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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국내 위나암의 위치

4. 국내 위나암의 위치

『삼국사기』 유리왕 22년 기사의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는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은 국내 위나암이다. 국내 위나암의 위치에 관한 견해를 정리하기에 앞서, 유리왕대의 ‘국내’와 4세기 이후 ‘국내성’의 관계에 대해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내 역시 졸본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멸망 이후 잊혔고, 『삼국사기』 지리지의 찬자가 유리왕대의 국내와 고국원왕대 이후의 국내성을 동일시한 이후, 전근대 역사서에서는 양자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로써 유리왕 22년(3년)부터 장수왕 15년(427년)까지 고구려의 도성은 국내성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졸본과 마찬가지로 그 위치는 잊혀졌다. 비록 17세기 청의 등장에 따른 조선 지식인들의 북방 영토의식 고양과 당시 활발해진 중국 동북지역 관련 지리서들의 편찬으로 말미암아 ‘국내’에 대한 다양한 위치 비정이 시도되었지만, 사료비판과 현지조사가 여의치 않았던 까닭으로 오류가 적지 않았다.
이후 근대 일본인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함으로써, 유리왕대 ‘국내’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지조사를 통해 졸본을 중국 요령성의 환인으로, ‘국내성’을 중국 길림성의 집안으로 확정한 이후, 논의의 방향은 국내성과 환도성의 관계 및 위치 문제로 국한되었다(鳥居龍藏, 1914; 關野貞, 1914; 白鳥庫吉, 1914). 이 와중에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은 산상왕대로 고정되었다. 물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함으로써, 유리왕대 천도 기사는 인정되지 않았고, 『삼국지』에 나오는 3세기의 “갱작신국(更作新國)” 기사가 활용되었을 뿐이다.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일본 학계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론을 비판하면서 유리왕대의 ‘국내’를 인정했는데(李丙燾, 1959; 金哲埈, 1975; 魏存成, 1985), ‘국내’와 ‘국내성’은 여전히 동일시되었고, 그 위치는 〈광개토왕비〉가 위치하고 고구려 적석총이 밀집한 집안으로 비정되었다. 이에 따라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은 유리왕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해석이 오래도록 통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중국의 발굴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집안 지역 도성으로 비정되는 집안의 평지성과 산성자산성에서 3세기 이전의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음으로써,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에 대한 재해석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국내’와 ‘국내성’을 구분하는 견해(노태돈, 1999; 김희선, 2010; 권순홍, 2015; 李道學, 2015)가 등장하였다. 이때의 ‘국내’는 지명으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국이 소재하는 나’라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내(內)가 고구려어의 한자 표기인 나(那), 노(奴)와 음이 통하고, 천(川), 양(壤), 원(原)등과 뜻이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천도하기 전인 유리왕 21년, “달아난 교시(郊豕)를 국내에서 잡았다”는 기록과 “천도를 위해 왕이 직접 국내로 가서 지세를 봤다”는 기록 등을 통해 ‘국내’가 보통명사가 아니라 특정 지명으로서 고유명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임기환, 2018a). 다만, 국내를 보통명사로 볼 수 없다고 해서 유리왕대의 국내와 4세기 이후의 국내성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국내성으로 불리던 집안 평지성과 위나암성으로 비정되던 산성자산성을 200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발굴한 결과, 3세기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고 있다는 점(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12)은 양자 구분의 필요를 뒷받침하였다. 유리왕대 국내와 4세기 이후의 ‘국내성’은 고고학적으로 구분되었던 셈이다. 후술하겠지만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에 관한 재해석의 전제로서, 국내와 국내성의 구별이 인정됨에 따라 태조왕대 천도설과 신대왕대 천도설, 산상왕대 천도설이 제기될 수 있었다.
다시 유리왕대 국내 위나암의 위치 문제로 돌아오자. 본격적인 위치 비정은 졸본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연구자들이 시작했지만, 앞서 지적한 대로, 이들의 위치 비정은 유리왕대의 국내 위나암이 아니라, 산상왕대 이후의 국내성에 대한 것이었다. 유리왕대 국내 위나암의 위치에 대한 본격적인 비정은 근대 일본 역사학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론을 비판했던 한국과 중국 학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앞서 지적한 대로 국내와 국내성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중국 길림성 집안의 평지성주 005
각주 005)
집안의 평지성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시가지에 위치하는 평지성이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연 해자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노령산맥이 자연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 2003년 조사에 따르면, 동벽 554.7m, 서벽 702m, 남벽 751.5m, 북벽 730m로, 전체 둘레는 약 2,738m의 방형에 가까운 석성이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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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산성자산성주 006
각주 006)
산성자산성은 집안 평지성에서 북쪽으로 2.5k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는 포곡식 산성이다. 산세를 따라 성벽을 쌓았고, 계곡의 입구인 남쪽에 성문이 나 있다. 전체 둘레는 약 6,94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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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70년대 집안 평지성의 발굴결과, 고구려시기의 석축 성벽 아래에 한대 토성의 흔적이 있다고 보고됨으로써(吉林省考古硏究室·集安縣博物館, 1984), 유리왕대 집안 지역의 한 현도군을 몰아낸 후 그곳을 도성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유리왕대 천도설과 함께 한동안 통설로 자리 잡았다(李丙燾, 1959; 金哲埈, 1975; 李殿福, 1982; 魏存成, 1985; 車勇杰, 1993; 姜仙, 1995; 임기환, 2003; 琴京淑, 2003; 심광주, 2005). 단, 2000년대 집안 평지성의 재발굴결과, 1970년대 고고조사와 상반된 결과가 나왔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유리왕대 국내와 4세기 이후의 국내성을 구분하려는 시도 이후, 위나암성의 위치에 대한 재해석이 속출하였다. 현재는 크게 세 가지 견해로 나뉘어 있다.
첫째, 환인의 오녀산성설이다(노태돈, 2012; 권순홍, 2015; 李道學, 2015; 강진원, 2018). 기왕에 이미 국내 위나암을 오녀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鳥居龍藏, 1914)가 있었는데, ‘위나암’과 ‘오녀’ 간 발음의 유사성이 주요 근거였다. 이에 더하여 근래에는 두 가지 근거가 추가되었다. 하나는 사료에 나타나는 위나암의 지형적 특징이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11년 기사에 “한 요동태수가 침략해오자 왕이 위나암성에 들어가 수십 일간 지켰다”는 기록에 따르면, 위나암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위나암이라는 글자 그대로 바위산이어야 한다는 점과 산 밑에서 봤을 때 물이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당시 한인(漢人)들이 위나암성에 수천(水泉)이 없다고 여겨, 오래 포위하여 성 내부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썼으나, 성 내부에 지(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물이 있으니 단번에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물러났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 증거로, 오녀산성에서 1세기 당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오녀산성 발굴결과(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3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1세기가 정확히 국내 위나암시기에 부합했다. 다만, 오녀산성설의 경우 공히 오녀산성으로 비정되는 흘승골성과 위나암성 간의 관계가 숙제로 남는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흘승골성을 후대의 각색으로 풀이하기도 하지만(노태돈, 2012; 권순홍, 2015; 李道學, 2015), 이미 지적한 대로 각색된 시기와 과정에 대한 설명을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 한편, 위나암성을 공히 오녀산성으로 비정하면서도, 평지의 도성으로서 국내의 위치에 관해서는 비정이 조금씩 달랐다. 졸본을 나합성으로 비정하는 경우, 고려묘자촌을 국내로 비정하거나(李道學, 2015), 고려묘자촌과 하고성자성 등을 포함하는 지금의 환인 지역 전체를 국내의 범주로 보면서 그 중심지를 환인 시가지로 비정하기도 한다(노태돈, 2012). 반면, 졸본을 고려묘자촌으로 비정하는 경우, 상고성자고분군, 하고성자성 일대와 고려묘자촌은 지역적으로 구분된다고 보면서 전자를 포함하는 지금의 환인 시가지 일대를 국내로 비정한다(권순홍, 2019a).
둘째, 집안의 산성자산성설이다(강현숙, 2015). 이 경우 흘승골성을 오녀산성으로 비정한다면, 위나암성은 오녀산성일 수 없다는 전제 아래, 특히 3세기 이전의 묘제였던 무기단적석총이 밀집했을 뿐만 아니라, 초대형 적석총들의 위계화가 진행된 지역은 집안의 마선구 일대였으므로, 그 주변의 산성에서 위나암성을 찾아야 한다는 해석이다. 단, 이러한 해석은 환도성 이전 시기의 중심지가 마선구 일대일 가능성을 보여줄 순 있지만, 1세기 국내 위나암의 위치를 말해주진 않는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을 가늠하기 위한 중요한 해석이지만, 유리왕대 국내 위나암의 위치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후술하겠지만, 비록 사료상으로 유리왕 22년(3년)과 산상왕 13년(209년) 사이에 천도 기사가 없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왕실 교체 기사를 통해 태조왕-신대왕대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중심지 교체를 설명할 수 있다면(김종은, 2003; 권순홍, 2015; 임기환, 2018b), 1세기 말부터 진행된 마선구 일대의 적석총 조영은 달리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서 언급했듯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위나암성의 지형적 특징은 그 내부에서 하천이 흘러나오는 포곡식 산성으로 집안의 산성자산성과 전혀 다르다는 약점과 산성자산성설 역시 공히 산성자산성으로 비정되는 위나암성과 환도성의 관계를 설명해야 한다는 약점이 있다.
셋째, 집안의 패왕조산성설이다(김현숙, 2017). 기왕에 국내 위나암으로 패왕조산성을 주목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았다(孫進己, 1988). 흘승골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은 위나암성일 수 없고, 또한 앞서 제기된 산성자산성 역시 위나암성의 지리적 특징과는 달랐으므로, 제3의 산성을 물색한 결과였다. 패왕조산성은 바위산의 정상부에 축조된 산정식 산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기에 성 내부에 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사료상 위나암성의 지형적 조건을 만족할 뿐만 아니라, 흘승골성과도 저촉되지 않는다. 다만, 위나암성을 패왕조산성으로 비정할 경우 그 아래 평지 중심지로서 국내를 비정할 만한 곳이 없다는 약점이 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이 견해에서는 유리왕대 국내를 집안 지역으로 비정하면서, 위나암성을 도성 혹은 그 주변의 산성이 아니라 국경 지역의 산성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11년 기사에 따르면, 한 요동태수가 위나암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면서도 고구려 왕성에 관련된 기록이 없는 이유는 그곳이 왕성 주변이 아니라 국경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두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 『삼국사기』 유리왕 21년 기사에 따르면, 교시를 뒤쫓은 장생(掌牲)이 국내가 아닌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그곳을 도읍할 만한 장소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통해, 위나암성은 비록 도성 범위에 포함되지 않을지라도 국내 인근의 산성으로 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패왕조산성의 위치는 집안에서 직선거리로만 5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오히려 오녀산성과 더 가깝다. 따라서 국내를 집안으로 비정하면서 위나암을 패왕조산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둘째, 패왕조산성에서는 4세기 이전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의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물질자료가 출토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비교적 근래의 발굴결과에서도 4세기 이전의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패왕조산성의 축조를 유리왕대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상을 통해서 유리왕 22년에 천도한 국내 위나암의 위치에 관한 견해를 정리했다. 근대 일본인 연구자들은 국내 위나암 자체를 부정했지만, 해방 이후의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는 국내 위나암을 인정하면서 그 위치를 대체로 4세기 이후의 국내성과 동일시하여 집안으로 비정해 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래의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유리왕대의 국내와 4세기 이후의 국내성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이후 국내 위나암을 다시 비정하는 견해들이 속출하였다. 위나암성을 기준으로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었는데, 오녀산성설과 산성자산성설, 패왕조산성설이다. 쟁점은 각각의 산성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느냐에 있다. 첫째, 『삼국사기』 대무신왕 11년 기사에 나오는 위나암성의 지형적 특징을 갖추었는가. 둘째, 고고학적으로 1세기대 이래의 유물이 출토되는가. 셋째, 다른 도성, 예컨대 흘승골성 혹은 환도성과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아직 어느 견해도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고, 충분한 해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각주 005)
    집안의 평지성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시가지에 위치하는 평지성이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연 해자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노령산맥이 자연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 2003년 조사에 따르면, 동벽 554.7m, 서벽 702m, 남벽 751.5m, 북벽 730m로, 전체 둘레는 약 2,738m의 방형에 가까운 석성이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바로가기
  • 각주 006)
    산성자산성은 집안 평지성에서 북쪽으로 2.5k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는 포곡식 산성이다. 산세를 따라 성벽을 쌓았고, 계곡의 입구인 남쪽에 성문이 나 있다. 전체 둘레는 약 6,942m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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