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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고구려의 등장과 한의 현도군 설치

2. 고구려의 등장과 한의 현도군 설치

1) 예군 남려의 내속과 창해군 설치
『한서』 권6 무제기와 『후한서』 권85 동이전 예조에 의하면,주 002
각주 002)
『한서(漢書)』 권6 무제기(武帝紀)6,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 罷蒼海郡”; 『후한서(後漢書)』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75 예로(濊條), “元朔元年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 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한서』권24 식화지4하, “彭吳穿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 靡然發動 … 東置滄海郡人徒之費疑於南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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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8년에 예군 남려가 28만 구를 거느리고 한의 요동군에 투항하였고, 한은 이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는데, 교통로를 개설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126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주 003
각주 003)
창해군에 대한 1980년대까지의 연구동향은 노태돈의 다음 연구에 잘 정리되어 있다. 노태돈, 1986, 「高句麗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東方學志』52;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편, 1987, 『고구려사연구』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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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흉노 정벌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던 한은 멀리 동쪽에 새로 군을 설치해 운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예군(濊君)’이라는 명칭 및 28만 구라는 대규모 주민집단의 범위를 고려하면 지역적으로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고구려 세력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동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예군 남려를 대표로 하는 28만 구에 해당되는 정치집단들이 요동군에 투항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들이 고조선을 통한 한과의 간접 교역에서 벗어나서 직접 한과의 교류, 교역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이상의 개설적인 이해를 기초로 좀더 구체적인 논점을 짚어보자. 먼저 예군 남려로 대표되는 28만 구라는 정치세력의 성격과 그 지역적 범위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가 주된 논점이 되어 왔다.
첫째, 28만 구가 위치했던 지역범위이다. 이에 대해서는 송화강 유역의 부여 지역(박경철, 1997)이나, 천산산맥-청천강 일대로 보는 견해(권오중, 2000), 요동반도와 압록강 중류 일대로 보는 견해(조영광, 2011)도 있지만, 대체로 요동군의 동부 산간지대에서 동해안 함흥 방면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28만 구라는 세력집단을 대상으로 설치된 군현의 이름이 ‘창해군’이란 점에서 동해안 지역이 포함되었음은 분명한데, 동해안 지역만으로는 28만 구의 세력 규모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의당 압록강 중상류 지역까지 포함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주 004
각주 004)
예군 남려가 거느린 28만 구라는 인구 규모와 관련하여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 의하면 3세기 중반경에 고구려 3만 호, 동옥저 5,000호, 동예 2만 호를 합치면 대략 30만 구 전후라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즉 예군 남려 28만 구의 지역적 범위는 요동군 동쪽부터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거쳐 동해안 일대에 이르는 지역으로 봄이 합리적이다(여호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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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예군 남려로 대표되는 28만 구 세력집단의 정치적 성격 문제이다. 예군 남려는 28만 구가 거주하는 지역적 범주를 아우르는 연맹장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고조선의 우거왕에게 반발하면서 일시적으로 정치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 견해는 한과 교섭을 행할 수 있는 대외교섭권을 가진 연맹장을 중심으로 다수의 정치체들이 결집하고 각 정치체 내부도 여러 읍락으로 구성된 누층적 구조를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예군 남려가 그 연맹장이라고 보는 것이다(김미경, 2002). 이러한 견해는 『사기』, 『한서』 등 사서에 나타나는 예맥(濊貊)의 존재를 흉노, 오환, 부여, 조선, 진번 등과 같이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의 상황이지만 압록강 중상류 및 동옥저 지역의 발전 수준에서 편차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 지역 전체를 하나의 연맹체로 보기는 어렵다(이준성, 2020).
후자 견해는 우거왕의 봉쇄정책으로 타격을 받은 주변 세력들이 한의 선진문물, 특히 철제품을 확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결합하여 요동군에 내속하였는데, 그중 사회 분화가 상대적으로 진전된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주민집단이 주도하였다고 이해한다(여호규, 2014). 압록강 중상류 일대 세력과 동해안 일대 세력 사이에는 요동군과의 관계 설정에서 정치적 이해 관계가 서로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 세력집단들이 어떻게 예군 남려로 대표되는 28만 구 세력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셋째,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예군 남려 등 28만 구 세력의 중심지가 어디냐 하는 점이다. 28만 구의 지역범위를 고구려와 옥저, 동예를 아우르는 지역에 설정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중심지 위치, 즉 대표자로 거론된 예군 남려의 세력기반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다. 즉 동해안의 동옥저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池內宏, 1951; 和田淸, 1955; 三上次男, 1966; 김미경, 2007)와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주민집단으로 파악하는 견해(이병도, 1976; 盧泰敦, 1986; 여호규, 2005)로 나뉜다.
후대의 상황이지만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고구려에 비하여 동해안 일대의 동옥저 지역이 상대적으로 후진적이었음을 고려하면, 예군 남려의 세력기반을 동해안 일대로 보는 전자의 견해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1958년 평양의 정백동1호분에서 “부조예군(夫租葳君)”이란 인장이 출토되었는데, 이 ‘부조(夫租)’는 낙랑군 소속의 부조현(夫租縣)으로서 곧 옥저성을 가리킨다. 즉 옥저 지역의 수장을 “葳(濊)君”으로 칭했던 자료로서, 예군 남려의 칭호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유의할 자료이다. 다만 ‘예(濊)’와 관련된 칭호는 『삼국지』 부여전에서도 “예왕지인(濊王之印)”, “예성(濊城)”이란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예군’이 동옥저라는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리적 상황을 보면 동해안 일대 세력이 고조선을 거치지 않고 한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경유하는 교통로 밖에 없다. 따라서 압록강 중상류 지역 세력집단의 적극적인 중간 역할 없이 동해안 일대의 세력이 한과 직접 교역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예군 남려 28만 구가 요동군으로 내투하는 데에는 압록강 중상류 지역 세력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견해가 좀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이후 설치되는 현도군의 군치 위치와 관련되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압록강 중상류 세력집단과 동해안 일대 세력집단이 함께 요동군으로 내속하게 되는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후한서』 권85 예전(濊傳)에 의하면, 예군 남려 등 세력은 고조선의 우거왕을 이반하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기』 권115 조선전에 의하면 본래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외신(外臣) 관계를 맺고(권오중, 1992), 주변 세력과 한 사이의 중계교역을 담당하면서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등 주변 소국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주 005
각주 005)
『사기(史記)』권115 조선전(朝鮮傳), “會孝惠高后時 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 以聞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 傷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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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거왕대에 이르러 고조선은 한의 유망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한 왕조에도 더이상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과 임둔 등 주변 세력들이 한과 교류하는 것도 막았다.주 006
각주 006)
『사기』권115 조선전,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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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조선을 중계자로 한과의 교역을 통해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던 주변 세력들의 입장에서는 독자적으로 한과의 교섭이 필요하였고, 그래서 예군 남려 등 세력이 우거왕에게 반기를 들면서 한의 요동군에 내속하여 직접적인 통교를 시도했던 것으로 이해한다.
한의 입장에서도 고조선의 태도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동방정책이 필요했다. 『사기』 권112 공손홍전에는 기원전 134~기원전 129년에 엄안(嚴安)이 올린 상서 중에 “남이(南夷)를 부르고 야랑(夜郞)을 조회시키며, 강(羌)과 북(僰)을 투항하게 하고, 예주(濊州)를 공략하여 성읍을 건설하고, 흉노(匈奴)에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농성(蘢城)을 불태우고자 합니다”주 007
각주 007)
『사기』권112 공손홍전(公孫弘傳), “今欲招南夷 朝夜郞 降羌僰 略濊州 建城邑 深入匈奴 燔其蘢城 議者美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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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내용이 있다. 즉 한이 동서남북 주변 여러 세력에 대해 새로운 대외정책을 펼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중 ‘예주(濊州)를 공략하여’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그 뒤 몇 년 지나지 않아 요동군에 내항한 남려를 “예군(濊君)”이라고 호칭하였다. 이 두 기사를 연관시켜 보면 기원전 2세기 중·후반 무렵에 한 왕조가 동방사회의 어떤 세력에 대하여 그 대표성을 가진 인물을 ‘예군(濊君, 薉君)’으로, 그 중심지를 ‘예주(濊州)’라고 일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엄안의 상서에서 보듯이 한 정부도 새로운 동방정책을 구상하고 있던 차였으며, 이때 예군 남려 등이 28만 구를 이끌고 내항해오자 한은 신속하게 이들을 대상으로 창해군의 설치를 결정하였던 것이다(이성제, 2011).
한편, 『한서』 권24 식화지(食貨志)4에는 한의 상인 “팽오(彭吳)가 예맥조선(穢貊朝鮮)을 개착하여 창해군을 두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무렵에 예맥 지역까지 처음으로 교역로가 개척되었고, 이를 토대로 창해군이 설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창해군의 설치를 이끌었던 상황은 예군 남려 28만 구가 요동군에 내속한 사실 및 팽오라는 상인이 한으로부터 예맥조선, 즉 예맥사회까지 이어지는 교역로를 개척한 사실이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과 직접 교역하려는 예맥사회의 요구, 그리고 위만조선을 통하지 않고 예맥사회 및 동해안 일대까지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한 정부의 정책, 양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여 창해군의 설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창해군의 설치 배경과 관련하여 양자의 이해관계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유사한 조건 아래에서 파촉(巴蜀)지역에 한의 건위군(犍爲郡)과 야랑현(夜郞縣)이 설치되었는데, 이 사례는 창해군의 설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건위군과 야랑현 개설과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겠지만, 창해군 설치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즉 당시 한 정부는 군현을 설치하고 그 대가로 군현 설치 지역세력에게 한의 물품을 제공하거나 교역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예군 남려 등 28만 구를 대상으로 창해군을 설치할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종록, 2018).
다음으로 창해군 설치와 관련된 몇 가지 논점에 대해 살펴보자.주 008
각주 008)
창해군 관련 연구사에 대해서는 박대재, 20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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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창해군의 위치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는데, 주로 창해군 이후에 설치된 현도군의 위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즉 동해안의 함경도로 보는 견해(白鳥庫吉, 1912), 압록강 중상류 유역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6), 혹은 요남(遼南)지구로 보는 견해(權五重, 2000)등이 제출되어 있다.
그런데 창해군의 위치를 비정함에 있어 고려해야 할 점은 창해군이 3년여 만에 재정 문제 등 교통로 개설의 어려움으로 인해 폐지되었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교통로가 개설되지 않은 지역에 창해군이 설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존 견해 중 요남지구 및 압록강 중상류와 독로강 지역 등에서는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대 명도전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이미 교통로가 개설되어 고조선 및 연(燕)과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김미경, 2002). 따라서 이들 두 지역을 제외하고 보면 동해안 일대가 남는다. ‘창해’라는 표현에서 바다와 관련된 지역이라는 점, 또 새로운 교통로 개설이 필요한 지역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동해안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 창해군 설치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위만조선은 한에 낙랑단궁(樂浪檀弓), 과하마, 바다표범가죽, 담비가죽, 표범가죽 등을 수출하였는데, 그중 바다표범가죽은 함경남도 덕원에서 산출되며, 과하마는 동예의 특산물이다. 이 점에서도 한의 요동군과 동해안 일대를 직접 연결하는 교통로가 아직 개설되어 있지 않아, 위만조선이 중계무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요동군에서 압록강 중상류 지역까지는 기존의 교통로가 개설되었다고 본다면, 이곳에서 동해안 일대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교통로 개척이 창해군 설치의 주된 목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창해군이라는 명칭에서 동으로 창해군을 설치함으로 사해(四海)를 통치하는 황제로서의 위상을 갖고자 한 한 무제의 천하관이 내포되어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김미경, 2002; 이성제, 2011). ‘창해(滄海)’라는 명칭에서 그런 측면을 추론할 수도 있겠지만, 창해군의 뒤를 잇는 현도군의 명칭에는 그런 이념적 요소가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더 실증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둘째, 창해군의 폐지 배경이다. 『한서』 권24 식화지에 의하면 창해군까지 교통로를 개설하기 위해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몇 년 지나지 않아 창해군을 폐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창해군을 폐지하게 된 이유가 단지 비용 문제뿐이었을까? 혹 교통로가 경유하고 있는 압록강 중상류 지역 세력집단이 한의 창해군 설치에 대해 반발하지는 않았을까? 직접적인 근거 자료는 없지만, 후일 창해군 뒤를 이어 설치된 현도군이 “이맥(夷貊)이 침략”하여 퇴축되었음을 고려하면, 마찬가지로 창해군을 혁파하게 되는 원인 중에 압록강 중상류 지역 정치세력의 동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하여 교통로 개설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단지 도로 개설 비용이라기보다는 이 지역 정치세력을 포섭, 회유하기 위한 경제적 비용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의 건위군과 야랑현 개설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한나라의 물품을 제공하거나 혹은 교역을 허용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도로 개설 비용뿐만 아니라 압록강 중상류 지역 세력의 요구에 따른 여러 형태의 경제적 부담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예군 남려 등의 요동군 내투에서부터 창해군의 설치 및 폐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 지역 정치세력의 움직임이 역동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한이 군사적 공세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이후에 이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현도군의 설치가 다른 군현 설치에 비해 1년 늦어진 이유도 창해군 치폐의 상황과 맞물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 창해군과 현도군의 설치 지역이 겹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예군 남려를 대표로 하는 28만 구 집단에 대한 검토에서 아직 해명해야 할 의문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먼저 28만 구에 압록강 중상류 지역 세력 집단과 동해안 일대 세력집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양자를 연결하는 교통로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창해군의 폐지 이유가 교통로 개설의 비용 문제라면 창해군이 폐지될 때까지도 압록강 중상류 세력집단과 동해안 일대의 세력집단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개설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이 교통로가 확보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동해안 일대 세력집단을 포괄하는 28만 구의 광범위한 지역의 연합이 가능했을까? 만약 이미 기존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다고 한다면, 교통로 개설의 어려움과 비용 문제로 창해군이 불과 3년여 만에 폐기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찾기 위해서 창해군 이후 다시 이 지역에 설치된 현도군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2) 현도군 설치 및 초기 중심지
현도군의 설치 및 변천과 관련된 기사는 『삼국지』 권30 동옥저조, 『후한서』 권85 고구려조, 동옥저조, 예조, 『한서』 권28 지리지 현도군조 등에 실려 있다.주 009
각주 009)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30 동이전30 동옥저, “漢 武帝 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후한서』권85 동이전75 동옥저, “武帝滅朝鮮 以沃沮地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 徙郡於高句驪西北 更以沃沮爲縣 屬樂浪東部都尉”; 『후한서』권85 동이전75 예,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玄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후한서』권85 동이전75 고구려,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한서』권28 지리지8하1,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 戶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上殷台 莽曰下殷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 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莽曰玄菟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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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기사를 종합하여 현도군의 설치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109년에 한이 고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이듬해에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3군을 설치하고, 다시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옥저전에 의하면 그때 현도군을 옥저성(沃沮城)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을 파하여 임둔군은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진번군은 낙랑군에 병합시켰다. 그리고 다시 뒤에 이맥(夷貊)에게 침략을 받게 되어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으며, 이때 옥저(沃沮)는 현(縣)으로 다시 삼아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시켰다.
이러한 현도군의 설치 및 변화 과정에서 처음 설치된 현도군을 통상 제1현도군, 이맥에게 침략을 받아 고구려 서북으로 옮긴 현도군을 제2현도군으로 부른다. 그 후 다시 현도군의 치소가 옮겨지게 되는데 이를 제3현도군이라고 부른다. 제2현도군, 제3현도군에 대해서는 3절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설치 당시의 현도군, 즉 제1현도군에 대해 살펴본다.
제1현도군의 설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논의점은 셋이다. 첫째는 왜 현도군이 4군 중 다른 군현보다 1년 늦게 설치되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현도군이 설치된 지역범위, 즉 현도군의 관할범위 및 현도군의 군치(중심지)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는 다른 세 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는 현도군의 군현 편성 문제이다.
한이 고조선을 침공하고 세운 4군 중에서 현도군이 다른 군들에 비해 1년 정도 늦게 설치된 이유나 배경을 알려주는 문헌자료는 없다. 다만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현도군이 창해군의 뒤를 이어 설치된 군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창해군의 설치 및 폐기와 관련된 상황이 현도군의 설치가 1년 늦어진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란 추정은 가능하다.
낙랑군 등 3군은 고조선과 그 복속 지역에 대한 군사적인 정복의 결과로 설치되었다면, 현도군은 이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과거 창해군을 설치하는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즉 한 정부에 의해 또다시 압록강 중상류 지역이나 동해안 일대 세력집단들에 대한 회유 과정이 있었고, 또 이 지역 세력집단 역시 한의 요구에 항거하지 않고 양자가 서로 타협한 결과 현도군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본래 이 지역 세력집단이 고조선에서 독립한 세력이었고, 군사적인 정복이 아니라 회유와 타협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현도군의 설치에 1년 정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김기흥, 1987). 그리고 이러한 설치 배경으로 인해 제1현도군의 관할 영역과 치소가 낙랑군 등 다른 군현들과 구분되는 이질적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둘째, 제1현도군의 관할 영역과 군치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 후기 고증학풍 실학자들 사이에 현도군에 대한 역사지리적 관심이 높았는데, 한진서(韓鎭書),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등은 제1현도군이 함경남도 함흥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일제 관학파 학자들은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를 취신하는 입장에서 조선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도군이 옥저를 주 대상으로 하는 동해안 일대에 설치되었다고 보았다(樋口隆次郞, 1911·1912; 白鳥庫吉, 1912; 池內宏, 1912; 稻葉岩吉, 1915; 瀨野馬熊, 1923·1924; 稻葉岩吉, 1928; 池內宏, 1941). 『후한서』와 『삼국지』 관련 기사에서 현도군이 옥저(성)에 설치되었다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가 가장 유력하였다.
그런데 그 뒤 이병도는 이를 비판하고 현도군 설치 당시의 영역을 요령성 흥경(興京)일대에서부터 압록강 유역으로 비정하면서, 제1현도군의 치소는 집안에 설치된 고구려현으로 보아야 하며, 옥저는 본래 임둔군에 속하였는데 임둔군이 폐지되면서 현도군에 통합되었다가, 이후 현도군이 고구려 서쪽으로 축출되자 옥저현이 낙랑군으로 이속된 것으로 파악하였다(이병도, 1930; 1976 재수록). 이후에는 이러한 이병도 견해가 한국 학계의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였다(金基興, 1987; 李賢惠, 1997, 여호규, 2005). 즉 『삼국지』, 『후한서』 동옥저전에 보이는 현도군이 옥저성에 설치되었다는 기사는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된 당시 임둔군 소속 영동 7현이 일시적으로 현도군에 합속되었던 시기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이해한다(이현혜, 2010; 여호규, 2005).
이 주장의 개요는 이렇다. 후일 낙랑 동부도위를 설치한 영동 7현은 동이(東暆), 불이(不而, 동부도위의 치소), 잠대(蠶台), 화려(華麗), 사두미(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인데, 영흥만 일대로 비정되며 지리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다. 영동 7현이 하나의 지역 단위를 이룬 사실은 ‘초원 4년(기원전 45년)낙랑군 현별 호구부’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윤용구, 2009). 그런데 본래 ‘부조(夫租)’로 불렸던 동옥저 지역은 고조선 멸망 직후에는 동일 지역권을 이루는 영흥만 일대의 다른 지역과 함께 임둔군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는데, 기원전 82년에 임둔군을 폐지하고 이 일대를 분할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의 관할로 재편할 때, 서북한 지역에 가까운 영흥 이남 지역은 낙랑군에 배속한 반면, 압록강 중상류에 가까운 함흥 지역에 위치한 동옥저는 현도군에 배속하였다고 파악한다. 즉 동옥저 지역이 제1현도군의 관할에 편입된 때는 기원전 82년 임둔군 폐지 이후라는 것이다.
한편, 『후한서』의 관련 기사는 후한서 편찬자가 『한서』 지리지의 고구려현 기사를 잘못 읽은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손영종, 1990; 기수연, 1998). 또한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는 현도군 재편 과정에 나타난 변화의 시차를 무시하고 기록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후한서』 예전의 “다시 구려로 옮겨 설치하였다(復徙居句驪)”라는 기사를 근거로 처음에는 고구려현이 현도군의 치소였으며, 그 뒤 일시적으로 옥저성이 현도군의 치소가 되었다가, 제2현도군 시점에 다시 고구려현으로 옮겨졌다고 보기도 한다(기수연, 2007). 하지만 분명하게 현도군이 옥저성에 설치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는 이 기사들을 부정할 사료적 근거는 아직 충분히 제시되고 있지 않다.
또한 현도군이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는 기사에서 고구려 지역이 현도군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현도군을 함흥 일대 동해안 지역에 한정하여 보는 견해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현도군의 지역적 범주를 압록강 유역과 동해안 지역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는 견해가 여러 기사들의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도군에 앞서서 예군 남려 28만 구 세력의 지역범위 및 창해군의 설치범위가 동해안 일대까지 포괄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현도군의 설치 초기에는 옥저 등 동해안 일대와 압록강 중상류 일대가 모두 그 관할대상에 포함되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현도군 설치 시 관할범위를 함흥 일대의 동해안과 압록강 중상류 지역 그리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공로(孔路)로 보는 견해가 현재 가장 유력하다. 다만 이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볼 때 낭림산맥 등으로 격절되어 있으며, 더욱 옥저성이 위치한 함흥을 포함한 영흥만 일대에는 이미 임둔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중 함흥 지역만 따로 분리해서 현도군의 소속으로 파악하는 점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현혜, 2010)도 타당하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은 아직 부족하다.
현도군의 관할범위에 대해서는 동일한 견해 사이에도 현도군의 중심지를 놓고 차이가 있다. 제1현도군의 치소를 집안의 고구려현으로 보는 견해(和田淸, 1951; 1955 재수록)와 옥저성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田中俊明, 1994; 김미경, 2002; 윤용구, 2008; 윤선태, 2010; 이성제, 2011; 이종록, 2018; 장병진, 2019; 이준성, 2019).
현도군의 중심지와 관련해서는 『삼국지』 및 『후한서』의 관련 기사 등 몇몇 논거가 있다. 하지만 이들 기사에 의해 옥저(성)을 현도군의 관할 범위에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이 기사만으로는 옥저성이 군치(郡治)인지 여부를 확정하기에는 문장 해석상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현도군 설치에 앞서 일어난 사건인 예군 남려 28만 구 세력의 중심지와 현도군의 군치를 일치시켜 이해하기도 한다. 한 군현의 편제가 어느 정도 기존 세력집단의 존재 양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높다. 하지만 예군 남려 세력의 중심지는 이 지역 정치세력의 존재 방식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고, 창해군이나 현도군 설치 시에 군현 운영의 중심지인 군치를 어디에 두느냐는 한의 정책과 관련된 문제이다. 따라서 현도군의 경우 양자를 동일하게 파악할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예군 남려로 대표되는 중심 세력의 근거지가 동해안 일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창해군이나 현도군의 군치는 한의 정책적 목표에 의해 옥저(성)에 둘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이 점에서 한의 동방 진출 및 군현 지배의 방향과 이 지역 예맥 세력의 존재 방식 사이에서 갈등이 초래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현도군의 군현 편성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현도군의 범주를 광역의 지배범위가 아니라 공로상의 지배범위로 파악한 이유는 현도군 소속 군현 수가 소수였을 가능성 때문이다. 현도군 설치 초기에 현이 몇 개 설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 이맥의 침공으로 현도군치를 고구려 서북으로 옮긴 제2현도군 시기 현의 수는 3개에 불과하다. 군치의 이동에 따라 다수의 현이 폐지되어 줄어들었다고 가정해도 잔존한 현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애초에 설치된 현의 밀도가 낙랑군 등 다른 군현과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군사적 정복지를 군현으로 편제한 다른 3군과는 달리 현도군은 예맥집단의 수장들과 한의 타협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현도군의 호구 수에 비해 현 수가 지나치게 적은 것은 군현 관할 아래 독립적인 고구려왕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김기흥, 1987). 이와 달리 고구려와 한의 타협설을 수용하면서도 당초부터 고구려 세력은 현도군 군현 지배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기원전 75년 이전 어느 시점까지 고구려는 현도군에 협조적이었기에 요동군에서 고구려 지역을 통과하여 동해안 옥저 지역까지 교통로가 연결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성제, 2011).
이와 관련하여 제1현도군 설치 시에 현 수가 어느 정도였을지에 대해 검토해보자. 이는 제2현도군 때 현의 수가 3개에 불과한 점, 그리고 제1현도군의 관할범위와 연관되어 논의되고 있다. 제1현도군의 현 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군현 설치 초기 다른 3군의 경우를 보면 임둔군과 진번군은 각각 15개 현이 있으며, 낙랑군도 11개 현으로 구성되었다.주 010
각주 010)
임둔군과 진번군의 속현 수는 『한서』 권6 무제기6 원봉(元封) 3년 기사에 보이며, 낙랑군의 속현수는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통합 25현에서 구 진번군 7현과 구 임둔군 7현을 제외한 11현이 설치 초기의 낙랑군 속현 수로 볼 수 있다(李丙燾, 1976).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臣瓚曰 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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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1현도군의 관할범위에 옥저현(옥저성)이 포함되고, 또 제2현도군 때의 3현을 합하면 최소 4개의 현 수는 확인된다. 그러면 4개 이외의 현은 설치되지 않았던 것일까?
후술하듯이 제2현도군 때의 고구려현, 서개마현(西蓋馬縣), 상은태현(上殷台縣)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어디에 비정하든 압록강과 강계 이북 지역으로, 이들 3개 현과 함흥 일대로 비정되는 옥저현과는 지리적으로 격절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와 관련되어 여러 현들이 분포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성제, 2011; 김미경, 2007).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추정일 뿐이다. 요동군에서 현도군을 경유하여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현까지 이어지는 긴 교통로를 운영하는 데 반드시 중간중간에 현이 설치되어야 했을까? 현의 설치 없이 교통로를 연결하면서 현도군을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사료상으로 전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교통로상의 현을 가상하기보다는, 왜 교통로 중간중간에 현을 설치하지 않고도 어떻게 교통로를 유지하면서 현도군 운영이 가능했는지를 추론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제2현도군 시절의 현도군치는 고구려현인데 지금의 신빈 일대로 비정된다. 제1현도군 시절의 고구려현 위치가 어디인지는 일단 접어두더라고 지금의 신빈 일대가 현도군의 가장 서쪽 지역이라고 본다면, 이 지역과 동해안 일대의 옥저현을 교통로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고구려 세력과 모종의 타협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앞서 창해군 설치 시에는 교통로 개설 비용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수년 만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도군을 설치할 때에는 이런 어려움 없이 현도군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는 것은 곧 창해군 설치 시에 봉착했던 어려움이 단지 지리적인 교통로 개설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더욱 현도군 역시 기원전 75년 시점에서 고구려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창해군을 폐지하게 된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3절에서 살펴보자.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직 설명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다. 창해군의 설치 시에는 위만조선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거쳐 동해안까지 교통로를 연결하여 창해군을 설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에는 낙랑군에서 기존부터 있었던 교통로를 통해 동해안 일대와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현도군을 설치하면서 압록강 중상류 지역과 동해안의 옥저성 일대를 연결하려는 정책을 취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 소홀한 부분이다.
물론 현도군의 설치 초기에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만이 대상이었고, 그 뒤 임둔군이 폐지되면서 옥저성 등 임둔군의 일부가 현도군에 편입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견해에서도 임둔군을 폐지하면서 기존의 교통로가 있는 낙랑군에 소속시키지 않고 왜 굳이 교통로 개설 여부가 불투명한 현도군에 소속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어느 견해이든 압록강 중상류 지역과 동해안 옥저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격절되어 있고, 종족 문화적으로도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지역을 하나의 군현으로 통합하여 운영하게 되는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 각주 002)
    『한서(漢書)』 권6 무제기(武帝紀)6,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 罷蒼海郡”; 『후한서(後漢書)』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75 예로(濊條), “元朔元年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 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한서』권24 식화지4하, “彭吳穿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 靡然發動 … 東置滄海郡人徒之費疑於南夷.” 바로가기
  • 각주 003)
    창해군에 대한 1980년대까지의 연구동향은 노태돈의 다음 연구에 잘 정리되어 있다. 노태돈, 1986, 「高句麗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東方學志』52;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편, 1987, 『고구려사연구』 재수록. 바로가기
  • 각주 004)
    예군 남려가 거느린 28만 구라는 인구 규모와 관련하여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 의하면 3세기 중반경에 고구려 3만 호, 동옥저 5,000호, 동예 2만 호를 합치면 대략 30만 구 전후라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즉 예군 남려 28만 구의 지역적 범위는 요동군 동쪽부터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거쳐 동해안 일대에 이르는 지역으로 봄이 합리적이다(여호규, 2014). 바로가기
  • 각주 005)
    『사기(史記)』권115 조선전(朝鮮傳), “會孝惠高后時 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 以聞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 傷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바로가기
  • 각주 006)
    『사기』권115 조선전,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바로가기
  • 각주 007)
    『사기』권112 공손홍전(公孫弘傳), “今欲招南夷 朝夜郞 降羌僰 略濊州 建城邑 深入匈奴 燔其蘢城 議者美之.” 바로가기
  • 각주 008)
    창해군 관련 연구사에 대해서는 박대재, 2017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9)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30 동이전30 동옥저, “漢 武帝 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후한서』권85 동이전75 동옥저, “武帝滅朝鮮 以沃沮地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 徙郡於高句驪西北 更以沃沮爲縣 屬樂浪東部都尉”; 『후한서』권85 동이전75 예,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玄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후한서』권85 동이전75 고구려,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한서』권28 지리지8하1,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 戶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上殷台 莽曰下殷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 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莽曰玄菟亭.” 바로가기
  • 각주 010)
    임둔군과 진번군의 속현 수는 『한서』 권6 무제기6 원봉(元封) 3년 기사에 보이며, 낙랑군의 속현수는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통합 25현에서 구 진번군 7현과 구 임둔군 7현을 제외한 11현이 설치 초기의 낙랑군 속현 수로 볼 수 있다(李丙燾, 1976).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臣瓚曰 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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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의 등장과 한의 현도군 설치 자료번호 : gt.d_0001_003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