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4세기~5세기 금석문 자료에 수록된 건국설화와 태왕권
3. 4세기~5세기 금석문 자료에 수록된 건국설화와 태왕권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 고구려 건국설화는 5세기 금석문이다. 물론 그에 앞서는 문자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탓도 있겠으나, 280년대에 편찬된 『삼국지』 고구려전을 비롯한 비교적 이른 시기 고구려 관련 기록에 건국설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그럴 가능성을 회의적이게 만든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유형 Ⅰ의 정립 시기를 소수림왕대, 즉 4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그 앞선 시기의 설화 판본은 고구려 구성원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인식되지 못한 채, 왕실에 한정된 전승이었던 것 같다.
4세기~ 5세기 왕권설화의 정립과 대형 금석문 조성을 통한 대내외 공표는 해당 시기 정치적 변화에 동반된 움직임으로 이해되며, 결국 신장된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권력정당화이론의 일환일 것이다. 고구려 건국설화 속에 역사상이 투영되어 있을 수 있어,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 건국의 역사를 복원해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설화의 성격상, 더욱 중요한 것은 권력정당화이론 장치로서의 역할이다. 즉, 설화가 지니는 정치적 기능에 착안해 왕권과의 연관성, 그리고 그 사회적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4세기~ 5세기를 전후한 시기, 고구려 왕권과 관련해 어떤 특이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부분은 ‘태왕(太王)’호의 사용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문자자료 중, ‘태왕’이라는 문자가 확인된 것으로는, 〈광개토왕비문〉, 〈모두루묘지명〉, 〈충주고구려비문〉, 호우총(壺杅塚) 출토 호우(壺杅), 서봉총(瑞鳳冢) 출토 은합우(銀盒杅), 태왕릉(太王陵) 출토 문자벽돌(銘文塼) 및 청동방울(銅鈴) 등 7종이 있다. 이들 자료에 보이는 영락태왕(永樂太王), 호태왕(好太王), 성태왕(聖太王) 등 표현은 단순한 미칭(美稱)이나 특정 군주만 사용한 이질적인 왕호만은 아니었다. 대개는 4세기 중·후반 고국원왕(혹 4세기 전반 미천왕)대부터 적어도 6세기 말 평원왕대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篠原啓方, 2004).
전통시대 한자문화권에서는 군주를 흔히 왕(王)으로 칭했는데, 제왕(諸王) 난립 상황에서 더 높은 지위를 표방하기 위해서는 호칭 변경이 필요했고, 이에 중국의 경우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호칭이 고안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4세기~ 5세기 무렵 고구려왕은 ‘태왕’호를 칭했다. 태왕호 성립의 이면에는 대내외적인 목적이 깔려 있다. 즉, 주변국을 향한 우월성 과시와 더불어 내부 귀족세력들을 향해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이중적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주 013
‘태왕’호로의 개칭은 대외적으로 고구려 국력의 신장과 그에 상응하는 국가적 위상의 상승, 그리고 대내적으로 왕권의 신장과 직결되어 있다. 대외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단순히 대내적으로 봤을 때, ‘태왕’호는 여타 귀족들에 비해 격상된 왕의 초월적 위상을 표출하기 위해, 즉 고구려 국내 정치의 일환으로 제정되었을 가능성이 많다(여호규, 2010b). 4세기~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태왕교조(太王敎造)’에 주목해 도량형 제작을 통한 권력의 집중 시도가 감지된다고 보기도 한다(조우연, 2017).
‘태왕’이라는 새로운 왕호는 앞선 시기에 비해 강력해진 왕권을 전제로 하는데, 고구려 왕권의 전개와 일치한다. 4세기에 들어와 미천왕 시기에는 낙랑군·대방군을 공취하여 서북한 일대를 점령하였고, 광개토왕-장수왕대에는 남쪽으로 백제를 제압하며 평양으로 천도하고, 마침내 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요동(遼東)을 확보하는가 하면, 북연(北燕)의 풍홍(馮弘)세력을 취하면서 왕권은 앞선 시기에 비해 훨씬 비대해졌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이 바탕이 되어 ‘태왕’호로 개칭함으로써, 앞선 시기 유력 귀족세력들에 비해 초월적인 존재임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태왕’의 의미에 대해 ‘천(天)’의 정통성, 혈통에 의해 보장되는 호칭으로서 ‘천’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제시된 바 있다(篠原啓方, 2004). 이는 마치 고구려 건국설화를 연상시킨다. 사실상 ‘태왕’호와 마찬가지로 설화를 통한 왕실 시조에 대한 분식(粉飾)은 곧 그 혈통을 계승한 ‘현재’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따라서 ‘태왕’호의 등장 시기와 거의 겹치는 시점에 유형 Ⅰ 건국설화가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건국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고사(故事)가 아니라, ‘태왕’의 신성한 혈연 조상에 대한 서술이며, ‘태왕’권의 정당화 이론인 것이다.
한편, 거대한 금석문에 ‘천제지자(天帝之子)’라는 왕실 시조의 신성한 혈통 강조를 통해 ‘현재’ 태왕권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역설적인 두 가지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다. 하나는 당시 왕권이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왕실 시조의 건국에 관한 설화가 고구려 전반에 걸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다시 말해, 만약 왕권이 충분히 강력하고, 또 건국설화가 고구려 구성원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면, 구태여 편폭이 제한적인 금석문에서 시조왕의 건국설화를 장황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