방 지배를 도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백제 한성을 함락시켜 한강 유역을 장악한 다음 백제의 몽촌토성을 재활용하는 한편 한강 북안에 남평양을 건설했고, 남한강 수로의 거점인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했다. 이러한 남평양이나 국원성은 도성에 버금가는 별도(別都)로 추정되는데, 한강 수로망을 활용해 지방 지배를 도모하던 양상을 잘 보여준다(여호규, 2002c; 2020).
다만 한강 수로망은 단양, 홍천, 춘천 등까지만 상시 운항이 가능했고, 이보다 상류 방면은 수량이 풍부한 중수기에만 항행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한강 수로망을 통해 지방 지배를 도모할 경우, 단양-홍천-춘천보다 상류 방면으로는 통치력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단양-홍천-춘천은 중부 내륙지역(영서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교통로가 지나는 주요 거점이며, 그보다 상류 방면으로는 험준한 산간지대가 펼쳐진다.
전술했듯이 이러한 산간지대에는 마한계와 구별되는 예계 주민집단이 다수 거주했다. 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대에 이 지역을 복속한 다음 ‘한’과 ‘예’를 구분하였는데, 548년에도 ‘예’를 집단적으로 동원해 백제를 공격한 사실이 확인된다.주 046 고구려가 6세기 중반까지도 중부 내륙 산간지대의 예계 주민집단을 그 서쪽의 주민집단과 구별하여 별도로 편제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한강 수로망을 비롯한 이 지역의 자연환경을 고려하며 지방 지배를 도모했던 것이다.
- 각주 036)
- 각주 037)
- 각주 038)
- 각주 039)
- 각주 040)
- 각주 041)
- 각주 042)
- 각주 043)
- 각주 044)
- 각주 045)
- 각주 0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