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건국설화 관련 문헌자료의 유형과 원형
1. 고구려 건국설화 관련 문헌자료의 유형과 원형
현전하는 고대 설화는 대개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던 전승이 문자의 보편화와 함께 특정 시기에 문자로 정리되어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따라서 설화를 담고 있는 문자 자료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건국설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문헌자료에 대한 자세한 검토가 우선되어야 한다.
현전하는 고구려 건국설화 텍스트에는 여러 이본(異本)이 존재하는데,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 자료뿐만 아니라, 중국 정사(正史)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자료로는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등 고구려 금석문, 『위서(魏書)』 고구려전을 비롯한 여러 중국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東明王篇)」,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 고려·조선시대 문헌을 손꼽을 수 있다.
다음에서는 이들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고구려 건국 관련 내용을 정리해 소개하고, 해석과 더불어 각 문헌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고구려 건국설화 관련 문헌자료
(1) 집안고구려비(4세기 말~5세기 초, 광개토왕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고구려 건국설화 자료는 장수왕(長壽王)대(414년) 건립된 〈광개토왕비〉였다. 그런데 2012년에 집안시(集安市) 마선구(麻線溝)에서 광개토왕대에 입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주 002 〈집안고구려비〉가 발견되면서 좀 더 오래된 건국 설화 자료로 지목되고 있다. 다만 비문 1, 2행에 걸쳐 시조왕의 건국에 관한 짧은 언급에 그치고 있어 다소 아쉽다.

그림1 | 집안고구려비(集安市博物館, 2013, 『集安高句麗碑』, 吉林大學出版社)
〈집안고구려비문〉은 시작 부분에서 시조 추모왕에 의한 고구려 건국과 시조의 신성한 혈통 및 그 후손에게로의 권력 승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비록 건국설화에 대한 직접 언급은 없으나, 설화의 여러 핵심 요소가 확인된다. 우선은 ‘추모왕’이라는 건국자의 명호(名號)가 등장하며, 다음으로 ‘□□□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라는 설화 속 건국자의 신성한 혈통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원왕(元王)’이라는 여타 판본의 고구려 설화에는 등장하는 않는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데, 그 실체를 두고 여러 가능성들이 제기되었다.주 003
한편, “그 후손으로 이어져 계승해왔다”라고 하여 설화의 숨겨진 진정한 의도, 즉 시조왕으로 연결되는 ‘현재’ 왕실의 신성한 혈통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고구려의 건국설화가 상세히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설화의 핵심적인 내용과 그 의도가 함축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2) 광개토왕비(414년, 장수왕대)
| 핵심 내용 |
| 시조 추모왕의 건국 |
| 출자: 북부여(北夫餘) |
| 혈통: 천제의 아들, 어머니는 하백의 딸 |
| 기이한 출생: 난생(卵生) |
| 남하 도중 엄리대수에 가로막혔으나, 갈대와 거북이가 다리를 만들어 도강(渡江) |
| 비류곡에 이르러 정도(定都) |
| 황룡을 밟고 승천(昇天) |
| 세자 유류왕, 대주류왕에 의한 계승 |
〈광개토왕비문〉의 첫머리에는 고구려 건국설화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앞선 〈집안고구려비문〉에서와는 달리 건국설화의 기본 줄거리를 갖추고 있으며 좀 더 풍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신성한 혈통을 갖고 있고 기이한 형태로 출생한(난생)건국자가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남하 과정에 강에 막혔으나, 갈대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건널 수 있었고, 비류곡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으며, 후에 황룡을 타고 승천하고, 후손들이 그 기업(基業)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림2 | 광개토왕비 탁본(武田幸男, 1988, 『廣開土王碑原石拓本集成』, 東京大學出版會)
〈집안고구려비문〉에서 전하는 건국설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조 추모왕, 북부여 출자 → 신성한 혈통(천제지자, 하백녀랑)→ 기이한 탄생(난생)→ 남하 → 기적적 도강(갈대와 거북이)→ 건국 → 승천 → 후손에 의한 왕위 승계
〈광개토왕비문〉 역시 금석문이라는 성격상, 건국자에서 광개토왕에 이르는 국가 권력 계승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제로서 건국설화를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함축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추모왕’ 명호, ‘북부여’ 출자, ‘천제지자, 하백녀랑’이라는 신성한 혈통, 신이한 도강 등 요소들이 등장해 주목된다.
(3) 모두루묘지(5세기 전반, 장수왕대)
| 핵심 내용 |
| 신성한 혈통: 하박(하백)의 손자, 해와 달의 아들 |
| 명호: 추모성왕 |
| 출자: 북부여 |
| 모두루의 조상 또한 북부여에서 성왕을 수행해 도래 |
| 북부여 대형 염모(모두루의 조부로 추정) |
모두루는 5세기 전반, 즉, 광개토왕-장수왕대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관직을 지낸 인물이다. 묘지에 가문 조상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데, 왕실 시조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가문 조상과 왕실 시조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시조설화에 등장하는 북부여 출자 및 건국에 관한 언급인데, 모두루 가문의 조상이 왕실 시조인 추모왕과 더불어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이를 고구려 왕실의 북부여 출자 사실을 입증해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서술 속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의도는 ‘현재’ 모두루 가문과 왕실의 ‘친밀한’ 관계 강조이다. 즉, 왕실과 동일한 가문 출자, 동반 건국 등 ‘친밀’한 관계에 대한 서술은 결국 ‘현재’적 친근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조우연, 2010a).
따라서 모두루묘지에는 건국설화의 줄거리가 잘 드러나지 않고, 다만 여러 관련 요소가 확인될 뿐이다. 그중 주목되는 부분은 ‘추모성왕’이라는 건국자의 호칭, 하박(하백)의 손자이자 해와 달의 아들이라는 신이한 혈통 및 북부여 출자, 이주(혹 탈주)건국 등 요소이다. 특히 4회에 걸쳐 ‘하박의 손자이자 해와 달의 아들’이라는 수식이 등장해 흥미롭다.
그 외, 고구려 출신인 천남산(泉男産)의 묘지명에서 “옛날에 동명이 기에 감응해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이 해에 감응해 잉태되었으니, 패수에 임해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 踰㴲川, 而開國, 朱蒙孕日, 臨浿水, 而開都)”라고 하여, 간략하게 동명설화와 주몽설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림3 | 모두루묘지(부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탈 한국금석문)
(4) 『위서』 권100 열전88 고구려(554년)
| 핵심 내용 |
| 출자: 부여 |
| 잉태: 하백의 딸이 햇빛에 감응해 잉태(신성한 혈통–태양의 아들, 하백의 외손) |
| 기이한 출생: 난생(卵生) |
| 왕이 혐오해 유기(遺棄)→개, 돼지, 마소, 새들이 보호→재수용 |
| 주인공 명호: 주몽–선사(善射)능력 |
| 부여인들의 모해, 말 사육 위임 |
| 동료 2명과 함께 동남쪽으로 탈주 |
| 큰 강에 막히자, ‘일자·하백외손(日子, 河伯外孫)’아라는 신분을 밝힘으로써 도움 호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도강(渡江) |
| 보술수에서 세 인물이 합류 |
| 고구려 건국 |
『위서』 고구려전에는 건국부터 양원왕 전후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장수왕 23년(435년)에 처음 고구려에 사절로 파견된 북위(北魏) 사신 이오(李敖)의 견문(서영대, 1997) 및 그 후 수차례의 사신 왕래를 통해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상황과 인식을 비교적 정확하게 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위서』 고구려전은 시작 부분에서 고구려 건국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설화로 전해지는 주몽의 건국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수록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건국설화를 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중국 정사(正史)자료이기도 하다. 즉, 고구려를 처음 전(傳)으로 수록한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에는 고구려 건국설화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위서』에 수록한 것이다. 그리고 『위서』에 수록된 고구려 건국설화의 축약본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주서(周書)』, 『북사(北史)』, 『수서(隋書)』 등 후대 정사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 외, 『속일본기(續日本記)』 권40에서도 “백제의 먼 조상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했는데, 이 역시 주몽탄생 설화로 짐작된다.

그림4 | 『중수21사(重修二十一史)』(南京國子監刊本)
앞에서 살펴봤듯이, 고구려 당대 금석문에서 건국설화가 더 이른 시기에 언급되고 있으나, 금석문이라는 특성상 그 내용이 아주 소략하다. 그에 비해 『위서』에서는 완정한 줄거리를 갖춘 비교적 자세한 건국설화를 전하고 있어, 이른 시기 전승 형태 내지는 편찬 당시 고구려인들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위서』에서 전하는 고구려 건국설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조 주몽, 부여 출자 → 신성한 혈통(日子, 河伯外孫)과 신이한 잉태(感日)→ 기이한 출생(난생)→ 혐오·유기 → 짐승 보호 → 재수용 → 선사(善射)능력 → 부여인의 박해 → 동료들과 동남쪽으로 동반 도주 → 기적적 도강(물고기, 자라)→ 세 인물의 합류 → 건국
(5)『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시조동명성왕(1145년)
| 핵심 내용 | |
| 동부여 금와왕설화 및 해부루설화 |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신이한 과정을 거쳐 금와(金蛙)를 얻어 후계자로 지정 |
| 신탁(神託)을 통해 동해가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東扶餘) 건립 | |
|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옛 도읍에 도래 | |
| 금와왕이 해부루를 이어 동부여왕에 등극 | |
| 고구려 건국설화 | 금와왕이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을 얻음 |
| 유화의 해명: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꾀어 몰래 사통하므로 하백에 의해 추방 | |
| 신이한 잉태: 금와왕이 유화를 방에 유폐(幽閉), 햇빛이 비춰 잉태 | |
| 신이한 출생: 난생(卵生) | |
| 왕이 유기→개, 돼지, 소, 말, 새들이 보호, 쪼개려 했으나 실패→재수용 | |
| 명호: 주몽[선사(善射)능력으로 인해 득명] | |
| 왕자들의 시기, 말 사육 위임 받고 양마(良馬) 취득 | |
| 부여인들의 모해를 피해 동료 3명과 함께 탈주 | |
| 엄호수(淹淲水)에 막혀 ‘천제자, 하백손(天帝子, 河伯孫)’이라는 신분을 밝힘으로써 도움 호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도강(渡江) | |
| 모둔곡에 이르러 세 인물이 합류 | |
| 졸본(卒本)에 이르러 건국 | |
|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讓王)과의 대결을 통해 비류국 병합 | |
| 아들 유리(琉璃)가 동부여에서 도래 | |
| 승하(昇遐) |
(6)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1193년)
| 핵심 내용 | |
| 동부여 금와왕설화 및 해부루설화 | 부여왕 해부루가 신이한 과정을 거쳐 금와를 얻어 후계자로 지정 |
| 신탁을 통해 동해가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 건립 | |
|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늘에서 옛 도읍으로 강림, 하늘과 땅을 왕래하면서 통치 | |
| 웅심연(熊心淵)에서 유화 등 하백의 세 딸과 조우 | |
| 해모수가 신이한 능력으로 하백과의 대결에서 승리, 유화와 혼인 | |
| 해모수 홀로 승천, 유화는 하백에 의해 우발수로 추방 | |
| 고구려 건국설화 | 금와왕이 물속에서 괴물 형상의 유화를 얻어, 자초지종을 듣고 별궁에 유폐 |
| 신이한 잉태: 햇빛을 품고 잉태 | |
| 신이한 출생: 난생(겨드랑이로 알을 낳음) | |
|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유기→짐승들과 햇빛이 보호→재수용 | |
| 명호: 주몽(선사 능력으로 인해 득명) | |
| 금와왕 왕자들의 시기와 모해, 말 사육 위임 | |
| 어머니에게 부여 탈출 의사 피력, 도움을 얻어 양마(良馬) 취득 | |
| 동료 3명과 함께 남쪽으로 탈주 | |
| 엄체(淹滯)에 막혀 ‘천손, 하백 외손(天孫, 河伯甥)’ 신분을 밝힘으로써 도움 호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도강(渡江) | |
| 유화가 비둘기를 통해 오곡 종자 전달 | |
| 졸본에 이르러 건국 | |
| 비류국 송양왕과의 대결에서 승리; 주술(呪術)을 통해 비류국 항복 | |
| 하늘이 왕을 위해 궁궐과 성 축조 | |
|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도래 | |
| 승천하여 옥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 |

그림5 정덕본(正德本)『삼국사기』(좌)와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병서(幷序)(우)
『삼국사기』와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등 고려시대에 편찬된 건국설화는 앞의 단편적인 자료들과는 달리 아주 장편이며, 내용이 훨씬 더 소상하고 풍성한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대개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 본기에 수록된 내용에 근거해 적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은 『구삼국사』를 직접 보고 이에 근거해 찬술한 반면, 김부식은 국사(國史)를 편찬하면서 신이한 요소를 제거하고 전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전하는 고구려 건국설화 텍스트 중 내용이 가장 풍부한 자료는 『구삼국사』 동명왕본기를 참조한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본문 및 주석문이고,주 004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 축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늦은 시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수록된 내용과 유사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는 설화는 「동명왕편」과 맥을 같이 한다(홍기문, 1964).
다만 문제는, 이상 고려시대 및 그 이후 관련 자료들이 파생된 『구삼국사』의 실체이다. 현재 『구삼국사』는 일실되어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정확한 편찬 시점이나 편찬자에 대해 알 수 없다.주 005 일본이나 중국 학계에서 고려시대 이후 문헌 속 설화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하튼 이들 고려시대 이후 찬술된 고구려 건국설화의 특징은 풍성한 내용 구성인데, 단순히 고구려 건국설화 내용이 소상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계열의 설화가 접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건국설화에 앞서 동부여 금와왕설화, 해모수설화가 접합된 것이다. 따라서 건국자의 출자, 등장인물과의 관계 설정도 달리 나타나는데, 건국자는 동부여 출자로 되어 있으며, 혈연 계보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즉 천손(天孫)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이후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고구려 건국설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부여 금와왕설화 및 해부루설화] 부여왕 해부루의 신이한 금와왕 취득 → 신탁에 의해 동부여 이도(移都)→ 천제 아들 해모수의 강림: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혼인(사통)및 유화의 수난 → [고구려 건국설화] 동부여 금와왕이 유화를 얻어 방에 유폐 → 신성한 혈통(天孫, 河伯甥)및 신이한 잉태(햇빛)→ 기이한 출생(난생)→ 혐오·유기 → 짐승 보호 → 재수용 → 선사(善射) 능력 → 금와왕 왕자들의 시기와 박해 → 말 사육 위임, 양마 취득 → 동료들과 동반해 남쪽으로 도주 → 기적적 도강(물고기와 자라)→ 건국 → 송양왕과의 대결을(혹 신이한 능력)통해 비류국 병합 → 유리 도래 및 승하(승천)
2) 고구려 건국설화의 유형과 원형
이상 살펴본 고구려 건국설화를 수록한 주요 문헌 및 설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중심 요소를 정리해보면 표1과 같다.
표1에서 보듯이, 고구려 건국설화의 유형은, 우선 자료 성격을 기준으로 고구려 당대 금석문, 중국 정사를 비롯한 중국 문헌, 고려시대 이후 편찬된 한국 전통시대 문헌으로 구분된다. 다음으로, 주인공의 출자를 기준으로는 북부여 출자, 부여 출자, 동부여 출자 등 세 가지 유형이 확인된다. 그다음, 주인공의 명호를 기준으로는 추모(추모왕), 주몽, 동명성왕 주몽 등 세 종류로 구분된다. 그다음, 주인공의 혈통을 기준으로는 크게 천자[天帝之子(皇天之子), 日月之子, 日子], 천손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표1 | 고구려 건국설화 수록 주요 문헌에 나타나는 중심 요소
| 유형 | 자료 | 연대 | 자료 성격 | 출자 | 주인공 명호 | 주인공 혈통 | 잉태 출생 |
| Ⅰ | 집안 고구려비 | 광개토 왕대 | 고구려 금석문 | 始祖鄒牟王 | □□□子 河伯之孫 | ||
| 광개토왕비 | 414년 | 고구려 금석문 | 북부여 | 始祖鄒牟王 |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皇天之子 | 剖卵降世 | |
| 모두루묘지 | 5세기 전반 | 고구려 금석문 | 북부여 | 鄒牟聖王 | 河泊之孫 日月之子 | ||
| Ⅱ | 위서 | 554년 | 중국 정사 | 부여 | 朱蒙 | 日子 河伯外孫 | 爲日所照; 旣而有孕; 生一卵 |
| 주서 | 636년 | 중국 정사 | 부여 | 朱蒙 | 河伯女 | 感日影所孕 | |
| 수서 | 656년 | 중국 정사 | 부여 | 朱蒙 | 河伯外孫 日之子 | 日光; 感而遂孕; 生一大卵 | |
| 북사 | 659년 | 중국 정사 | 부여 | 朱蒙 | 日子 河伯外孫 | 爲日所照; 旣而有孕; 生一卵 | |
| 천남산묘지명 | 702년 | 중국 금석문 | 朱蒙 | 孕日 | |||
| 통전 | 801년 | 중국 사서 | 부여 | 朱蒙 | 母河伯女 | 爲日所照; 遂有孕而生 | |
| Ⅲ | 삼국사기 | 1145년 | 고려시대 사서 | 동부여 | 朱蒙, 鄒牟, 象解(東明聖王) | 天帝子 河伯外孫 * 실제 계보는 天帝孫 | ① 解慕漱+柳花; ② 爲日所炤; 因以有孕; 生一卵 |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 1193년 | 고려시대 시문집 | 동부여 | 朱蒙 (東明王) | 天孫 河伯甥天 | ① 解慕漱+柳花; ② 懷牖中日曜, 因以有娠; 左腋生一卵 | |
| 삼국유사 | 1280년대 | 고려시대 사서 | 동부여 | 朱蒙 | 天帝子 河伯孫 | ① 解慕漱+柳花; ② 爲日光所照; 因以有孕; 生一卵 | |
| 제왕운기 | 1287년 | 고려시대 사서 | 부여 | 朱蒙 | 父解慕漱, 母柳花; 皇天之孫 河伯甥 | 五升大卵左脇誕 | |
| 세종실록 지리지 | 1454년 | 조선시대 사서 | 동부여 | 朱蒙 | 天帝之孫 河伯之甥 | ① 解慕漱+柳花; ② 懷牖中日曜, 因而娠; 左腋生一大卵 |
이상의 분류가 복잡한 듯 보이나, 사실 자료 성격에 따라 아주 단순하게 구분된다.주 006
• 유형 Ⅰ: 4세기~5세기 고구려 금석문에서는 고구려 건국자의 출자를 ‘북부여’로, 그리고 명호는 ‘추모’로, 혈통을 ‘천제지자(혹 일월지자)’로 기술하고 있다.
• 유형 Ⅱ: 『위서』(6세기)를 시작으로 하는 중국 문헌에서는 건국자의 출자를 ‘부여’로, 명호를 ‘주몽’으로, 그리고 혈통을 ‘천제지자’와 동일한 의미의 ‘일자’로 전하고 있다.
• 유형 Ⅲ: 고려시대(12세기)이후 편찬된 한국 전통시대 문헌에서는 건국자의 출자를 ‘동부여’로, 명호를 ‘주몽(동명성왕)’으로, 혈통을 ‘천손’으로 전하고 있다.
• 유형 Ⅱ: 『위서』(6세기)를 시작으로 하는 중국 문헌에서는 건국자의 출자를 ‘부여’로, 명호를 ‘주몽’으로, 그리고 혈통을 ‘천제지자’와 동일한 의미의 ‘일자’로 전하고 있다.
• 유형 Ⅲ: 고려시대(12세기)이후 편찬된 한국 전통시대 문헌에서는 건국자의 출자를 ‘동부여’로, 명호를 ‘주몽(동명성왕)’으로, 혈통을 ‘천손’으로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건국 시점이 기원전 37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 문헌인 4세기~5세기 고구려 금석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설화의 원형은 무엇일까? 그리고 원형과 이들 세 유형 문헌 사이의 전승 관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우선, 고구려 건국설화의 원형과 관련해서 연구자들은 부여(夫餘)건국설화인 동명(東明)설화와의 유사성에 주목해왔다. 부여의 동명설화는 고구려 건국전승에 비해 훨씬 앞선 문헌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다. 후한(後漢)장제(章帝)원화(元和)3년(86년)에 왕충(王充)이 편찬한 『논형(論衡)』 길험편(吉驗篇)에 부여 동명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부여 건국설화는 『논형』을 시작으로 『삼국지』 부여전 소인(所引), 『위략』(3세기), 『수신기(搜神記)』(4세기)등 비교적 이른 시기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줄거리가 고구려 건국설화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른 시기부터 이 두 설화의 관계가 주목되었으며, 혹자는 두 설화를 동일한 것으로 보거나, 혹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복규, 1991).
사실 전통시대부터 두 설화의 동일 여부를 두고 엇갈린 이해가 있어 왔다. 고려시대 일연(一然)은 『삼국유사』에서 두 전승을 동일한 설화로 판단한 데 비해, 〈천남산묘지명〉에서는 별개의 설화로 이해했다. 즉, 『삼국유사』 고구려조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림전(珠林傳)』에 수록된 부여 건국설화를 소개하면서, 주석을 붙여 고구려를 ‘졸본부여’라고도 했으므로, 동명설화를 고구려 건국설화로 이해했다. 그에 비해 〈천남산묘지명〉에서는 “옛날에 동명이 기에 감응해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이 해에 감응해 잉태되었으니, 패수에 임해 도읍을 열었다”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을 별개의 인물로 인식했다.
표2 |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설화 비교
| 부여 건국설화(『논형』) | 고구려 건국설화(『위서』) | 비교 |
| 출자: 탁리국(橐離國) | 출자: 부여(夫餘) | 차이 |
| 기이한 잉태: 왕의 시비가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에 의해 임신(부–신성, 모–평범) | 기이한 잉태: 하백의 딸이 햇빛에 감응(신성한 혈통–태양의 아들·하백의 외손) | 차이 |
| 평범한 출생: 아들 출산, 태생(胎生) | 기이한 출생: 난생(卵生) | 차이 |
| 유기했으나, 돼지, 말이 보호, 하늘의 아들이라 여겨 재수용 | 기왕이 혐오해 유기했으나, 개, 돼지, 말, 소, 새들이 보호, 재수용 | 유사 |
| 명호: 동명(東明) | 명호: 주몽(朱蒙) | 차이 |
| 소와 말 사육 담당 | 말 사육 담당 | 유사 |
| 선사 능력 | 선사 능력 | 유사 |
| 부여왕의 모해를 피해 남쪽으로 탈주 | 부여인들의 모해를 피해 동료 2명과 함께 동남쪽으로 탈주 | 유사 |
| 큰 강에 가로막혔으나,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도강(渡江) | 큰 강에 막히자, ‘일자, 하백외손(日子, 河伯外孫)’이라는 신분을 밝힘으로써 도움 호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도강(渡江) | 유사 |
| 부여 건국 | 고구려 건국 | 차이 |
이러한 견해 차이가 근현대 학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나카 미치요는 『논형』에 수록된 부여 건국설화는 고구려 건국설화가 와전된 것이라고 보았다(那珂通世, 1894). 이병도 역시 『논형』에 수록되어 있는 부여 건국설화는 사실상 주인공이 탁리국을 탈출해 부여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부여를 탈출해 탁리국, 즉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라고 보았다(이병도, 1959). 그 후 이 같은 주장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지지되었으며(김상기, 1964; 홍기문, 1964; 박두포, 1968), 김육불(金毓黻)을 대표로 하는 중국 학계에서도 동일설(同一說)이 제기되었다(金毓黻, 1941; 張博泉·魏存成, 1997; 李大龍, 2005; 李新全, 2010).

그림6 | 『논형』 길험편
이 같은 동일설의 근거는 『논형』에 보이는 탁리를 『위략』, 『수신기(搜神記)』에서는 고리(槀離)로, 『후한서』에서는 색리(索離)로, 『양서(梁書)』에서는 고리(櫜離)라고 썼는데, 자형(字型)이나 독음(讀音)이 고구려를 약칭하는 구려(句麗)와 흡사하다는 점,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시조 왕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여 모두 동명으로 호칭되었다는 점 등이다. 실제로 『양서』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의 조상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언급하면서 『논형』의 부여 건국설화만 전재하고, 고구려 건국설화는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시라토리 구라키지는 부여와 고구려 건국설화를 별개의 전승으로 보았다. 부여 시조설화가 먼저 형성되어 있었고, 후대에 고구려에서 정치적 목적에서 부여 시조설화를 자신들의 건국설화로 개작했다는 것이다(白鳥庫吉, 1936). 이케우치 히로시는 두 설화는 별개의 것이고, 주인공 또한 달리 보아야 한다고 구라키지의 개작설을 비판하기도 했다(池內宏, 1941). 한편, 김정학은 두 설화가 동일 계통임은 인정하면서 부여의 분열과 함께 고구려의 것으로 변형,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김정학, 1948). 이홍직은 부여와 고구려는 이동 건국의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시조 신성관념도 비슷하므로, 두 건국설화가 대동소이할 수도 있다고 보고 각자의 독자성을 강조했다(이홍직, 1959). 그 외, 1960~1980년대를 거치면서 비슷한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면서(박시인, 1966; 이옥, 1972; 김철준, 1975; 이복규, 1979, 1982)현재 일반적인 견해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현재 중국 학계에서도 부여 건국설화를 원형으로 고구려 건국설화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두 설화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시각이 대부분이다(劉永祥, 1988; 李德山, 1996; 劉子敏, 1996; 魏存成, 2001; 耿鐵華, 2005).
두 설화는 비록 여러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주인공의 명호(동명 / 추모, 주몽), 출생 방식(태생 / 난생), 사후 승천(昇天)여부 등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발견된다. 따라서 현재 학계에서는 두 설화를 엄연히 다른 두 고대국가의 건국을 전하는 별개의 설화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양자 서사구조상의 유사성과 관련해서는, 두 설화의 선후 순서를 감안해 부여 건국설화를 원형으로 고구려 건국설화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고구려 건국설화는 부여 건국설화를 원형으로 하고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여러 문헌에 보이는 고구려 설화의 여러 유형은 가장 이른 시기 문헌인 『논형』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문헌 편찬 선후 순서에 따라 고구려 건국설화 계통의 전개를 『논형』 → 〈광개토왕비문〉 → 『위서』로 보거나(김정학, 1948), “『논형』 → 〈광개토왕비문〉 → 『위서』 → 『고기(古記)』(『삼국사기』,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로 보기도 한다(박두포, 1968). 또 내용의 상세 정도에 따라 『구삼국사』 → 『삼국사기』 → 『삼국유사』를 간략형으로, 『구삼국사』 → 「동명왕편」 → 『세종실록지리지』를 상세형 계통으로 분류하기도 한다(홍기문, 1964). 한편, 부여와 고구려 건국설화가 별개의 설화임을 전제로 주인공 명호에 따라 동명계(東明系)와 주몽계(朱蒙系)로 문헌 유형을 구분하기도 한다(이복규, 1979).
표3 | 고구려 건국설화 문헌 유형 및 전승 관계
| 유형 및 계승 관계 | 현전 문헌 자료 |
| 『논형』 | 1세기 『논형』 → 『위략』, 『수신기』 등에 수록된 부여 건국설화 |
| ↓ | |
| 유형 Ⅰ | 4세기~5세기 고구려 금석문(〈집안고구려비문〉, 〈광개토왕비문〉, 〈모두루 묘지명〉) |
| ↓ | |
| 유형 Ⅱ | 6세기 『위서』 → 『주서』, 『수서』, 『북사』, 『통전』 등 중국 문헌 |
| ↓ | |
| 유형 Ⅲ | 간략형: 『구삼국사』 → 『삼국사기』(12세기), 『삼국유사』(13세기) |
| 상세형: 『구삼국사』 → 「동명왕편」(12세기), 『세종실록지리지』(15세기) | |
표 2에서 고구려 건국설화를 담고 있는 문헌 계통의 전승 관계를 정리했는데, 사실상 유형 Ⅰ과 Ⅱ는 건국자 출자, 명호 등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적어도 고구려 건국설화로 일관되어 있으며, 혈연관계도 천신(天神)→ 건국자라고 하여 비교적 단선적이다. 문제는 유형 Ⅱ와 유형 Ⅲ의 전승 관계인데, 고구려 건국설화에 앞서 동부여 금와왕설화와 해모수설화가 접합되어 있어, 건국자의 출자와 혈연계보에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즉, 건국자의 출자는 동부여로, 혈통은 천신 → 해모수 → 건국자로 설정되어 한 세대 늘어난 형태로 변모된다. 학계에서는 이 같은 전승 형태로 미루어 4세기~5세기 금석문이나 6세기 『위서』 찬술 무렵에는 아직 동부여 금와왕, 해모수 설화가 접합되지 않았고, 이들 요소는 후대(고구려당대설과 고려시대설로 양분)에 접합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한편, 중국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비슷한 입장이나, 유형 Ⅱ와 Ⅲ의 전승 관계를 달리 해석하고 있다. 즉, 『논형』의 부여 건국설화를 원형으로 하여 고구려 건국설화가 창출되었으며, 고구려 금석문과 중국 정사에 수록되어 하나의 계통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삼국사기』나 「동명왕편」 등 한국 전통시대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설화는 고려시대 이후에 ‘한국적’인 문화요소들이 터무니없이 접합되어 재창조된 계통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있다(曹德全, 2001). 이에 대해 한국 학계에서는 중국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은 단지 이민족 국가의 연원을 설명하기 위한 간략한 언급에 불과하고, 한국 문헌에 전하는 내용이야말로 스스로 신성한 건국전승을 문헌화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서대석, 2004).
그 외, 일각에서는 『논형』 계통을 시초로 후대 여러 전승이 파생되었다는 주장에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기이한 탄생 → 혐오·유기 → 짐승의 보호 → 재수용’이라는 설화 구조는 주(周)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설화나, 서언왕(徐偃王)설화 등에서도 확인되며, 또 선비(鮮卑) 단석괴(檀石槐)설화나, 신라 석탈해(昔脫解)설화에서도 유사한 모티프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부여와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공유하고 있는 일부 설화적 모티프를 근거로 양 계통의 전승 관계를 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건국설화는 『논형』의 부여 건국설화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계루부(桂婁部)왕실 시조전승(외래인 출신의 조상 기억)→ 4세기~5세기 고구려 금석문(‘부여출자’ 추가)→ 『위서』(부여 건국설화와 유사한 구조로 변모)→ 『삼국사기』 등 고려시대 이후 문헌(고구려 및 고려시대에 걸쳐 변형된 전승들의 취합)으로 그 유형과 파생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조우연, 2010b).
3) 동아시아 지역의 여러 유사 설화
앞서 살펴봤듯이, 『논형』에 수록되어 있는 부여 건국설화는 고구려 건국설화와 줄거리가 유사하며 여러 설화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사실 이 두 설화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사회에 비슷한 구조나 모티프를 가진 설화가 종종 발견되고 있다. 이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고구려 건국설화의 문화적 연원에 관한 일부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주 007
| 설화 | 핵심 내용 |
|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설화 | 신이한 잉태(거인의 족적을 밟고 감응)→ 혐오·유기 → 짐승들의 보호 → 재수용 |
| 서언왕(徐偃王)설화 | 난생 |
| 신이한 출생 → 유기 → 짐승 보호 → 재수용 | |
| 활[弓]과 호칭의 연관성 | |
| 신라 석탈해(昔脫解)설화 | 난생 |
| 유기 → 재수용 | |
| 선비(鮮卑) 단석괴(檀石槐) 출생설화 | 신이한 잉태(우박을 삼키고 감응) |
| 유기 | |
| 은(殷)나라 시조 설(契)설화 | 신이한 잉태(알을 삼키고 감응) |
| 삼인(三人)목욕 |
은나라 설출생설화는 앞의 설화들에 비해 부여나 고구려 건국설화와 크게 연관이 없어 보이나, 사실 알(卵)이나 궁인의 기이한 잉태 등은 부여 건국설화와 닮아 있으며, ‘세 인물의 목욕’은 고구려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웅심연가의 해백의 세 딸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은의 기원을 만주 지역에서 찾기도 한다(傅斯年, 1933). 한편, 이 설화를 근거로 부여나 고구려의 기원을 은에서 찾고자 하기도 한다(耿鐵華, 2002; 2005). 그 외 진(秦)나라 조상설화 또한 마찬가지로 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낳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설화 | 핵심 내용 |
| 청(淸)태조(太祖)조상설화 [불고륜(佛庫倫)설화] | 선녀 세 자매 목욕 |
| 신이한 잉태(까치가 물어온 붉은 과일을 삼키고 감응) | |
| 몽골 칭기즈칸 조상설화 [알랑고아(阿蘭豁阿)설화] | 기이한 잉태(빛에 감응) |
| 혈통: 천자(天子) | |
| 백제 조상설화 |
사실, 『수서』 등 중국 문헌에서는 백제 역사를 다루면서 그 조상 동명이 고려국(高麗國), 즉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하면서도 부여 건국설화와 흡사한 내용을 전재하고 있다. 즉, 부여 시조 주인공의 출자를 탁리국 대신 고려국으로 바꿔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같은 전승이 특정 시기 백제에 존재했는지, 아니면 중국 찬자가 자의적인 이해에 기초해 지어낸 것 인지는 알 수 없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을 백제 시조라고 전하는데, 이를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으로 보아, 백제가 고구려와 동일한 시조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도모와 추모는 비록 모두 하백녀가 태양에 감응하여 출생했다고는 하나 별개의 설화로서, 도모대왕설화는 백제의 독자적인 시조 인식을 담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8b).
이상에서 고구려 건국설화와 유사한 모티프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여러 설화들을 간략하게 살폈다. 신이한 감응(감정)잉태, 난생, 기아(棄兒)등 문화적 요소들이 비단 부여나 고구려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대에 걸쳐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설화의 원형으로 지목되고 있는 부여 건국설화 또한 그보다 오래된 문화적 연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러한 것을 특정 집단 고유의 문화적 요소로 취급해 족속 구분 기준으로 삼는다든가, 집단의 기원을 유추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어,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설화와 은(殷)·주(周)조상설화와의 유사성을 근거로 고구려의 종족적 기원이나 문화적 뿌리를 중원지역에서 찾고자 한다(姜維東, 2009; 張碧波, 2010). 반면에 한국 학계에서는 설화에 등장하는 일광감정(日光感精)과 같은 몽골, 만주 등 북방지역에서 널리 나타나는 감생 설화적 요소(三品彰英, 1971), 신라, 가야 설화 등에 나타나는 난생 요소를 들어 고구려가 중원과 구별되는 집단임을 역설하고 있다. 한편, 설화의 유사성에 근거해 부여에 혈연적 내지는 종족적 뿌리를 두고 있는 이른바 범부여족을 상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형태의 유사한 설화적 모티프를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동질성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럼에도 특정 시기, 특정 정치 목적에서 여러 집단들이 부여 계승을 표방하고 또 부여를 공통분모로 일종의 범부여 집단의식이 형성되면서 설화의 차용이 발생한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 설화에 ‘부여 출자’를 비롯한 부여와 연관된 요소가 등장하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하고, 또 적극 해석해야 할 부분이다.
앞서 학계에서는 부여, 고구려, 백제의 종족 계통이 동일하기 때문에 설화적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석해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체성 의식의 형성 시점과 원인, 다시 말해, 고구려나 백제가 어떤 시점에, 어떤 이유에서 부여가 필요했는지에 대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