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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고구려 건국설화의 단계적 정립과 변형

2. 고구려 건국설화의 단계적 정립과 변형

1) 설화의 전개 양상
현재로서는 고구려 건국설화의 정립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데, 앞에서 언급한 문헌자료만 보더라도 상당히 후대의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가 건국될 무렵인 기원전 1세기경 혹은 조금 늦은 시기에 기록된 고구려 설화 관련 문헌자료는 전무하다. 그럼에도 한편 설화의 구전(口傳)특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설화의 정립 시기를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 인식의 편차가 있어 왔다.
고구려 건국설화의 정립 시점과 관련해 대개 두 가지 학설이 있어 왔다. 하나는 고구려 초기형성설이고, 다른 하나는 4세기~5세기형성설이다. 즉, 전자는 고구려 건국 초기 주몽과 더불어 부여를 탈출한 세력에 의해 신성한 시조왕에 대한 숭배 관념이 형성되고, 그 일환으로 부여 동명설화를 모델로 건국설화가 창출되었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고구려 중기에 특정 정치적 목적에서 부여설화를 차용해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한편, 동부여설화가 접합되어 나타나는 설화 형태(유형 Ⅲ)에 대해, 고구려 중·후기(서영대, 1991; 노태돈, 1993; 김기흥, 2007)또는 고구려 멸망 후(津田左右吉, 1922)혹은 고려시대(중국 학계의 보편적 인식)에 재정립된 것이라고 보는 한편, 정치적 목적에서 후대에 개작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임기환, 1998; 윤성용, 2005).
구체적으로, 초기형성설에서는 제3대 왕인 대무신왕 3년조(20년)의 동명묘(東明廟)설립 기사를 ‘주몽사당’ 건립으로 해석해, 이를 근거로 고구려 초기에 이미 건국설화의 골격이 마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김기흥, 2001; 이종욱, 2004; 윤성용, 2005). 또 태조대왕대에 주몽 숭상의식이 대두하면서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거나(이종태, 1990), 태조왕 시기 고구려로 이주해 계루부와의 혼인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부여인들이 창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範恩實, 2013).
한편, 3세기 문헌인 『삼국지』 고구려전에 수록되어 있는 ‘동맹제(東盟祭)’라는 제천(祭天)의례에 주목해, 이를 신성한 시조설화를 재연한 의식으로 해석하면서(김기흥, 2001; 서영대, 2003; 최광식, 2007) 건국설화가 3세기 고구려사회에서 이미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3세기의 제천의례를 건국설화의 재연으로 해석할 만한 논거가 미흡하고(여호규, 2011), 또 당시 비(非)혈연 나부연맹체제하에서 여러 나부 사이의 혈연적 유대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혈연을 상징하는 ‘인귀(人鬼)’계 신격이 국가의례의 중심에 표방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조우연, 2010c; 2011). 일각에서는 고구려 동맹제를 주몽이 아니라 부여의 동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노명호, 1981; 강경구, 2001; 박승범, 2001; 장병진, 2016), 마찬가지로 연맹체제 속에서 ‘혈연’정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는 어렵다.
그에 비해, 고구려 중기형성설에서는 대개 소수림왕대(371~384년) 체제 정비와 연관시켜 왕실의 권위를 고양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건국설화가 정비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노태돈, 1993). 한편, 미천왕대(301~331년)부여집단에 힘입어 왕위에 등극, 국난을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고 보고, 이 무렵에 부여 출자를 모티프로 하는 시조설화가 창출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李成市, 1989). 또 일찍부터 광개토왕대(391~412년)나 장수왕대(413~491년)에 창출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白鳥庫吉, 1936; 耿鐵華, 2005). 즉, 고구려는 북쪽의 북부여, 동쪽의 동부여, 그리고 부여 출자를 표방한 남쪽의 백제 등 부여 계통 집단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 부여설화를 개작해 자체 설화를 정립 및 부여계의 ‘종가(宗家)’로 자부했다는 것이다. 한편, 5세기 이후 개작설이 제기되기도 했는데(조우연, 2010b), 왕실 나름대로 독자적 형태의 시조전승이 있었고, 5세기 이후 친(親)왕실집단의 취합을 목적으로 부여의 동명설화와 유사한 형태로 개작되어 『위서』를 비롯한 6세기 이후 문헌에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고구려를 전(傳)으로 기록한 중국 정사(正史)는 280년대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찬술한 『삼국지』인데, 고구려 건국설화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그보다 한참 후대인 445년에 완성된 『후한서』 고구려전에도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동이의 옛말에 부여 별종이라고 한다(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라는 언급이 있고,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동이들이 서로 전하기를, 부여 별종이라고 한다(東夷相傳, 以爲夫餘別種)”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른바 ‘구어(舊語)’란 곧 설화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이는 곧 주몽집단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고구려를 건국한 설화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헌에서 고구려를 부여 별종이라고는 했더라도, 고고학적으로 양 지역 문화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나므로, 송화강 유역의 부여민이 압록강 중류 일대로 남하했다고 직접 연관시키기 어렵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田村晃一, 1990).
『삼국지』에서 고구려 제반 사항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장 중요한 건국전승을 누락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에 비해, 부여전에는 『위략』을 인용해 부여의 동명설화(건국설화)를 주석으로 붙였다. 『후한서』 역시 마찬가지로 부여전에 동명설화를 수록했으나, 고구려전에는 건국설화가 누락되어 있다. 즉 앞서 자료 계통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부여 건국설화는 일찍이 1세기 문헌에 이미 수록되어 나타나나, 고구려는 건국된 지 3세기가 경과한 무렵에도 문자로 채록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 4세기~5세기 무렵에 이르러 고구려 왕실의 조상 관념, 즉 선왕(先王) 세계(世系) 인식에 변화가 발생하는데, 태조대왕을 정점으로 하던 종묘체계가 장수왕대에는 주몽을 정점으로 정비된다(조인성, 1990; 조우연, 2010a). 그리고 소수림왕대(이기백, 1976; 井上秀雄, 1976),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미천왕대에 『유기(留記)』라는 고구려 초기 역사서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주 008
각주 008)
혹자는 미천왕대, 즉 4세기 전반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조우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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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새롭게 정립된 초기 왕계가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그에 앞선 시기에 고구려에서는 아직 현전하는 형태의 주몽을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가 정립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건국설화가 언급되어 있는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 텍스트는 광개토왕대인 4세기 말~5세기 초에 입비된 〈집안고구려비〉이다. 이는 4세기 후반, 즉 소수림왕 무렵에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해 고구려 건국설화를 정립했다는 앞선 시기 주장(노태돈, 1999)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건국된 기원전 1세기에서 4세기 후반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건국 내지는 왕실 조상에 관한 설화가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일까?
현재로서는 현전하는 형태의 고구려 건국설화의 정립 시기를 4세기 후반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건국설화는 문학작품처럼 단기간에 창작 및 배포될 수는 있는 개념은 아닌데, 그에 대한 집단인식의 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4세기 이전에 ‘외래인(外來人)에 의한 건국’이라는 유사한 형태의 골조를 갖춘 나름대로의 왕실 시조전승이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초기의 왕실 조상설화가 고구려를 구성한 연맹체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공인되었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외래인에 의한 건국’이라는 설화의 기본 줄거리는 고구려 왕실인 계루부집단의 외래적 성격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른 시기 연구에서 이미 계루부의 외래설이 제기된 바 있다(池內宏, 1941). 또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 등 5부연맹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계루부만 ‘노(奴)’가 들어가 있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명칭으로 되어 있는데,주 009
각주 009)
‘노(奴)’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형성된 고유의 토착집단, 즉 각 지역별 강변이나 계곡 지대에서 형성된 정치체의 단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三品彰英,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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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계루부가 외래집단일 가능성을 시사한다(노태돈, 1993). 따라서 외래집단인 계루부는 초기부터 본국의 박해를 피해 도주한 ‘외래인 왕자(王子)에 의한 건국’이라는 독자적인 조상전승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조우연, 2010b). 한편, 이 같은 전승 줄거리의 유사성은 훗날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해 건국설화를 재정립할 수 있었던 집단인식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2세기~3세기 고구려 왕실에서는 ‘부여 출자’임을 표방하지 않았으며(노태돈, 1993), 단지 ‘외래 출자’에 대한 역사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 왕실에서 전승된 건국설화의 원초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4세기 무렵에 이르러, 미천왕, 고국원왕대의 적극적인 대외 공략은 왕실 위상의 신장을 가져왔다. 하지만 미천왕은 선대왕 조카의 신분으로 정변세력에 의해 추대되었다는 왕위 계승 적법성의 한계를 지녔고,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투쟁에서 전사했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이에 이어지는 소수림왕대에 제반 체제 정비와 역사서 찬술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고,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건국설화가 새롭게 정비되었던 것 같다.
즉, 4세기 후반에 이르러, 앞선 시기 왕실에서 전승되어온 원초적 형태의 설화가 5세기 금석문(유형 Ⅰ)에 수록된 형태의 설화로 개작되어 비석이라는 ‘항구성(恒久性)’을 지닌 기념물에 문자로 명기(銘記)되어 고구려 구성원 전체에 널리 선양(宣揚)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초적 형태의 설화가 단지 ‘외래인 왕자에 의한 건국’이 기본 줄거리였다면, 이 시기 개작된 설화에는 ‘북부여(北夫餘)’라는 시조의 출자 내지는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며, ‘천제의 아들, 어머니는 하백의 딸(天帝之子, 母河伯女郞)’이라는 신성한 혈통이 강조되었고, 또 기적적인 도강(渡江)과 같은 부여 동명설화와 유사한 설화적 모티프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당시까지만 해도 부여 동명설화의 적극 차용은 감지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6세기에 편찬된 『위서』에 수록된 설화(유형 Ⅱ)를 체제 정비 후 새롭게 정립된 건국설화의 내용으로 보아 〈광개토왕비〉를 비롯한 5세기 금석문의 시조설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8a). 하지만 양 문헌의 결정적인 차이는 부여의 동명설화 차용 여부인데, 5세기 금석문에서는 아직 적극적인 차용 단서가 잘 드러나지 않으나, 6세기 『위서』에서는 거의 유사한 형태로 변모되어 있다. 따라서 두 계통의 설화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금석문이라는 자료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으나, 부여 동명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는 결정적으로 주인공의 출생 방식에 차이가 있다. 전자는 태생(胎生)이고, 후자는 난생(卵生)인데, 이는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며(李成市, 1998), 상이한 계열의 설화임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비문에는 ‘혐오·유기 → 짐승의 보호 → 재수용’이라는 중요한 설화적 요소가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5세기 금석문에 수록된 고구려 건국설화에 ‘도강’ 모티프나 ‘북부여’라는 요소가 등장한다고 해서 당시 이미 부여 동명설화를 적극 착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를 부여 동명설화와 거의 유사한 형태의 구조를 갖고 있는 6세기 『위서』에 수록된 설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북부여’ 출자라는 왕실의 정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는 강력해진 고구려가 쇠퇴한 부여주 010
각주 010)
부여는 285년에 모용외(慕容廆)의 공격을 받아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종실이 옥저로 피신하는 등 국가적 위기에 처하였고(『晉書』 卷97 四夷夫餘國傳), 346년에 다시 모용황(慕容皝)의 공격으로 왕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資治通鑑』 권97 晉紀19 穆帝). 이로써 부여는 중흥하지 못하고 근근이 명맥만을 유지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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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대신해 동북아 지역에서 부여가 지녀온 위상과 지위를 계승하고(李成市, 1989), 나아가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표방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 경쟁관계였던 백제 왕실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표방하기 위해 시조에게 ‘북부여 출자’라는 정체성을 부여, 나아가 부여의 쇠락과 함께 이탈된 집단을 다시 취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정원주, 2009).
하지만 일각에서는 5세기 당시 약소국으로 전락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부여에서 정통성을 찾고 그 계승을 표방했다는 것은 어색하다고 보고, ‘부여 출자’의 의미를 내부에서 찾기도 한다. 즉 고구려 내부의 부여 출신 집단을 왕실 중심으로 아우르기 위해, 그들과 왕실이 공유하고 있는 정체성의 상징으로 시조의 ‘부여 출자’를 표방했다는 것이다(조우연, 2010b).
5세기 금석문에 이어 6세기 『위서』에 수록되어 있는 건국설화는 이미 부여의 동명설화와 거의 흡사한 형태로 변모되어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고구려에 동명설화와 추모왕전승이 독자적으로 존재했는데, 북위(北魏) 사신 이오(李敖)가 양자를 결합시켜 『위서』에 수록된 형태의 설화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즉, 고구려인 스스로가 적극 부여 동명설화를 차용해 새로운 고구려 건국설화를 창출해낸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 내방한 북위 사신의 소행이라는 것이다(神崎勝, 1995).
여하튼 5세기 금석문에 비해, 『위서』를 비롯한 유형 Ⅱ 전승에서는 부여 동명설화의 중요한 모티프들이 다수 확인된다. 예를 들어, ‘기이한 출생 → 혐오·유기 → 짐승의 보호 → 재수용’, ‘양마(養馬)’, 그리고 기적적인 도강, 주인공의 ‘선사(善射)’ 능력 등 핵심적인 설화적 모티프들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출자와 관련해, 앞선 시기의 ‘북부여’에서 ‘부여’로 바뀌었는데, 이는 찬자(撰者)의 ‘부여’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한 듯하다. 현재 학계에서는 북부여와 부여를 동일 실체로 이해하고 있다(노태돈, 1993).
유형 Ⅱ의 구체적인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435년 고구려로 사행한 북위 사신 이오의 전문과 연관시켜 보고 있다. 앞서 유형 Ⅰ이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을 전후한 시기 형성된 것임을 추정했고, 또 5세기 초기 금석문에 반영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5세기 중반 이후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에서 ‘부여 출자’라는 정체성이 왕실뿐만 아니라 여타 귀족층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한 정체성 인식의 움직임을 잘 드러내주는 자료가 바로 5세기 〈모두루묘지명〉이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모두루는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라는 관직을 지냈으며, 그 가문 조상은 주몽을 수행해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한다(聖王奴客祖先□□□北夫餘隨聖王來). 앞서 언급했듯이, 이 같은 서술의 핵심은 역사 사실 자체 보다는 현재적 의미이다. 이는 북부여 출자라는 왕실 정체성에 대한 모방이며, 먼 조상과 왕실 시조의 군신(君臣)관계 설정을 통한 현재 가문과 왕실의 친밀성 강조이다(조우연, 2010a).
즉, 이 무렵에 고구려에서 ‘북부여 출자’라는 정체성 인식이 확산되었던 것 같은데, 이는 494년 몰락한 부여 왕실에서 고구려로의 내투(來投)를 최종 선택했던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즉, 부여가 고구려를 귀순 대상국으로 선택했던 것은 물론 당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강력한 국력 때문일 수도 있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부여 출자’라는 정체성이 고구려사회 전반에 걸쳐 상당 부분 확산 및 정착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554년 『위서』에 수록된 부여 동명설화와 상당 부분 일치하게 변형된 유형 Ⅱ 설화 계통은 대개 5세기 중·후반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동부여가 등장하는 유형 Ⅲ 설화의 형성 시기와 관련해 앞서 언급했듯이 병존설과 개작설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전자는 동부여설화가 북부출자설화와 함께 애초부터 존재했으나, 6세기 『위서』에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는 찬자가 고구려 건국설화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것으로 간주해 생략한 것으로 이해한다(윤성용, 2005). 한편, 해부루 등 설화적 내용이 애초부터 동명설화의 원형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본다(임기환, 2008b). 이 같은 견해는 근래 〈집안고구려비〉 연구나 고구려 시조 출자 전승 연구에서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정호섭, 2014; 임기환, 2016).
그럼에도 유형 Ⅲ 설화의 도입 부분에 등장하는 해모수, 금와왕 등 내용이 이른 시기 문헌에 보이지 않고, 고려시대 이후 문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은 개작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따라서 해모수, 금와왕 설화가 접합된 유형 Ⅲ 형태의 설화는 후대에 첨삭을 거쳐 개작된 것일 가능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었으며(島田好, 1934),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동명왕편」의 건국설화는 고구려 당대의 것이 아니라, 신라인 혹은 고려인들에 의해 재창조된 설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津田左右吉, 1922). 그 구체적인 형성 시점과 관련해서, 5세기 이후 어느 시점에 부여족 위무 목적에서 창출되었다고 보거나(서영대, 1991), 6세기 중반 이후 동부여계 출신들이 유력 정치세력으로 대두하면서 동부여설화가 접합된 것으로 보고, 또 『신집(新集)』 편찬과 연관시키기도 한다(노태돈, 1999). 적어도 해모수라는 신격이 주몽의 부계로 설정되면서 시조의 신분이 앞선 시기 ‘천자(天子)’에서 ‘천손(天孫)’으로 변모된 것은 고구려 6세기 이후 후기의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김일권, 2005; 박기범, 2011). 그럼에도 혹자는 큰 틀에서 유형 Ⅲ 설화 또한 유형 Ⅱ(〈광개토왕비문〉 등)와 마찬가지로 4세기 후반에 정립된 건국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여호규, 2010b).
유형 Ⅲ 설화에서 시조의 출자가 ‘북부여’ 혹은 ‘부여’에서 ‘동부여’로 바뀌었다는 점과 더불어, 건국자의 신분이 ‘천자(天子)’에서 ‘천손(天孫)’으로 변형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천자나 천손 모두 하늘과 연결된 신성한 혈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주 011
각주 011)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천제’와 ‘천손’ 관념이 한 가지로 정립되지 못한 채 혼용되고 있는데, 찬자는 양자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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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부(父)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은 시조의 신분이 격하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다만 이러한 변형의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배경을 짚어낼 만한 단서가 결여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시조왕의 신분 격하는 결국 그 혈연 후손인 ‘현재’ 왕권의 격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혹여 6세기 전반 안원왕(安原王)-양원왕(陽原王) 시기 권력 투쟁으로 인한 왕권 약화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1988년에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절터(梧梅里寺址)에서 양원왕 2년(546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銘文) 금동판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천손’에 관한 언급이 등장한다.
원하옵건대 왕의 영령이 도솔천으로 올라가 미륵(彌勒)을 뵙고, 천손(天孫)이 함께 만나며, 모든 생명(四生)이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願王神昇兜率查勤彌勒天孫俱會四生蒙慶). 
물론 명문에 등장하는 ‘천손’이 천신의 손자로서 시조 주몽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일반 표현인지는 확단하기 어려우나, 왕에 관한 언급이므로 전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5세기 금석문과는 다른 ‘천손’ 설화 계통의 영향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김일권, 2005). 그러므로 이 같은 ‘천손’ 형태의 설화는 고려시대에 날조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6세기 무렵 고구려 당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림7 | 오매리절터 출토 명문 금동판(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조선유적유물도감』 4)
이상에서 장황하게 다룬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초기부터 계루부 왕실에서 외래인 조상의 건국에 관한 원초적 형태의 설화가 전승되다가,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이르러 시조 주몽을 정점으로 하는 왕실 조상 계보가 새롭게 정립되면서, 시조가 구체적으로 ‘북부여’에서 출자한 형태로 개작(4세기~5세기 금석문에 수록된 판본)되었고, 5세기 중·후반 이후 정치적 목적에서 ‘부여 출자’가 정체성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본격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해 아주 유사한 형태로 변형되었으며(6세기 『위서』에 수록된 판본), 6세기 이후 동부여설화, 즉 해모수, 금와왕 설화가 접합된 형태의 설화(『삼국사기』 및 「동명왕편」 판본)가 등장한다.
 
2) 시조의 ‘부여’ 출자와 신성한 혈통
〈광개토왕비문〉의 첫머리에 시조왕의 신성한 출신을 강조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바로 “북부여에서 나왔고,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出自北夫餘, 天帝之子母河伯女郎)”이라는 문구이다. 그런데 전통시대 문장 서술에서는 중요한 내용을 앞에 배치하는 것이 관례이다. 즉, 부여 출자가 천제의 아들이라는 신성한 혈통보다 앞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은 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부여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발흥한 고대국가로서 장기간에 걸쳐 주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고대사에서 부여계승의식이 적지 않게 확인되는데, 대표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 출자’ 인식이 그것이다. 고구려 건국설화를 전하는 여러 문헌에서는 시조의 출자를 북부여, 부여 혹은 동부여로 다양하게 전하고 있으며(유형 Ⅰ·Ⅱ·Ⅲ), 또 졸본부여로 호칭되기도 했다. 백제는 ‘남부여’를 칭했고, 왕성(王姓) 또한 ‘부여씨’를 칭했다. 이러한 것들이 실제 부여와의 혈연적·종족적 연관성을 반영한 역사 사실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치적 의도에서 ‘창조’된 역사 인식인지 여부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특정 역사 흐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은 틀림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부여의 동명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와의 유사성에 착안해, 부여족이 여러 지역으로 이동·확산하면서 동명설화가 부여-고구려-백제로 변형 및 재생산되었다고 보고 있으며(김철준, 1973; 노명호, 1981; 박승범, 2009), 부여 계통에서 출발한 정치세력인 고구려 왕실에서 부여 시조 동명 계승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장병진, 2016). 한편, 고구려 건국설화를 고구려로만 한정하지 말고, ‘동명’을 연결고리로 ‘범부여’ 계통의 설화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이장웅, 2008). 그럼에도 관련 기술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 모순점도 적지 않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설화의 정립 시기와 더불어 설화 속에 등장하는 건국자의 출자국으로 설정되어 있는 ‘부여(북부여, 동부여)’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문헌별로 부여뿐만 아니라 북부여, 동부여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어, 이들의 실체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이들 제(諸)부여와 관련해, 대개는 세 가지 이해가 있다. 첫째는 북부여와 부여를 동일시하고 동부여와 달리 보는 입장이고, 둘째는 북부여, 부여, 동부여를 모두 별개로 보는 견해이며, 셋째는 이들 셋을 동일 실체로 이해하려는 입장이다(송기호, 2005). 그런데 〈광개토왕비문〉에서 고구려인 스스로 북부여와 동부여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어 셋을 동일 실체로 보기는 어렵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주몽의 출자국으로 설정돼 있는 5세기 금석문(유형 Ⅰ)에 보이는 ‘북부여’와 6세기 『위서』(유형 Ⅱ)에 언급되어 있는 ‘부여’는 동일한 실체에 대한 다른 호칭으로 보고 있다(노태돈, 1993; 송호정, 2005). 즉, 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구려 천하관(天下觀)의 시각에서 자신들의 북쪽에 위치한 부여를 ‘북부여’로 칭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편, 고구려인들이 남긴 문헌인 〈광개토왕비문〉에서도 ‘북부여’와 ‘부여’를 혼용하고 있는데, 시조 출자를 ‘북부여’라고 하면서, 남하 과정에서 ‘부여 엄리대수(夫餘奄利大水)’를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1세기 후반 『논형』을 시초로 하는 이른 시기 부여 건국설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후대 문헌에서 고구려 건국설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북부여 해모수설화와 전혀 달라 공유하는 모티프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또 북부여가 과연 부여와 동일한 실체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문헌에 보이는 북부여가 곧 부여라고 단정하기 어려우며, 동부여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16).
동부여는 중국 문헌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광개토왕비문〉과 고려시대 이후의 고구려 건국설화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기록에서 동부여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는데, 전자의 경우 피정복국가로, 후자의 경우 시조왕의 출자국으로 기술하고 있다.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친정에 나서 동부여를 공취(攻取)했다고 하는데, 비문에 등장하는 ‘동부여’의 실체에 대해 대개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해부루가 동해 바닷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를 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옥저(沃沮)지방에 해당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부여가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옥저로 도피한 사실이 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즉, 학계에서는 285년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으로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잔여 세력들이 옥저로 피신하였다가 서진(西晉)의 도움을 받아 의라(依羅)가 나라를 회복하게 되는데, 당시 옥저 지역에 잔류한 세력이 세운 나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북옥저(池內宏, 1932; 박경철, 1992), 두만강 유역(노태돈, 1989), 동해안(공석구, 1990), 유수(榆樹) 노하심(老河深)(孫進己, 1996), 교하(蛟河) 일대(이성제, 2008)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주 012
각주 012)
그 외 여타 주장들은 송기호의 관련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송기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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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주장들이 최종 설득력을 가지려면 고고학상의 발견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나, 아직 해당 지역에서 이렇다 할 만한 유적·유물이 발견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한편, 『삼국사기』의 갈사국(曷思國, 22~68년)에 주목해, 이는 부여의 대소왕(帶素王)피살 후 그 일파가 세운 국가로서, 바로 ‘동부여’일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했다. 즉, 이 집단이 스스로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해부루 → 금와왕 → 대소로 이어지는 전개를 동부여의 역사로 분식하고, 고구려 시조의 출자 또한 동부여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입장에서 자국의 북쪽과 동쪽 동해안의 부여집단을 각각 북부여와 동부여로 구분했다고 보고 있다(노중국, 1983).
어찌됐든, 가장 이른 시기 고구려인들이 남긴 5세기 금석문에서는 시조의 출자가 북부여로 되어 있고, 동부여는 시조의 속민(屬民)이자, 광개토왕의 정벌 대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동부여의 해부루, 금와왕 설화에 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없다. 5세기 문헌뿐만 아니라, 6세기의 『위서』 등 유형 Ⅱ에 해당하는 문헌에서도 관련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조의 부계로 설정되는 북부여 해모수설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조의 부계(父系)로 등장하는 해모수나 동부여의 해부루, 금와왕 설화가 등장하는 유형 Ⅲ 문헌은 특정 시기 접합된 후대의 변형된 설화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시조왕의 출자가 왜 부여일까? 다시 말해, 왜 시조왕에게 토착적 성격보다 외래적 성격이 부여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져볼 수 있다.
그 해답은 대개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고구려가 실제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특정 시기 지배자가 정치적으로 ‘부여’ 출자의 정체성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존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첫 번째 가능성 입증에 주력해왔던 것 같다. 이른 시기 고구려 건국설화 속 시조 주몽의 출자국은 부여(북부여)로 되어 있고, 또 『삼국지』를 비롯한 이른 시기 기록에서 고구려를 ‘부여 별종(夫餘別種)’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해당 설화에 주몽집단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인식해왔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송화강 유역의 부여와 압록강 중하류 지역에서 흥기한 고구려는 고고학적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그 일례가 바로 가장 보수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묘제(墓制)인데, 전자가 토광묘(土壙墓) 위주라면, 후자는 적석총(積石塚)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고구려의 ‘부여 출자’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고학적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완전히 단절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첫 도읍인 환인(桓仁)남부에 위치한 망강루고분군(적석총)에서 부여 계통의 금제귀걸이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들 고분 피장자를 고구려로 남하한 부여계 유민으로 보거나(梁志龍·王俊輝, 1994; 여호규, 1996), 직접 주몽집단과 연관시키기도 한다(王綿厚, 2005). 실제로 다양한 부여 출신 집단(夫餘之屬)들이 압록강 중상류 일대로 이주해 현지 토착세력과 결합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왕실인 계루부 또한 그들 중 하나로서, 부여 유이민과 졸본부여계를 주축으로 형성된 세력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김현숙, 1994).
다만, 주몽집단의 외래적 성격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이 선진문물을 소유한 외래집단으로서 압록강 중류의 토착집단 정복을 통해 왕권을 정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지』 고구려전 기록에서 계루부에 앞서 왕을 배출한 연노부(涓奴部)가 존재했고, 별도로 왕실설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다(여호규, 2011). 즉, 계루부는 토착세력과 결합해 나가면서, 장기간 5부(部)라는 연맹정치형태를 유지했고, 후대에 이르러서야 점차 왕실 세력의 신장과 함께 확고한 계루부 왕권을 정립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건국설화에서 시조 주몽에게 부여한 ‘부여 출자’라는 정체성이 단지 계루부 왕실의 부여 출자가 객관적 역사 사실이기 때문일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따라서 권위를 표방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심성이 작용하는데,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곧 가장 신성하고 위대한 곳으로 상정된다. 천하의 중심을 의미하는 ‘중국(中國)’이라는 표현이 바로 전형적인 경우이다. 이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서구의 이른바 ‘지구중심설(천동설)’이라는 우주관에 그러한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고구려의 천하관 속에도 그러한 관념이 투영되어 나타나는데, 세계의 중심은 고구려이고, 신라는 그 동쪽에 있는 오랑캐(東夷)로 설정된다.
그럼에서 왕실의 정체성이라는 핵심 이념 속에 외래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다. 이 같은 정체성은 역사 사실과는 무관하다. 설화는 결코 ‘객관적인 역사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고구려인들이 건국의 진실한 역사를 기록해 후세에 전해주려는 목적에서 건국설화를 창출하고 기록했던 것이 아니다. 설사 계루부 왕실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 그러한 정체성이 현실정치에 득이 되지 않는다면 의도적인 ‘망각’과 ‘전통 단절’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 순리이다.
따라서 이 같은 인식을 전제로 고구려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부여 출자’의 의미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와 관련해 대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우선 부여라는 고대국가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지녀온 위상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었고, 다음으로 백제 등 부여 출자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 중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함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편, 설화 텍스트의 형성 시기에 주목하여 4세기~5세기 무렵에 약소국으로 전락한 부여로부터 왕실의 우월한 정체성을 확보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시조왕의 ‘부여 출자’는 고구려 내부의 부여 관련 세력을 왕실 중심으로 취합하기 위한 목적이 중요하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5세기를 전후한 시기 왕권의 신장과 연관이 있다.
마지막으로 시조의 신성한 혈통에 관해 짚어보도록 하겠다.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는 시조왕의 신성한 혈통에 대한 언급은 표현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5세기 금석문에 공히 등장한다. 〈집안고구려비문〉에서는 “□□□아들, 하백의 손자(□□□子, 河伯之孫)”라고 했고,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天帝之子, 母河伯女郎)”,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皇天之子, 母河伯女郎)”이라고 했으며, 〈모두루묘지명〉에서는 “하박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河泊之孫, 日月之子)”, “하박, 해와 달의 손자(河泊日月之孫)”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왕은 ‘천명(天命)’만으로도 권력의 정당성을 표방하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최고지배자에게 천자(天子)성격만 부여할 뿐 모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천자는 천신과의 직접적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단지 천명을 받들어 다스린다는 의미가 짙다. 그에 비해, 고구려 금석문에서 시조 주몽은 혈연적으로 천신과 직접 닿아 있으며, 더불어 신성한 모계까지도 병기되고 있다.
즉, 고구려에서 왕실 혈통 수식에서 부계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모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백’은 황하(黃河)의 신을 지칭한다고는 하나, 동이계(東夷系)설화에 연원을 두고 있는 강의 신(神)으로서, 고구려에서는 시조 주몽의 외조부로 설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수신제(隧神祭)가 물가에서 거행한 시조모를 대상으로 한 의례(서영대, 2003)라는 주장이 있는데, 강의 신 하백이라는 외가의 신성한 혈통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신성한 부계와 모계를 함께 언급한 것은 아마도 앞선 시기 신앙이나 관념의 잔재일 가능성이 많다. 혹 고구려 서옥제(壻屋制)풍속이나 여러 대에 걸쳐 왕실과 통혼한 이른바 ‘왕비족’의 존재를 감안하면 왕실 외척(外戚)의 중요성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조의 외조부로서 하백이 지속적으로 그 신성한 혈통 분식에 등장하였던 것 같다(조우연, 2010a).
한편, 현재 발견된 4세기~5세기 건국설화 자료에서, 공히 ‘천제지자, 하백외손’을 시조왕의 신성한 혈통에 대한 수식 문구로 붙이고 있는데, 이는 마치 권력자에게 부여하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식의 관용 수식과도 같다. 이는 당시 이 같은 수식이 일종의 관용구로 정형화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조우연, 2013).

  • 각주 008)
    혹자는 미천왕대, 즉 4세기 전반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조우연, 2019). 바로가기
  • 각주 009)
    ‘노(奴)’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형성된 고유의 토착집단, 즉 각 지역별 강변이나 계곡 지대에서 형성된 정치체의 단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三品彰英, 1953). 바로가기
  • 각주 010)
    부여는 285년에 모용외(慕容廆)의 공격을 받아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종실이 옥저로 피신하는 등 국가적 위기에 처하였고(『晉書』 卷97 四夷夫餘國傳), 346년에 다시 모용황(慕容皝)의 공격으로 왕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資治通鑑』 권97 晉紀19 穆帝). 이로써 부여는 중흥하지 못하고 근근이 명맥만을 유지해나갔다. 바로가기
  • 각주 011)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천제’와 ‘천손’ 관념이 한 가지로 정립되지 못한 채 혼용되고 있는데, 찬자는 양자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바로가기
  • 각주 012)
    그 외 여타 주장들은 송기호의 관련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송기호, 2005).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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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 건국설화의 단계적 정립과 변형 자료번호 : gt.d_0001_003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