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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나부의 해체와 중앙귀족의 형성

1. 나부의 해체와 중앙귀족의 형성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의 중앙지배체제는 외형상 나부체제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였으나, 계루부 왕권이 전반적으로 강화되는 가운데 다른 나부의 자치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추세가 이어졌다. 특히 2세기 후반 이래의 대외정복활동 및 복속민의 지배에 따른 수취물 분배가 왕실인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했던 연나부 등 특정 부에만 집중되었고, 이러한 경제적 불균형은 나부세력 간 정치적 우열이 심화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결국 세력기반이 약해진 나부들은 단위정치체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3세기 중반까지 진행된 사회경제적 발전도 나부 해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 철기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가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사회적 계층 분화가 심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는 점차 해체되었고, 각 지배집단은 축소된 친족집단의 형태로 분화되는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이는 제가세력의 기반이었던 나 집단과 곡 집단이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상실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사회·경제적 발전과 공동체적 유대관계의 소멸도 나부의 점진적 해체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여호규, 2014).
나부 내의 제가세력이 예하 지배집단과 읍락민에 대한 자치적 지배 권한을 상실하면서, 지배세력들은 더이상 독자적 세력기반에 근거하여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왕권과의 결합을 기초로 한 중앙정치에의 참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성과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처음에 왕도로 결집한 세력은 왕의 가신적 성격이 강한 계루부 출신들이었을 것이나, 다른 나부의 제가세력도 집권체제 정비에 따라 중앙관계조직의 운영체계 속에 점차 흡수되어 왕도로 이거했을 것이다. 지배층이 이탈한 나부 지역은 단위정치체로서의 기능을 잃고 차츰 국가권력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는 공간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한편, 각 나부의 제가세력이 왕도를 중심으로 결집해 편제되는 모습은 방위명부(部) 관련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국천왕대(179~197년) 이래로 동·서·남·북의 방위가 붙는 방위명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수도인 국내성 일대의 지역 구분 내지 행정적 편제로서 왕의 정치·군사적 세력 기반으로 파악된다. 특히 서천왕대(270~292년)부터는 일반 신료들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갖는 왕비나 국상의 자리에도 방위부 출신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정계 운영의 주도권이 나부 출신에서 방위부 출신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준다.
3세기 말에 이르면 사료상으로 나부 출신의 인물이 더이상 확인되지 않으며, 대신 왕도에 거주하는 지배세력은 대부분 자기 출신지로 방위부를 내세우게 된다. 이는 나부의 지배세력이 왕도로 점차 결집한 결과 방위부로의 편제가 완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지배세력이 왕권 아래 중앙귀족으로 전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초기의 나부지배세력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지배세력이 왕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지배세력은 이전에 비해 축소된 친족집단 형태인 가문(家門) 단위로 분화하였을 것이다. 이미 3세기 중엽인 동천왕대에 조위(曹魏) 관구검(毌丘儉)의 침입 당시에 활약했던 밀우(密友)·유옥구(劉屋句)·유유(紐由), 그리고 봉상왕대에 모용외의 침입 시에 활약했던 고노자(高奴子) 등은 국가와 왕실에 대한 공훈을 배경으로 왕권과 밀착했던 귀족가문의 유형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특히 5세기 중반의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그리고 7세기 말 당나라 때에 제작된 〈고질묘지(高質墓誌)〉·〈고자묘지(高慈墓誌)〉 등에는 뚜렷한 가계의식을 남긴 귀족가문의 사례가 보인다. 이들은 모용선비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의 기억을 공유하는 가운데, 이 때의 공적을 계기로 가문의 정치적 위상을 확립한 사례이다.
이 가운데 〈모두루묘지〉에 등장하는 염모(冉牟)는 4세기 중반 모용선비의 북부여 지역 침공을 격퇴하는 데 일정한 공을 세웠는데, 이는 그의 후손인 모두루 때까지 대대로 국왕으로부터 관은(官恩)을 입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부자 관계인 〈고질묘지〉와 〈고자묘지〉에서는 이 가문의 중시조격인 고밀(高密)의 활약상을 기록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과거 모용선비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고밀이 공을 세워서 국왕으로부터 식읍 3,000호와 더불어 자손을 대대로 후(侯)에 봉한다는 교서를 받았다고 전한다. 모두루와 고질·고자의 가문은 모두 선대의 전공에 따른 ‘관은’과 ‘식읍’을 매개로 한 정치·경제적 기반을 통해 성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귀족들의 가계 의식과 전승은 기본적으로 당시 지배층이 가문 단위로 분화된 상태를 배경으로 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모두루와 고질・고자 두 가문은 집안의 시원(始原)에 대한 서술에서 나부체제하의 제가 시절이 아닌, 고구려 왕실의 건국 시조인 주몽설화를 배경으로 서술하였다. 주몽은 원래 계루부 왕실의 시조신에 불과했으나, 왕권의 강화 과정에서 동명(東明)전승과 결합하였고, 이후 고구려 전체의 종족 시조신이자 국가의 시조신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나부집단의 개별적인 시조전승은 부정되었고, 각 가문별로 분화된 귀족집단의 시조의식은 점차 국가와 왕실의 시조인 주몽전승으로 모아졌던 것으로 추측된다(임기환, 2004).
요컨대 나부의 분화·해체 속에서 그 지배세력은 도성으로 집주하여 왕권 아래의 중앙귀족으로 변화했다. 중앙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편제되는 과정에서 사자계(使者系)와 형계(兄系) 관등을 포함한 일원적 관등제가 성립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관료체제가 운영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구축되었다. 그리고 대내적 정치체제 변화의 정점에 있었던 고구려의 왕권은 귀족세력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위상을 확보하게 되면서 ‘태왕’으로 상징되는 절대적 권력과 지위를 과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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