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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졸본과 흘승골성의 위치

3. 졸본과 흘승골성의 위치

고구려의 첫 번째 도성에 관해서는 두 가지 사료 계통이 전한다. 하나는 주몽(朱蒙)이 건국한 곳을 졸본(卒本)으로 전하는 사료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경에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하고 그곳을 첫 도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의 기록인 〈광개토왕비〉에서도 시조 추모가 홀본(忽本)서쪽 산 위에 도성을 세웠다고 전하는데, 이때의 추모, 홀본은 『삼국사기』의 주몽, 졸본과 같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도성을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전하는 사료이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주몽이 이른 곳은 흘승골성이고 그곳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주서(周書)』에서는 흘승골성을 흘두골성(紇斗骨城)으로 전하기도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주몽이 아니라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곳을 흘승골성(訖升骨城)으로 전하는 등 흘승골성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일찍이 김부식은 졸본과 흘승골성을 같은 곳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하였지만, 구체적인 위치까지 알 수는 없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평양을 제외한 고구려 도성의 위치는 모두 잊혀졌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래로 간헐적인 위치 비정이 시도되었지만, 추정 이상은 아니었다. 17세기 청(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조선 지식인들은 북방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은 경계의식의 일환으로 고구려 초기 도성의 위치 비정을 시도하였다. 단, 현지 접근의 어려움으로 인해 추정에 추정을 거듭할 뿐이었다.
고구려 초기 도성의 본격적인 위치 비정은 19세기 말 이래, 일본 연구자들이 중국 동북지방을 현지 조사하면서 시작되었고, 1980년대 이래 중국의 발굴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고구려 첫 도성이었던 졸본 및 흘승골성은 중국 요령성 환인으로 확정되었다. 다만, 여전히 두 가지 논쟁점이 남아 있다. 하나는 졸본과 흘승골성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환인 지역 내 평지 중심지의 위치이다. 논쟁점을 정리하기에 앞서 상대적으로 이견이 적은 흘승골성의 위치에 관해 우선 확인할 필요가 있다. 흘승골성은 일찍이 환인의 오녀산성주 001
각주 001)
오녀산성은 중국 요령성 환인현에 위치한 산성으로, 환인현 시가지의 동북쪽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산의 정상부에 자리하며, 남북 600m, 동서 110~200m의 평탄한 개활지와 샘까지 갖춘 요새에 축조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거쳐 고구려시기와 요·금대를 아우르는 다섯 시기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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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비정된 이래(白鳥庫吉, 1914), 지금까지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근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흘승골성의 ‘골(骨)’이 『삼국사기』 및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고구려의 신성처로 등장하는 골령(鶻嶺)의 ‘골(鶻)’과 통하므로, 흘승골성은 신성처인 골령에 세워진 산성일 가능성이다. 둘째,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시조 추모(주몽)의 건도지는 환인 지역 내의 산성이었다. 셋째, 뷰트(butte)지형의 전형인 오녀산성의 경관은 신성처로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김현숙 외, 2005), 고구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물질자료도 출토되었다. 특히, 고구려시기의 대형 건물지 3기와 주거지 12기 등이 확인되었는데, 이 가운데 1호 대형 건물지는 길이 13.8m, 너비 6~7.2m의 초석 건물지로서, 전한대의 반량전과 오수전, 왕망대의 대천오십전 등이 출토되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이로써 고구려의 건도지로 전하는 흘승골성은 환인의 오녀산성으로 비정된다.
그림1 오녀산성 유적 분포도(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한편, 흘승골성을 오녀산성이 아닌, 환인의 하고성자성주 002
각주 002)
하고성자성은 환인현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혼강 건너편에 있는 평지 토성으로, 성의 북쪽 1.5km 거리에 상고성자고분군이 위치하며, 오녀산성과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평면은 전체 둘레 1km 내외의 장방형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북벽 240m, 서벽 170m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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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비정하기도 했는데(魏存成, 1994; 耿鐵華, 2001), 흘승골성이 산성이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한대 토성이었던 하고성자성을 고구려가 도성으로 재활용했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지표 조사만으로 하고성자성을 한대 토성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였다. 1998년 발굴조사 결과 하고성자성의 남벽 아래 수혈에서 고구려 전기 토기가 출토됨으로써(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그 축조 연대가 고구려 건국 시기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으로 성벽 축조 시 만들어진 층이 아닌 다른 층(남벽 아래 수혈)이 남아 있다면, 양자 간의 시차는 장시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고성자성은 흘승골성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흘승골성을 오녀산성으로 비정한 후 다시 논쟁점으로 돌아오자. 먼저 졸본과 흘승골성의 관계에 관해서는 김부식과 마찬가지로 졸본과 흘승골성을 동일한 곳의 다른 이름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었다. 다만, 김부식이 추정에 그쳤다면, 여기서는 음운학을 동원하였다. 같은 지명을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에서 각각 졸본과 홀본으로 달리 표기하였듯이, 당시 고구려어 지명은 한자로 전환되어 전래되는 와중에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전제였다. 곧 졸본과 흘승골은 동일한 고구려어 지명이었는데, 전래 과정에서 한자어 표기만 달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렇더라도 구체적으로는 차이가 없지 않았는데, 흘승골/흘두골의 ‘골’이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말 ‘구루(溝漊)’라면, 흘승골/흘두골은 흘승/흘두에 위치했던 성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흘승/흘두는 홀본의 오기가 아니었을까’라는 추정(白鳥庫吉, 1914)과 흘승골을 승흘골(升紇骨)의 오기로 볼 수 있다면, ‘승흘골=卒忽(솔골)=졸본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라는 추정(李丙燾, 1959)이었다. 대체로 후자는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으로 평가받지만, 전자의 경우 졸본/홀본은 흘본(紇本)과 통할 수 있고, 또 전사하는 과정에서 ‘흘본(紇本)’이 ‘흘승(紇升)’으로 잘못 베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기도 한다(기경량, 2017b).
반면, 흘승골성과 졸본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흘승골성과 졸본의 관계에 따라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첫째, 광의의 졸본을 환인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범칭으로 보면서, 흘승골성과는 구별되는 평지의 중심지로서 협의의 졸본을 상정하는 경향이다. 산성으로서 흘승골성은 평상시의 거주처가 될 수 없다는 상식적인 전제 위에서 평지의 졸본을 고구려 왕의 상시 거주처로 본 것이다. 이는 다시 평지 졸본의 경관에 따라 평지성설과 평지거점설로 구분되는데, 두 번째 논쟁점인 환인 지역 내 평지 중심지 위치 문제를 정리하면서 후술하겠다. 둘째, 졸본은 서쪽의 흘승골성과 동쪽의 용산을 포함하는 성소(聖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기경량, 2017b)이다. 『삼국사기』 유리왕대에 수차례 등장하는 이궁의 존재는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위상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며, 따라서 평지에 정치적 위상이 높은 중심지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 셈이다. 평지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는 다음에서 설명할 평지거점설과 같지만, 평지거점조차도 도성으로서의 위상을 갖진 못했을 것으로 판단하는 점에서 다르다. 이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유일한 정궁이자 왕성은 흘승골성이었다. 단, 주몽이 비류수가에 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홀본과 산성을 구분했던 〈광개토왕비〉의 기록 등을 통해 드러나는 평지 중심지의 존재는 풀어야 할 숙제이다. 셋째, 흘승골성은 실제의 건도지가 아니었고, 신성지로서 골령이자 두 번째 도성으로서 국내 위나암성이었던 오녀산성을 후대에 각색하여 건도지로 재설정했다는 해석(노태돈, 2012; 권순홍, 2015; 李道學, 2015)이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인 국내 위나암성을 오녀산성으로 비정함에 따라 똑같이 오녀산성으로 비정되는 흘승골성을 실제의 건도지로 볼 수 없었던 자구책이었다. 다만 그렇더라도, 건도지가 흘승골성으로 각색된 시점과 과정에 대한 설명이 숙제로 남아 있다. 한편, 이 경우 비록 졸본과 흘승골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해석이 같지만, 졸본의 위치 비정은 나합성(노태돈, 2012; 李道學, 2015)주 003
각주 003)
나합성은 부이강과 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는 평지성으로, 오녀산성의 동쪽 약 15km 거리에 있다. 1960년대 환인댐의 건설로 인해 현재는 수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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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고려묘자촌(권순홍, 2019a)주 004
각주 004)
고려묘자촌은 오녀산성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혼강 연안에 위치한다. 그 남쪽으로 고려묘자고분군이 자리하는데, 1956년 조사 당시 24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었고, 무기단적석총과 기단적석총, 계단적석총까지 모두 확인되는 등 환인 지역의 중심 고분군 중 하나이다. 고분군의 남단에는 대형 적석총 80여 기가 집중 분포한다. 고려묘자촌과 고려묘자고분군 역시 수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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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다르다. 단, 나합성에서는 고구려시기의 물질자료가 전혀 출토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고구려시기의 고분군도 없다는 약점이 있고, 고려묘자촌은 국내 위나암으로 비정한 오녀산성과 너무 가깝다는 약점이 있다.
그림2 환인 지역 고구려 도성 관련 유적 분포도(구글어스, 1990년 12월)
이상에서 고구려 첫 도성인 졸본과 관련된 첫 번째 논쟁점, 졸본과 흘승골성의 관계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졸본과 흘승골성을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 둘째, 환인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광의의 졸본 안에 산성으로서 흘승골성과 그에 대응하는 평지 중심지로서 협의의 졸본을 포함시키는 견해, 셋째, 평지 중심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협의의 졸본마저도 건도지로서 흘승골성과 주몽의 장지로서 용산을 포괄하는 성소로 보는 견해, 넷째, 흘승골성은 후대에 각색된 건도지일 뿐 졸본은 평지 중심지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다음, 두 번째 논쟁점은 환인 지역 내 평지 중심지의 구체적인 위치 문제이다. 환인 지역의 유일한 왕성을 흘승골성으로 보면서 평지 중심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있지만(白鳥庫吉, 1914; 李丙燾, 1959; 기경량, 2017b), 다음의 두 사료를 고려하면 평지 중심지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에서 주몽이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과 〈광개토왕비〉에서 시조 추모가 ‘홀본 서쪽 산 위에 도성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전자는 주몽이 살았던 곳이 비류수가 즉 혼강가의 평지임을 보여주고, 후자는 서쪽 산성과 구분되는 평지 홀본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단, 앞서 언급했듯이, 평지 중심지를 인정하더라도 그 위치와 경관에 따라 견해는 둘로 구분된다.
첫째는 평지성설이다. 산성과 평지성이 하나의 도성을 이룬다는 고구려 고유의 도성 구조가 이미 이 시기에도 마련되었다고 보면서 환인 지역 내 평지성 유적 가운데 하나로 비정하는 견해이다. 구체적으로는 하고 성자성으로 보는 견해(魏存成, 1985; 車勇杰, 1993; 王綿厚, 2002; 민덕식, 2006; 朴淳發, 2012)와 나합성으로 보는 견해(田中俊明, 1994; 千田剛道, 2015)로 구분된다. 그러나 양자 공히 약점을 안고 있다.
먼저 평지 졸본을 하고성자성으로 볼 경우는 비록 흘승골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평지성 유적이라는 거리상의 강점이 있지만, 두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 방위상의 약점이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홀본/졸본의 서쪽 산 위에 도성이 있으므로, 오녀산성의 동쪽에 졸본이 위치해야 하는데, 하고성자성은 오녀산성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방위상 전혀 맞지 않는다. 둘째, 고고학적 약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발굴결과 하고성자성의 축조 연대는 고구려 건국 시기로부터 멀어졌으므로, 졸본의 평지도성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반면에 평지 졸본을 나합성으로 볼 경우는 오녀산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방위상의 강점은 있지만, 역시 두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 거리상의 약점이다. 직선거리만 약 17km에 달하고 교통로상으로는 약 35km 떨어져 있어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둘째, 고고학적 약점이다. 나합성에서는 축성 시기를 고구려대로 판단할 만한 어떠한 고고자료도 출토되지 않고 있다. 쐐기돌로 성벽을 쌓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 성일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채집된 기와편도 모두 중화민국시기의 것으로 편년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평지성설은 공히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림3 고려묘자촌과 고려묘자고분군(서울대학교박물관·동북아역사재단, 2008; 梁志龍, 2008)
둘째는 평지거점설이다. 산성과 평지성이 하나의 도성을 이루는 고구려 고유의 도성 구조는 아직 이 시기에 마련되지 않았고, 따라서 평지성 유적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문제 제기이자, 하고성자성과 나합성 중 양자택일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의 제기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던 『삼국사기』의 주몽이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과 〈광개토왕비〉의 시조 추모가 “홀본 서쪽 산 위에 도성을 세웠다”는 기록에 따르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나는 방위상으로 오녀산성의 동쪽이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지리상으로 비류수로 비정되는 혼강가에 위치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중심지는 인구가 밀집했을 것이므로, 고고학적으로 그 주변에 초기 적석총이 밀집한 고분군의 존재까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곳, 즉 졸본의 평지거점으로서 고려묘자촌을 주목한다(조법종, 2007; 양시은, 2013; 여호규, 2014b; 김현숙, 2017). 기왕에 이미 고려묘자촌을 주목하는 견해(梁志龍, 2008)가 없지 않았다. 단, 비록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원래는 고려묘자촌에도 평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점에서 평지거점설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편, 평지성이 아닌 평지거점의 존재에 동의하더라도, 고려묘자촌은 고구려 초기의 중심지였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아직 충분치 않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강현숙, 2015).
이상을 통해서 졸본에 관한 두 번째 논쟁점, 환인 지역 내 평지 중심지의 위치 문제를 정리하였다. 하고성자성설과 나합성설, 고려묘자촌설로 정리되는데, 평지성설로서 앞의 두 견해는 특히 고고학적으로 고구려 첫 도성의 평지 중심지로 볼 만한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약점이 있었다. 한편, 평지 중심지로서 졸본의 위치를 나합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평지성설(田中俊明, 1994; 千田剛道, 2015)만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흘승골성을 후대의 각색으로 해석하는 경향 가운데 졸본을 나합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노태돈, 1999; 노태돈, 2012; 李道學, 2015)가 있었다. 단, 이 경우 거리상의 약점은 상쇄되더라도, 고고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은 여전히 남는다. 평지 중심지로서 졸본의 위치를 고려묘자촌으로 비정하는 견해 역시 평지거점설만이 아니었다. 역시 앞서 언급한 대로, 흘승골성을 후대의 각색으로 해석하면서, 고려묘자촌을 졸본으로 비정하는 견해(권순홍, 2019a)이다. 평지거점으로서 고려묘자촌을 주목한 점에서 앞의 평지거점설과 같지만, 졸본에 도읍했던 당시에는 평지거점에 대응하는 산성이 없었다고 보는 점에서 다르다. 즉 당시 졸본의 범위에 오녀산성은 포함되지 않는 셈이다.

  • 각주 001)
    오녀산성은 중국 요령성 환인현에 위치한 산성으로, 환인현 시가지의 동북쪽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산의 정상부에 자리하며, 남북 600m, 동서 110~200m의 평탄한 개활지와 샘까지 갖춘 요새에 축조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거쳐 고구려시기와 요·금대를 아우르는 다섯 시기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하고성자성은 환인현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혼강 건너편에 있는 평지 토성으로, 성의 북쪽 1.5km 거리에 상고성자고분군이 위치하며, 오녀산성과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평면은 전체 둘레 1km 내외의 장방형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북벽 240m, 서벽 170m만 남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나합성은 부이강과 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는 평지성으로, 오녀산성의 동쪽 약 15km 거리에 있다. 1960년대 환인댐의 건설로 인해 현재는 수몰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고려묘자촌은 오녀산성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혼강 연안에 위치한다. 그 남쪽으로 고려묘자고분군이 자리하는데, 1956년 조사 당시 24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었고, 무기단적석총과 기단적석총, 계단적석총까지 모두 확인되는 등 환인 지역의 중심 고분군 중 하나이다. 고분군의 남단에는 대형 적석총 80여 기가 집중 분포한다. 고려묘자촌과 고려묘자고분군 역시 수몰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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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졸본과 흘승골성의 위치 자료번호 : gt.d_0001_003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