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가형성기의 취락 입지
1. 국가형성기의 취락 입지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취락과 관련된 문헌사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삼국지』에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원택(原澤)이 없어서 사람들이 산과 골짜기를 따라서 거주한다고 전할 뿐이다. 따라서 초기 적석총의 분포 양상이나 몇몇 주거유적의 입지 등 고고자료를 통해서 대략적인 추이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국가형성기에 해당하는 취락유적은 다섯 곳 정도인데, 발굴 보고가 자세하지 않은 까닭에, 연대를 확정하기 어려운 통화(通化) 강연(江沿)유적군과 입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시중(時中) 노남리(魯南里)유적 등을 제외하면 환인(桓仁) 추수동(抽水洞)유적과 왕의구(王義溝)유적, 통화 만발발자(萬發撥子)유적 세 곳이다. 이들을 시기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환인 추수동유적이다. 이 유적은 중국 요령성 환인현 대전자촌 북쪽, 혼강의 지류인 삼도하자(三道河子)가 흐르는 골짜기의 산기슭에 위치한 취락유적으로, 수혈주거지 2기, 회갱(灰坑)5기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거지 남쪽에 동서 방향으로 축조된 석장(石墻)이 확인되었는데, 취락을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시설일 가능성이 높다(여호규, 2011). 이곳에서는 전국시대 명도전 280매와 진대(秦代) 반량전 등이 출토되어 유적의 상한 연대를 진·한 교체기로 추정하였다(武家昌·王俊輝, 2003). 단, 한대(漢代) 화폐가 출토되지 않는 점을 주목하여 연·진 교체기인 기원전 3세기 말경으로 조금 더 소급하기도 한다(여호규, 2011). 한편, 추수동유적과 밀접한 거리에 있는 대전자석관묘와 대전자서(大甸子西)고분군의 M6호묘에서 전국시기 유물들이 출토됨에 따라 양자가 공히 기원전 3세기경에 조영되었다고 볼 수 있고(梁振晶, 2005),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추수동유적과도 거리상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대전자서고분군의 북쪽에 위치한 대전자(大甸子)고분군에서도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다수 확인됨에 따라(梁志龍·李新全, 2009), 취락유적인 추수동유적 주변으로 동 시기에 조영된 다수의 적석총들이 분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는 통화 만발발자유적이다. 이 유적은 중국 길림성 통화시 남쪽 약 3km 거리의 약진촌 뒷산에 위치하는데, 혼강과 그 지류인 금창하가 만나는 합류 지점에 조성된 강안(江岸)충적대지 가운데 돌출되어 있는 구릉 정상부에 자리한다. 취락유적과 고분군이 복합된 유적으로, 주거지 22기와 회갱 160기, 고분 56기 등이 발굴되었다(中國國家文物局, 2001). 총 6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그 가운데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로 편년되는 4기 문화층에서 비로소 무기단적석총과 대석개적석총 등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확인된다(오강원, 2004). 특히, 이 문화층에서는 구릉 정상부를 방어하는 환호가 확인되어,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취락 가운데 환호취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적석총에 대한 보고가 자세하지 않아서, 4기 문화층을 고구려 초기로 확정하기는 아직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강현숙, 2015).
셋째는 환인 왕의구유적이다. 이 유적은 혼강 지류인 부이강과 혼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강안 충적대지에 돌출된 구릉 기슭에 위치한 주거유적으로, 수혈주거지 25기, 회갱 22기 등이 발굴되었다(樊聖英, 2008; 樊聖英, 2009). 전국시기 또는 한대 토기와 유사한 니질승문회도와 초기철기시대 이래 고구려 토기에서 보이는 특징인 수교이(竪橋耳)와 봉상이(棒狀耳)를 가진 심발 등이 출토됨으로써,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취락유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철기의 조합이 전국시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무순 연화보유적에서도 확인되므로, 왕의구유적 역시 비슷한 시기로 비정하기도 하지만(강현숙, 2015), 왕의구유적의 출토품들을 오녀산성 3기 문화층의 출토품들과 같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기원전 1세기로 비정하기도 한다(金旭東, 2011). 한편, 이 유적 부근에도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무기단적석총(M1호묘)와 기단적석총(M2호묘), 대석개적석총(산두자1호묘)등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분포한다(梁志龍·李新全, 2009). 특히, M1호묘에서는 왕의구주거유적 출토품과 거의 유사한 수교이심발이 출토되어 고분군과 주거유적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는데(樊聖英, 2009), 무기단적석총의 조영 시기를 고려하면 왕의구주거유적의 연대 역시 늦어도 기원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김종은, 2017).
요컨대,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취락유적을 통해서 당시 고구려 취락의 두 가지 조건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입지가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강줄기의 충적대지라는 사실이다. 이는 공교롭게도 고구려 사람들이 골짜기를 따라 거주한다는 『삼국지』 기록과 일치한다. 다른 하나는 취락 인근에 무기단적석총 등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군집한 고분군이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조건을 통해서 비록 현재는 취락유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강안의 충적대지에 위치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 고분군의 존재와 그 분포를 통해서 국가형성기 고구려 취락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