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좌·우보제에서 국상제로의 전환
4. 좌·우보제에서 국상제로의 전환
고구려 초기 최고위 관직은 본래 좌보와 우보였는데, 2세기 후반에 국상으로 개편되었다. 종래 많은 연구자가 좌·우보에서 국상으로의 개편을 통해 초기 정치체제를 이해하려 했다. 이를 통해 왕권 강화라는 전반적 추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초기 정치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각 관직의 성격을 상이하게 이해하였다.
전술했듯이 나부체제론자는 나부의 자치권을 중시했는데, 좌·우보에 대해서도 연맹체적 정치형태(노중국, 1979a), 계루부 출신 우보와 나부 출신 좌보의 공동 정치운영형태(김현숙, 1993; 1995), 계루부가 특정 나부와 연합하여 정치를 운영한 2나부 통치체제(임기환, 1995a; 2004) 등 나부를 전제로 운영한 관직으로 이해했다. 이에 비해 집권체제론자는 군신회의의 대표자(이종욱, 1979)나 왕권을 지지하는 기구(금경숙, 1995; 2004) 등으로 보아 왕권과의 관련을 강조했다.
국상에 대해서도 나부체제론자는 제가회의의 의장(노중국, 1979a; 윤성룡, 1997), 제가회의의 의장이면서 왕과 국가 중대사를 상의한 백관지상(김현숙, 1995), 제가세력을 대표하는 성격이 두드러진 존재(임기환, 1995a; 2004) 등으로 파악했다. 왕권이 전반적으로 강화되었지만, 국상은 제가회의 또는 제가세력의 정치 참여를 전제로 성립되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에 비해 집권체제론자는 왕권 수호에 앞장서는 백관지상(이종욱, 1979), 군신회의를 이끌면서 왕권 강화를 뒷받침한 관직(금경숙, 1995; 1999; 2004), 중국의 승상(丞相)에 비유되는 국정을 총괄한 수상(김광수, 1983a; 1991) 등으로 보아 왕권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다.
나부체제론자는 나부와 제가, 집권체제론자는 왕권을 키워드로 삼아 좌·우보와 국상의 성격을 고찰한 것이다. 나부의 자치권과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 가운데 특정 측면을 중심으로 초기 관직의 성격을 이해한 것이다. 그렇지만 제가회의에 대한 검토에서 보듯이 계루부 왕권과 나부의 역관계는 끊임없이 변모했고, 이로 인해 제가회의의 성격도 변화했다. 이는 최고위 관직인 좌·우보나 국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표 5와 표 6은 좌·우보와 국상 관련 기사를 정리한 것인데, 먼저 양자의 인적 구성이 크게 차이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좌·우보는 모두 6명 확인되는데, 관나부 미유와 환나부 어지류를 제외한 4명은 출신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인물은 어떤 형태로든 출신지를 표기하고 있고(김현숙, 1993), 태조왕대에는 4나부 출신 인물이 모두 등장한다. 그러므로 목도루를 비롯해 출신부를 기재하지 않은 좌·우보 4명은 계루부 출신으로 추정된다.주 063
이와 관련해 좌·우보의 전신인 대보(大輔)에 왕과 친밀한 인물이 임명된 사실이 주목된다. 고구려 대보의 사례로는 협보(陜父)가 유일한데, 시조 주몽(동명성왕)과 함께 부여에서 남하했다는 인물로 추정된다.주 064 좌·우보의 전신인 대보에는 왕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인물이 임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대보에서 분화된 좌·우보에도 처음에는 왕과 친밀한 계루부 출신 인물이 임명되었다고 추정되는데, 대무신왕과 태조왕대의 좌·우보가 출신부명을 관칭하지 않은 것은 이를 반영한다.
표5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좌·우보 관련 기사
| 순번 | 연대 | 출신부 | 관등 | 관직 | 인명 | 기사 내용 |
| a | 유리왕 22.12(3) | 대보 | 협보 | 협보(陜父)는 왕의 잦은 전렵(田獵)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파직되고, 한(韓)으로 감. | ||
| b | 대무신왕 8.2(25) | 우보 | 을두지 | 을두지(乙豆智)를 우보로 삼아 군국지사(軍國之事)를 맡김. | ||
| c | 대무신왕 10.1(27) | 좌보 우보 | 을두지 송옥구 | 을두지를 좌보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로 삼음. | ||
| d | 대무신왕 11.7(28) | 좌보 우보 | 을두지 송옥구 |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기 위한 대책회의에서 송옥구는 기습공격, 을두지는 지구전 주장. 지구전을 펴 한병(漢兵) 격퇴. | ||
| e | 태조왕 71.10(123) | 패자 | 좌보 | 목도루 |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삼아 수성(遂成)과 함께 정사(政事)에 참여케 함. | |
| f | 태조왕 71.10(123) | 우보 | 고복장 | 위와 같음. | ||
| g | 태조왕 80.7(132) | 패자 | 좌보 | 목도루 | 좌보 패자 목도루가 왕제 수성의 왕위 찬탈 음모를 눈치채고 병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남. | |
| h | 태조왕 90.9(142) | 우보 | 고복장 | 우보 고복장이 왕의 꿈을 해몽해 줌. | ||
| i | 태조왕 94.10(146) | 우보 | 고복장 | 고복장이 왕에게 수성의 왕위 찬탈 음모를 아뢰었지만, 왕은 도리어 수성에게 선위(禪位)함. | ||
| j | 차대왕 2.2(147) | 관나부 | 우태→ 패자 | 좌보 | 미유 | 관나 패자 미유(彌儒)를 좌보로 삼음. |
| k | 차대왕 2.3(147) | 우보 | 고복장 | 우보 고복장이 차대왕에게 주살됨. | ||
| l | 차대왕 2.7(147) | 패자 | 좌보 | 목도루 |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이유로 사직함. | |
| m | 차대왕 2.7(147) | 환나부 | 우태→ 대주부 | 좌보 | 어지류 | 환나 우태 어지류(菸支留)를 좌보로 삼고, 작(爵)을 더하여 대주부로 삼음. |
| n | 신대왕 1.10(165) | 환나부 | 대주부 | 좌보 | 어지류 | 차대왕이 명림답부(明臨荅夫)에 의해 시해된 뒤, 좌보 어지류가 군공들과 의논하여 신대왕을 옹립함. |
| o | 신대왕 2.1(166) | 연나부 | 조의→ 패자 | 국상 | 명림답부 | 명림답부를 국상에 임명하고, 좌·우보제를 국상제로 개편함. |
표6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국상 관련 기사
| 순번 | 연대 | 출신부 | 관등 | 관직 | 인명 | 기사 내용 |
| a | 신대왕 2.1(166) | 연나부 | 조의 ↓ 패자 | 국상 | 명림답부 | 명림답부(明臨荅夫)를 국상으로 삼고, 작(爵)을 더하여 패자로 삼음. 내외 병마를 맡도록 하고, 양맥(梁貊) 부락을 거느리게 함. 좌·우보를 고쳐 국상으로 삼는 것이 시작됨. |
| b | 신대왕 8.11(172) | 연나부 | 패자 | 국상 | 명림답부 | 좌원(坐原)에서 한병(漢兵) 격퇴,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받음. |
| c | 신대왕 15.9(179) | 연나부 | 패자 | 국상 | 명림답부 | 국상 답부 사망, 나이는 113세. 질산에 장사지내고 수묘호 20가를 둠. |
| d | 고국천왕 13.4(191) | 서압록곡 좌물촌 | 우태 | 중외대부 ↓ 국상 | 을파소 | 을파소(乙巴素)가 중외대부의 관직과 우태의 관작을 받았다가, 관직이 낮다고 여겨 사양하자, 왕이 그의 뜻을 알고 국상에 임명하고 정사를 맡김. |
| e | 산상왕 7.3(203) | 상동 | 우태 | 국상 | 을파소 | 왕이 후사와 관련된 꿈 이야기를 하자, 을파소가 천명의 불가측성을 아룀. |
| f | 산상왕 7.8(203) | 상동 | 우태 | 국상 | 을파소 | 국상 을파소 사망. 왕이 고우루(高優婁)를 국상으로 삼음. |
| g | 산상왕 7.8(203) | 계루부(?) | 국상 | 고우루 | 위와 같음. | |
| h | 동천왕 4.7(230) | 국상 | 고우루 | 국상 고우루 사망. 우태 명림어수(明臨於漱)를 국상으로 삼음. | ||
| i | 동천왕 4.7(230) | 연나부 | 우태 | 국상 | 명림어수 | 위와 같음. |
| j | 중천왕 3.2(250) | 연나부 | 우태 | 상 | 명림어수 | 왕이 상(相: 국상)인 명림어수에게 내외 병마사를 겸하여 맡도록 함. |
| k | 중천왕 7.4(254) | 연나부 | 우태 | 국상 | 명림어수 | 국상 명림어수 사망. 비류 패자 음우(陰友)를 국상으로 삼음. |
| l | 중천왕 7.4(254) | 비류나부 | 패자 | 국상 | 음우 | 위와 같음. |
| m | 서천왕 2.7(271) | 비류나부 | 패자 | 국상 | 음우 | 국상 음우 사망. 음우의 아들 상루(尙婁)를 구상으로 삼음. |
| n | 서천왕 2.7(271) | 비류나부(?) | 국상 | 상루 | 위와 같음. | |
| o | 서천왕 17.2(286) | 계루부(?) | 왕제 | 상 | 일우 소발 | 왕제 일우(逸友)와 소발(素勃) 등이 모반을 꾸미며 병을 시칭하며 온탕에 감. 왕이 그들을 불러 거짓으로 상(相)에 임명한다고 함. 도착하자 역사로 하여금 잡아서 주살케 함. |
| p | 봉상왕 3.9(294) | 비류나부(?) | 국상 | 상루 | 국상 상루 사망. 남부 대사자 창조리(倉助利)를 국상으로 삼고, 작을 대주부로 승진시킴. | |
| q | 봉상왕 3.9(294) | 남부 | 대사자 ↓ 대주부 | 국상 | 창조리 | 위와 같음. |
| r | 봉상왕 5.8(296) | 남부 | 대주부 | 국상 | 창조리 | 국상 창조리가 북부 대형 고노자를 왕에게 천거하여 모용외의 침입에 대비하게 함. |
| s | 봉상왕 9.9(300) | 남부 | 대주부 | 국상 | 창조리 | 국상 창조리가 군신들과 모의하여 왕을 폐위하고 왕제 돌고의 아들 을불을 맞아 옹립함. |
그런데 차대왕대에는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 등 나 부 출신 인물이 좌·우보에 임명되었다.주 065 이들은 각 나부의 최고위 관등인 패자보다 낮은 우태를 소지하고 있다가 좌·우보 임명과 함께 패자나 대주부로 승진했는데, 전술했듯이 각 나부의 대리인으로 중앙정계에서 나부체제 운영과 관련한 일상업무를 담당했다. 이처럼 나부체제 운영과 관련한 일상 업무를 담당한 나부 출신 인물이 좌·우보에 임명된 사실은 좌·우보의 성격과 관련하여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좌·우보를 개편하고 설치한 국상의 인적 구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표 6에서 보듯이 국상은 모두 7명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1~4대 국상은 조의나 우태에 있다가 국상 임명과 함께 상위 관등으로 승진한 데 비해, 5대 음우는 처음부터 최고 관등인 패자이고, 7대 창조리는 이들과 계통이 다른 사자계 관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출신부도 3대 고우루를 제외하면 1~5대는 모두 나부 출신이고, 7대는 방위부 출신이다. 국상의 인적 구성이 4대까지는 차대왕대의 좌·우보와 유사한 양상을 띠다가, 5대 이후 최고위 관등인 패자가 임명되고, 출신부도 방위부로 바뀌었다.
종래 좌·우보의 성격에 대해서는 연맹체적 정치형태를 반영한다는 나부체제론자의 견해와 군신회의의 대표자로서 국정 총괄자라는 집권체제론자의 견해가 대립되었다. 그렇지만 좌·우보가 처음에는 계루부 출신 인물이었다가 나부 출신 인물로 변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견해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초기의 좌·우보에 왕과 친밀한 계루부 출신 인물이 임명된 사실은 이들의 주요 임무가 왕을 보좌하는 것이었음을 반영한다. 초기의 좌·우보는 왕의 측근이라는 성격이 강했는데, 당시 정치체제의 운영방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전술했듯이 국가체제 성립 초기에는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고, 의결사항은 각 나부를 통해 집행했으며, 일상 업무는 각 나부의 대리인을 통해 처리했다. 아직 국가 전체 차원의 행정업무는 비교적 적었고, 실무를 총괄할 관직의 필요성도 적었다.
물론 좌·우보가 왕의 측근으로 국정을 총괄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표 5에서 보듯이 우보 을두지에게 군국지사(軍國之事)를 맡긴 것(b), 좌보 어지류가 차대왕 시해 이후 군공(群公)과 의논하여 신대왕을 옹립한 것(n) 등을 제외하면, 국정을 총괄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이 무렵 군국지사를 위임받은 인물로는 유리명왕의 태자 무휼이나 태조대왕의 동생 수성 등 왕족이 많다.주 066 군국지사의 관장을 좌·우보의 고유한 임무로 보기 힘든 것이다. 초창기의 좌·우보는 계루부 출신 왕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주로 왕의 측근이 기용된 것이다(노태돈, 1999; 조영광, 2016).
초창기 좌·우보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차대왕대에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를 좌·우보에 임명한 것은 중요한 변화로 파악된다. 물론 미유와 어지류는 차대왕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측근적 성격이 강하며, 논공행상적 성격도 있다. 그런데 당시의 왕위계승은 세대계승원리로 이루어졌는데, 수성은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등의 지원을 얻어 계루부 내에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왕위계승권을 확보했다. 계루부 왕실을 구성하는 소혈연집단과 각 나부가 왕위계승 및 국정운영을 둘러싸고 다양한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차대왕대 나부 출신 인물의 좌·우보 임명은 나부 세력의 본격적인 중앙정치 참여로 해석된다. 각 나부는 출신 인물을 좌·우보 등 중앙관직에 진출시켜 그 위상을 강화하고, 중앙관직에 임명된 인물은 왕권과의 관계 및 중앙정계에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나부에서의 세력 확대를 도모했을 것이다. 나부 출신 인물의 좌·우보 임명을 계기로 중앙정치가 본격적으로 계루부 왕실을 구성하는 여러 세력과 각 나부의 다양한 역관계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나부 출신 인물의 좌·우보 임명은 각 나부의 실무집행권이 점차 계루부 왕권으로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체제 성립 초기에는 각 나부를 통해 제가회의의 의결사항을 집행했으므로 일상 실무가 비교적 적었다. 그렇지만 전쟁·외교 등 국가 중대사뿐 아니라 일상 행정실무가 증대하면서 이를 총괄할 관직이 요청되었을 것이다. 이에 미유나 어지류 등 나부체제 운영상의 일상 행정실무를 관장한 나부의 대리인을 좌·우보에 임명하여 실무적 기능을 강화했다고 추정된다. 좌·우보가 왕의 측근이라는 성격을 탈피하여 점차 행정실무 총괄직으로 변모한 것이다(여호규, 2014).
신대왕대 좌·우보제에서 국상제로의 전환은 이러한 경향 속에서 이루어졌다. 국상의 성격을 재지적 기반이 강한 고조선의 ‘상(相)’과 연관시켜 이해하기도 하지만(김철준, 1964; 노중국, 1979a), 국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고조선의 상과 뚜렷이 구별된다. 초대 국상 명림답부는 고령의 나이에도 조의라는 낮은 관등을 소지하고 있었고, 2대 국상 을파소는 본래 관등도 없었다. 이로 보아 명림답부도 미유나 어지류처럼 나부의 대리인으로 추정되며, 국왕 근위업무에 종사했다고 여겨진다. 국상은 차대왕 시기부터 강화되던 좌·우보의 행정실무기능을 승계하면서 성립되었다고 파악된다.
물론 명림답부가 국상 임명과 동시에 병마권과 양맥부락에 대한 통령권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국정 총괄직이나 제가회의 의장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서천왕대에 왕제 달고(達賈)가 병마권과 양맥·숙신에 대한 통령권을 부여받은 데서 보듯이 병마권과 이종족 통령권을 국상의 고유업무라고 보기는 어렵다. 표 6의 j에서 보듯이 국상의 병마권 관할은 국상 업무 이외의 겸직이었다. 그러므로 좌·우보제에서 국상제으로의 전환은 나부체제 운영의 변화와 연관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술했듯이 국가 전체의 행정실무가 증대하자 좌·우보의 실무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했는데, 이러한 임시해결책은 곧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이에 중국 상제(相制)의 정무총괄기능을 본떠주 067 좌·우보제를 국상제로 개편하여 행정실무를 총괄하도록 했다고 추정된다. 국상의 ‘국(國)’은 국중대회의 ‘국’처럼 ‘국도’를 뜻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국상은 ‘국도(國都)’ 즉 계루부 왕권 차원에서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상(相)’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국상은 각 나부에서 집행하던 행정실무를 국가 전체 차원에서 총괄하던 ‘국의 상’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2대 국상 을파소는 국상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179년 명림답부가 사망한 다음 191년 을파소가 국상에 임명될 때까지 10여 년간 국상은 공석이었는데, 국상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못해 공석으로 두었다고 파악된다. 국상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못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국상이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것에 대한 나부의 반발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을파소가 국상에 임명되었다.
을파소는 농사지으며 자급하던 인물로 나부의 지배세력과 명확히 구별되는데, 동부 안류(晏留)가 천거했다는 점에서 방위부 출신 인물에 더 가까운 성격을 지녔다. 고국천왕은 처음에 을파소를 측근으로 삼아 국정 쇄신을 추진하려고 우태 관등을 수여하며 중외대부에 임명했다가, 을파소가 실질적 권한을 지닌 직책을 요구하자 10여 년간 공석이었던 국상에 임명했다. 『삼국사기』 찬자는 을파소의 국상 임명을 백관지상(百官之上)에 비유하기도 했지만,주 068 당시에는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 중대사를 의결했으므로 중국의 승상처럼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백관지상으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정사를 맡았다(知政事)’는 표현이나 진대법 실시에서 보듯이 을파소의 국상 임명을 계기로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기능이 전반적으로 강화되었다. 이로써 국상은 행정실무를 국가 차원에서 총괄하는 실질적인 ‘국의 상’이 되었다. 각 나부는 여전히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 중대사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했지만, 행정실무라는 측면에서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더 강하게 받았고, 행정실무의 집행권은 점차 계루부 왕권으로 집중되었다.주 069 나부의 지배세력이 주축이었을 조신국척(朝臣國戚)들이 을파소의 국상 임명에 강하게 반발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3세기 중반경에 제가회의가 상설회의기구로 변모하여 국가 중대사뿐 아니라 일상 행정실무를 처리하는 비중이 증대되었다. 또 구성원인 제가들이 점차 중앙귀족으로 전환됨에 따라 귀족회의로 변모했다. 표 6의 k에서 보듯이 5대 국상 음우는 종래의 국상과 달리 임명될 당시 패자라는 최고위 관등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3세기 중·후반에 진행된 나부체제의 해체와 밀접히 연관된다.
나부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제가회의가 상설적인 귀족회의로 변모하여 국가 중대사뿐 아니라 일상 행정실무까지 의결하게 되자, 국상에 최고위 관등을 소지한 인물을 임명하여 귀족회의 의장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한 것이다. 이로써 국상은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기능 외에 진(秦)·한(漢)의 승상처럼 점차 왕에 대한 간쟁권, 관리천거권 등을 행사하는 국정 총괄직으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7대 국상 창조리는 국상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표 6에서 보듯이 창조리는 역대 국상 가운데 처음으로 관리천거권을 행사하였을 뿐 아니라(r), 국왕에 대한 간쟁권을 행사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신변의 위협까지 받게 된다(s). 이에 창조리는 군신과 모의하여 왕을 폐위하고 미천왕을 옹립하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주 070
그런데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하고 미천왕을 옹립하는 과정을 보면, 중앙귀족의 대표자로서 귀족 전체의 의견을 수렴함과 더불어주 071 방위부 출신 인물을 동원하여 행정실무를 총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의 폐위 과정에서 의결권과 실무집행권을 총괄하여 행사한 것이다. 이는 3세기 말경 국상이 귀족회의의 의장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백관지상’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처럼 국상의 성격은 나부체제의 전개와 더불어 바뀌었고, 3세기 중반 이후 제가회의의 성격 변화와 더불어 귀족회의의 의장으로서 국정을 총괄한 것으로 파악된다(윤성룡, 1997; 여호규, 1998; 2014; 이정빈, 2006b).주 072
각주 072)

좌·우보와 국상 이외에 초기 관직으로 중외대부(中畏大夫)와 평자(評者)가 확인된다. 중외대부의 ‘중외(中畏)’는 후기의 중리소형(中裏小兄)·중리대형(中裏大兄)·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 등에 나오는 ‘중리’와 같은 의미로 왕궁 가운데 국왕이 거주하는 ‘내리(內裏)’를 지칭한다(武田幸男, 1978). 또 ‘대부(大夫)’는 중국의 선진(先秦)시기에는 경(卿)보다 아래의 관작이었는데, 진·한 이후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처럼 관부의 장관직으로 칭해지거나 태중대부(太中大夫)처럼 황제에 대한 간의(諫議)나 고문(顧問)을 담당하는 근시직으로 여겨졌다. 이로 보아 중외대부는 국왕의 측근에서 간의나 자문을 수행한 근시직으로 추정된다. 실제 중외대부에 임명된 인물은 차대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비류나부의 우태 양신(陽神), 고국천왕대의 척신인 연나부의 패자 어비류, 고국천왕이 국정 개혁을 위하여 등용한 을파소 등 모두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중외대부는 국왕 측근에서 근무하면서 왕권을 뒷받침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이종욱, 1982a; 임기환, 1996). 이에 국왕이 중외대부를 임명해 사자, 조의, 선인 등 가신을 중심으로 근시조직을 정비했다고 보기도 한다(이규호 2021). 이에 대해 중외대부의 직능을 진·한의 어사대부에 비기며 백관에 대한 규찰을 담당했다고 보기도 한다(손영종, 1990; 김광수, 1991). 또 중외대부가 국왕 측근의 관직이라는 성격을 내포했다고 보면서도 그 임무와 역할은 당시의 수상직인 국상과 큰 차이가 없는 하위직(이문기, 2003) 또는 국상 다음 가는 관직(이종욱, 1982a; 금경숙, 2004) 등으로 보기도 한다.
평자는 고국천왕 시기의 척신인 연나부 좌가려(左可慮)가 지낸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양서』 신라전의 ‘육탁평(六 評)’이 6부를 지칭하며, ‘평(評)’의 고대 일본어 훈인 ‘ごほり’가 우리말 ‘고을’을 뜻한다는 사실을 통해 ‘평’이 지역집단이나 행정구역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今西春秋, 1971; 노태돈, 1975). 실제 『수서(隋書)』 권81 고려전의 ‘內評外評五部褥薩’이라는 기사를 통해 고구려 후기에 전국을 내평(內評)과 외평(外評)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고구려 초기의 평자를 각 나부의 부장(部長)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83a). 한편 〈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쟁송(爭訟)의 평의(評議)를 담당한 쟁인(爭人)집단에 ‘평공(評公) 사미(斯弥)’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평자를 쟁송의 평의를 담당한 관직으로 볼 수도 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安鼎福)은 내평과 외평을 내외의 관료를 규찰한 헌관(憲官)으로 보았다.
평자는 고국천왕 시기의 척신인 연나부 좌가려(左可慮)가 지낸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양서』 신라전의 ‘육탁평(六 評)’이 6부를 지칭하며, ‘평(評)’의 고대 일본어 훈인 ‘ごほり’가 우리말 ‘고을’을 뜻한다는 사실을 통해 ‘평’이 지역집단이나 행정구역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今西春秋, 1971; 노태돈, 1975). 실제 『수서(隋書)』 권81 고려전의 ‘內評外評五部褥薩’이라는 기사를 통해 고구려 후기에 전국을 내평(內評)과 외평(外評)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고구려 초기의 평자를 각 나부의 부장(部長)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83a). 한편 〈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쟁송(爭訟)의 평의(評議)를 담당한 쟁인(爭人)집단에 ‘평공(評公) 사미(斯弥)’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평자를 쟁송의 평의를 담당한 관직으로 볼 수도 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安鼎福)은 내평과 외평을 내외의 관료를 규찰한 헌관(憲官)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제가회의와 좌·우보, 국상의 성격은 초기 정치체제인 나부체제의 전개와 더불어 여러 번 변모했다. 나부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계루부 왕실과 각 나부의 유력자로 구성된 제가회의가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는 핵심 정치기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각 나부의 대표들이 비교적 고르게 제가회의에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했다. 각 나부는 제가회의에 참여하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반영했고, 계루부 왕권도 각 나부의 이해관계를 수렴하여 국가 중대사를 결정함으로써 영도력을 관철할 수 있었다.
이처럼 나부체제 초기에는 제가회의에서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고, 의결사항을 각 나부를 통해 집행했기 때문에 국가 전체 차원의 행정실무가 비교적 적었다. 그리하여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관직은 설치되지 않았고, 왕의 측근인 좌보와 우보가 설치되어 국왕을 보좌했다. 그러다가 행정실무가 증대하자 일상 실무를 담당한 나부의 대리인을 좌·우보에 임명하여 실무적 기능을 강화했다. 그렇지만, 행정실무의 증가로 인해 이러한 임시 해결책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에 2세기 후반에 국가 전체의 행정실무를 총괄하기 위해 국상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계루부 왕권의 위상은 강화된 반면, 각 나부의 자치권은 상당한 통제를 받았다. 더욱이 3세기 중반에 제가회의가 상설 회의기구로 변모하고, 그 구성원이 중앙귀족으로 변질됨에 따라 제가회의의 성격도 귀족회의로 변모했다. 이에 최고위 관등을 소지한 인물이 국상에 임명되어 귀족회의 의장의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다. 국상이 국정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의 운영양상은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각 나부별로 행정실무를 처리하던 초기에는 제가회의가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였지만,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국상이 설치되고 행정실무 집행권이 계루부 왕권으로 집중되면서 제가회의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제가회의가 상설적인 귀족회의로 변모함에 따라 귀족회의가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고 행정실무를 집행하는 최고의 정치기구로 부상했고, 국상이 양자를 아우르는 국정 총괄직으로 전환되었다.
- 각주 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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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65)
- 각주 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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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69)
- 각주 070)
- 각주 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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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보와 국상 이외에 초기 관직으로 중외대부(中畏大夫)와 평자(評者)가 확인된다. 중외대부의 ‘중외(中畏)’는 후기의 중리소형(中裏小兄)·중리대형(中裏大兄)·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 등에 나오는 ‘중리’와 같은 의미로 왕궁 가운데 국왕이 거주하는 ‘내리(內裏)’를 지칭한다(武田幸男, 1978). 또 ‘대부(大夫)’는 중국의 선진(先秦)시기에는 경(卿)보다 아래의 관작이었는데, 진·한 이후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처럼 관부의 장관직으로 칭해지거나 태중대부(太中大夫)처럼 황제에 대한 간의(諫議)나 고문(顧問)을 담당하는 근시직으로 여겨졌다. 이로 보아 중외대부는 국왕의 측근에서 간의나 자문을 수행한 근시직으로 추정된다. 실제 중외대부에 임명된 인물은 차대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비류나부의 우태 양신(陽神), 고국천왕대의 척신인 연나부의 패자 어비류, 고국천왕이 국정 개혁을 위하여 등용한 을파소 등 모두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중외대부는 국왕 측근에서 근무하면서 왕권을 뒷받침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이종욱, 1982a; 임기환, 1996). 이에 국왕이 중외대부를 임명해 사자, 조의, 선인 등 가신을 중심으로 근시조직을 정비했다고 보기도 한다(이규호 2021). 이에 대해 중외대부의 직능을 진·한의 어사대부에 비기며 백관에 대한 규찰을 담당했다고 보기도 한다(손영종, 1990; 김광수, 1991). 또 중외대부가 국왕 측근의 관직이라는 성격을 내포했다고 보면서도 그 임무와 역할은 당시의 수상직인 국상과 큰 차이가 없는 하위직(이문기, 2003) 또는 국상 다음 가는 관직(이종욱, 1982a; 금경숙, 2004) 등으로 보기도 한다.
평자는 고국천왕 시기의 척신인 연나부 좌가려(左可慮)가 지낸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양서』 신라전의 ‘육탁평(六 評)’이 6부를 지칭하며, ‘평(評)’의 고대 일본어 훈인 ‘ごほり’가 우리말 ‘고을’을 뜻한다는 사실을 통해 ‘평’이 지역집단이나 행정구역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今西春秋, 1971; 노태돈, 1975). 실제 『수서(隋書)』 권81 고려전의 ‘內評外評五部褥薩’이라는 기사를 통해 고구려 후기에 전국을 내평(內評)과 외평(外評)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고구려 초기의 평자를 각 나부의 부장(部長)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83a). 한편 〈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쟁송(爭訟)의 평의(評議)를 담당한 쟁인(爭人)집단에 ‘평공(評公) 사미(斯弥)’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평자를 쟁송의 평의를 담당한 관직으로 볼 수도 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安鼎福)은 내평과 외평을 내외의 관료를 규찰한 헌관(憲官)으로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