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계층과 읍락의 모습
1. 사회계층과 읍락의 모습
1) 주요 계층
(1) 대가(大加)·소가(小加)
고구려 초기의 사회구조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하는 것은 『삼국지』 고구려전이다. 해당 기록에서는 당시의 지배층으로 대가, 소가와 주부, ‘대가’ 등이 언급된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흔적을 남긴 것은 대가와 소가이다.
대략 3세기 중·후반의 사정을 전한다고 여겨지는 『삼국지』 고구려전에 따르면 제천대회, 즉 동맹 시 공회에서 대가와 주부는 중국에서 쓰는 것과 비슷한 책(幘)을 쓰는 반면 소가는 고깔 모양의 절풍(折風)을 썼다. 아울러 대가는 휘하에 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을 둘 수 있었으나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이들은 중국의 경(卿)이나 대부(大夫)의 가신과 같았으며, 회동하여 자리할 때에는 왕가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줄에 함께할 수 없었다. 또 왕의 종족(宗族)으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古鄒加)로 불렸고, 감옥이 없었으므로 죄가 있으면 제가가 평의하여 형벌을 내렸다 한다.
이상을 보면 대가와 소가는 국정 운영의 중심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처결하는 주체로 나오는 제가는 이 두 계층을 아우른 표현이다. 『삼국지』 부여전에서 “제가가 따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니, 큰 것(大者)은 수천 가(家),주 002 작은 것(小者)은 수백 가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큰 것과 작은 것은 각기 대가와 소가를 가리킨다(여호규, 2014). 부여와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면모가 상당하였기에,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여길 수 있다.
더욱이 제가가 ‘모든 가(加)’란 의미이며,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가(加)로 칭해진 세력은 대가와 소가이므로, 제가는 대·소가 전반을 뜻한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3세기 중·후반의 정치적 지배자에 대한 통칭, 그것이 바로 대·소가라 하겠다. 북방 유목사회의 카간(可汗), 신라의 간(干)·금(今)·감(邯), 가야의 한기(旱岐) 등은 의미가 모두 통하며(三池賢一, 1970; 이병도, 1976), 이들은 본디 왕과 같은 수장에게 사용된 칭호로 이해된다(김철준, 1975). ‘가’의 기원을 고조선의 관제에서 찾는 논의도 제기되었는데(박대재, 2015), 어찌 되었든 대·소가의 뿌리는 재지 지배자와 맞닿아 있으리라 추정된다.
다만 대가와 소가를 제가로 통칭했다 해도, 원칙적으로 동등한 처우를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가는 자체적으로 관인(사자·조의·선인)을 둘 수 있었던 반면, 소가는 그러한 흔적이 없고, 공회 참석 시에도 차림새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별이 존재했으나, 그 기준은 명확히 알기 어렵다. 아마도 신분제사회였던 만큼 본래 계층의 성격에 차이가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가와 소가를 나부의 지배세력으로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당시 중앙집권화가 미비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가와 소가는 왕권과의 밀착도나 중앙정계에서의 정치적 지위보다는 각각의 공동체, 즉 나부에서의 세력기반에 따라 구별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노중국, 1979; 여호규, 2014). 따라서 그 차이는 나부체제 성립과 함께 나타났을 확률이 높다. 부여의 제가가 수천 가구를 거느린 ‘큰 가’와 수백 가구를 거느린 ‘작은 가’로 구분되었듯이, 고구려의 대·소가도 비슷한 양상이었던 것 같다(여호규, 2014).
이 가운데 대가는 상당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갖추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중앙관등조직의 하위에 자리한 사자·조의·선인과 대가가 둘 수 있었던 관인의 이름이 같으므로, 양자의 본원적인 성격이 동질적이며 재지수장으로서의 기반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은 군사적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고국천왕 12년(190년) 외척 좌가려(左可慮)는 자신의 소속 부인 연나부(掾那部) 세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고국천왕 사후 왕제(王弟) 발기(發歧)는 비류나부(沸流那部)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계승분쟁에 나섰다. 좌가려나 발기가 대가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 『후한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1세기 중엽 잠지락(蠶支落) 집단의 대가 대승(戴升)이 1만여 명을 이끌고 낙랑에 투항하였고,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발기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비류나부의 3만 명과 함께 요동의 공손강(公孫康)에게 갔다고 전한다. 이는 대가가 국가 공동체에서 집단 이탈이 가능할 만큼 원심력을 갖춘 세력이었음을 보여 준다(김현숙, 2005).
후한 가평(熹平) 연간(172~177년) 공손탁(公孫度)의 요청으로 부산(富山)의 도적 무리를 공격할 때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이 파견된 일도 간과할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이때 대가와 주부가 함께 행동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 군사활동을 주관한 것은 대가이며, 주부는 왕의 측근으로서 외교업무를 담당함과 아울러 군사권을 쥔 대가를 통제하였으리라 추정된다(김광수, 1982; 여호규, 2014). 그 면에서 대가를 나부의 중심세력, 즉 패자(沛者) 관등을 소지할 수 있었던 집단을 가리킨다거나(여호규, 2014), 나부의 전신인 나국(那國)이나 소(小)연맹국의 지배층이 편제되었다고도 이해하며(문창로, 1997; 임기환, 2004), 왕족을 비롯한 각 지배집단의 상층부로 파악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어떻게 보든 고구려 초기 단위정치체인 나부의 상층부에 자리하였다고 여기는 것은 같다.
요컨대 대가는 나부의 상위 지배층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고구려 초기 중앙집권화가 미비하였고 각 나부의 자치력이 상당하였다고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와 달리 이른 시기부터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고 상정한다면, 대가를 바라보는 견해도 달라질 여지가 있다. 예컨대 대가 휘하의 관인이 왕의 관인보다 격하되었고 경·대부의 가신에 비교되었으므로 대가는 이미 집권체제 내로 편제되었으며, ‘가’는 신분적 표시로서 관등으로 보자면 주부 정도의 위상을 갖는다고 여기거나(김광수, 1982), 대가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 등의 상위 관등 소지자를 가리키며, 경·대부에 비견된다는 점을 들어 지배체제 내에 편입되어 왕권에 의해 규제를 받는 지배계층으로서 유작자(有爵者)와 비슷하다고 보기도 한다(이준성, 2016).
한편 소가는 상대적으로 작은 세력집단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 제가의 경우 큰 자와 작은 자가 주관하는 가구의 차이가 10배에 달하는 것을 보면, 고구려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대가와 소가의 차이가 세력기반의 양적 측면에만 머물렀던 것 같지는 않다. 소가가 대가와 달리 자체적으로 관인을 두지 못한 것을 보면, 이는 지배권력 성장도에 질적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임기환, 2004). 그래서 곡(谷) 집단이나 읍락, 혹은 세력이 작은 나국의 수장층이 훗날 소가로 편제되었다고 여기기도 한다(문창로, 1997; 임기환, 2004).
그런데 나부 지배세력만 대·소가였던 것은 아니다. 『북사』 고려전에서는 3세기 중엽 관구검의 침공 시 고구려왕 위궁(位宮), 즉 동천왕이 제가와 함께 피난하였다고 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고구려의 독자 전승 기사에 근거하여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후자에서는 유유(紐由)나 유옥구(劉屋句)·밀우(密友) 등의 활동상을 비롯하여 더욱 면밀한 사정이 나오는데, 이들은 나부가 아니라 방위부(方位部) 출신 인물이다. 방위부는 도읍의 행정적 편제로서, 적어도 이 무렵 제가, 즉 대·소가에 방위부의 지배집단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방위부가 나부에 비하여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방위부 인물의 대·소가 구분은 중앙정계에서의 정치적 위상에 기초했을 가능성도 있다(여호규, 2014). 이때 밀우나 유옥구와 달리 유유는 식읍을 받지 못했기에 가 계층이 아니라거나(김광수, 1982), 호민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문창로, 1990), 관등이 추증된 점을 보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을뿐더러, 그 점을 제쳐 둔다 하여도 제가에 방위부 세력도 존재했음은 인정하여도 좋을 것이다.
대가와 소가 가운데 기록에 자주 언급된 쪽은 상위 지배층이라 할 전자이다. 따라서 초기의 사회구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대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가의 성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가가 기록상 왕명에 의하여 특정한 임무를 맡았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대무신왕이 비류부장의 탐학을 제지하였다는 일화가 나오므로 관료로서의 색채를 강조하기도 한다(홍승기, 1974). 다만 사료의 정리 과정에서 수정과 윤색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이들이 애초 왕권에 대하여 일정한 독자성을 지녔다고 보는 경우가 대개이다. 다시 말해 중앙집권화가 정비된 이후의 신료 혹은 귀족과 같은 선에서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여긴다. 이에 대가 휘하에 관인을 둘 수 있었음과 함께 왕과 별도로 군사조직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일이 주목되는데, 다른 측면에서도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대가 다수가 중앙관서조직의 외곽에 자리하였던 결과, 국정 주요 사항은 제가의 회의체에서 처리하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노태돈, 1999). 6세기 초 신라의 상황을 전하는 〈포항냉수리신라비〉(503년 건립)에서는 관련 업무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전사인(典事人) 7명 가운데 6명이 관등을 지니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관등 획득이 직무 수행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아울러 이 비문과 〈울진봉평리신라비〉(524년 건립)에서는 ‘간지(干支)’라 불린 인물들이 정치 운영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때의 간지는 관등이 아니라 유력세력가에게 주어진 호칭으로, 고구려의 ‘가(加)’와 통한다고 보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고구려 또한 대략적인 양상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상정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서는 관등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확인된다. 이들은 애초 관등을 갖지 않고 중앙의 정치 운영에 참여한 존재로 보인다. 즉 다수의 제가세력은 왕권이 편제한 중앙관등과 한 발짝 떨어져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지닌 독자적 세력기반에 기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임기환, 2004). 덧붙여 설령 관등이 있었다 하여도 훗날과 같이 뚜렷한 위계 서열 안에 포섭된 것 같지도 않다. 명림답부(明臨荅夫)가 그 예이다. 명립답부는 차대왕을 죽이고 신대왕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이러한 정변은 그가 속한 연나부가 움직였던 일로 이해된다. 따라서 명림답부는 연나부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그러함에도 차대왕 살해 당시 그는 조의라는 하위 관등에 머물렀다.
제가, 특히 대가는 강고한 지역적 세력기반을 가진 채, 왕권이 주관하는 중앙관등에 편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왕궁에서 수시로 이루어진 정치행위에 이들이 참여하기는 쉽지 않았기에 제가회의에서 국정 주요 부분이 처리되었던 셈이다(노중국, 1979; 노태돈, 1999; 여호규, 2014). 이미 언급한 것처럼 죄인을 처결할 때 제가가 평의하였던 것이 그 예라 하겠으며, 제천대회 시 공회에 제가가 참석하였던 것도 단순히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 결정과 합의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터이다(강진원, 2021). 그와는 달리 제가회의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축소하여 이해하기도 하나, 이는 이른 시기에 집권체제가 수립되었다고 본 데 기인한다(김광수, 1982; 이종욱, 1982a; 금경숙, 1994).
요컨대 다수의 연구에서는 대가가 정치적인 영역에서 상당한 독자성을 지녔다고 여기는데, 이는 당시 정치체제, 즉 나부체제와 맞물린다. 나부체제 아래에서는 중앙집권화가 궤도에 오르지 못하거나 왕권 행사에 제약이 뒤따른 결과, 왕실을 제외한 여타 지배집단의 세력기반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 하여도 왕권이 어느 정도의 구심력을 발휘하였으므로, 대가는 이상에서 살펴본 측면 외에 다른 면모도 지녔으리라 생각된다.
그 하나가 바로 대가 휘하의 관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왕과 함께 대가도 같은 이름의 관등을 둘 수 있었으나, 그 명단을 왕에게 알려야 했을 뿐 아니라, 공회에서 왕의 사자·조의·선인과 대가의 그들은 같은 줄에 설 수 없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왕권은 나부 내부의 일을 어느 정도 통제·간섭했으리라 여겨진다(임기환, 2004).
이러한 면모를 제가회의에서 찾기도 한다. 즉 제가회의에 참여하는 제가 가운데 왕이 내린 관등을 가진 존재도 있었으며, 그에 따라 회의에서의 순차가 정해졌을 터인 만큼 근본적으로 왕의 권위 아래 귀속된 존재였다고 파악한 것이다(노태돈, 1999).
이상을 보건대 나부체제 아래에서 제가, 특히 대가의 정치권력은 상당하였으며,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그 정도가 왕권을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나오듯 왕실인 계루부의 대가는 모두 고추가라는 존호를 칭할 수 있었으나, 연노부(소노부)나 절노부는 특정 인물에게만 허용된 것을 통해서도 그 점을 엿볼 수 있다. 왕권이 일정한 구심력을 행사하는 이상, 제가는 그 아래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2) 주부(主簿)
주부는 『삼국지』 등에서 고구려의 관제를 서술할 때 나오는 관등의 하나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대가와 비견되는 존재로 나타나기에 일정한 계층적 성격을 지녔다고 이해된다.
주부는 본디 중국에서 유래한 직명(職名)으로, 한대에는 중앙이나 지방의 실무직인 연사(掾史) 가운데 수석관리로 문서를 관장하고 인신(印信), 즉 도장이나 관인을 감수(監守)하였다. 이에 주부가 현도군 시기의 속리(屬吏) 직임을 변용한 것이라 보기도 하는데(노중국, 1979; 권오중, 1992), 그 연장선에서 문서행정과 왕명출납을 관장하던 관등으로 관직적 성격이 강했으며, 대체로 왕권을 뒷받침했다고 이해한다(김철준, 1975; 노중국, 1979; 이종욱, 1982; 노태돈, 1999; 금경숙, 2004; 임기환, 2004). 앞서 대가 우거와 함께 활동한 주부 연인이 왕권에 협조하여 독자적 세력기반을 지녔던 대가의 군사활동을 통제하였다고 이해한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이처럼 왕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던 주부 세력은 대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상을 가졌던 것 같다. 군사활동 시 대가와 병렬되어 나타날 뿐 아니라, 제천대회 때 행해진 공회에서도 대가와 동등한 옷차림새를 하였기 때문이다(노중국, 1979; 여호규, 2014). 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집권력이 강화된 데 따른 결과이다(여호규, 2014). 다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가와 구별하여 언급한 점은 주부의 본질적인 성격이 대가와 달랐음을 보여 준다. 대가는 이전의 나국과 같은 독자적 세력집단의 수장층과 관련되었다. 반면 주부는 그 관명(官名)이 행정업무와 연계되었기에 왕에 직속된 세력으로서 대가가 아닌 인물군이 편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노태돈, 1999).
요컨대 주부는 왕권에 부응하는 관료적 성격이 강하였다. 즉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녔다기보다는 왕권을 매개로 대가에 버금가는 반열에 올라선 것이므로 대가와 비슷한 수준의 인적 자산을 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노태돈, 1999). 덧붙여 주부가 일종의 계층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제가만큼 세대를 이어가며 공고한 신분적 속성을 지녔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훗날 고구려 관제에서 대가나 소가에서 유래한 관명을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주부는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주부 등으로 분화되기도 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3) 대가(大家)
『삼국지』 고구려전에 따르면 ‘대가’가 농사를 짓지 않아 앉아서 먹기만 하는 이들, 즉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명이나 된다고 전한다. 또 『태평어람』 사이부(四夷部) 고구려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대가’가 생산 활동을 하지 않아 하호가 부세(賦稅)를 대니 노객과 같다고 하였다. 이 ‘대가’의 경우 식읍제가 실시되었다는 전제 아래 노동하지 않고 조세에 근거하여 생활한 자들, 즉 식읍주로 보기도 한다(이인재, 2006). 어떻게 보든 ‘대가’가 당시 사회 상층부를 이루었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대가’의 실체에 관한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대가(이옥, 1984), 대·소가(김광수, 1982), 혹은 대가를 비롯한 그들의 친족과 사자·조의·선인 등(노태돈, 1999)으로 본 것인데, ‘대가’의 주된 인적 구성을 대가나 제가로 이해하였다.
다른 하나는 ‘대가’를 농사짓지 않고 살아간 가구 가운데 규모가 큰 경우로 간주하여 부여의 호민과 비슷한 맥락으로 파악한 것이다(문창로, 1990; 여호규, 2014). 호민은 본디 중국 한대에 부유한 상층민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는데, 그들은 지방행정의 재정적 조력자로서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문창로, 1990). 한국 고대 호민의 경우 제가와 동일시하기도 하나(김철준, 1975), 양자는 구별하는 편(김삼수, 1965; 武田幸男, 1967; 홍승기, 1974)이 일반적이다. 이에 중국과 마찬가지로 재력을 갖춘 민으로 보거나(노중국, 1988; 이인재, 2006), 제가와 연결된 재지세력으로 여기기도 하며(홍승기, 1974), 그 유형을 제가세력과 부유한 상층민으로 양분하기도 한다(문창로, 1990). 어떻게 보든 대가 혹은 제가를 넘어서는 인적 범위를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이 글에서 주목한 것은 ‘대가’의 규모이다.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의 호수(戶數)를 3만이라 하였는데, 1호를 5~6명으로 본다면 1만여 명은 당시 인구의 5% 이상이므로, 이들 모두를 정치적 지배자(가)로 상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문창로, 1990; 여호규, 2014). 즉 ‘대가’란 나부 지배세력이나 신흥 중앙귀족 등 정치권력을 주도하던 집단 외에 부여의 호민과 같은 경제적 상층민을 포함하는데, 대·소가 이외에 이들 부유층도 피지배층인 하호를 경제적으로 통제하였으며, 오히려 지배층의 다수를 점한 것은 후자라고 보았다(여호규, 2014).
다만 고구려의 ‘대가’에 부여의 호민과 같은 이들이 상당하더라도, 양자를 완전히 같은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호민의 경우 ‘민(民)’이 붙는 이상 인민 중 부유한 계층을 가리킴에 비해(김삼수, 1965; 武田幸男, 1967; 홍승기, 1974), ‘대가’에는 대·소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차이점은 다른 데서도 드러난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삼국지』 고구려전에 따르면 ‘대가’는 원거리의 하호에게서 식량을 공급받아 생활하였다. 따라서 부여의 호민이 하호와 같은 읍락에 거주한 것과 달리, 고구려 ‘대가’ 세력 상당수는 도읍에 거주하며 하호를 경제적으로 지배했다고 여긴다(여호규, 2014).
한편 ‘대가’ 가운데 부여의 호민에 상응하는 상층민의 경우, 제가세력이 중앙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자신들의 읍락에서 친밀한 관계가 있었던 인물을 실질적 지배자로 두면서 출현하였으며, 일부는 재지세력으로 남아 가(加) 계층의 가신으로 종사하였던 반면, 다른 일부는 중앙에 진출하여 대가 휘하의 사자·조의·선인으로 변모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하며(문창로, 1990), 소가를 호민과 같은 계층으로도 보았다(문창로, 1997).
(4) 하호(下戶)
『삼국지』 부여전의 경우, 백납본(百衲本)·전본(殿本)을 비롯한 대개의 판본에서는 부여의 읍락에 호민이 있으며 하호라 불리는 이들은 노복의 처지였다고 한다. 읍락 구성원이 ‘호민-하호-노비’의 계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武田幸男, 1967; 홍승기, 1974; 朴燦奎, 2003; 나유정, 2018). 반면 급고각본(汲古閣本)에서는 이 기술에 대하여 ‘名下戶’를 ‘民下戶’라 했기에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다. 즉 읍락에 호민·민이 있었고 하호는 노복의 처지였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김삼수, 1965; 이인재, 2006). 그렇게 본다면 읍락에는 ‘호민-민-하호-노비’의 서열이 존재하게 된다. 다만 오늘날에는 읍락에 호민이 있었고 민은 하호로 노복의 처지였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우세하다(홍승기, 1974; 김철준, 1975; 이현혜, 1984; 문창로, 1990; 노태돈, 1999; 전덕재, 2006). 따라서 판본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호민-하호-노비’로 읍락이 구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큰 이견은 없다.
『삼국지』 동이전 찬자는 여러 곳에서 유사한 내용이 나올 때 먼저 언급된 쪽에 이를 기술하고, 그 뒤에는 관련 사안을 생략하거나 간략히 기술하였다(전해종, 1980). 고구려와 부여의 풍속에 비슷한 점이 많았으므로, 애초 고구려의 읍락 역시 부여와 확연히 다르진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고구려에도 호민과 유사한 부유층이 존재했을 텐데(나유정, 2018), 그 점은 앞서 ‘대가’를 다루며 언급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피지배층 다수를 점한 하호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하호는 『삼국지』 동이전 곳곳에 나타나며, 특히 고구려와 이웃한 부여와 동예에 관한 기술에서도 나오는데 읍락의 민인(民人)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기백, 1967; 홍승기, 1974; 김철준, 1975; 이경식, 1989). 그런데 하호는 본디 중국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한대에는 경제적 상황이 열악했던 소작인 등을 일컬었다. 『삼국지』 동이전 찬자가 만주 및 한반도의 피지배층에게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들의 처지가 중국의 하호와 비견될 정도로 빈한하게 다가왔거나(武田幸男, 1967; 노중국, 1979; 노태돈, 1999; 여호규, 2014), ‘대가’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모습이 지대를 내는 소작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라 생각된다(나유정, 2018).
하호는 여러 지역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소속 공동체에 따라 성격이 달랐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하호의 상위에 존재하는 계층을 언급함에 부여는 제가나 호민, 동예는 후(侯)·읍군(邑君)·삼로(三老) 등의 거수(渠帥) 계층, 고구려는 ‘대가’라 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호에 대응되는 집단이 각기 달랐으므로, 고구려의 하호를 단순한 읍락민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여호규, 2014).
동예 사회는 읍락 공동체적 요소가 상당히 남아 있고, 거수는 공동체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지녔다. 부여 사회는 동예 사회가 진전된 모습이며, 호민의 경우 읍락의 거수였다고 이해하기도 하나(武田幸男, 1967; 노태돈, 1999), 거수 아래에 자리했다고 보기도 한다(홍승기, 1974). 그런데 이 무렵 고구려 사회의 ‘대가’ 가운데에는 도읍 일대에 거주하는 이들도 존재하였다(여호규, 2014). 고구려의 경우 하호와 ‘대가’의 관계는 읍락의 범위를 넘어서 맺어지기도 했으므로, 공동체적 면모가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다만 지역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하호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피지배층을 일컫는 일반적 용어로 하호가 선택된 점에 주목하여, 사회별로 하호의 성격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며, 왕이 아닌 특정 상위 계층에게 통제되고 조세를 바치던 민을 가리킨다고 보았다(나유정, 2018).
하호 아래에는 노비와 같은 천인 계층도 존재했을 텐데, 구체적인 생활상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열악한 처지에 놓였으리라 짐작된다.
2) 읍락의 상황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 초기 읍락의 하호는 ‘대가’ 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맺었다. 그 실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삼국지』 동옥저전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 동옥저는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로, 고구려에서는 대인(大人)을 두어 사자(使者)로 삼아 함께 다스리게 했고,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하게 했으며, 여러 물품을 원거리에서 이동케 하고, 미인을 종이나 첩으로 삼는 등 동옥저인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이 기록에서 대가가 동옥저의 조세를 관장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대인과 사자의 실체에 관해서는 견해가 나뉜다. 고구려에서 옥저의 대인, 즉 재지 수장층을 사자로 삼아 간접적인 집단지배방식을 행했다고 보기도 하고(武田幸男, 1967; 문창로, 1990; 김기흥, 1991; 하일식, 1991; 김현숙, 2005; 여호규, 2014), 고구려의 대인을 옥저에 파견하여 사자(使者)와 사상(使相)이란 관직을 주어 다스리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日野開三郞, 1988), 옥저의 대인을 사자로 삼되 상(相)이 통치케 했다고 여기기도 한다(서의식, 1990; 김미경, 1996; 이인재, 2006). 현재는 대개 동옥저의 대인을 사자로 삼아 토착사회 내부를 관장케 하였다고 보는 설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때의 대인은 호민에 상응하는 계층으로서 대가 휘하에 둔 사자·조의·선인에 비견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문창로, 1990).
다만 어떻게 보든 대가가 동옥저 읍락에서 조세를 징수하는 등 경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하호가 원거리에서 물품을 이송하여 좌식자, 즉 ‘대가’에게 공급한다고 한 것은 이를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러한 양상은 압록강 중류 유역의 원(原)고구려 지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산골짜기에 주거하였다 하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 ‘곡(谷)’ 혹은 ‘천(川)’이 붙은 지명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 곡(천) 집단의 성격은 읍락과 통한다고 추정된다(문창로, 1997; 이준성, 2020).
그렇다면 대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복속지역에 경제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까. 그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초기의 군사활동 면모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왕 20년(72년)과 22년(74년) 관나부와 환나부의 패자를 보내 각기 조나와 주나를 병합하였다. 이 사건은 기록상 왕이 주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나부 지배세력이 왕권의 통제 아래 각기 군사력을 동원하여 정복한 사건으로 이해한다(이종욱, 1982b; 금경숙, 1994; 임기환, 2004). 이처럼 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가는 조세 수취 권한을 획득했을 것이며, 동옥저 읍락은 그 한 사례로 여긴다(김현숙, 2005; 여호규, 2014).주 003
물론 이러한 정복을 왕이 직접 주도할 때도 있었을 것이며, 왕실과 나부 세력이 함께 출전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복속지역에 대한 수취도 그에 발맞추어 별도로 행해졌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삼국지』 동옥저전을 통하여 그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즉 이 기록에서 대가가 조세를 통괄하는 지역은 나부세력이 관장하는 곳으로 식읍과 성격이 유사하며, 대인을 통하여 관리한 것은 왕권의 지배방식이라 본 것이다(김현숙, 2005). 이미 살펴본 것처럼 관련 문구의 해석을 두고 견해가 엇갈리지만, 당시는 중앙집권화가 미비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우므로 각 읍락의 지배 주체가 일원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비슷한 사례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변세력을 아우를 때 성읍 또는 군현으로 삼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북옥저·행인국·동옥저 등이 성읍, 개마국이 군현에 해당한다. 성읍은 재지 질서를 인정하거나 부분적으로 재편하여 속민(屬民)이나 집단적 예민(隸民)으로 삼아 조세 수취를 통하여 간접지배한 것으로 이해하고(금경숙, 2004; 임기환, 2004; 김현숙, 2005), 군현은 왕의 직할령이나 계루부 내로 직접 편제된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4). 성읍이 된 사례에 동옥저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타당성이 있다.
원고구려 지역 읍락의 양상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모본왕을 시해한 모본인(慕本人) 두로(杜魯)의 일화를 통하여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모본왕이 묻힌 모본원은 왕실 사유지였으므로(조인성, 1980), 그곳 출신인 두로가 죽음의 위협에 떨었던 것은 지배층이 주관하던 읍락의 공동체 구성원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보여 준다(이인재, 2006). 아울러 고국천왕 때 좌가려 등의 외척에게 자녀와 전택(田宅)을 빼앗긴 이들이 하호란 견해(홍승기, 1974)를 수긍한다면, 세력가의 읍락민에 대한 경제적 침탈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으리라 추정된다.
요컨대 고구려 초기 읍락은 대·소가와 재지 유력자를 비롯한 ‘대가’의 경제적 지배를 받았다. 하호와 이들 사이에 일종의 상하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구조는 조세 수취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꽤 광범위한 측면에서 통용되었던 것 같다. 『삼국지』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에 외침이 있을 때 제가가 몸소 싸우고 하호는 식량을 운송하여 그들을 먹인다고 하였다. 제가가 병력 및 노동력 동원과 관련된 권한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는데,주 004 이때 호민이 실질적 책임자로서 활동했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문창로, 1990). 고구려 초기의 양상도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고 이해된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왕권이 재지 읍락에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국가 공동체의 호수(戶數)가 기재되어 있으므로 주민 개개인에 대한 파악은 이루어졌을 텐데, 아마도 재천대회 때 각 지역집단의 인구와 경제적 현황이 취합되었으리라 여긴다(나유정, 2018).
3) 사회적 변화상
고구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방면에서 변화가 촉진되었다. 이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체제의 변모, 즉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화 움직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고 이해된다.
먼저 대가를 비롯한 제가는 왕권 아래의 관료조직으로 편입되어 갔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대무신왕 때 문제를 일으킨 비류부장, 즉 비류나부의 대가는 별다른 관등이 기재되지 않았으나, 고국천왕 때의 연나부 대가 세력은 패자와 같은 관등이나 중외대부·평자 등의 관직을 지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앙관료체계 내로 흡수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임기환, 2004). 이처럼 지배집단이 중앙귀족으로 변모하게 된 결과, 제가회의 또한 상설화된 귀족회의로 변모하였다고 생각된다(이정빈, 2006b; 여호규, 2014).
다음으로 읍락의 경우 애초 정치적으로 대·소가의 지배를 받을 때도 적지 않았으나, 중앙집권화가 진전됨에 따라 나부의 세력기반이 약해져 하호는 제가보다는 ‘대가’, 즉 읍락의 부유층과 경제적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가 늘어났다고 여긴다(여호규, 2014). 기존의 나부체제가 이완되면서 제가, 특히 대가의 왕권에 대한 독립성이 옅어졌고, 그 연장선에서 이들의 읍락에 대한 영향력 역시 줄어든 셈이다.
주목할 점은 ‘대가’ 또한 자신들의 근거지에 머물며 권한을 행사한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삼국지』 부여전과 고구려전에 보이듯, 부여의 호민이 하호와 같은 읍락에 거주했던 것과 달리, ‘대가’는 원거리의 하호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았다. 고구려의 ‘대가’는 부여의 호민과 달리 도읍에 거주하며 하호를 경제적으로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여호규, 2014).
이러한 변화는 지배세력의 주요 수취대상이 귀금속과 같은 동산(動産)에서 토지와 노동력으로 변한 것과 연관된다. 종래 나부의 지배집단은 동산적인 부를 축적하여 읍락민을 지배하였기에 재지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2세기 말 이후 농업생산력이 늘어나 토지가 주요 경제기반이 되면서 ‘대가’는 토지를 매개로 하호와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재지에서 유리하여 도읍으로 집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세기 말 이후 도읍에 거주하는 지배세력이 점차 증가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는 방위부의 비중 강화 및 중앙귀족의 형성을 초래했으리라 여겨진다(여호규, 2014). 이 무렵 우태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좌·우보나 국상 및 중외대부 등 상위 관직을 역임했던 사례를 통하여 대가가 고위 관등을 독점했을 것이란 견해(임기환, 2004)가 제기되었는데, 이는 대가가 중앙의 관등을 필수적으로 지니지 않았던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러한 흐름은 지배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농업생산력 증대로 인하여 공동체적 질서가 약해졌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에 따라 읍락민의 처지 또한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었던 것 같다. 미천왕이 즉위하기 전 유랑생활 도중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에게 고용살이를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같은 민이라 하여도 음모로 대표되는 자급농민과 을불(乙弗)로 대표되는 용작농민이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홍승기, 1974). 이때 음모를 호민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문창로, 1990), 어찌 되었든 민이 분화되었다고 본 것은 같다. 아울러 이 두 계층 사이에 진대법으로 관곡(官穀)을 빌려 쓰고 환납하던 즉 소량의 토지를 소유한 이들도 존재했으리라 여긴다(홍승기, 1974). 간과하면 안 될 점은 이러한 격차가 고정불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을불이 음모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소금장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일반 민의 사회적 처지도 변동 가능성이 있었다(홍승기, 1974).
요컨대 시일이 지남에 따라 기존의 재지 읍락사회는 동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실시되었던 것이 바로 진대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2세기 말 실시된 이 조치는 당시 고구려가 처한 사회적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각 나부를 구성하는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도 약해졌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민은 공동체의 보호를 받기 어려워졌다. 이에 왕권으로서는 그들이 지배집단의 예속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진대법이라는 빈민구제책을 시행한 것이다(김기흥, 1991). 이에 대하여 그전까지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공민(公民) 관념이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진대법은 공민을 새롭게 조성하고자 실시되었다고 여기기도 한다(여호규, 2014). 다만 이러한 조치가 제도적으로 유지되었다 해도 실질적 운영에는 어려움이 뒤따랐으리라 추정하는 설(정동준, 2020)도 제기되었다. 당시 사회상에 대해서는 더욱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 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