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학 설립과 기능
1. 태학 설립과 기능
태학 설립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한다.주 001 372년(소수림왕 2년)에 설립하여 자제(子弟)를 교육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600년(영양왕 11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왕명으로 『신집(新集)』을 편찬했다고 하였다. 7세기 중반의 사정을 전하는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도 국자박사(國子博士)·태학사(太學士) 등 태학의 교수와 관련한 관명이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구려에서 372년에 태학을 설립하여 후기까지 운영하였음을 알려준다.
현전 문헌기록상 고구려의 태학은 한국사 최고(最古)의 학교라 할 수 있는데, 태학의 명칭과 학교제도의 운영은 한대(漢代) 이후 여러 중원 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대 중원 왕조의 태학은 서주(西周)의 대학을 이상적인 학교상으로 제시하며 설립된 중앙의 국립학교, 즉 국학(國學)이었다. 고구려의 태학은 그와 같은 중원 왕조의 학교제도를 수용하여 설립된 것이다. 372년이란 태학 설립의 시점에 주목해 보면, 동진(東晉, 315~420년) 또는 전진(前秦, 351~394년)에서 수용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동진설이 있었고(高明士, 1995), 전진설이 있었다(李丙燾, 1959; 이병도, 2012; 盧重國, 1998).
먼저 동진설을 살펴보자. 동진설은 373년 고구려의 율령이 서진(西晉, 265~316년)의 태시율령(泰始律令)을 수용했다고 본 통설적인 이해에 기초하였다. 동진이 이른바 한족(漢族) 정통왕조로서 서진의 율령과 학교 제도를 계승·운영하였다고 보고, 동진을 통해서 서진의 학교제도를 수용했다고 추정했다. 동진은 왕조 수립 직후인 317년에 태학을 설립했고, 337년에 이를 재건하였다. 비록 고구려와 동진의 정치적 교섭은 단속적이었지만, 양국의 문물 교류는 부단하였다. 4세기 중·후반~5세기 초반 구(舊) 낙랑·대방 지역에서 출토된 기년명전(紀年銘塼), 국내성(國內城) 지역에서 출토된 청자기(靑磁器), 그리고 동진의 승려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과 고려도인(高麗道人)의 서신 교류 등이 이를 방증한다(金鎭漢, 2012).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는 동진을 통해 중원의 유교 문물을 수용하였고, 이로써 태학 설립의 기반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주 002
그런데 동진 사대부(士大夫)의 습속은 노장(老莊)을 숭상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유훈(儒訓)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하고, “유술(儒術)은 끝내 진흥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아 337년 동진에서 재건하였던 태학의 운영은 성공하지 못했다. 서진시기보다 부실하였고, 설치와 폐지를 반복했다.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였기에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한 국립학교가 환영받지 못한 면도 있었다. 따라서 372년 고구려에 수용된 태학의 학교제도가 동진에서 전해졌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음으로 전진설을 살펴보자. 고구려와 전진의 관계는 370년부터 확인된다. 고구려는 전진-전연(前燕)전쟁에서 전진을 지지했고, 전진과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불교도 수용했다. 태학이 설립된 372년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해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냈다. [소수림]왕이 사신을 보내 회사(迴謝)하고 방물을 바쳤다”고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 태학은 전진과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불교를 수용하던 중에 설립되었다.주 003 그러므로 태학의 설립은 전진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 무렵 전진의 국왕이었던 부견(재위 357~385년)은 왕맹(王猛, 325~375년)을 중용해서 유교를 진흥했다. 태학의 학교제도를 정비했으며 매월 태학에 친림(親臨)했다. 관민(官民)에 유교를 장려했으며, 노장과 도참(圖讖)을 금지했다. 이렇듯 부견은 강력한 유교진흥책을 추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전진의 태학 운영과 유교진흥책을 고려하면, 고구려 태학의 학교제도는 전진에서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고구려가 전진과 본격적으로 교섭·교류한 것은 370년이었다. 태학을 설립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였다. 2년이란 단기간 내에 전진의 학교제도와 교육내용을 받아들여 태학을 설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를 갖추고 있었다고 짐작된다(盧重國, 1979). 그러므로 태학의 학교제도가 전적으로 전진에서 수용된 것으로 단언하기에도 미흡한 점이 있다. 이에 고구려와 동진·전진 관계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전연 관계도 아울러 참고해야 한다고 본 견해도 있었다(이정빈, 2014).
전연 역시 태학에 준하는 동상(東庠)을 설립·운영했다. 고구려는 4세기 전반부터 모용선비, 전연과 요동을 둘러싸고 각축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교섭했다. 양국은 상당수의 전쟁포로, 질자(質子)와 망명인(亡名人)을 통해 문물을 교류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불교·기마문화를 위시해 모용선비, 전연의 여러 문물을 수용하였다(李基東, 1996). 이 과정에서 전연의 유교 문물은 물론이고 동상과 같은 학교제도도 참고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연의 동상과 전진의 태학은 기본적으로 유교교육기관이었지만, 호족문화(胡族文化) 전통의 군사교육도 수반하여 무예와 병학도 교육하였다. 전연·전진의 동상·태학에서 실시된 군사교육은 한족(漢族) 중심의 중원 왕조에서 운영된 태학과 다른 모습으로, 호족문화의 전통적인 요소였다. 고구려의 태학이 전연·전진의 동상과 태학을 참고·수용하였다고 보면, 적어도 고구려 태학이 설립되었을 무렵 교육내용에도 군사교육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연과 전진처럼 기왕의 교육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태학의 학교제도를 수용하였다는 것이다(이정빈, 2014).
여기서 기왕의 교육적 전통이란 다른 여러 나라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청소년조직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태학생은 자제였다고 하였다. 후조(後趙, 319~351년) 태학의 입학생은 13~25세였고, 북연(北燕, 409~436년) 태학의 입학생은 13세 이상이었다. 고구려의 태학생 또한 13세 이상에서 25세 이하의 연령이 입학하여 주로 청소년 연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태학의 기원 내지 설립의 내적 기반을 찾는다면, 청소년조직의 전통이 주목된다(李基白, 1996). 다시 말해 고구려의 태학은 전통의 청소년조직을 개편해서 설립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고구려 전통의 청소년조직은 신라의 화랑도(花郞徒)와 유사하였을 것이다. 구성원 상호 간의 수평적인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신의(信義)와 같은 덕목을 중시하였고, 군사 방면에서 교육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전사(戰士)로서의 자질을 함양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런데 6세기~7세기 신라에서는 화랑도를 매개로 하여 국왕 중심의 수직적인 정치·사회질서를 구축하고자 했고(李基東, 1984), 종래의 수평적인 유대관계는 축소되어 갔다(노태돈, 2009). 3세기~4세기 고구려에서도 국왕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인 정치·사회질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변화에 따라 전통의 청소년조직 역시 개편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태학은 박사 등의 관료가 교육하였다. 졸업생 또한 관료로 배출되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태학은 전통의 청소년조직과 달리 국왕 중심의 수직적인 정치·사회질서를 원리로 하여 운영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태학의 유교교육에서 충효(忠孝)와 같은 덕목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태학 설립 무렵의 군사교육이 전통적인 요소였다면, 유교교육은 역사적인 변화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교육대상이었던 자제가 주목된다.
전연의 동상은 대신(大臣)의 자제를 교육했고, 전진의 태학은 공후백료(公侯百僚)의 자제를 교육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태학 역시 관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귀족의 자제를 교육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보면 태학은 귀족 자제에게 유교를 교육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데 설립의 주된 목적이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처럼 태학의 유교교육은 역사적인 변화를 말해주며, 여기서 설립 목적을 찾을 수 있다. 그 성과는 태학 설립 이후 고구려 사회에 유교가 보급된 면면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어 〈광개토왕비〉를 보면 오경(五經)과 『맹자(孟子)』를 비롯한 유교 경전을 다수 인용하고 있으며, 인의(仁義)를 내세운 왕도정치(王道政治)이념을 표방하고 있다(三岐晃, 1992; 이도학, 2006). 왕의 은덕(恩德)에 모화(慕化)되어 따라왔다는 동부여의 관인은 왕도정치가 구현된 실례 중 하나였다. 유교의 왕도정치이념이 소화되어 정치사상으로 표방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6세기~7세기의 사정이지만 『구당서』와 『신당서』를 보면, 고구려인은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오경(五經)은 물론이고,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춘추(晉春秋)』 등의 역사서, 『옥편(玉篇)』·『자통(字統)』·『자림(字林)』 등의 자전류(字典類)가 있었고, 문집에 속하는 『문선(文選)』 등을 중시하였다고 하였다. 경서와 역사서, 자전과 문집 등 각종 서적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경서와 사서는 유교의 학문이었다. 자전류와 『문선』은 한문의 작성을 위한 서적이었는데(노용필, 2017),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유교적 지식에 포함되었다. 고구려 사회에 유교의 학문과 지식이 보급·확대된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643년(보장왕 2년)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에서 새로 도교(道敎)를 수용하자고 주장하면서 이미 유교와 불교가 흥성하다고 발언한 사실이 주목된다. 6세기~7세기 고구려 사회에서 유교는 불교와 더불어 양대 사상으로 정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못지않게 유교에 대한 이해 수준이 상당하였고, 또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고구려의 유교 수용과 성행은 태학과 같은 학교제도의 운영에 기초하였다고 이해된다(李基白, 1986). 따라서 태학의 설립은 고구려 사회에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주 004
각주 004)

이외에 『구당서』·『신당서』에 보이는 경당(扃堂)을 주목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당은 평양 천도 이후에 출현하였는데, 지방의 공립학교였다고 이해된다(李基白, 1996). 지방의 촌락에 소재하였고 평민의 미혼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구당서』·『신당서』에서 경당은 가구(街衢) 내지 구측(衢側), 즉 대로(大路) 가까운 데 건립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주목해 경당의 소재지가 지방의 촌락이 아니라 왕도와 별도(別都)를 비롯한 지방의 주요 도시, 6세기~7세기의 경우 대성(大城)급의 지방 도시로 보아야 한다는 이견도 있다(이정빈, 2012, 「고구려 扃堂의 설립과 의의」, 『한국고대사연구』 67).
태학의 설립은 이듬해인 373년에 반포된 율령과도 밀접하였다. 율령의 편목 중에는 태학의 학교제도와 운영방식을 규정한 학령(學令)도 있었다고 추정된다(盧重國, 1979). 태학의 운영은 율령에 입각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태학의 설립을 주도한 관료집단이 율령의 제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태학을 통해 양성된 관료는 차후 율령에 입각한 국가 운영에 중추를 구성하였다고 이해된다(李基白・李基東, 1982). 태학의 설립은 율령의 반포와 궤를 같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 짝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다. 따라서 태학이 주된 교육내용에 포함되었던 유교와 율령의 관계 또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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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이외에 『구당서』·『신당서』에 보이는 경당(扃堂)을 주목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당은 평양 천도 이후에 출현하였는데, 지방의 공립학교였다고 이해된다(李基白, 1996). 지방의 촌락에 소재하였고 평민의 미혼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구당서』·『신당서』에서 경당은 가구(街衢) 내지 구측(衢側), 즉 대로(大路) 가까운 데 건립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주목해 경당의 소재지가 지방의 촌락이 아니라 왕도와 별도(別都)를 비롯한 지방의 주요 도시, 6세기~7세기의 경우 대성(大城)급의 지방 도시로 보아야 한다는 이견도 있다(이정빈, 2012, 「고구려 扃堂의 설립과 의의」, 『한국고대사연구』 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