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구려와 맥족
3. 고구려와 맥족
압록강 중상류와 혼강 유역에서 적석총을 조성하며 나(那)로 불리던 예맥계 소국 연맹체들은 한에 의한 창해군(滄海郡)설치 시도와 현도군(玄菟郡)의 설치 등으로 인해 저항을 위한 자각과 결속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과 그 영향은 고구려의 건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창해군은 기원전 128년 예족의 군장인 예군(薉君) 남려(南閭)가 고조선의 압력으로 한에 투항하자 한 무제가 그의 세력권에 설치하려 한 군현이다. 그 지리적 위치는 예맥족의 주된 분포지역인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원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고조선과 한 사이에 위치해 두 세력이 전국시대부터 전한시기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 주민들의 주된 종족 구성은 예맥계였으리라 생각되고, 한과 고조선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하던 이들 세력은 남려를 대표로 하여 결국 고조선의 압력을 피해 한에 투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흉노와의 대결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고 서남이, 남월 등에 대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며 많은 인력과 재력이 고갈된 상황에 처한 한은 이 지역에 창해군을 두려 한 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그리고 흉노를 완전히 굴복시킨 이후 고조선을 멸하면서 요동군 동부도위와 현도군을 해당 지역에 각각 설치해 본격적인 지배를 시도한다.
창해군이 도상의 군현이었던 것에 비해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원고구려 지역에 실제로 둔 군현으로, 그 설치는 해당 지역의 재지집단들에게 상당한 파급력을 가져왔다. 그리고 현도군 수현(首縣)의 명칭은 고구려현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고구려라고 불린 정치체가 압록강 중류 유역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노태돈, 1986). 현도군이 설치될 무렵의 기록인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과 현도는 무제 때 설치되었는데, 모두 조선, 예맥, 구려만이이다(玄菟·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라고 전하고 있다. 이 사료의 조선은 고조선, 예맥은 부여를 필두로 한 예맥계 제집단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과 구분해 ‘구려만이’로 지칭된 집단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압록강 중류 유역과 혼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원고구려 세력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처럼 당시 원고구려 지역의 세력이 고조선, 예맥(부여)등과 구분되는 집단으로 묘사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성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종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 세력인 현도군이 자신들의 영역에 설치되자 원고구려 지역의 재지 세력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집하여 현도군을 퇴축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옥저성으로 현도군으로 삼았다. 이후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 서북으로 옮기니, 이른바 현도고부로 불리는 곳이다(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라고 하여 현도군이 결국 기원전 75년 무렵 이맥(夷貊)으로 불린 토착세력의 공격으로 군치를 구려(句麗)서북으로 옮긴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 시기 이러한 항쟁을 주도한 것은 원고구려사회에서 상당 기간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비류국(沸流國)세력으로 보인다(김현숙, 2007).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비류국 세력을 중심으로 한 원고구려 세력을 ‘이맥’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 이를 고구려의 종족 명칭으로 등장하는 맥과 동일한 용법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현도군에 저항하며 성장하기 시작한 이 지역세력들은 서서히 예맥과 구분되며 고구려(高句驪), 구려(句驪)등으로 불리다가 이맥으로도 호칭되며 이후 자신들의 종족명이 맥으로 자리 잡게 되는 단계의 과도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비류국을 연맹주로 한 압록강 중상류, 혼강 일대의 적석총 조성 세력들이 서서히 결집하며 주변의 예(예맥)와 구별되는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이후 별도로 맥이라 불리는 단초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맥이 특정 종족명, 곧 고구려를 구성한 주된 종족을 뜻하는 단칭으로 다시 중국 사서에 출현하는 것은 기원 전후부터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를 전후하여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맥’이라 칭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부여계의 계루부 세력이 원고구려 지역으로 이동해와 새로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며 중국 세력과 대항하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깊다.
특히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부여계 계루부 세력이 도착하여 고구려의 새로운 연맹주로 부상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는 고구려로 불린 세력이 존재하였다.주 005 이 원고구려 세력이 한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 초엽 현도군을 퇴축하면서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여러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세력과의 대결을 개시한 것은 계루부 세력이 부여에서 남하해와 원고구려 세력들을 규합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으로 팽창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고구려는 이미 건국 초기부터 중국 세력과 접촉하였고 충돌 또한 있었다.주 006 이후 고구려는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의 역량을 더욱 확대시켜 지속적으로 한 군현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성장 과정에서 중국과 대결을 거치며 중국 세력에 의해 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고구려를 예와 구분해 맥이라 칭한 배경에는 단순히 위와 같은 정치적 성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고구려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북방의 부여를 중심으로 한 예족과 일부 다른 부분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압록강 중류 유역과 혼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적석총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강현숙, 2000; 2013).
예족의 일반적 묘제인 토광묘와 확연히 구분되는 적석묘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이는 분명 부여에서 남하해온 유이민집단인 계루부의 묘제가 아니라 비류국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혼강 유역 토착세력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적석총의 조영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발달할 수 있었던 계기는 부여계 세력들이 원고구려 지역으로 내려와 토착세력과 결합하며 그 묘제를 수용, 발전시키면서부터이다. 적석총 중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인 무기단석곽적석총의 추정 조영 상한연대가 기원전 2세기 말엽이며, 그 대표적인 유적인 환인(桓仁) 망강루(望江樓)유적에서는 부여계 유물이 발견됐다. 더 발전된 형태인 기단석곽적석총도 1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조영되는 것으로 밝혀졌다(강현숙, 2000; 2013). 이것이 부여 계통의 유이민과 토착세력의 결합으로 새로이 도약한 고구려가 부여를 중심으로 한 범예맥계에서 정치·문화적으로 구분되어 독보적인 존재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 결국 맥이라 함은 예맥계 여러 집단 가운데서 고구려가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자 여타 세력들과 구분되며 얻은 호칭으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