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초기 도성의 성격과 경관
6. 초기 도성의 성격과 경관
이상을 통해서 고구려 초기 도성에 관한 세 가지 쟁점을 정리하였다. 주로 도성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문제였는데, 사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추 정에 추정을 거듭하던 와중에, 특히 2000년대 이래 중국의 발굴성과가 축 적됨에 따라 새로운 논의가 속출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발굴성과의 축적은 논의의 심화뿐만 아니라 주제의 확장으로도 이어졌다. 지리적 위치 및 천도 시점을 넘어, 도성의 공간구조와 경관, 이에 따른 도성의 성격 변화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이다. 고구려 전 시기에 걸쳐서 도성의 공간과 경관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는데, 그중 초기 도성과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다. 하나는 문헌사료를 통해서 도성 경관에 따른 성격의 차이를 도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자료를 통해서 고구려 초기 도성의 경관을 평지성이 아니라 평지거점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 건국 초기부터 멸망 시기까지 중심지의 성격 변화와 그에 따른 경관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제의(여호규, 2015; 기경량, 2017c; 권순홍, 2019b)가 있었다. 사료상에 나타나는 국읍(國邑)과 도(都)의 구분이나, 종묘·궁실·별도의 정무시설·뇌옥·창고·태학·불교사원·상설시장 등 도성 내 새로운 경관의 출현, 여기에 더하여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격자형 가로구획의 존재 등을 통해서 도성의 경관을 단계화하고, 나아가 경관의 차이와 표리관계인 중심지의 성격 차이에 따라서 용어도 구분하자는 제안이었다. 초기 도성과 관련하여, 『삼국지』에 따르면, 대군장 혹은 대군왕 없이 장수(長帥)나 거수(渠帥)가 읍락민을 통주(統主)했던 동옥저, 예 및 삼한의 중심지와, 국왕이 존재하며 다양한 지배기구가 확인되는 부여 및 고구려의 중심지를 국읍과 도로 구분하였다. 특히, 국읍의 장수나 거수들은 읍락에 섞여 살았던 반면, 도의 왕들은 배타적인 공간으로서 궁실을 확보하였다는 점과 도에는 종묘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여, 그 경관에 궁실과 종묘를 갖춘 도와 그렇지 못한 국읍을 구분하는 견해(여호규, 2015; 권순홍, 2019b)가 제기된 것이다. 비록 『삼국지』에서는 3세기 당시 여러 사회의 중심지들을 경관에 따라 구분한 것이지만, 이러한 공간의 차이를 시간의 차이로 치환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심지 역시 국읍의 단계를 거쳐 늦어도 3세기 중반에 도의 경관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졸본과 국내 위나암은 궁실 혹은 종묘가 아직 조영되지 않은 국읍 혹은 그 이전 읍락 단계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단, 이렇게 볼 경우에 도 이전, 즉 읍락 혹은 국읍 단계의 중심지를 ‘도성’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격자형 가로구획이 조영된 후대의 ‘도성’ 및 ‘왕경’과 구분하여 초기의 중심지를 ‘왕도’라고 부르자는 제안(기경량, 2017c)역시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충분한 답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 문제는 ‘도성이란 무엇인가’ 내지 ‘고대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이면서도 주제를 심화시킬 수 있는 문제로 치환되기도 한다.
다음 후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대로 평지거점설의 제기였다. 이른바 고구려의 도성제, 즉 산성과 평지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도성 구조는 일찍이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포착되었다(關野貞, 1911). 그의 견해는 제출된 직후부터 탁견으로 받아들여지며 통념으로 자리 잡았고(白鳥庫吉, 1914; 池內宏, 1951; 三品彰英, 1951; 武田幸男, 1989),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도 적극 수용되었다. 단, 그는 고구려만의 특징이 아니라, 가야와 신라 등 한국 고대사회가 두루 공유하는 특징으로 파악하였고, 또한 당시 일본 학계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했으므로, 산상왕대 이전의 졸본이나 국내 위나암 등은 염두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성과 평지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도성 구조는 고구려만의 특징으로 재생산되어, 졸본과 국내 위나암의 위치 비정을 위한 전제로서, 소급 적용되었다. 재생산의 배경에는 1970년대 집안 평지성의 발굴결과, 석축 성벽 아래에서 한대 토성으로 추정되는 토축 성벽이 있다는 분석과 함께 고구려가 한대 토성을 재활용했다는 해석이 있었다(吉林省考古硏究室·集安縣博物館, 1984). 이에 따라 환인에서도 집안과 마찬가지로 한대 토성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었고(魏存成, 1985), 이후 한중일 학계에서는 오래도록 산성과 평지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고구려 도성제가 초기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근래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동명왕대 이미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국 초기의 중심지 경관에 평지 성곽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문제 제기였다. 배경은 2000년대 이래의 발굴결과였다. 집안 평지성의 아래에서 한대의 토축 성벽이 있었다는 1970년대 이래의 통설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하고성자성의 축조 연대도 건국 초기에서 멀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고구려가 초기에 평지성 자체를 조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물론 앞서 누차 언급한 대로, 환인 지역에서 졸본의 사료적·고고학적 조건에 걸맞는 평지성 유적을 찾기 어려우므로, 그 대안으로서 평지거점을 거론하는 견해가 기왕에도 있었지만(조법종, 2007; 양시은, 2013; 여호규, 2014b; 김현숙, 2017), 초기 고구려의 사회 성격과 권력 집중도를 고려했을 때 그 중심지에 평지 성곽이 반드시 요구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기경량, 2017b; 강진원, 2018; 권순홍, 2019c)가 제기된 것이다.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 경관에서 평지 성곽을 배제한 것이다.
요컨대, 고구려 초기 도성에 관한 연구는 위치 비정과 천도 시점에 관한 새로운 논의 외에도, 중심지의 경관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크게 두 가지 경향이 있었는데, 하나는 문헌사료를 분석하여 궁실과 종묘의 조영을 기준으로 ‘국읍-도’라는 경관의 단계화를 상정하는 경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 성과를 반영하여 초기 도성의 경관에 평지 성곽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경향이었다. 바꿔 말해서 고구려 초기 도성 즉, 졸본과 국내 위나암의 경관에는 궁실 혹은 종묘 그리고 평지 성곽이 없었다고 본 셈이다. 후속 작업은 고구려 도성에 궁실과 종묘, 평지 성곽 등 새로운 경관이 채워지는 과정을 재구성하거나, 그에 따른 도성 및 지배 권력의 성격 변화를 해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