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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고구려 종족 기원을 둘러싼 제 논의

1. 고구려 종족 기원을 둘러싼 제 논의

고구려의 종족 기원과 관련한 기존의 국내와 일본 학계의 이해는 한민족 혹은 고조선의 종족 기원 문제와 맞물려 주로 예(濊)·맥(貊)·예맥(濊貊, 穢貊)등의 명칭에 중점을 두어왔다. 이를 크게 나누어보면, 예·맥 동종설과 예·맥 이종설로 설정된다. 예·맥 동종설은 조선 후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맥은 종족명이고, 예는 지명 또는 물의 이름이라고 보아 예맥은 구맥(九貊)의 일종을 지칭한 것이라 본 것이 시초이다. 미시나 쇼에이는 선진(先秦)문헌상의 ‘맥’은 북방민족의 범칭이며, 예는 한대에 처음 보이는데, 한대의 범칭적인 예는 부여, 고구려, 동예를 포괄하는 명칭이고, 예맥이라는 호칭은 예라는 현실적 민족명과 북방 종족에 대한 고전적 범칭인 맥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고구려를 지칭한 맥은 민족명인 범예족 내 특정 부족의 이름으로 이해하였다. 곧 한대 이후의 맥은 예와 동일 계통이라는 것이다(三品彰英, 1953). 윤무병은 예맥이라는 명칭은 『사기』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한 것이었고, 한대 이후의 예와 맥은 동일한 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는 실체로 파악하였다(윤무병, 1966). 김정배 역시 예, 맥은 동일계 족속으로 그 분포 지역에 따라 각각 구분된다 고 보았다(김정배, 1963).
예·맥 이종설을 주장한 학자는 미카미 츠기오가 대표적이다. 그는 예족은 유문토기(有紋土器)문화를 영위하고 생활방식에서는 수렵·어로 비율이 컸던 고아시아 계통으로 이해하였고, 맥족은 무문토기(無紋土器)문화를 남긴 퉁구스족으로 보았다(三上次男, 1951). 그러나 그의 설은 빗살무늬토기문화와 민무늬토기문화가 동시대의 것이 아니라, 시대적 선후관계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된다.
한편, 이옥은 예족과 맥족은 중국 섬서성, 하북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으로 이동해왔다고 보았다. 기원전 3세기 무렵 길림성 장춘, 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하고 있던 예족은 이후 맥족에 밀려 남쪽으로 이동하고 다시 고조선에 의해 쫓겨났는데, 그것이 곧 『한서』 무제기에 등장하는 예군 남려 집단으로,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하였으니 그것이 곧 고구려족이라고 하였다(이옥, 1984). 그러나 이와 같은 예족과 맥족의 동천에 근거한 예맥족 성립설은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으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본래 선진 문헌의 맥과 예라는 별개의 족칭에서 출발해 예맥이라는 연칭에 이르게 되는 예, 맥, 예맥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근래에는 보다 정치한 문헌 비판과 진전된 고고학 발굴성과를 토대로 문헌에 나타난 예, 맥 등의 용례를 시대별로 분석해 도식적으로 연결하던 과거의 시도들을 극복하고 고구려의 족칭으로 등장한 맥을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해 해석하려는 질 높은 연구성과가 다수 나왔다.
이러한 연구의 필두로 여호규의 견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고구려의 종족 기원에 대해 기존의 주장을 정리하며 고구려의 기원이 된 주민 집단에 대해 원래 예족 혹은 예맥족의 일원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 초 무렵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주변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집단을 형성하였고, 그들이 기원전 2세기 후반경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았다. 그 집단(정치세력)이 처음에 구려(句驪)라 불리다가, 고구려라는 국가명으로 고정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맥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여호규, 1996; 2011). 즉 고구려를 지칭한 맥족은 예족과 종족적으로 구분되던 선진시기의 개념이 아니라, 예맥족에서 파생된 것으로 고구려라는 국명을 대신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근래에 예맥의 실체에 대해 문헌과 고고학을 종합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가 있는 송호정 역시 대체로 이와 같은 여호규의 견해에 동의하며, 늦어도 기원전 3세기 말에 독자적 문화를 이룩한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주민집단은 ‘구려종족(句驪種族)’, 그리고 고구려의 모체를 이룬 사회라는 의미에서 ‘원고구려사회(原高句麗社會)’주 001
각주 001)
고구려의 모체가 되었던 사회 혹은 정치세력에 대해 원(proper)고구려라고 처음 이름 붙인 것은 이병도이다(이병도,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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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송호정, 2007). 박경철 역시 적석총의 조영에 주목하며 고구려사회라고 칭하였다(박경철, 2003).
김현숙도 선진 문헌의 맥과 고구려를 지칭하던 맥은 별개라는 견해를 수용하며, 선진시기 이래 요동 지역에 거주해오던 예가 곧 예맥이고 여기서 다시 예와 맥(고구려)으로 분화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초기 고구려의 탄생을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과 유리 집단,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비류수(沸流水)일대로 내려와 주변의 맥과 역사적 경험을 같이하며 동화의 길을 걸었던 졸본부여, 그리고 송양(松壤)의 비류국을 위시한 압록강 유역의 토착세력들이 결합한 결과물로 파악한 바 있다(김현숙, 2007).
고구려의 종족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학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는 1980년대 이전까지 고고학적 성과를 제외하고는 별로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 점차 활발해져 90년대 중반부터는 다수의 단행본까지 간행하며 고구려 역사 연구에 박차를 가해 왔다(김현숙, 2004; 2005). 이는 1980년대 이후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정책과 맞물려 대내적인 결속을 강화하고자 이른바 변강사(邊疆史)연구가 국가중점사업으로 정해져 진행된 것과 연관이 크다. 특히, 고구려사 연구는 중국 사회과학원의 중심과제로 책정되어 정책적 지원을 받으며 많은 학자에 의해 행해졌다(耿鐵華, 2000). 근래에는 소위 ‘동북공정’ 이후 중국 동북지역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구려 관련 연구는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 연구자인 왕면후는 그간 중국에서 제기된 고구려 종족 기원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며 예맥설, 고이(高夷)설, 고이-맥부(貊部)설, 부여설, 고조선설, 상인(商人)설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였다(王綿厚, 2006).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에서 종족 기원 관련 문제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둘러싼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고구려의 민족적 원류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4개로 나뉜다. 첫 번째는 고구려 종족 기원에 대한 고전적 견해라 할 수 있는 예맥족설로, 1980년대에 출현해 1990년대 초반까지 거의 정설로 자리 잡았던 견해이다(張博泉, 1983; 孫進己, 1987; 楊保隆, 1998; 王綿厚, 2002; 李春祥, 2006; 楊軍, 2006). 다음은 부여출자설로, 고구려는 숙신(肅愼)계통의 퉁구스족인 부여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金毓黻, 1936; 王健群, 1987; 金岳, 1994). 이러한 견해는 『삼국사기』 기록 등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숙신출자설’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하다.
이 두 설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오고, 기존 북한, 한국, 일본 등의 견해를 수용해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라면, 이제 소개할 두 설은 근래 중국 학계 자체에서 등장해 내부적으로 큰 반향과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먼저, 염제족(炎帝族)설은 고구려와 부여 모두 중국 산동성(山東省)에서 기원하였고,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염제 신농씨의 후예라는 견해이다(李德山, 1992; 2003). 이 설은 한족(漢族)구성체의 하나인 염제 계통의 동이족이 고구려의 종족적 기원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주요한 근거를 거의 고구려 명칭의 음운적 변개 고찰에 의존하고 있어 논거가 극히 희박하지만,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오늘날 중국 정부의 현실적 이해관계와 완전히 부합되어 많은 지원을 받는 가설이다.
끝으로 상인(商人)설 혹은 고이(高夷)설은 근래 다수의 중국 학자가 수용하고 있는 견해이다(氾犂, 1993; 劉子敏, 1996; 馬大正·楊保隆, 2001). 이 설은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 『관자(管子)』 소광(小匡)편 등을 근거로 은·주 교체기에 주족에게 쫓긴 상족의 일파가 동북으로 진출해 고구려(기록에는 ‘고이’로 나옴)를 건국하였다고 추정한다. 이 견해도 대내외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은 글로써 근거를 내세우지는 못하였으나 고구려 문화와 은상(殷商)문화에 관한 연구를 병행해 논지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 설 역시 고구려와 은의 연결고리를 문헌이나 고고학 증거를 통해 실증해내지는 못하였다.
위에서 개략적으로나마 중국 학계의 고구려 종족 기원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연구가 가진 문제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고전적인 견해인 예맥출자설과 부여출자설의 경우,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출자했고, 부여와 고구려가 모두 예(맥 또는 예맥으로도 칭해짐)라는 고대의 민족집단에서 나왔다는 것이 사료에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간 더 들어가보면 이들이 갖는 문제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이들은 앞서 본 대로 예맥족이 한민족과는 상관없는 퉁구스계의 종족인 숙신, 곧 고려, 조선 시대의 여진족과 오늘날 만주족의 조상들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한 오류로, 중국의 정사서들도 숙신이 동이 중에서 유일하게 말과 풍습이 달랐음과 예맥, 부여와 전혀 무관함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원시적 수렵민족인 숙신족들이 남긴 유물은 거의 없고, 기록에 나오는 예맥족의 분포지역과 그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고조선의 것과 대개 일치한다(김정배, 2000).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중국 측의 주장은 일부 사료나 자료만을 이용하여 세운 현실 정치질서의 유지를 위한 억지 논리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가장 근래에 대두한 고구려의 종족 기원이 오늘날의 한족과 직결되는 은상이라는 주장에서 한층 더 강화된다. 이른바 상족출자설로 불리는 이 견해는 논거로 제시하는 기록 자체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주 002
각주 002)
이들이 주된 근거로 하는 『일주서』, 『관자』 등의 선진 문헌은 인용에 앞서 엄밀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나, 대부분 이 과정이 결여되어 있어 문제가 많다. 정사인 『사기』의 기록도 동주시대 이상의 것은 매우 세밀한 사료비판을 요구한다. 하물며, 이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해 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고 비객관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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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으로 10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기록상의 ‘고이’와 고구려와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더 나아가 다민족국가 중국의 일원으로서 고구려를 파악하던 기존의 견해를 넘어서, 고구려를 중국 한족의 역사로 가져다 붙이려는 견강부회식의 주장은 결코 올바른 역사 해석이 아니다.
고구려 종족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구려사의 귀속은 물론 그와 앞뒤로 연결되는 고조선, 부여, 발해 등 여타 한국 고대국가의 정체성 확립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구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이 근래 들어 정치적 목적으로 고구려의 자국사 편입을 위해 고구려사 연구를 진행하며 그것에 많은 비중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각주 001)
    고구려의 모체가 되었던 사회 혹은 정치세력에 대해 원(proper)고구려라고 처음 이름 붙인 것은 이병도이다(이병도, 1976). 바로가기
  • 각주 002)
    이들이 주된 근거로 하는 『일주서』, 『관자』 등의 선진 문헌은 인용에 앞서 엄밀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나, 대부분 이 과정이 결여되어 있어 문제가 많다. 정사인 『사기』의 기록도 동주시대 이상의 것은 매우 세밀한 사료비판을 요구한다. 하물며, 이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해 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고 비객관적인 것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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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 종족 기원을 둘러싼 제 논의 자료번호 : gt.d_0001_002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