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국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종족 기원과 예맥의 실체
2. 중국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종족 기원과 예맥의 실체
고구려를 구성한 주된 종족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기에 함께 존속한 중국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한서(漢書)』 왕망(王莽)전에는 고구려를 ‘예맥(穢貊)’, ‘맥인(貉人)’이라 칭하고,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기원전 75년 무렵 현도군이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옮겨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어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 혹은 고구려인을 예맥, 그중에서도 맥으로 인식하고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고구려의 종족적 근간으로 인식되는 예맥, 맥(貉, 貊)과 예(穢, 濊)가 중국 사서에 고구려 관련 기록이 보이기 시작하는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어서야 등장한 것은 아니다. 종족명으로서 예맥, 맥, 예 등은 이르게는 중국 선진시기의 여러 문헌에서부터 등장한다. 선진 문헌에 등장하는 예맥, 맥 혹은 예가 어떤 실체인지, 그리고 그들 상호 간의 관계나 고구려와의 연관성 등에 관하여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우선 예와 맥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선진 시기의 예와 맥이 분명히 구분되는 두 개의 종족이었다는 것에는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예족과 맥족의 향방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예족과 맥족이 이동 혹은 결합을 통해 후에 예맥족을 형성한다는 것이고(김상기, 1948; 김정배, 1963; 리지린·강인숙, 1976), 둘째는 근본적으로 선진 문헌에 나타나는 맥은 이후 고구려를 지칭한 맥과는 무관한 북방민족의 범칭일 뿐이므로, 예맥은 예족이 예맥으로 불린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이다(三品彰英, 1953; 여호규, 1996). 이처럼 예맥 혹은 예와 맥의 실체에 대해 견해가 갈리는 것은 그와 관련된 중국 문헌의 기록들이 매우 복잡다기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시기 문헌에서는 맥이 예보다 빨리 나타나는데, 『시경(詩經)』 한혁(韓奕)편에는 “큰 한성은 연나라 군사에 의해 완성되었다. 선조들이 받은 명으로 지금 여러 오랑캐를 다스린다. 왕이 한후에게 추와 맥을 주었으니 북쪽 나라를 받아 그 수장이 되었다(薄彼韓城 燕師所完 以先祖受命 因時百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라고 하여 가장 이른 시기 맥의 존재를 전하고 있다. 해당 기록은 서주(西周)시기 주의 왕이 제후인 한후(韓侯)에게 주변의 종족 혹은 국가적 성격을 띤 정치집단인 추(追)주 003와 맥을 사여하며 북국을 지킬 것을 명한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일찍부터 한국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 상고시기 한민족의 이동설에 대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헌 연구의 질적 제고와 고고학적 증거의 부재로 인해 현재 이러한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정이다. 곧 위 사료에 보이는 맥을 한민족의 원조(遠祖)혹은 훗날 고구려를 일컫는 맥과 쉽게 연결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에 『시경』 한혁편에 등장하는 맥의 실체를 새롭게 해석하는 견해가 제출되기도 하였다. 해당 기록의 성격상 맥의 활동 영역은 문맥상 만주나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섬서성(陝西省)북부지역이나 하북성(河北省)지역에서 활동하던 세력으로 추정되는데, 그러다가 시기의 흐름에 따라 점차 북방의 이종족들을 두루 일컫는 호칭으로 바뀌게 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
선진 시기 중국 문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맥의 용례 변화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주시기까지만 해도 맥은 주의 제후국에 해당하는 한후가 통솔할 정도로 작은 정치체의 고유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춘추시대 이후 맥의 용례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 문헌에 등장하는 맥은 점차 불특정 이종족을 뜻하는 단어, 곧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주변의 오랑캐 세력을 막연하게 표기하는 것으로 쓰인다. 전국시대 후기부터는 점차 북방 종족을 지칭하는 범칭 혹은 멸칭으로 굳어진다.주 004 이러한 변화는 반드시 계기적 변화로만 해석할 것은 아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부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조영광, 2010). 맥이 다시금 특정 종족(정치체)에 대한 호칭으로 개념 변화가 생기는 것은 고구려가 건국되는 기원 전후가 되어야 한다.
이어서 예(濊)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는 서주 초의 역사를 전하는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에 “성주 대회에서 … 정북방은 숙신씨의 땅으로 예인 전아가 있는데 전아는 원숭이처럼 서서 걷고 그 소리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成周之會 … 正北方 稷愼大塶 穢人前兒 前兒若彌猴 立行聲似小兒)”라고 하며 처음 등장한다. 만약,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예는 이미 기원전 12세기에 중국에 그 존재가 알려진 것이 된다. 『일주서』의 사료적 가치는 의고학파의 경우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봄이 일반적이지만, 근래 고고학 발굴성과의 진전으로 그 신빙성을 재평가하기도 한다(이성규, 1987). 어찌되었든 이 문헌이 전국시대에서 한대(漢代)에 걸쳐 정리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박준형, 2002), 중국 동북방의 종족으로서 예(濊)의 존재가 늦어도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중국에 알려졌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 『관자(管子)』 소광(小匡)편에는 “환공이 이르기를 내가 승거로 회합함이 세 번이고 병거로 회합함이 여섯 번이니, 아홉 차례 제후들을 회합하여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았도다. 북으로는 고죽, 산융, 예맥에 이른다(桓公曰 余乘車之會三 兵車之會六 九合諸侯 一匡天下 北至於孤竹山戎穢貉)”고 하여, 예맥이 연칭으로 등장해 주목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예와 맥을 각각 칭한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대상으로 통칭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별이 어렵다. 하지만 앞의 고죽이나 산융 같은 특정 종족을 나열하고 있는 것과 이 시기 맥은 불특정 이종족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예맥은 요동 지역의 예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생각된다.
『사기』가 정리되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예맥이 중국 동북지역의 종족을 부르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송호정은 산융, 동호 등을 모두 맥으로 본 사마천이 예도 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 해석하였다. 중국인들이 동북의 종족들을 맥이라 칭하게 된 것은 동방에 대한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북방 종족들의 범칭인 맥의 범위가 확대된 데 따른 원인이 크다. 그리고 동시에 흉노가 세력을 확장해 북방을 석권함으로써 차츰 동북방의 종족만 맥으로 칭하게 됐으며, 이후 북방 종족을 맥으로 범칭한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송호정, 2007). 즉 본래 중국 동북방에 위치하던 종족은 예(穢, 薉)로 불렸으나, 전국시대 이후 맥이 북방 종족의 범칭이 되면서 예에도 접미사적인 맥을 붙여 예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맥의 종족적 속성은 어디까지나 예족이라 보는 것이 옳다.
이후 예는 기원전 3세기의 문헌인 『여씨춘추(呂氏春秋)』 시군람(恃君覽)편에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중국의 동북방에 위치한 예족을 지칭한 것이다. 그리고 『사기』와 『한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예맥 역시 예족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맥과 예의 용례를 비교해보면, 맥은 원래 주의 변방에 거주하던 종족에 대한 명칭이었다가 불특정 이종족의 범칭(멸칭), 북방 종족의 범칭으로 그 개념의 변화가 있었다. 반면 예는 큰 개념의 변화 없이 발해만 이동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가리키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사기』에서는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치세력과 주민집단을 통칭할 때 예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원래 중국의 북방 종족에 대한 명칭이었던 맥이 『사기』 이후로 ‘예’라는 명칭과 결합해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던 예족 일반에 대한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三品彰英, 1953; 황철산, 1963).
그러므로 선진시기의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맥과 압록강 중상류, 혼강 유역의 원고구려민집단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없는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서는, 고구려가 처음부터 예족 혹은 예맥족으로 불린 주민집단과 종족적으로 구분되는 ‘맥족’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본래 예맥으로도 불린 예족의 일원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 초경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주변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원전 2세기 후반경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박경철, 2003). 이 주민집단은 처음에는 ‘구려(句驪)’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고구려라는 국가명으로 고정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맥’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렸던 것이다(여호규, 1997; 2014).
다시 말해 『후한서』나 『삼국지』 등에 등장하는 맥, 곧 고구려는 종족적으로는 예맥이라는 호칭으로 등장하는 예족에 속하는 일부이며, 다만 주변의 세력들과는 다른 정치체를 구성하고 그 세력권을 확장하면서 맥이라는 구분되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만약 맥이 예와는 종족적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별개의 족속이라면 구려 혹은 고구려라는 호칭보다 늦게 등장할 이유가 없다.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 혹은 구려라는 명칭이 늦어도 기원전 2세기 말엽에는 확실히 보이는 것에 비해, 맥은 기원 전후 시기부터나 단칭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맥의 용례 변화가 부여계 계루부에 의해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성립된 이후에 고구려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요컨대 예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 동북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사용되다가 맥이 북방 종족의 범칭으로 굳어지자, 이르면 전국시대나 늦어도 전한 무렵에는 이와 결합해 ‘예맥’이라고 전화(轉化)되기도 하였다. 곧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예맥’이라는 연칭은 예와 맥 두 종족의 합칭이 아니라, 종족적으로 예를 일컫는 명칭이었던 것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맥으로 지칭되는 기원 전후 시기까지 요하 이동 지역에는 예와 구분되는 종족으로서 맥은 존재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