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구려 성립 전야의 물질문화: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과 관련하여
5. 고구려 성립 전야의 물질문화: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과 관련하여
적석총은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경 혼강과 압록강 중상류를 중심으로 축조되기 시작하여 고구려 멸망까지 전 기간에 지속되었다. 지상에 돌을 깔고 그 위에 주검을 안치한 후 돌을 덮어 매장을 마감하므로, 지상에 드러난 분구에 매장부가 위치한 분묘일체형의 무덤이다. 중원이나 주변 다른 국가의 묘제와 구분되는 적석총은 초창기에 압록강과 혼강이라는 일정한 공간범위를 갖고 있어, 고구려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원고구려 주민의 묘제라 할 수 있다(강현숙, 2013).
적석총의 여러 구조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분구에 있는데, 석재 가공 및 무덤 축조기술의 발달에 따라 무기단, 기단, 계단으로 발전하였다. 1인장을 기본으로 하며, 수혈식에서 횡혈식 장법으로 변화하였다. 처음에는 목관이나 목곽장구를 매장부로 한 석광적석총이었다가, 목곽과 목실 또는 목개석실을 매장부로 한 광실적석총, 이어 석실적석총으로 발전하였다. 적석총의 매장부가 지상에 있다 보니 후대의 교란이나 훼손으로 인해 내부구조가 잘 남아있지 않은 예가 많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더라도 매장 시설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관련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동 시기 인접 국가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묘제이기에 적석총의 기원 문제는 고구려 주민집단 및 국가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나 초기철기시대 이후의 석관묘에서 적석총의 기원을 찾기도 하였으나, 지석묘나 석관묘 모두 무덤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적석총과 큰 차이가 있어 직접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요서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인 우하량(牛河梁)에서 확인된 적석묘를 적석총의 기원으로 본 견해(耿鐵華, 2006)도 있는데, 홍산(紅山)문화의 적석묘는 고구려의 적석총과 시간적으로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판석을 이용한 석관묘를 반지하에 마련하여 돌을 덮었다는 점에서 매장주체부가 지상에 위치하고 석곽(석광)구조인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중국 동북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던 청동기시대 이래의 돌무덤 전통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 가장 우세한 견해는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강상(崗上)과 누상(樓上)으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적석묘에서 고구려의 적석총이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다. 요동반도에서는 사평산(四平山), 쌍타자(雙砣子), 강상, 누상, 우가촌(于家村), 노철산(老鐵山), 장군산(將軍山)등 여러 지점에서 적석묘가 확인되고 있다. 이들 적석묘는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공간적으로는 요동반도의 남단인 중국 요령성 대련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적석묘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된다.

그림12 | 강상적석묘(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그림108, 그림118)
1960년대에 강상과 누상 적석묘가 보고되자(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이들 적석묘가 고구려의 적석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정찬영, 1967; 東潮, 1997). 두 묘제 모두 여러 기가 연접하여 군집을 이루고 있고, 지상에 주검이 놓이며, 돌을 덮어 매장을 마감하거나, 매장 후 화장이 행해졌다는 점 등에서 관련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지상에 돌을 쌓아 묘단을 조성하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과는 달리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적석묘는 지표면에 바로 석관묘와 유사한 형태의 매장주체부를 조성하고 있으며, 단인장 중심의 고구려 적석총과는 달리 다곽식(多槨式)다인장의 집단묘라는 점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池炳穆, 1997).
압록강 중하류의 수암(岫巖) 서방신(西房身), 봉성(鳳城) 소진가(小陳家), 관전 포자연(泡子沿)·조가보자(趙家保子)·사평가(四平家), 환인 대전자(大甸子), 집안 오도령구문 등에서는 적석묘 또는 석퇴유구(石堆遺構)가 다수 확인된다.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이들 유적에서는 요령식세형동검과 함께 동모나 동경 등이 출토되며 철제품은 제한적이다. 또 오도령구문에서 발견된 적석묘(方壇階梯積石墓)를 제외한 나머지 압록강 중하류의 적석 유적들은 매장주체부가 대부분 석관묘라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오도령구문적석묘 역시 외형상으로는 계단식적석총에 가깝지만 유구 내에서 동검, 동모, 동부, 동경 등과 같은 청동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일반적으로 철제농공구나 철제무기가 출토되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과는 확연히 다르다. 통화 만발발자유적의 경우 토광묘, 석관묘, 대석개묘 등의 묘제가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후기문화층에서 오도령구문 출토품과 유사한 동검과 동모가 출토된 반면, 철기가 출토되는 고구려 초기문화층에서는 대석개적석묘(석개석광적석묘)와 함께 무기단적석묘(무기단적석총)가 발견되고 있어,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는 청동기시대 후기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여호규, 2011).
고구려 초기 적석묘에서 동검이나 동모 등의 청동기는 거의 출토되지 않고 철제 농공구나 무기류가 많이 부장된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압록강 중류 유역의 적석묘는 기원전 3세기 말경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등장하였을 것이다(김종은, 2017).
근래에는 고구려 적석총을 요령성의 혼강 유역과 길림성의 압록강 유역으로 나누어 각각의 기원을 설명하기도 한다(李新全, 2009).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중 가장 이른 장백현 간구자적석묘는 요동반도 남단의 청동기시대 적석묘에서 연원한 것으로, 혼강 일대의 적석총은 석개석광적석묘와 연결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림13 | 오도령구문적석묘(集安縣文物保管所, 1981)
혼강 유역(환인 일대)의 적석총(적석묘)은 선행 묘제인 청동기시대의 석붕(石棚)과 석개묘(石盖墓)가 요동반도 남단에서 확인되는 적석묘의 영향을 받아 적석석붕묘(積石石棚墓)와 석개석광적석묘(石盖石壙積石墓)로 발전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환인의 풍가보자(馮家堡子)5호묘와 같이 석개석광적석묘에서 덮개돌이 사라지면서 망강루(望江楼)고분군과 같은 고구려 이른 시기의 무단석광적석묘(무기단적석총)이 되었다고 본다. 자세히 살펴보면, 혼강 유역 적석총의 연원으로 본 석개석광적석묘(적석석개묘)가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묘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묘를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으로 파악하는 중국 학계의 기존 학설을 보완하고 있는 셈이다.
석개석광적석묘는 근래 환인 일대의 풍가보자, 용수산(龍首山), 흑구(黑溝), 노립자(老砬子), 북전자(北甸子), 만룡배(彎龍背), 대전자, 대파(大把)유적 등에서 발견된 전국 말(초기철기시대)~전한 후기(고구려 조기)로 편년되는 대석개묘(大石盖墓)를 지칭하는 것이다. 대석개묘는 덮개를 큰 돌로 덮은 무덤으로, 덮개돌이 지표에 노출되기도 하고, 지하에 매몰되기도 한다. 덮개돌의 아래에는 토광 혹은 돌로 쌓은 석곽(석광)이 마련되어 있다.
이들 대석개묘(석개석광적석묘)분포 지역에는 고구려 적석총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李新全, 2009). 풍가보자유적에서도 석개석광적석묘 옆에 무단석광적석묘가 확인되는데, 두 유구에서 동일한 유형의 토기가 출토되어 두 묘제가 병존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혼강 유역 청동기시대의 석개(석광)적석묘에서 고구려 적석총으로의 연원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적석묘와 석개묘가 결합하는 과정, 석개적석묘에서 고구려 적석묘(적석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석개적석묘의 덮개돌이 사라진 시기와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북방문물연구회 편역, 2018).
한편, 환인 망강루적석묘는 혼강변의 절벽 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총 6기의 적석묘에서 금제이식, 각종 구슬, 청동방울과 청동팔찌를 비롯한 각종 청동장식, 도자, 차축두, 낚시바늘 등과 같은 각종 철기, 그리고 호, 발형토기, 두, 완 등을 비롯한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금제귀걸이와 청동방울 등은 유수(榆树)노하심(老河深)유적이나 서풍 서차구고분군 출토품과 유사하여 부여와의 관련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망강루적석묘에서 동병철검이 수습되었다는 보고를 참고하면, 망강루적석묘는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 1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오강원, 2012), 이러한 양상은 망강루적석묘는 고구려의 무기단적석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유적임을 시사한다.

그림14 | 고구려 적석총 기원 모식도(李新全, 2009, 도12, 도판7)

그림15 | 풍가보자유적의 적석묘(李新全, 2009, 도4, 도5)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은 장백현의 간구자(干溝子)적석묘이다. 여러 기의 무덤이 연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유적에서는 모두 52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3). 고구려의 연접 적석총은 방형 평면의 적석총 한 변에 잇대어 연접묘를 구축하지만, 간구자적석묘에서는 중앙부 원형 평면의 적석묘 둘레를 돌아가며 4~6개의 반원형 평면 적석묘가 연접하고, 다시 동일한 방식으로 무덤을 추가하면서 많게는 십수 기가 이어진 집단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연접 적석총의 전체 평면은 원형, 반원형, 부채꼴로 나뉜다. 묘광 평면은 장방형이나 타원형이며, 바닥에는 작은 냇돌을 한층 얕게 깔았다. 인골은 화장 후에 매장하였으며, 깨진 돌로 봉하고 뚜껑을 덮었는데, 목질 장구는 사용하지 않았다. 유적에서는 전국 말기에서 진한 시기에 유행한 화폐인 반량전(半两錢), 일화전(一化錢) 등과 함께 철곽(鐵钁), 철도(鐵刀) 등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오수전과 동한 시기의 화폐는 출토되지 않아, 고분군은 전국 말기에서 서한 즉,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 전후에 조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는 시점에 조영되기 시작한 간구자적석묘는 집단묘의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 단위 적석묘의 구조와 철기의 부장, 그리고 유적의 시공간적인 위치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연결되는 묘제로 판단된다.
이신전은 고분군의 입지와 묘광의 구조, 화장 등의 유사성을 들어 간구자적석묘를 요동반도 남단의 청동기시대 적석묘를 직접 계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李新全, 2009). 그리고 이러한 압록강 유역의 적석묘가 이후 고구려의 조기 무기단적석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압록강 유역의 적석묘와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묘는 시공간적으로 연결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석묘의 전체적인 구조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은 아직까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국가 형성의 핵심 지역인 혼강 유역과 압록강 중상류 일대는 고구려 성립 직전의 묘제 양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혼강 유역에서는 환인 일대를 중심으로 대석개묘로도 불리는 석개석광적석묘가, 압록강 중상류에서는 간구자유적에서 연접(석광)적석묘가 확인된다. 석개석광적석묘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주로 발견되며, 간구자적석묘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다. 석개석광적석묘는 구조적으로는 덮개돌이 존재하고 매장주체부가 지상이 아닌 지하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간구자적석묘는 기본적으로 다인장과 연접방식의 측면에서 초기 고구려 적석총과는 차이를 보인다. 중국에서는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을 요동반도 남단의 청동기시대 적석묘에서 찾고 있으나, 두 묘제의 시간과 공간적 공백이 크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이다. 고구려 초기 적석총의 기원은 고구려 건국 주도 집단의 형성과 건국 과정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만큼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