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여계 유이민집단의 이동과 주몽의 고구려 건국
4. 부여계 유이민집단의 이동과 주몽의 고구려 건국
사료에 고구려의 시조로 나오는 주몽은 부여 출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기록인 〈광개토왕비〉나 〈집안고구려비〉 등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이는 그만큼 부여와 초기 고구려의 관계가 밀접하고 인적·문화적 연관성이 공고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여는 예맥계 국가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국가를 형성하고 선진문화를 이룩하여 주변의 종족과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 역시 부여를 자신의 모태로 인식하였다. 부여의 지리적 위치는 오늘날 중국 길림성(吉林省) 중북부 지역의 길림시(吉林市)부근에 그 초기 중심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림시 지역은 북류 송화강을 끼고 일찍부터 서단산(西團山)문화가 발달하여 높은 수준의 농업 중심 문화를 영위하였다. 기원전 7세기~기원전 3세기 무렵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서단산문화의 주체는 부여의 선주민인 예맥으로 파악된다(李健才, 1985).
그런데 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 부여의 지배층은 원래부터 길림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지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나타난다. 1세기경에 정리된 『논형(論衡)』 길험(吉驗)편에는 부여 건국설화인 동명(東明)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부여의 시조인 동명이 북쪽의 탁리국(橐離國: 索離國, 藁離國이라고도 함)에서 남쪽으로 이동해와 부여를 세웠음을 전하고 있다. 해당 기록이 비록 설화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설화는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동명이 북쪽의 모처에서 길림시 지역으로 이동해와 국가를 건립한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방해 보인다.주 007
그렇다면 길림시 지역으로 이동해와 부여를 건립한 세력의 원주지, 즉 탁리국의 위치는 어디일까? 현재로선 그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는 어렵지만, 부여 초기 중심지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이른 시기부터 고고 문화가 발달한 북쪽 지역이 유력하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길림성 북부지역의 송눈(松嫩)평원 일대이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꽃피운 예맥문화의 원류로 드는 대표적인 것이 흑룡강성(黑龍江省) 조원(肇源)의 백금보(白金寶)문화, 망해둔(望海屯)문화, 그리고 길림성 부여(夫餘), 대안(大安)지역의 한서(漢書)문화 등이다. 이들 문화는 시기적으로 백금보-한서하층(1기)문화와 망해둔-한서상층(2기)문화로 구분되는데, 모두 백금보유형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동일 계열의 문화로 간주된다(송호정, 1999). 이 문화유형들의 상한은 기원전 8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설정 가능한데, 백금보에서 출토된 토기는 유형별로 보면 서주 중기에 해당되고 주거유적을 탄소동위원소법으로 측정한 결과 약 2,800년 전으로 나왔기 때문이다(干志耿, 1984). 하한은 한서2기문화유적에서 전국시대-전한으로 편년되는 토기 등이 출토된 바가 있으므로 기원전 3세기~기원 전후로 추정된다(張偉, 1997). 그리고 그 분포범위는 북으로는 소흥안령(小興安嶺), 남으로는 길림, 장춘(長春) 지역,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 기슭의 조아하(洮兒河)유역, 동으로는 동류 송화강 일대 까지를 포함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탁리국의 문화로 추정되는 백금보, 한서, 망해둔 문화와 유사한 양상이 길림, 장춘 지구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선부여문화로 알려진 서단산문화이다. 서단산문화와 백금보문화는 토기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주 008 서단산 후기(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유형과 한서-망해둔문화의 묘제와 유물은 기본적으로 같은 계통 주민의 것으로 볼 수 있어 동일 시기에 병존한 부여 선주민의 문화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송눈평원의 북쪽지역에서 발달한 한서-망해둔문화는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할 수 있고, 그 주민의 일부가 북류 송화강 중류 유역(길림지역)으로 남하해 이 지역에서 서단산문화를 발전시키며 살던 부여 선주민과 융합해 부여를 건립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송호정, 1997).
부여의 기원이 된 탁리국의 직접적 지배력이 어디까지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아마도 송눈평원 북부를 넘어서기는 어려웠을 법하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그 문화적 영향력은 송눈평원 북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으로 북류 송화강 중류 유역의 길림 지역은 물론 농안, 장춘 지역과 서남으로 요령성 서풍(西豐) 일대까지 동북에서 서남향으로 뻗은 교통로를 따라 길게 뻗어있었다 생각된다. 이 일대에서 조사된 망해둔, 한서, 백금보, 보산(寶山), 양천(凉泉)문화 등 예맥계 여러 문화를 원부여문화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 내에서 예맥족의 이동 및 교류는 고구려의 건국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예(예맥)족 내에서 탁리국 세력과 길림 지역의 부여 선주민 세력 사이의 정치·사회적 변동, 곧 그러한 역사적 상황이 설화의 형태로 반영되어 등장한 것이 동명의 부여 건국설화이다. 동명설화는 예맥계 건국설화의 원형으로서, 고구려 건국 이전에 훗날 고구려를 세우게 되는 세력들의 존재 양상과 역사적 변화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구려 건국이라는 연쇄 파동을 가져오게 되는 원부여 지역의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고고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기원전 3세기부터 서단산문화의 주 묘제가 이전의 석관묘에서 토광묘로 변함이 그것이다. 이 또한 새로운 정치집단의 출현과 관련해 해석된다는 점에서도 방증된다(송호정, 1997). 부여가 어느 시점에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그 존재가 확실히 확인되므로, 이 시기에는 이미 부여라는 정치체가 길림시 일원에 성립되었음이 확실하다.
주지하듯이 부여의 동명설화는 고구려 건국설화인 주몽설화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어 고구려의 기원이 부여와 관련 있음을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이다. 고구려 건국설화인 주몽설화는 부여의 동명설화에서 파생해 고구려의 색깔이 가미되면서 건국설화로 정착된 것이다(이복규, 1998). 두 설화의 주인공이 모두 왕의 자식이지만 태어나자마자 방기된 점, 그 후 동물들이 보호하였다는 점, 활을 잘 쏘았다는 점(善射者), 핍박을 피해 도주할 때 큰 강을 만나 위기에 처했으나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추격군을 따돌릴 수 있었다는 점(魚鼈浮橋)등이 대표적인 공유 모티프이다. 그리고 두 설화는 원부여 지역과 부여의 정치적 변동이 반영되어 각각 부여와 고구려 건국설화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른 시기부터 종족적·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고구려와 부여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되는 것이 환인 망강루유적이다. 망강루유적은 초기 고구려 유적으로 묘제 양식은 고구려 고유의 적석총이지만 출토유물이 노하심, 서차구 유적과 비슷한 형식의 것이 많다. 따라서 초기 고구려와 부여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양지룡 등은 서차구와 환인 망강루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망강루유적이 부여와 고구려 문화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고 보고 고구려 시조가 부여에서 왔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하였다(梁志龍·王俊輝, 1994). 이것은 곧 서차구유적의 주체를 부여로 인정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특히 금제이식의 경우 노하심, 서차구 유적에서 출토된 그것과 매우 유사해 다수의 연구자가 초기 고구려와 부여를 이어주는 대표적인 고고학적 증거로 주목하였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주몽에 의한 고구려 건국은 고구려라는 고대국가가 처음 등장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부여계 유이민집단인 주몽, 유리 등으로 묘사된 세력이 기원전 1세기 무렵 부여 지역에서 원고구려 지역으로 이동해와 그곳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함이 일반적이다.주 009 즉 주몽의 이주 이전에 이미 원고구려 지역에는 초보적인 국가 수준의 정치체가 존재하였음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주몽의 고구려 건국 연대로 적기된 기원전 37년 이전에 해당하는 시기의 중국 기록에 ‘고구려’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는 것과 원고구려 지역 세력들이 결집해 중국 군현인 현도군을 축출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부여계 유이민집단은 어떠한 과정과 경로를 통해 원고구려 지역으로 이주해 왔고, 그곳의 재지세력과 융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고고학적으로 기원 전후 시기 부여계 세력이 원거주지에서 최종적으로 환인, 집안(集安)지역으로 진출하였음을 밝혀낼 수 있는 증거는 환인 망강루유적과 집안의 일부 고분에서 발굴된 부여계 유물들이다. 망강루유적은 중국 요령성 환인현 합달촌(哈達村)의 북쪽 혼강에 면한 언덕에 위치한 6개의 적석총으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이 고분의 입지 및 출토된 금귀걸이가 부여계 유적으로 인정되는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 서풍 서차구(西岔溝) 유적의 것과 흡사해 고구려 건국 이전 환인 지역에서 활동한 졸본부여(卒本扶餘)나 부여계 주민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粱志龍·王俊輝, 1994; 王綿厚, 2005). 이 유적의 정확한 조성 주체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토착세력과 부여계가 융합한 대표적인 고고학적 증거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외에도 환인, 집안 지역에서 부여와 관련된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오도령구문(五道嶺溝門)고분에서 나온 도끼날형 화살촉과 기상참(氣象站)유적에서 나온 좁고 긴 창끝 등은 유수 노하심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매우 흡사하다(리광희, 2005).
그렇다면 환인, 집안 일대에 이러한 고고학적 흔적을 남긴 부여 계통의 사람들은 어디서 어느 경로로 이동해온 것일까? 기록에 주몽, 유리, 졸본부여 등으로 나타나는 부여계 세력들은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 무렵 여러 차례 자신들의 원주지에서 원고구려 지역으로 이동해 왔으리라 생각된다. 그 이동 경로는 환인, 집안에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서 조사된 부여계 문화유적을 통해 주로 세 방면에서 이동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하나는 요령성 서풍, 길림성 동료현(東遼縣)일대에서 남하하는 경로이며, 다음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부여의 중심지인 길림시 일대에서 서남향으로 내려오는 경로로 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경로이다. 길림 지역이 초기 부여의 중심지이며 원부여 지역의 일부였으므로 많은 수의 부여계 유이민들이 이곳에서 고구려로 내려왔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동부여의 소재지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에서 통화 방면을 통해 이동해왔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에서 부여로 통하는 교통로를 조금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초기 부여와 고구려의 경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3세기 부여의 강역에 대하여 동으로는 장광재령(張廣才嶺)과 위호령(威虎嶺) 이서, 서쪽 경계는 대안(大安), 쌍료(雙遼), 창도(昌圖)를 잇는 선, 남으로는 휘발하(輝發河)상류와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 북으로는 눈강(嫩江)과 동류 송화강 이남으로 봄이 일반적이다(송호정, 1997).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와 경계가 되는 남쪽 경계선이다. 여호규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로를 활용해 교통로를 재구성하였다. 대무신왕이 부여 정벌을 위해 북상하던 경로상의 중요한 자연지물인 비류수를 혼강으로, 이물림(利勿林)을 용강산맥(龍崗山脈)으로 비정하여 1세기 무렵 고구려와 부여의 경계를 용강산맥으로 파악하였다(여호규, 1997; 2014). 고구려는 지속적인 국력 신장으로 3세기 무렵에는 부여와의 경계선을 보다 북쪽의 길림합달령까지 넓힐 수 있었지만 초기에는 휘발하 상류, 용강산맥을 경계로 부여와 접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부여의 중심지인 길림 지역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그 사이에 있는 성터의 분포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길림-휘남(輝南)-류하(柳河)로 이어지는 경로에는 부여 초기의 중심지이며 고구려까지 사용한 용담산성(龍潭山城), 부여에서 고구려로 가는 교통로상의 중진인 휘발성(輝發城), 남쪽으로 용강산(龍崗山)을 마주한 나통산성(羅通山城), 청동기시대부터 사용된 흔적이 있는 조어대산성(釣魚臺山城)등이 있어 그것을 연결한 선이 부여와 고구려 사이의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음을 방증해 준다(이종수, 2005). 그리고 통화(通化)의 적백송고성(赤柏松古城)은 한이 교통 요지에 설치한 성인데, 용강산보다 더 남쪽에 위치하고 환인 지역과 바로 맞닿아 있어서 이곳이 고구려에서 부여 지역으로 빠지는 시작 지점이며 관문과 같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역시 이곳을 지나는 경로를 중요한 교통로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길림-요원(遼源)-서풍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에도 고구려 산성인 용수산성(龍水山城),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등이 있다. 해당 성들은 연구자들에 의해 부여 후기 왕성의 소재지로 추정되기도 한다(李鍾洙, 2004). 이를 통해 이 지역에 부여계 주민들이 분포하였고, 주요 이동 통로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다. 서풍, 요원 지역은 서남쪽으로는 제3현도군 치소가 있던 무순(撫順)으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제2현도군이 있던 신빈을 통해 초기 고구려 중심지인 환인, 집안에 이르는 요지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길림 부여계 유이민집단이 고구려 지역으로 진출할 때 따라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로를 지도에 표시해보면 지도 1과 같다.

지도1 | 부여계 유이민집단의 고구려로의 이동 경로
다만 부여와 선비계 종족의 거주 접경지이며 내몽고 평원과 요령 북부 산지의 문화적 점이지대인 서풍, 동료 지역이 고구려와 부여를 세운 예맥계 종족의 주 활동무대였는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즉 이 지역이 예맥계 종족집단의 거주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줄 만한 고고학적 증거가 바로 서풍의 서차구유적과 동료의 채람(彩藍)유적이다.
먼저 서차구유적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이 유적이 발견된 요령성 서풍지역은 길림성 지역에서 중원과 요동반도 남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유적의 편년은 기원전 150~50년 사이로 추정된다(孫守道, 1960). 서풍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미송리식토기나 요령식동검이 출토되는 유적들이 다수 조사되었고(오강원, 2002; 2006), 전국-전한대의 유적에서는 서단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고파두(高把豆)등이 다량 출토되는 것을 통해 볼 때 청동기시대에서 전한대까지 예맥 계통의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曹桂林 等, 1991).
현재까지 드러난 고고학상의 증거와 문헌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이 지역을 기원전 1세기 무렵 예맥계 종족의 중요한 거주지 중 하나로 상정할 수 있다. 특히 서차구유적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 중 하나인 동병철검(銅柄鐵劍)의 형식상 특징을 통해 볼 때 노하심, 채람 유적의 철검과 상통하며 특히 철검의 촉각식(觸角式)검병의 연원은 부여가 소재한 송화강 유역의 서황산(西荒山)형과 서란(舒蘭)형 검병이 분명하므로, 부여와 같은 예맥계 주민의 문화라 보아도 무방하다(林澐, 1998).
채람유적은 서차구유적에서 동쪽으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동료현 채람촌에서 조사된 2개의 수혈식 토광묘이다. 이 고분에서 쌍조회수형동병철검(雙鳥回首形銅柄鐵劍), 구슬 달린 금은이식(耳飾), 투·부조 수문동패식(獸紋銅牌飾), 토기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그 양식상 흉노, 선비와는 거리가 있고, 서차구나 유수 노하심 문화에 더 가까워 부여 등 예맥 계통의 주민이 남긴 것으로 이해된다(田耘, 1987). 그리고 이 유적에서 가까운 용수산성에서 발견된 토기편의 재질과 양식이 노하심유적의 것과 일치한다(李君·蘇洪武 總簒, 1988).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하여 이 지역이 예맥계 종족들의 분포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집단이 이들 지역에서 발원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조영광, 2019). 이들 유적에서 발견된 북방계 유목문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은 그러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와 부여 문화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조영광, 2017).
특히 서차구, 노하심 유적에서 나온 금제이식은 초기 고구려 유적인 망강루에서 출토된 그것과 형식과 제작기법 등에서 매우 흡사해 고구려와 부여 및 북방계 유목문화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유물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 그림1 부여계 금제이식 - 망강루 |
![]() 그림1 부여계 금제이식 - 서하구 |
![]() 그림1 부여계 금제이식 - 노하심 |
이한상은 이와 같은 형식의 이식을 부여식이식으로 정의하고, 그 출토지를 부여의 강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이한상, 2013). 그러한 이식은 선비 등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은 분명하나, 모양이 선비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평양(平洋), 모아산(帽兒山), 서차구, 채람, 노하심, 망강루 등에서 출토된 이식은 상호 간 제작 기법과 양식상 매우 높은 유사성을 갖고 있으므로 부여 중심지인 길림시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확산하는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러한 양식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부여계 주민의 이동과 분포지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서차구와 유사한 유물들은 두 지역에서만 나타나고 공유하는 특수성을 띠는 것들이 많다. 망강루 발굴에 참여하였던 왕면후(王綿厚)가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이 서차구 형식에 해당한다고 한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주 010 이는 유물을 통해 초기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를 알게 해줌과 동시에 망강루유적을 조영한 집단이 서차구유적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주 011
이러한 문화적 유사성 외에도 서차구유적이 소재한 길림, 요령 접경 지역은 초기 부여 세력권의 외곽에 위치하여 그 이탈이나 이동 또한 상대적으로 용이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서차구유적이 소재한 서풍 지역과 그 인근의 요원 지역은 부여 후기 왕성의 소재지로 거론되기도 하였던 만큼(王綿厚, 1990; 李鍾洙, 2004), 이른 시기부터 부여계 주민들의 이동 경로로 활발히 이용되었을 것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후한대의 부여가 현도군에 속하였던 시기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2세기 말 공손도가 등장하면서 요동군에 복속하게 되므로, 부여가 현도군과 교류하였던 시점은 그 이전이 된다. 이것은 현도군치가 신빈(新濱)이나 무순(撫順)에 있었던 제2현도군 혹은 제3현도군 시절이 된다. 서풍, 동료 지역은 부여 중심지인 길림에서 현도군치인 무순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동선상에 있으며, 신빈 역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므로 해당 지역을 거점으로 부여인들이 현도군과 활발히 교류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처럼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 부여와 원고구려 지역에서는 중국 세력, 북방 초원 세력, 토착 예맥계 세력들이 서로 교차하는 복잡한 역사적 상황이 전개된다. 여기서 여러 방면의 압박을 받은 부여계 유이민들은 상대적으로 앞선 문화와 기술을 갖고 원고구려 지역으로 이주해오게 되고, 같은 예맥계로 언어, 문화 등이 유사한 현지 세력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부여계 계루부가 중심이 된 고구려의 성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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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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