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정복활동과 진출범위
1. 초기 정복활동과 진출범위
1) 북옥저 지역으로의 진출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과 못이 없어 산골짜기를 따라 살면서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애써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하다”라고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고구려의 존립과 발전 과정에서 외부와의 전쟁과 노획물 획득은 필수불가결한 생산활동의 하나였다. 압록강 중류 유역에 성립되어 있던 정치세력의 연맹체로 출발한 고구려는 계루부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면서 주변의 토착정치세력들을 부로 편제하는 한편, 그 외곽지역에 대한 정복활동도 활발히 수행했다. 초기 고구려의 대외진출은 정복활동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삶의 터전 확보와 부족한 물산 획득에 있었다(김현숙, 2005).
압록강 중류 유역을 벗어난 외부로의 진출은 건국 시조인 동명왕대부터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정복활동은 태조왕대부터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가장 먼저 진출한 곳은 북옥저(北沃沮)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혼춘(琿春)이 중심지였던 북옥저 지역은 양질의 철제와 목재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북으로 읍루(挹婁)와 부여, 남으로 남옥저(南沃沮)와 접하고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으로 가는 교통로는 고구려 성립 이전, 창해군(滄海郡) 설치 시기에 이미 개척되었다. 고구려는 동명왕대에 압록강을 따라 올라가는 고대 교통로를 따라 백두산에 이르러 그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한 후,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고 4년 뒤에 부위염(扶尉猒)을 보내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부분적으로 재편하였다. 하지만 이때 북옥저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대무신왕대에 매구곡인(買溝谷人) 상수(尙須) 등이 투항해옴으로써 이곳으로의 진출을 완성했다. 매구곡은 치구루(置溝婁)와 같은 곳이며 혼춘에 비정되고 있는 책성(柵城)이다(박진석, 1985).
북옥저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지배는 태조왕대부터 이루어졌다. 태조왕대에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지역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국왕이 수차례 이곳으로 순수(巡狩)를 갔고, 장기 체류하기도 했으므로 왕이 일정 기간 머물면서 지역 통치를 살필 수 있도록 행궁도 설립되었을 것이다(김현숙, 1996). 산상왕대에는 투항해온 평주(平州) 출신 하요(夏瑤) 등 1,000여 호의 한인(漢人)을 이곳에 집단적으로 안치했다. 한인의 사민은 발달된 농업기술을 가진 한인들을 이식함으로써 이 지역의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지역 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이루어졌다(여호규, 1995).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244년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 비류수(沸流水), 즉 혼강 유역에서 1차전을 벌였는데, 이때 고구려가 2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방어전을 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위군이 양맥(梁貊)의 거주지였던 태자하 유역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다시 고구려 수도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막아내는 데 실패함으로써 도성이 함락되었다(여호규, 2007a). 전투에서 패배한 동천왕은 옥저 방면으로 도망갔다. 다음 해인 245년에 왕기(王頎)를 보내 고구려군을 쫓게 하니 동천왕은 남옥저를 거쳐 북옥저까지 쫓겨 갔고 마침내 숙신 땅으로 피신하였다. 위군은 ‘숙신남계(肅愼南界)’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회군하였다.
이후 동천왕도 곧 환궁하여 전사자와 공훈자에게 포상을 하는 등 사후 처리를 한 다음 다시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동천왕은 북옥저에서 남은 군대를 모으고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구상을 마친 후 환궁했다. 당시 북옥저는 고구려의 중요한 세력기반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었다. 동명왕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지속적으로 지역을 집중 관리한 결과였다. 북옥저를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정복해 강도 높게 지배했던 것은 이 지역의 경제적, 군사적 중요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2) 동옥저 지역으로의 진출
고구려가 다음으로 진출을 기도한 곳은 북옥저의 남쪽에 있는 남옥저, 즉 동옥저 지역이었다. 고구려는 서변과 북변 두 방향에서 동옥저를 압박해 들어갔다.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동옥저가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었다고 나온다. 이때의 개마대산을 실학자인 이익, 안정복, 정약용 등은 백두산이라 보았는데, 오늘날 북한과 중국의 학자들이 상당수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와 달리 유형원과 김정호, 그리고 이병도는 개마대산을 낭림산맥으로 보았다. 동옥저의 중심지가 함흥 지역이었으므로 그 동쪽에 있었다면 백두산보다는 개마고원 또는 낭림산맥일 가능성이 더 크다. 고구려는 개마국(蓋馬國)과 구다국(句茶國)을 먼저 병합하여 동옥저의 서쪽 방면에 전진기지를 마련했다.
또 다른 전진기지는 개마국과 구다국을 발판으로 삼아 획득한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32년) 4월조에 항복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담긴 설화 속의 낙랑국은 호동왕자가 옥저로 놀러갔다가 그 왕인 최리를 만났다고 하므로 한의 낙랑군은 아니었다.
당시는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철폐하고 영동지역의 정치세력들을 후국(侯國)으로 삼아 기미통치(羈縻統治)를 하던 때였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도 그런 소국 가운데 하나였다. 낙랑국 자체가 곧 동옥저였다고 본 견해도 있다. 낙랑군이 직접 지배를 포기하고 대신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들어오려는 가운데 그간 낙랑군의 지배를 받아 한화(漢化)가 많이 된 영동지역 정치세력들이 낙랑국을 칭했다고 본 것이다(이종록, 2016).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여러 세력들을 통주할 큰 세력이 없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이 설을 뒷받침해줄 결정적인 다른 근거가 없는 한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동옥저의 동변은 바다고 북변은 이미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는 북옥저와 맞닿아 있었고 또 남변에는 예가 있었으므로 그 서변의 어느 곳, 즉 고구려 왕도에서 동옥저로 가는 교통로 상에 소국(小國) 혹은 후국(侯國) 정도의 낙랑국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선에 그쳐야 할 것 같다.
동옥저는 북변과 서변 양쪽에서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남쪽에는 또 동예의 소국들이 위치하고 있으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옥저는 지역 기반도 양호하고 또 일찍부터 한군현과의 교류가 빈번했으므로 비교적 문화수준이 높고 강대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계루부 병력만으로 일거에 정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변세력을 먼저 정복하는 등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준비를 마친 후 태조왕대에 계루부와 다른 부의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공격한 후에야 비로소 항복시킬 수 있었다. 이곳은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했으므로 물산이 부족한 고구려로서는 생산기반 확보를 위해 꼭 필요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동옥저는 예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복속시켜야 할 곳으로 전략적, 군사적 가치도 큰 지역이었다.
3) 예 지역으로의 진출
고구려는 태조왕대에 예 지역으로 진출했다. 예는 동옥저와 오늘날의 함경남도 영흥(永興) 계선에서 서로 접경하고 있었다. 이 정치세력은 『삼국지』에 예전(濊傳)이 독립적으로 설정될 정도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예 또는 동예로 지칭되고 있지만, 『삼국지』 동옥저전에 남으로 예맥과 접해 있다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족 구성이 단일하지 않았으며 예족과 맥족이 각각 부락별로 거주하고 있었다. 고구려에 정복될 당시 예는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여러 정치세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영동 7현 가운데 옥저인 부조(夫租)를 제외한 동이(東暆), 잠태(蠶台), 불이(不而), 화려(華麗),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6현이 예 가운데 가장 유력세력이었다. 고구려가 이 6현을 모두 병합한 것은 118년을 전후한 시기였다(日野開三郞, 1988). 고구려는 이때 한편으로 현도군을 공격하면서 한편으로는 함경남도 영흥에 있던 화려(華麗)를 공격했다(이병도, 1976).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4년(56년)에 동옥저를 점령했다고 나오고,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동옥저가 후한대에 고구려에 예속되었다고 나온다.
고구려는 옥저를 완전히 차지한 후 그곳을 기반으로 삼아 예 지역으로 진출했다. 예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정평(定平) 이남의 함경남도 지역을 위시하여 황해도 동부지역과 강원도 및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이란 동인(銅印)이 출토된 영일군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한 말에 이미 이 지역 전체를 정복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동해안 북부지역 일대에 해당하는 영동 6현을 중심으로 예속시켰을 것이다.
6현 가운데 동부도위의 치소인 불이, 즉 불내예(不耐濊)에 대해서는 덕원, 안변, 영흥 설이 있고, 사두매는 강원도 삼척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문〉에는 안변으로 비정되는 비리성에서 차출한 수묘인을 ‘구민(舊民)’이라 부르고 있다. 구민은 광개토왕 이전에 복속했던 지역의 주민이었다(김현숙, 1989). 수묘인 출자지는 안변 이남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광개토왕 이전까지 고구려의 동변은 이 부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2세기에 고구려가 예속시킨 지역도 이 선 이하로는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요컨대 동옥저와 예 지역의 정복은 생산물 수탈과 교역권 확보 등 경제적인 면과 주변 정치체 경계를 위한 후방기지 확보라는 군사적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했으며 이후 고구려의 부강과 세력 팽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옥저와 예는 관구검의 침략 이후 고구려의 예속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났다. 하지만 고구려가 곧 전열을 정비하고 중국 군현에 대해 투쟁을 지속한 결과 서천왕대인 3세기 말에는 다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내부 역량 강화와 지방통치방식의 변화에 따라 일부 주요 거점 지역에는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을 파견했다. 서천왕 19년(288년)에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경어목(鯨魚目)’을 바친 해곡태수(海谷太守)는 동해안 주변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이었으며, 이는 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파견되는 고구려 지방관의 시원적인 존재였다.
4) 서북 방면으로의 진출과 현도군과의 각축
고구려의 서쪽 및 서북 방면으로의 확장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고조선 멸망 이후 설치된 한군현 세력이었다. 고구려는 건국 과정에서부터 중국 군현세력과의 각축을 통해 근거지를 안정되게 확보하고 터전을 넓혀 나가야 했다. 2000년 이후 요동군과 현도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권오중 외, 2008), 현도군과 고구려현의 위치와 성격, 그리고 변화 등에 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김미경, 2002; 여호규, 2005; 2007a; 2015; 윤용구, 2006; 서영수 외, 2008; 이성제, 2011; 장병진, 2015; 2017; 2020; 공석구, 2021a; 2021b). 초원(初元) 4년 낙랑군 호구부라는 새로운 자료의 출현과 국내외 연구환경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군현 지배 및 고구려와 현도군 간의 관계가 구체적,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이 글에서는 관련 논의 가운데 영역 확장 과정과 복속민 지배 서술에 필요한 사안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고조선 멸망 당시 압록강 중류 유역에는 이미 ‘고구려’라 불리는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적석총이라는 독특한 묘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변세력과 구별되는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적석총의 조성 시기와 군집양상을 근거로 이 무덤을 축조한 사람들이 기원전 2세기경에 이미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정치적 결집을 이루고 있었고, 이들이 고구려라 불렸던 것으로 보고 있다(지병목, 1987; 김현숙, 1996). 최근에는 기원전 3세기 말~기원전 2세기 초에 주변의 다른 예맥사회 세력집단들과 구분되는 고구려가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나왔다(장병진, 2020). 북한 학계에서는 예 또는 예맥의 땅인 고조선 영역에서 단일한 주민으로 살던 부여와 구려가 기원전 1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서로 분기하여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등장하면서 지역적, 국가적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고구려를 기원전 277년에 건국한 고구려와 구분하여 구려국이라고 부른다(손영종, 1990; 2006; 공명성, 2004).
한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 영역에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을 설치했고, 그 다음해에 현도군을 추가로 두었다. 이 현도군 아래 고구려현이 존재했다. 고구려현은 다른 예맥과 구분되는 존재로 성장한 고구려를 통치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면 기원전 2세기에 정치적 결집을 이루고 있던 이른바 고구려가 모두 현도군 고구려현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일까? 고구려가 한 현도군 경내에서 건국했고, 고구려현의 지배를 받았다면서 한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馬大正·楊保隆·李大龍, 2001). 고구려현의 존재로 인해 한국과 일본 학계에도 고구려가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었다고 보는 연구자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배양상이 다른 군현처럼 직접통치가 아니었고 시기적으로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고 보았지만, 고구려현에 속했다고 보거나, 지배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진한의 군현 지배에 대한 연구가 성행하면서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에도 관심이 집중됨에 따라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현도군의 관할권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기수연, 2007; 이성제, 2011). 즉 고구려현이 비록 고구려라 불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치되기는 했지만, 그 현에 속해 있던 사람들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고구려인들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현도군 지역은 군현 설치 이전에 고조선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고, 토착사회의 정치적 결집도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세 군과 달리 토착 대군장과의 타협을 통해서 군현이 설치되었다고 본 설이 있다(김기흥, 1987). 이로 인해 대군장의 지배구조가 온존할 수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현도군에 속국과 유사한 형태로 속해 있었지만 독립국으로서 외번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사실상 내치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본 설도 있다(장병진, 2015). 이 경우 고구려현은 토착 고구려국의 지배 주체가 아닌 외교 창구 정도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았다.
아직까지는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이 밝혀져야 하지만, 왕망(王莽)이 고구려 병사를 동원하려 할 때 그를 피해 새외(塞外)로 도망친 고구려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부추긴 인물로 추(騶)가 지목된 것을 볼 때, 고구려로 불리는 정치세력이 고구려현 아래 들어간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나눠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현도군 치하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던 것은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高句驪)로 중국 사서에 기록된 존재들을 모두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구려의 건국 중심지인 환인과 집안에 한의 군현 치소였던 평지토성이 있었다고 한 고고학 방면의 연구가 신빙성을 더 보태주었다. 또 그동안 고조선 멸망 이후 고구려가 건국되기까지의 상황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1990년 중·후반부터 한국 학계에서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의 관련 사료들을 심층 분석하고 최신 고고학 성과를 이용하여 초기 고구려사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한 결과, 고구려와 원고구려 세력, 소수맥(小水貊)과 양맥 등 고구려 건국 이후 편입된 세력들의 실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환인과 집안 지역 소재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그동안 한의 치소성(治所城)으로 보아왔던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과 국내성(國內城)이 한이 축조한 토성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吉林省考古文物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2012; 李新全·梁志龍·王俊輝, 2004). 이에 따라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를 이전과 달리 볼 수 있게 되었다.
현도군은 고조선시기에 이미 정치적 존재를 드러낸 고구려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런데 압록강을 지나 동해안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현도군을 설치함으로써 낙랑군 외 한의 지배권을 실현할 또 다른 길을 마련한 것으로 본 설(이성제, 2011)과, 한에서 추진하기 시작한 염철전매사업과 관련하여 소금을 굽고 철을 녹이기 위해 필요한 땔감용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서라고 본 설(공석구, 2021b)이 나왔다. 현도군의 치소성으로 보아왔던 평지토성이 한대에 축조된 것이 아니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만큼 향후 이런 점을 바탕에 두고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이치(移置)되었다.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현도군이 후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구려 서북으로 옮겼다고 나온다. 현도군을 옮기게 한 이맥은 고구려였고 그 시기는 한 소제(昭帝) 연간인 기원전 75년이었다. 이때 구려 서북은 오늘날의 신빈(新賓) 지역에 해당하며 이곳에 있는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의 남성과 북성이 바로 현도군과 고구려현의 치소성이라고 보고 있다(여호규, 2020). 이곳을 제2현도군이라 한다. 현도군이 고구려 서북으로 옮겨가면서 환인과 집안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활동 영역은 이전보다 확장되었다.
제2현도군은 뒤에 다시 혼하 유역의 무순(撫順)으로 옮겨졌다. 이를 제3현도군이라 일컫는데, 다수의 연구자들이 그 치소성을 무순의 노동공원에 비정하고 있다. 제3현도군으로 이동한 시기에 대해서는 1세기 초반경으로 보는 설(김현숙, 1996)과 97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는 설(여호규, 2015)이 있다. 전자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14년인 유리왕 33년에 태자하 상류 유역에 있던 양맥(박시형, 1966; 여호규, 2007a)을 정벌한 후 병(兵)을 진격시켜 고구려현을 쳐서 취했다는 기사를 근거로 한다. 그리고 후자는 선비가 후한을 공격하기 시작함으로써 후한의 대내외 정세가 악화된 것을 제3현도군 설치의 배경으로 보고 있다. 모본왕 2년인 49년에 고구려는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은 물론 서쪽 내지인 태원(太原)까지 공격했다. 이것은 전략적 필요에 따른 일시적 공격이었으므로 영역 확보와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공격 지점이 이미 무순 일대를 넘어서고 있던 상황임을 고려하면, 1세기 중·후반까지 현도군이 신빈 지역에 계속 머물러 있었는지 여부를 더 살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구려현과 고구려의 경계에 세워졌던 책구루(幘溝婁)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고구려의 영역범위가 어디까지였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원흥(元興) 원년, 즉 태조왕대인 105년에는 제2현도군과 요동군의 군계(郡界)였던 요동고새(遼東故塞)를 넘어 요동군 관내까지 공격하여 6개 현을 초략하는 등 한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그러자 후한은 다음 해인 106년에 혼하 유역에 제3현도군을 설치하고 요동군 소속의 고현(高顯), 후성(侯城), 요양(遼陽) 3개 현을 이곳으로 이관하였다. 이전보다 관할 현을 늘린 현도군은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방비를 강화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현도군을 넘어 더 진격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자, 고구려는 111년에 사신을 후한에 파견하여 공헌하고 현도군에 내속(內屬)하기를 스스로 요청했다. 당시 후한은 선비(鮮卑)와 강족(羌族)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있었으므로 고구려와의 전쟁까지 병행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 대한 공격을 유보하는 대신 제3현도군 변새의 외곽, 곧 요동 동부 산간지대에서 세력 확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여호규, 2015). 그리고 후한은 제2현도군 시기에 비해 국경선을 요동 방면으로 크게 후퇴시켜야 했지만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적의 침공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고구려와 후한은 118년부터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118년에 소자하 유역의 예맥을 동원하여 현도군을 공격하면서 한편으로는 영동 7현 가운데 하나인 화려를 쳤다. 그리고 146년에는 요동을 공격하면서 서안평을 공격해 도상(道上)에서 대방령(帶方令)을 참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121년 봄에 후한이 먼저 공격해오자 선비와 연합하여 맞대응했다. 고구려는 현도군을 친 다음 후성과 요대(遼隊)를 동시에 공격한 후 평평곽(平郭: 현재 開州)과 양평(襄平: 현재 遼陽) 사이에 있는 신창(新昌)까지 진격했다. 요동군의 중심지인 양평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곳을 공격한 것이다. 후한은 121년 가을에 부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현도군을 공격한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는 그 후 122년에 현도군에 자청하여 내속했다가 다시 공격하는 등 각축전을 벌였다(여호규, 2015).
요컨대 2세기 전반까지 고구려는 서북 방향으로는 소자하 유역, 서쪽으로는 단동(丹東) 지역까지 공격하면서 세력권을 확장시켜 갔다. 그러나 동천왕대에 관구검군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맞이함으로써 영역 확대 노력이 잠시 주춤해졌다. 하지만 봉상왕대에 모용선비군의 침략에 대비해 지방통치제를 정비한 곳이 후기까지도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서변 요충지로 유명했던 신성(新城)임을 보면 현도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무순 지방으로의 세력 침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북부여 지역으로의 진출
고구려는 북쪽으로의 진출도 도모했다. 고구려 북방에는 〈광개토왕비문〉에 시조 주몽의 출생지로 명기되어 있는 북부여가 있었다. 전성기인 4~5세기 고구려에서는 시조와 왕실의 출자지로서 북부여를 신성시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주몽과 그 친구들인 오이, 마리, 협보 등이 동부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고, 중국 정사에 실린 고구려 건국신화에는 모두 부여(夫餘)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부여와 북부여는 동일한 나라이고 동부여는 고구려의 동쪽에 존재했던 나라인데 고구려의 시각에서 위치상 구분해서 부른 것이라고 보거나, 부여·북부여·동부여를 모두 같은 나라라고 보는 등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전자는 한국 학계, 후자는 중국 학계의 주류설인데, 한국 학계의 설은 다시 주몽의 출자지를 두고 북부여로 보는 설과 동부여로 보는 설 등 다양한 설로 나눠져 있다.
현재로서는 고구려의 시각에서 북부여, 동부여라는 국명이 나왔다고 보는 입장에서 주몽의 출자지인 부여가 곧 북부여이고, 285년 북부여가 모용황(慕容皝)의 침공을 받아 왕이 서거하는 상황에 이르자, 왕족의 일부가 북옥저로 옮겨가 건국한 것이 동부여였다고 보는 설이 가장 다수설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에 동부여 출자의 건국신화가 수록된 것은 후대에 동부여 출신이 고구려에서 크게 활약하게 되면서 동부여 출자 신화로 윤색되었다고 본다(노태돈, 1999b).
부여는 고조선 이래 고구려, 옥저, 예 등 예맥계의 가장 선진 정치세력이었다. 국가 형성 시기나 발전 정도 등 모든 면에서 앞섰다. 부여는 요동세력이나 한 왕조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세력들과 고구려 사이에서 중요한 변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즉 부여는 한때 만주 지역 일대에서 정세와 역학관계 변화의 한 축을 담당한 정치세력이었고, 같은 정치세력에서 분기한 고구려와 갈등을 겪는 관계였다. 고구려는 초기에 부여로부터 압력을 받았지만 4세기 중엽 이후 부여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부여가 가지고 있던 상징과 권위를 모두 이어받게 되었다. 〈광개토왕비〉에 북부여 출자 건국신화를 새긴 데에는 이런 배경과 자부심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주몽의 출자지는 고구려 북쪽에 있던 부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때 부여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길림 지역이었다.
초기 고구려에게는 중국 군현에 버금가는 최대 관심 대상이 부여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외교적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신경전도 많았으며 실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구려는 국가의 성립 시기와 발전 정도에서 부여보다 열세였다. 부여는 선진국으로서 고구려에 압박을 가하며 굴복을 요구했으나 어린 무휼(無恤)로부터 오히려 수모를 당하자, 유리왕 14년 11월 왕 대소(帶素)가 5만 명을 거느리고 침입했으나 큰 눈을 만나 후퇴했다. 유리왕 32년 11월에 다시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왕자 무휼이 학반령(鶴盤嶺) 아래에서 격퇴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대무신왕 4년 12월부터 5년 2월에 걸친 부여 공략을 기점으로 변화되었다. 고구려군은 비류원(沸流源)과 이물림(利勿林)을 거쳐 부여 남쪽에 도착하였고 부여와 싸워 대소왕을 죽이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부여군이 고구려군을 포위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장기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희생이 상당했기 때문에 대무신왕은 자신의 허물을 자책했고, 이후 대외정복의 방향을 동남쪽으로 돌렸다.
그렇지만 이때 부여가 입은 타격은 상당했다. 이로 인해 부여왕 대소의 동생은 압록곡(鴨淥谷)으로 옮겨 가 갈사국(曷思國)을 세웠고, 그 종제는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로 투항해온 후 연나부에 안치되었다. 왕족이 대거 분열하여 흩어졌으므로 부여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구려는 대부여 관계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실제 군사적으로도 승기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부여로의 본격적인 진출은 3세기 말에야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서천왕 11년 10월 왕제 달가(達賈)를 보내 북변을 침략해 변경 주민들에게 해를 끼쳐오던 숙신을 정벌하여 그 추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지배층을 비롯한 주민 600여 가를 부여의 남쪽으로 옮기고 항복한 부락은 부용(附庸)으로 삼았다. 이때 숙신을 부여의 남변 근처로 옮긴 것은 이들을 본거지에서 떼내 지역공동체의 결속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지배를 쉽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 이들을 부여 남쪽에 이식함으로써 부여를 견제하면서 그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부여 지역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건국 초기 선진세력으로서 압박을 가하던 부여는, 고구려가 왕도 함락이라는 위기에 처했던 관구검의 침입 시 위군(魏軍)에 군량을 제공함으로써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중원과 요동의 정세가 급격히 변화되면서 부여는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게 되었다. 3세기 중·후반 세력을 키워 서진(西晉)의 통제에서 벗어나 요동 북쪽으로 근거지를 옮긴 모용선비가 부여와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285년 모용외(慕容廆)가 부여를 침공하였다. 이때 부여의 왕성이 함락되었고 왕인 의려(依慮)는 자결했다. 그 자제는 옥저로 달아나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옥저는 북옥저를 말하는데 당시 북옥저 지역인 혼춘과 연길을 포함한 지역은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어 있었다. 이에 부여왕의 자제가 달아나 세운 것이 동부여이고, 그 동부여는 고구려의 인도 아래 고구려 영역인 북옥저 땅 연길로 와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김현숙, 2000). 후에 부여 세력은 진(晉)이 부여 왕실을 재건시켜줌에 따라 북부여로 돌아갔으나,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것이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동부여였다고 본다.
한편 북부여 지역인 길림 일대는 왕성 함락 이후 원래 상태로 회복할 수가 없었다. 진이 부여 왕실을 재건할 때, 원래 근거지인 길림 지역이 아닌 연(燕)에 가까운 서쪽 지역인 지금의 농안(農安) 지역으로 부여 잔존세력을 옮겼다. 연의 침공을 받았던 부여를 오히려 연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는 것은 그만큼 길림 지역이 회복 불가 상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연은 이후에도 수시로 부여를 침공하였고 부여인을 잡아 노예로 팔기도 했다. 예맥계의 대표 주자로서 국력을 과시하던 부여가 이처럼 힘이 약화되고 길림 지역이 공백상태가 되자, 그 전부터 부여 남쪽에 항복한 숙신 집단을 옮겨 놓으며 부여 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하고 있던 고구려 역시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길림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연과 충돌하기도 했다.주 001
각주 001)

이런 점에서 모두루(牟頭婁) 가문의 중시조격인 염모(冉牟)가 이때 연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그 결과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김현숙, 1996). 하지만 염모가 공을 세운 것은 346년에 부여를 함락시킨 전연이 계속 동진하여 길림 일대를 침공해왔을 때 그것을 막는 과정에서의 역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다수설이다(武田幸男, 1981; 1989; 盧泰敦, 여호규). 285년으로 보는 근거는 『고구려통사 3: 고구려 중기의 정치와 사회』(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편, 2020)의 5장 「지방제도의 구조와 대민 지배」(김현숙) 참조.
346년에 전연이 농안 지역에 있던 부여를 공격한 뒤 계속 동진하여 길림 일대를 침공했다는 것은 이때 고구려가 이곳에 진출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285년과 346년 사이 어느 때에 고구려가 길림 일대, 즉 북부여 지역으로 진출했고, 346년 이후 이 지역을 완전히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즉 3세기 말까지 고구려는 북쪽으로 길림 일대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당시 이 지역이 고구려 영역으로 안정되게 편입되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일시적으로라도 고구려의 세력권이 이 선까지 확장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6) 대동강 이북 지역으로의 진출
한편 남쪽으로의 진출도 진행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4년 7월조에는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여기에서 창해는 동해, 살수는 청천강이다. 즉 태조왕대인 56년에 고구려의 남쪽 경계는 청천강이었다는 것이다. 313년인 미천왕 14년 10월에 낙랑군, 다음해인 미천왕 15년 9월에 대방군을 침략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314년에 황해도까지 고구려의 남쪽 경계선이 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3세기 말까지 고구려가 남부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가 많지 않다. 따라서 고구려 초기 고구려 남경이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단지 몇 개 사료를 통해 남진 과정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 남진 상황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낙랑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대무신왕 15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낙랑왕 최리의 딸에게 고각(鼓角)을 찢게 한 뒤 그 나라를 쳐 항복을 받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5년 뒤인 대무신왕 20년에 낙랑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앞에서 서술했듯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은 미천왕대에 가서야 축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무신왕대에 낙랑국의 항복을 받고 낙랑을 멸망시켰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태조왕대에 고구려의 남경이 살수, 즉 청천강에 이르렀다고 『삼국사기』 태조왕기에 나오는 것을 보면 대무신왕대에 나오는 낙랑국, 낙랑이 낙랑군과 별개의 정치세력임이 분명하다. 대무신왕은 재위 4년에 부여를 공격했다가 부여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그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퇴각한 뒤, 재위 9년 10월에 개마국을 쳐 왕을 살해하고 그 지역을 군현으로 삼았다. 그러자 같은 해 12월에 개마국이 정복되는 것을 본 구다국이 자진해서 항복해 왔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옥저로 놀러 갔다가 낙랑왕 최리를 만났다. 이때의 옥저는 북옥저가 아닌 동옥저였다. 개마국과 그 근처에 있던 구다국은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사이에 있던 소국으로 동옥저로 가는 교통로상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앞에서 보았듯이, 최리의 낙랑국은 동옥저 근처에 있던 소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김현숙, 2005).
사료에 나타나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다른 정치적 실체로 보는 것에 대해 혼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중국 군현이 설치된 가운데 토착세력이 세운 소국도 병존했었다는 점(손진태, 1954)과 청천강을 경계로 한 남북 일대가 모두 낙랑으로 총칭되었을 것이라 본 견해(이강래, 1994) 등을 참조하면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다. 낙랑군 외에도 ‘낙랑(樂浪)’으로 지칭되는 소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김현숙, 2005; 이종록, 2016).
즉 고구려는 대무신왕대에 이미 청천강 이북 지역까지 영향권을 확대했고, 태조왕대에 지역 지배를 강화하여 영역으로 안정시킬 수 있었다. 고국천왕대에는 요동의 공손씨(公孫氏)가 낙랑군을 분할, 정비하여 황해도 둔유현(屯有縣) 이남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남하에 따라 대동강 이북 지역을 포기한 것이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金美炅, 1996). 중국 본토와의 연계가 끊어진 채 재지세력만으로 유지되는 상태이긴 했지만 미천왕대까지도 평양 지역의 낙랑군 세력이 독자적으로 존립한 것으로 보아 고국천왕대에 둔유현 이북 지역이 완전히 고구려의 지배권 아래 들어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군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이 집요하고 치명적이어서 대방군을 설치함으로써 둔유현 이남 지역만이라도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을 가능성은 있다.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략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을 때 남쪽으로의 진출을 한동안 중단했지만 곧 다시 공격을 재개해 낙랑군 지역을 점차 해체시켜 나갔다. 그 결과 미천왕대에 마침내 낙랑군과 대방군을 완전히 축출할 수 있었다.
요컨대 3세기 말까지 고구려는 동북으로 혼춘 일대, 동남으로 안변 부근까지 진출했으며, 서쪽으로 신성, 남쪽으로 대동강 이북선까지, 그리고 북쪽으로 길림 일대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 범위가 모두 당시 고구려 영역으로 안정되게 편입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 세력권이 이 선까지 확장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 고구려인 자신과 이 범위 안에 드는 지역의 주민들이 어디까지를 실제 고구려 영역이라고 생각했는지 여부는 별개 문제다. 당시까지는 영역과 민에 대한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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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이런 점에서 모두루(牟頭婁) 가문의 중시조격인 염모(冉牟)가 이때 연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그 결과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김현숙, 1996). 하지만 염모가 공을 세운 것은 346년에 부여를 함락시킨 전연이 계속 동진하여 길림 일대를 침공해왔을 때 그것을 막는 과정에서의 역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다수설이다(武田幸男, 1981; 1989; 盧泰敦, 여호규). 285년으로 보는 근거는 『고구려통사 3: 고구려 중기의 정치와 사회』(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편, 2020)의 5장 「지방제도의 구조와 대민 지배」(김현숙)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