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군사동원과 방어체계의 성립
2. 군사동원과 방어체계의 성립
1) 초기의 전쟁과 군사동원체계의 성립
고구려 초기 군사동원체계는 국가발전단계에 따라 그 규모와 구성원에 있어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데, 2세기까지는 스스로 무장이 가능한 전사층[대가(大家)]을 중심으로 1만 명 미만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3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그 배가 넘는 수량의 병력이 동원되는 것으로 보아 군사동원체계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분명 고구려의 집권력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울러 고구려가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방식을 유지하고 있던 주변의 복속세력들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병력 동원을 단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배경에는 고구려가 복속지역에 대한 수취를 위해 마련한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음에서는 고구려 초기 그와 관련된 일련의 사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고구려의 발원지이자 중심지인 압록강, 혼강 유역의 입지조건은 농업생산에 지극히 불리한 산곡지형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하는 것이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이 없으며, 좋은 밭이 부족하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부족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힘든 환경으로 인하여 고구려는 이른 시기부터 대외정복과 같은 약탈경제로 그 부족분을 채워야 하였다. 이것은 농경민에 비해 현저히 생산력이 떨어지는 유목민이나 수렵민 집단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생활방식이다. 부족한 물자와 인력 등을 획득하기 위한 약탈전쟁의 수행을 위해서는 무력이 필수적이며, 그러한 무력은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발전하면서 군사력으로 진화하게 된다. 반농반렵(半農半獵)의 경제였던 초기 고구려 또한 자연스럽게 대외정복에 기반하고 발전시킨 군사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초기부터 활발한 정복전쟁을 수행하였음은 여러 사료를 통하여 확인된다. 그와 같은 군사활동의 수행을 위해서는 군사조직과 동원체계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초기 고구려는 계루부를 비롯한 5나부가 중심이 된 연맹체였으므로 나부가 군사활동 및 편제의 핵심 기제로 작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각 나부는 본래 독립된 소국이었던 나국(那國)에 기원을 두고 있어, 비록 고구려 왕권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지만 반자치적인 형태로 자체 운동력 또한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 고구려의 군사력은 각 나부의 병력이 기본 구성원이자 편제단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태조왕이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국을 정벌한 사건이나,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국을 정벌케 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패자는 나부의 수장급으로 군사적 성격이 강한 관등인 만큼(김두진, 2009), 고구려 초기 군사동원체계에서 각 나부가 갖는 의미와 역할은 매우 컸다. 고구려 초기 잠지락(蠶支落) 대가 대승(戴升)의 이탈, 발기(拔奇)와 소노부의 이탈, 어비류(於畀留)와 좌가려(左可慮)가 중심이 된 4연나(椽那) 반란 사건 등은 기본적으로 나부 혹은 그에 준하는 규모로 이루어진 사실로 보아 나부가 군사활동의 기본단위로 기능하였음을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고구려 초기 나부의 수장층인 대가들이 군사활동의 주체로 나선 사례는 신대왕대의 우거(優居), 동천왕이 조위(曹魏)를 도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할 때 대가를 보낸 사실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이들 작전에서는 국왕과 밀접한 관등인 주부(主簿)가 함께 파견되어 함께 지휘하고 있어 국왕권이 나부의 군사력과 그 활동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부체제기 고구려 군사조직과 편제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기록이 없어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혀내기는 어렵다. 다만 나부가 읍락을 기반으로 한 누층적 구조를 갖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임기환, 2004), 해당 시기 군사조직 역시 이를 바탕으로 편제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고구려 초기 독자적 전술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본적 편제단위가 각 나부의 병력이었다면, 그 하위 부대는 나부의 구성단위와 거의 일치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화해 보면, 말단에는 읍락, 그 상위에는 부내부(노태돈, 1999), 정점에는 나부의 군사조직으로 편제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이들 나부의 군대가 모여 고구려군을 구성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군사시스템이 작동하던 시기에 고구려 국왕이 직속 계루부를 제외한 4나부의 부대에 행사할 수 있었던 군령권이나 군정권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사살상 군정권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며, 군령권 역시 전시 부대 동원이나 배치 정도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나부가 중심이 되었던 고구려 초기의 군사동원체계는 4세기 이후 나부 해체 및 집권체제 강화로 인해 점차 왕권에 직속된 군사조직으로 변모해 나가게 된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가 2세기부터 고구려군의 작전에 등장하는 ‘주부’의 존재이다. 주지하다시피 본래 주부는 중국 군현의 속관에서 유래한 관직으로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대로, 패자 등과 함께 고위 관등으로 서술되어 있다. 고구려 주부 관등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한나라의 주부는 중앙행정기구의 장관이나 지방관에 부속되어 문서행정을 관장하던 관리로서, 그 상관의 근시직 성격을 띠었다(陳茂同, 1988). 고구려 역시 이를 모방해 자국의 관등으로 주부를 설치하였으므로 국왕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김철준, 1975). 그러나 고구려 초기 행정조직의 구성원이던 주부가 왕권을 대리해 군대를 지휘하였다는 점은 당시 고구려가 군사와 행정이 완전히 분화된 단계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주 009
고구려의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이 어느 시기에 명확히 분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을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후기 사료에는 군관직임이 확실한 대모달(大模達: 대당주, 막하라수지), 말객(末客), 당주(幢主) 등의 사례가 나오므로 고구려가 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영역국가로 발돋움하던 3~4세기 무렵에는 그러한 체계의 원형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고구려 후기 중앙의 군사조직은 대체로 100명을 지휘하는 당주, 1,000명을 거느리는 말객, 그 상위의 대모달(대당주)이 지휘하는 구조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방군은 대성-중성-소성의 장관인 욕살(褥薩), 처려근지(處閭近支), 루초(婁肖) 등에 의해 통솔된 것으로 파악된다(김현숙, 1997). 이것은 고대사회에서 지방의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완전히 분리하여 운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초기의 전투와 군사조직은 기본적으로 전문 무사단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에 ‘좌식자(坐食者)’, 즉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도 대가를 지급받는 전문 무사단이 1만 명이나 존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 인구가 3만 호, 약 15만 명 내외였음을 감안할 때 직업군인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 된다. 만약 좌식자 1만 명이 모두 직업군인이었다면 초기 고구려는 사실상 병영국가였다고 보아도 무방한 비율이다. 따라서 전문 무사단의 가족까지 포함하여 1만 명이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렇게 계산해도 최소 2,000~3,000명의 전문 무사집단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된다. 같은 시기 부여도 유사한 체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적[의 침공]이 있으면 제가들은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는 식량을 갖고 와 음식을 담당한다”라고 씌어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전투 시 ‘제가’로 묘사된 전문 무사집단과 보급을 담당하는 하호로 임무가 나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 역시 이와 유사한 체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이후 고구려의 국력이 증대하고 국가 규모가 커지면서 주변 세력과의 충돌, 즉 전투의 규모도 자연스레 커졌을 것이다. 때로는 국가의 상당한 자산을 투여하는 총력전 양상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3세기 중엽 동천왕대에 수도 국내성이 함락당한 위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이나 3세기 후반 봉상왕대에 선비 모용외의 침공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대대적인 국가 위기상황을 거치며 고구려는 점차 군사조직을 확대, 정비하였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집권력을 강화해 나가게 된다.
초기 고구려는 계루부를 위시한 5나부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지니며 각 나부가 국왕권에 대해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군사권, 외교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을 나부 내에서는 나부의 수장층이 향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심지어 군사권 역시 국왕에게 동원권과 최종적 명령권이 있었다는 것이지 국왕이 직접적으로 각 나부 군대의 인사권을 행사하거나 직접적으로 통제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를 방증하는 사료가 초기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여러 군데 나타난다.
태조왕은 고구려 초기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체제의 틀을 형성한 군주이다. 그런데 재위기 그가 전개한 군사활동을 보면 특이한 형태가 몇 차례 보인다. 우선 왕 20년(72년)에 실시한 조나 정벌에 대한 건이다. 당시 그는 직접 출병하지 않고 관나부의 패자인 달가를 보내 조나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나온다.주 010 그리고 왕 22년(74년)에도 역시 환나부의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았다고 한다.주 011
이 기록들은 고구려 국왕이 주변의 소국들을 정벌할 때 나부 단위의 군대를 동원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전의 현장 최고 지휘는 당시 나부의 수장급으로 패자 관등을 갖고 있었던 인물들이 맡았다. 사실상 국왕의 명에 의해 해당 나부가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군대를 동원하고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이것은 전투의 규모에 따라 1개 혹은 복수의 나부가 동원된 부대를 조직해 전투를 치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초기 고구려의 군대는 반자치적 성격을 갖는 각 나부 군대의 연합군 형태로 구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동북아시아의 유목, 수렵 종족이 세운 국가의 초기 상황에서 대부분 발견되는 현상이다.주 012 그러나 이러한 반독립적 성격을 내재한 부족 혹은 나부연합군 형태의 국가 군대는 집권력이 강화되고 국가 발달 수준이 진전되며 점차 국왕을 정점으로 한 단일지휘체계로 편제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고구려 초기 전투와 이를 대응하기 위한 군대의 규모를 추정케 해주는 사료가 있어 주목된다. 태조왕 69년(121년) 후한과 고구려 사이 벌어진 전쟁기록이다. 당시 후한은 최고위 광역 지방장관인 유주자사를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고구려와 직접 경계를 접하고 있던 현도군과 요동군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와 일전을 벌인다. 이때 고구려가 동원한 군대는 모두 5,000명이었던 것으로 나온다.주 013 당시 고구려 전체 인구가 채 15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고구려는 국가 총력전으로 후한에 대항한 것이 된다. 물론 이 시기까지 고구려 군대는 기본적으로 각 나부 예하 부대를 동원해 편제한 것이지만, 그 최고 지휘관을 국왕의 아우인 수성이 맡았음을 통해 볼 때 사실상 국왕의 각 나부 부대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전체 공동의 이익이라 할 수 있는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정도로 전쟁이 대규모화함에 따라 이에 대한 효율적 대응과 생존을 위해 점차 국왕을 중심을 한 집권력이 강화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의 군대가 나부의 병력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상황은 2세기 말까지도 직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국천왕 12년(190년)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어비류와 평자(評者) 좌가려는 4연나, 즉 연나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국왕에 대한 반란이라는 대외전쟁을 제외한 최 대규모의 무력이 필요한 사건에서 동원된 병력이 나부 단위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까지도 여전히 나부가 고구려 군대 구성에 기본이 되는 단위였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비슷한 시기 산상왕의 즉위에 반발해 왕제 발기가 비류나부와 더불어 고구려 왕권에 이탈해 공손씨 세력에 귀부해 버린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주 014
그러나 이처럼 나부 중심의 병력 동원과 군사조직체제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점차 소멸된다. 3세기 이후에는 나부 단위의 군사활동이나 집단 반발 등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의 크기나 심각성도 매우 확대되어 나부 정도의 단위 병력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동천왕대의 침공만 하더라도 기존 군현 규모가 아니라 주(州)에 해당하는 병력이 고구려로 침공해 왔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복속지인 옥저까지 달아나야 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가 동원한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해 무려 2만 명에 달하였다.주 015 조위 또한 유주자사 관구검을 주장으로 1만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양측이 동원한 병력의 규모와 질은 기존에 비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가 무려 2만 명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국력과 집권력의 강화되었다는 것이고, 위 역시 성장한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주 단위의 병력을 동원한 군사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고구려의 국가적 성격이 이처럼 변한 사실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집권력의 강화로 이를 통한 나부의 소멸, 방위부의 등장 등 당시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성격이 변화한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중천왕 12년(259년)에 위는 또다시 장수 위지해(尉遲楷)를 보내 고구려를 침공해 왔는데, 이때 중천왕은 기병 5,000명을 동원해 위군을 격파하고 무려 8,000여 급을 베었다고 한다.주 016 이 전쟁 또한 동천왕대의 전쟁에 비해 그 규모 면에서 크게 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가 동원한 병력은 기병만도 5,000명이었고, 위군의 사망자는 8,000명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건의 시간 차는 불과 13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고구려가 동천왕대 전쟁의 패배를 통해 군사력을 재점검하고 방어체제와 군사조직 등도 재정비하여 이후의 전쟁을 대비하는 계기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중천왕대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개편은 당연히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의 일원화가 그 핵심이었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4세기 초반에 요동군의 중요한 속현인 서안평 공략과 한반도 서북지역에 잔류하고 있던 중국 군현세력인 낙랑군과 대방군 축출이라는 결실로 이어지게 된다.
요컨대 고구려 초기 계루부의 군대는 국왕의 직접통제 아래 있었을 것이고, 여타 나부의 군대는 각 나부가 자체적으로 편성하고 지휘하되, 전쟁과 같은 특정 조건하에서는 국왕의 동원·배치령 등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3세기 이후 국왕권이 비약적으로 신장하면서 각 나부의 군대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나부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일괄 왕권의 직접통제를 받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형태로 재편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초기 방어체계의 형성과 무기체계
고구려는 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국왕권 중심의 군사조직 일원화가 이루어졌고, 이와 더불어 국토방어시스템 또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구려는 성 축조기술이 뛰어나 후기가 되면 국방 면에서는 산성 중심의 방어체계를 정교하게 구축하였고, 지방제도 역시 성 중심으로 편제하게 된다. 곧 성은 고구려 행정과 국방의 핵심 기제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국가 방어에 성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이른 시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성을 쌓았다는 공식적인 첫 기록은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책구루(幘溝婁)’ 관련 기사이다.주 017 정확한 연대를 비정하기는 어렵지만 한(후한)대에 고구려는 현도군에 복속되어 한으로부터 북과 피리, 악공 등과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문서는 현도군 고구려현령이 관장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이후 고구려가 점차 국력을 키우며 성장하자 직접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 등을 수령하기보다는 현도군의 동쪽 경계 부근에 작은 성을 쌓고 그곳에 물건을 두면 찾아가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전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 성을 의책을 받는 성, 즉 책구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구루’는 성을 뜻하는 고구려 고유어라고 적기하였다.
책구루 관련 기사는 대체로 태조왕(재위 53~146년)대로 추정되는데(노태돈, 1975), 이로 미루어 고구려가 초기부터 성을 중요하게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음의 유사성을 고려할 때 고구려라는 국명 자체가 성을 의미하는 ‘구루’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만큼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과 성의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발원한 압록강 중류 유역은 기원전 2세기 말 중국 군현세력 휘하로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외부세력의 압력에 대항하기 규합된 현지세력의 연맹체로서 탄생한 국가이다. 초기 고구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중국 군현, 곧 현도군과 요동군은 영역지배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군사요충지 혹은 교통결절지 등 중요한 지역에 토성을 쌓아 행정과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국 군현세력은 그러한 토성을 거점으로 부여, 고구려와 같은 현지의 예맥계 이종족집단을 복속시키고 지배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한대 토성유적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고구려 역시 초기부터 이러한 한대 토성의 장점과 효용성을 목격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진화시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고구려 지형과 지리 조건에 부합하는 산성의 축조가 그것이다.
한은 주로 평지에 토성을 쌓아 지방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 사용하였지만 고구려는 험준한 산지에 석축의 산성을 쌓아 주요 교통로를 통제하는 형태로 산성 중심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는 늦어도 2세기 무렵에는 초기 중심지인 졸본(요령성 환인)과 국내성(길림성 집안) 부근의 중요한 지점에 석축산성을 쌓아 행정과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양시은, 2016). 당시 고구려는 제2현도군을 축출하고 그 치소였던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을 해당 지역통치의 거점으로 삼았고, 부여 지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통화(通化) 지역에는 자안산성(自安山城)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수도였던 졸본 지역에는 초기 도성으로 기능하였다고 파악되는 오녀산성(五女山城)과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 나합성(喇哈城) 등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 외곽에 초기 성곽으로 추정되는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이 조영되었다. 일종의 초기적 산성방어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의 수도로 기능하였던 국내성 지역 역시 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도성권역인 집안분지에는 평지성인 국내성(國內城)과 산성인 환도산성(丸都山城)이 축조되었으며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산성들이 조영되었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는 정확한 시점이 여전히 고고학적으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국내성 지역에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성곽이 조영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 22년(3년)에 국내 지역에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전하며, 산상왕 2년(198년)에는 환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위 관구검의 침입 후 동천왕은 재위 21년(247년) 평양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아직까지 초기 고구려의 산성에 대해 조사된 바가 드물어 초기에 어떠한 산성방어체계를 형성하였는지는 정확히 복원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료에 전하는 초기 고구려의 축성 기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중국 측의 기록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어 고구려가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성을 축조하고 이를 활용한 기초적인 방어체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은 추론하기 어렵지 않다. 3세기 이후 고구려가 수행한 대규모 전쟁의 전개양상을 고려해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부분이다. 특히 졸본과 국내 지역에 있던 고구려 초기의 도성이 방어를 위한 산성과 평시 거주지인 평지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던 사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여호규, 1998a).
그런데 고구려가 성곽을 집중적으로 조영하고 이를 전국적인 행정과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현존하는 성 유적을 중심으로 확인해 보았을 때 5세기 이상으로 소급하기가 어렵다. 고구려 초기에는 도읍인 환인과 집안 일대에 성을 축조하여 사용하였고, 4세기 들어 요동과 평양 지역 등을 확보하면서 중요한 방어의 거점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양시은, 2013).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로 편년되는 산성은 매우 드문 실정이다. 2세기 말까지 구축된 산성으로 확인되는 것은 최초의 수도인 환인 지역에 소재한 오녀산성 정도이고(정원철, 2017), 집안 지역의 국내성과 환도산성도 각각 4세기와 5세기 이상으로 소급될 수 없음이 밝혀졌다(양시은, 2013). 따라서 고구려는 3세기 중반까지는 체계적인 방어체계를 제대로 구축하고 있지 못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고구려는 4세기 초까지 공격과 방어의 거점으로 기능하는 대규모 성곽들이 제대로 축조되지 못한 상황이므로 중·후기처럼 산성 중심의 체계적 방어망을 형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정 규모 이상의 성곽을 의미하는 것이고, 고구려 중심지인 혼강(渾江), 압록강 유역과 가까운 혼하(渾河) 상류 유역에는 청동기시대부터 고구려 산성의 입지와 유사한 산상취락유적들이 다수 조사되었다(西川宏, 1992). 이러한 소형 산성급 취락들은 고구려 산성의 원형이자 기원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陳大爲, 1985; 여호규, 1998b). 그리고 고구려 고유어로 성곽을 뜻하는 구루에서 연원한 명칭인 ‘구려’가 이미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사서에 등장하며, 기원전 1세기~1세기 무렵 현도군과 교섭하면서 성을 쌓은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중·후기와 같이 대규모 산성은 아니더라도 중심거주지와 교통 및 방어의 요지 등에 초보적 형태나 소규모 산성 같은 방어시설을 조영하고 활용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조사된 이른 시기의 산상취락유적 등이 그러한 가능성을 방증해 주는 자료라 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환인 지역은 그 외곽에 교통로를 따라 성곽이 분포하며 방어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임기환, 2012b). 물론 환인 지역에 축조된 성곽이 모두 초기의 것은 아니지만, 흑구(黑溝)나 고검지(高儉地) 같은 일부 산성은 그 축조방식이나 공반유물 등을 근거로 초기로 비정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산성들은 초기 방어체계 형성에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초기부터 군사 방어 목적을 위해 성곽을 조영한 사실은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신대왕 8년(172년) 한나라가 공격해 왔을 때 명림답부(明臨荅夫)는 “도랑을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궁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왕에게 조언하였다.주 018 이 사료에 보이는 ‘높은 보루(高壘)’가 산성과 유사한 구조물임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고구려는 지리적 입지조건과 자연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어시설물을 축조하고 이로써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두 번째 수도인 집안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산성과 차단성[관애(關隘)]의 존재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현재 남아 있는 산성과 차단성 대부분은 고구려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초기 고구려가 이러한 지형지물을 방어에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록에는 환도성이 2세기 말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며, 앞서 언급한 신대왕 8년에 있었던 한과의 전쟁 중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도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수성 전략을 피력하였다.주 019 이러한 문헌기록은 고구려가 초기부터 수도인 집안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관문이나 보루, 성곽 등을 축조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늦어도 2세기 이후부터 국내성이 소재한 집안 지역은 고구려 수도로 기능하였다. 험준한 산과 큰 강으로 막힌 분지지형인 이 지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하천과 계곡을 따라 형성된 6개의 교통로를 이용해야만 하였다(여호규, 2012). 그리고 그 교통로들을 따라서 고구려는 수도 방어를 위한 산성과 차단성 등을 쌓아 이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집안 주변의 고구려 성곽들이 모두 초기에 축조된 것은 아니다. 다수가 중기 이후 조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초기부터 수도 방어를 위한 체계가 마련되고 그를 통해 축적된 경험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후기 산성이 축조된 지점은 초기에도 중요한 방어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이것은 고구려가 늦어도 2세기 후반 이후에는 도성의 배후 지역에 광역의 왕기(王畿)를 설정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조영광, 2016).
왕권을 중심으로 집권체제가 강화되어 가고 그에 수반해 국가의 규모와 국력이 신장하면서 주변세력과의 충돌도 더 격렬하고 대규모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쟁의 규모와 그에 따른 피해 역시 더욱 크고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효율적인 군사동원과 보급체제의 확립, 장비와 전술 개발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고구려가 국가 규모를 키워가며 집권체제를 강화시켜 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생산력의 증대가 있었다. 고구려의 중심산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농업생산력에 관한 문헌자료는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에 당시의 생산도구를 통해 이를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철기의 보급은 생산력 증가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
3세기 무렵의 사실을 전하는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농업 생산력과 환경에 대하여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평야가 없어 산골짜기를 거주지로 삼고 골짜기 사이의 물(澗水)을 마셨다. 좋은 밭이 없어 힘써 경작하여도 배를 채우기에도 부족하여 절식하는 습 이 있었다”라고 전한다.주 020 이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농업생산을 위한 환경조건이 열악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생산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양질의 농기구 도입이 절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고구려 지역에 철제농기구가 도입된 것은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연(燕)계 철기의 영향을 받아 주조(鑄造)한 철제 괭이(斧), 호미, 낫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한의 영향을 받아 단조(鍛造)한 괭이가 나타나 고구려 지역에서 농경에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3세기 단계에 사용된 고구려의 철제 농기구는 보습, 일자형 쇠날, U자형 쇠날, 괭이 등의 가는 농구(起耕具), 쇠스랑과 같은 삶는 농구(摩田具), 철제호미(鐵鋤) 같은 김매는 농구(除草具)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한대의 철제농기구와 형태가 유사하다. 이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해 더욱 발달된 형태이며 이를 통하여 생산력 증대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4~7세기경에는 이전 시기 형식의 농구와 더불어 전형적인 고구려식으로 분류되는 U자형 쇠날, 쇠스랑, 호미, 보습 등이 사용되면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철제 농기구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한다(김재홍, 2005). 이러한 철제농기구의 보급과 발달이 생산력 증대로 이어지고, 더불어 국가발달단계 제고와 집권력 강화로 이어졌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고구려 초기 본격적으로 한 계통의 철제농기구가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고, 더 나아가 생산력 증대를 목적으로 한 우경(牛耕)도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는 한 양식의 대형 보습을 사용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우경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구려가 한의 요동군, 현도군 등과 교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채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서민수, 2017).
진전된 형태의 철제농기구 등장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철제무기의 보급이다. 고구려는 건국 시점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현도군 등 한의 군현세력과 격돌하고 주변지역을 정복하며 성장하였다. 이처럼 강력한 무력은 질 좋은 무기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처음부터 발달된 철제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세력과 무력충돌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차 무기체계와 군사조직을 완성해 나갈 수 있었다.
고구려 초기 주변국 중 가장 발달된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국가는 당연히 중국 한이다. 고구려는 한의 군현세력과 대립 또는 타협을 반복하며 질이 좋은 철제무기를 수용하고 이를 발전시켜 점차 자체적인 방식대로 무기체계를 육성해 나갔다. 고구려가 갓 건국된 1~2세기경에는 한의 영향을 받은 검(劍), 화살촉, 도(刀) 등을 제작하였고, 긴 창을 의미하는 장모(長矛)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장창은 대(對)기병전을 전제로 제작된 것이므로 초보적 기병의 편성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화살촉을 통해 원사(遠射)무기인 궁시(弓矢)도 활발히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출토 철제무기 유물의 수량이 적고, 한의 무기와 흡사한 외형을 하고 있어, 고구려가 초기 단계에는 중국에서 철제무기를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김길식, 2005).
2세기 이후에는 소환두대도(素環頭大刀), 철대도(鐵大刀), 직기형철모(直基形鐵鉾), 다양한 유경식(有莖式)철촉 등 고구려의 독자적인 무기 체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 제작된 고구려 철제무기는 압록강 중류 지역의 무기단식(無基壇式), 초기 기단식(基壇式) 등 초기 적석총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집안의 하활룡(下活龍) 8호분과 20호분에서는 소환두대도가 나왔고, 환인 고력묘자(高力墓子)19호분, 북한 심귀리73호분과 79호분, 남파동104호분, 운평리4지구6호분 등 다수 무덤에서 철단도가 출토되었다.
『삼국지』에는 고구려가 ‘맥궁(貊弓)’이라는 좋은 활을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궁시 또한 고구려의 중요한 무기체계로서 2세기 이후 한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소재의 특성상 고구려활, 즉 맥궁이 전하지 않아 그 모습을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 고분벽화를 토대로 복원해 보면 크기는 단궁(短弓)이며, 형태는 만궁(彎弓), 재질은 각궁(角弓), 제작방법은 합성궁(合成弓)이라고 한다. 화살은 싸릿대로 만든 호시(楛矢)가 사용되었고 살촉은 철촉(鐵鏃)과 동촉(銅鏃)이 모두 사용되었지만, 출토유물의 다수가 철촉이므로 철촉이 주류였음을 알 수 있다. 3세기 후반부터는 각 철제무기의 종류별 형식 분화가 더욱 활발해지고, 마구(馬具)로 등자(鐙子)가 등장하며 갑주는 기병전에 적합한 찰갑(札甲)이 주류를 이루어 확실한 고구려식 무기체계를 확립하게 된다(김길식, 2005).
발달된 철제무기체계의 보급은 자연스럽게 군사동원력을 신장시키며, 고구려 중앙과 주변부의 통합을 촉진시켰다. 이처럼 군사 수요의 증대와 확대된 군사동원력은 군사조직의 재편으로 귀결된다. 고구려 초기에는 계루부 왕권이 일원적으로 고구려 5나부 전체의 병력을 통제, 통솔하기보다는 5나부 단위로 편성된 군대를 필요에 따라 국왕이 동원하거나 파병하는 형태로 통제하였다. 그러다가 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점차 고구려 군대는 국왕에 직속되는 방향으로 재편된다.
이어서 초기 고구려의 병종 구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고대국가의 군대는 육군과 수군으로 구성되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주력군과 상비군은 육군을 의미한다. 고구려 군대 역시 이러한 편제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관련 기록과 자료가 없어 수군의 존재를 쉽게 긍정하기는 어렵다. 고구려가 수군을 활용해 작전을 펼친 사실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광개토왕비문〉 영락 14년(404년)조 대방계(帶方界)를 침공한 왜를 격퇴한 기록에 보이는 ‘연선(連船)’이라는 표현을 통해서이다. 물론 이 역시 수군 설치의 근본 목적인 해전을 상정한 전투함의 개념이 아니라 상륙전을 위한 수송함으로 파악되므로 엄밀한 의미의 수군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내륙 국가인 초기 고구려의 특성을 감안할 때 고구려 군대는 육군이 주력일 수밖에 없다. 고구려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대규모 전투에 활용된 주력 병종은 보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토가 대부분 산지와 골짜기로 구성되었고, 기본적으로 반농반렵의 생산체계였던 초기 고구려가 대규모 기병 군단을 운영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3세기 무렵 고구려 외곽지역에 위치한 동예가 ‘보전(步戰)’에 능하였다는 기록과 퉁구스계 수렵 종족인 숙신(肅愼)이 말을 탈 줄 몰랐다는 기록이 이를 방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최고 지배층인 계루부가 부여계 유이민세력이었고, 부여는 송눈(松嫩)평원이라는 평탄한 지형에 반농반목(半農半牧)의 경제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비교적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 하고 있었다.주 021 이처럼 부여계 계루부가 중심이 되어 건국된 고구려는 초기부터 일정 수의 기병을 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력 병력은 여전히 보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세기 무렵 고구려보다 국력이나 국가 발달 수준 등이 우월하였고 기병의 양성과 운용도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던 부여 또한 하호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보병이 전투의 주축이었을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주 022 이후 4세기~5세기 무렵이 되면 고구려는 쇠뇌(努), 궁전(弓箭), 극(戟), 삭(矟), 모(矛), 연(鋋) 중심의 무기체계를 갖추게 된다.주 023 주로 원사무기와 장병기(長兵器)로 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전쟁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이로 인해 기병의 활용도가 증대하면서 대기병전용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여호규, 1999). 고구려 중기가 되면 이전에 비해 기병의 비율이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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