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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관등제 정비와 운영

3. 관등제 정비와 운영

4세기~5세기 관등제와 관련하여 우선 『위서(魏書)』 고구려전을 참고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알사(謁奢)·대사(大奢)·대형(大兄)·소형(小兄)”의 관명이 나온다. 『위서』는 554년 북제(北齊, 550~577년)의 학자 위수(魏收)가 편찬했는데, 그중에서 고구려전은 이오(李敖)와 같은 북위(北魏)의 사행(使行) 및 고구려의 사행에 의해 수집된 새로운 정보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평가된다. 주몽설화 및 초기 왕계가 처음으로 수록된 사실이 대표적이다. 그에 소개된 관명 또한 『후한서』·『삼국지』 등 앞서의 사서와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위서』 고구려전에 보이는 관명은 4세기~5세기 관등제의 구성과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다만 『후한서』·『삼국지』와 비교해 내용이 더욱 소략하므로 다음과 같은 전후의 여러 자료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① 北夫餘 大兄 冉牟 /祖父 大兄 慈□ /大兄□□□/大使者 牟頭婁 _ 모두루묘지
② 建位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龍驤將軍 遼東太守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史 _ 덕흥리고분묵서
③ 古牟婁城 守使 下部 大兄 耶□ /前部 大使者 多亏桓奴 /主簿 貴德 /新羅土 內幢主 拔位使者 補奴 _ 충주고구려비
④ 小兄 相夫 若牟利 /物句 小兄 百頭 /百頭 上位使 尒丈 /漢城 下後部 小兄 文達 /卦婁盖切 小兄 加群 _ 평양성석각
⑤ 乙亥年 八月 前部 小大使者 _ 태천 농오리산성마애석각  
우선 ①과 ③의 대사자와 발위사자가 주목된다.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를 보면, 사자 계통 관명의 이칭으로 사(奢) 계통의 관명이 나온다. 예컨대 『위서』 고구려전에 보이는 알사는 태대사자(太大使者)의 이칭이었다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사자·사 계통의 관명은 상(相) 계통의 관명으로 확인된다. 대상(大相)은 태대사자·알사에 대응된다. 사자·사·상은 동일한 관명의 이칭이었던 것이다(武田幸男, 1989; 공역, 2017). 이와 관련하여 6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⑤에 보이는 소대사자(小大使者)가 참고된다. 태대사자는 소대사자와 짝한다. 태대사자·소대사자·사자 등으로 사자 계통의 관명이 분화되어 있었던 것이다(임기환, 2004; 琴京淑, 2004).
사자 계통의 관명이 분화한 모습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191년(고국천왕 13년)에 을파소(乙巴素)를 천거한 동부(東部)의 안류(晏留)가 대사자였고, 동천왕대(227~248년)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였을 때 전사한 유유(紐由)가 구사자(九使者)로 추증되었으며,주 006
각주 006)
구사자(九使者)는 대사자(大使者)의 오기(誤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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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들 다우(多優)가 대사자를 수여받았다. 서천왕(재위 270~292년)의 장인 우수(于漱)와 봉상왕대(292~300년)의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 역시 대사자였다. 이들 대사자 관등은 최고위 관등으로 비교적 하위 관등이었던 『삼국지』 동이전의 사자와 구분된다. 2세기~3세기 이후 분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대사자 관등을 소지한 인물은 왕권과 밀접하였다. 사자 계통의 관명은 어원적으로 보아도 왕권을 뒷받침한 관등으로 파악된다(金哲埈, 1975). 따라서 사자 계통 관명의 분화는 왕권의 강화에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여호규, 2014).
다음으로 ③의 주부가 주목된다. 대체로 이때의 주부는 관명으로 보는데, 『위서』 고구려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충주고구려비〉에서 주부는 대사자 다우환노의 다음에 나온다. 따라서 그 하위 관명이었다고 생각된다. 주부의 분화 양상 역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차대왕대(146~165년) 환나(桓那) 우태(于台) 어지류(菸支留)를 좌보로 삼고 가작(加爵)해 대주부로 삼았다고 하였고, 294년(봉상왕 3년) 창조리도 국상에 취임하면서 진작(進爵)해 대주부가 되었다고 하였다. 대주부는 국상과 좌보·우보에 취임할 수 있었던 최고위 관등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충주고구려비〉의 주부는 대주부가 아닌 주부였고(임기환, 2004), 늦어도 4세기~5세기에 주부 관등은 이미 2개 이상으로 분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부 계통의 관명은 왕권과 밀접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武田幸男, 1989; 2017). 따라서 그의 분화 또한 왕권의 강화에 따른 결과였다고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②의 소대형 관등이 주목된다. ②는 묘주(墓主)인 진이 후연(後燕, 384~407년)과 고구려에서 수여받은 관명을 나열한 것으로, 소대형은 그중 고구려에서 수여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소대형은 『주서(周書)』 고려전(高麗傳) 이후의 사서에 보이는 태대형(太大兄)을 떠올린다. 이를 감안해 보면 이미 5세기를 전후해서 대형이 태대형과 소대형으로 분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위서』 고구려전 및 ⑤에 소형이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4세기~5세기 형 계통의 관명은 태대형-소대형-소형 등 적어도 3개 이상으로 분화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형 계통의 관명이 분화한 모습 역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살필 수 있는데, 293년(봉상왕 2년)에 모용외(慕容廆)가 침공하였을 때 왕을 구출하고 전공을 세운 북부(北部) 소형 고노자(高奴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때의 전공으로 대형으로 승진하였다. 형 계통의 관명이 소형과 대형으로 분화된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형 계통의 관명은 어원적인 측면에서 보아 독립적인 정치세력에게 수여된 관명으로 출현하였다고 이해된다(金哲埈, 1975). 그런데 고노자는 소형에서 대형으로 승진하였지만, 관직은 신성재(新城宰) 그대로였다. 3세기 후반 소형과 대형은 상하의 관등으로 관인의 위계를 표시했던 것이다. 이로 보아 3세기 후반 이후 형 계통의 관명은 독립적인 정치세력의 직위를 표시했다기보다 관인의 상하 지위를 표시한 관등으로 지배층 일반에 수여되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형 계통 관명의 분화는 독립적인 정치세력과 관련된다기보다 일원적인 관등제의 정비를 말해준다고 파악된다(여호규, 2014).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보이는 4세기~5세기 고구려의 관명을 참고할 수 있다. 특히 대로(對盧) 관명이 주목된다. 대로는 『삼국지』 동이전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상가 다음의 관명으로 패자와 교치(交置)가 가능한 최고위 관등 중 하나였다. 또한 『주서』 고려전 이후 여타의 사서에서 대대로(大對盧)가 보이는데, 제1위의 최고위 관명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4세기~5세기 역시 대로 관명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제우(齊于)·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이 대로였다고 하는데, 그들은 475년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한 고구려 군대의 최고 지휘부를 구성했다. 이를 보면 4세기~5세기의 대로 역시 최고위 관명의 하나였다고 짐작된다(임기환, 2004).
이상과 같이 각종 금석문 및 문헌자료를 통해 보건대 4세기~5세기 고구려의 관명은 『위서』 고구려전보다 다수 존재하였고, 사자·주부·형 계통의 관명이 상하의 관등으로 분화된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관명이 상정된다.주 007
각주 007)
소대사자와 소대형이 주의된다. 이들 관명은 『주서』 고려전과 그 이후의 여러 사서에서 찾을 수 없는데, 각각 대사자와 대형을 가리킨다고 볼 여지가 있다(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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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사자-(소)대사자-발위사자(소사자)
태대형-(소)대형-소형
대주부-주부
대로 
그 순서는 어떠하였을까. 『위서』의 경우 태대사자-대사자-대형-소형의 순서로, 〈충주고구려비〉의 경우 대사자-주부-발위사자의 순서가 확인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태대사자
대사자
주부/대형
발위사자/소형 
『삼국지』와 『주서』를 통해 보건대 최상위 관등은 대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위서』의 순서를 통해 보건대 사자 계통의 관명이 형 계통의 관명보다 상위였다고 파악된다. 아울러 대주부의 경우 최상위 관명에 속하였 다고 하였다. 대로 다음의 관명이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상정할 수 있다(임기환, 2004).
대로-대주부-태대사자-태대형-대사자-대형-주부-발위사자-소형-[선인] 
그리고 소형 아래에 선인(仙人) 등의 관명이 추가적으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대략 10여 개의 관등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관등 순서를 정리하고 보면, 주부·사자·형 계통의 관명이 분화되었고, 또한 여러 계통의 관명이 상하의 관등으로 교차되며 서열화된 면모를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모두루묘지〉를 참고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모두루 선조 염모와 조부의 관등은 대형이었고, 모두루의 관등은 대사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북부여 지역의 통치를 관장했다. 대대로 관인으로서의 지위나 활동이 유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각기 대형과 대사자 관등을 수여받은 사실은 형 계통의 관명이나 사자 계통의 관명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성격이 탈각된 사실을 말해준다. 4세기~5세기 시점에서 다양한 계통의 관명은 이미 연원적인 차별성이 해소되고, 국왕 아래에 일원적으로 서열화된 것이다(徐永大, 1981; 여호규, 2014). 다시 말해 일원적 관등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지』 동이전을 통해 보건대 3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여러 대가(大加)는 스스로 사자·조의·선인 등의 관인을 둘 수 있었고, 나부의 읍락을 세력기반으로 삼아 그 지위를 세습했다. 중앙의 관등보다 나부의 세력기반이 지배층의 우열을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했던 것이다. 다만 3세기 중반의 시점에서 이미 왕권은 제가보다 우위에 올라섰다. 여러 대가의 사자·조의·선인 명단은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고, 왕가의 동일 관명 소지자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 고구려의 주요 지배층은 점차 왕권 아래에 편제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점은 2세기 후반이었다. 이때부터 계루부 왕권이 한층 강화되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가 가속화되었다. 고국천왕대(179~197년)를 전후하여 왕위 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의 방식으로 전환되었고(李基白, 1996; 여호규, 2014), 왕도(王都)와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중앙의 방위명부(方位名部)가 설치되었고(李鍾旭, 1982;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방위명부는 왕도·왕기의 행정단위로 개편되었다(李基白, 1996;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그리하여 4세기 미천왕대(300~331년) 이후 부자상속의 왕위 계승 방식이 확립되었고, 5나부는 해체되었으며, 그 지배층은 왕도·왕기로 이주해서 중앙의 귀족으로 변모했다(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이와 같은 변화를 제도적으로 정비한 중요한 계기는 율령의 반포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관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이로써 일원적 관등제를 완비·운영할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상과 같은 정치사 변화의 추이를 고려해 보면, 4세기~5세기 일원적 관등제의 정비는 3세까지 나부를 중심으로 다원적으로 편제된 지배세력이 국왕 아래의 중앙귀족으로 일원적으로 편제된 양상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4세기~5세기 관등제는 중앙귀족의 존재 양태를 반영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현재로서 고구려에 신라의 골품제(骨品制)와 같은 신분제가 운영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약간의 추정은 가능하다.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를 보면, 7세기 중반 고구려의 관등은 몇 개의 묶음으로 구성되었고, 특정 관직이 특정 관등에 일대일로 대응되기보다 몇몇 관등이 묶음을 구성했고, 관등의 묶음 단위가 취임의 자격으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상위 5관등인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위두대형(位頭大兄) 이상이 하나의 묶음이었다. 조의두대형·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국가의 기밀(機密)을 장악하고 정사(政事)를 모의했으며 군대를 징발하였고, 관작을 선발·제수하였다고 하였다. 최고위 관등 소지자가 정치권력을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따라서 조의두대형·위두대형 이상 상위 5관등 소지자로 귀족회의가 구성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조의두대형·위두대형 이상의 상위 5관등 소지자는 대모달(大模達)을 비롯한 최상위 무관직을 차지했다. 그다음은 상위 7관등인 대형 이상이었다. 그들은 말약(末若) 내지 말객(末客)과 같은 차상위 무관직을 구성했다. 그다음은 상위 10관등인 소형 이상이었다. 그들은 국자박사(國子博士)·대학사(大學士)와 같은 태학 관련 교수에 취임할 수 있었다. 조의두대형·위두대형 이상이 하나의 묶음이었다면, 대형·소형 이상이 각기 하나의 묶음으로 일정한 관직의 취임 자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등제의 운영은 개별 관등의 상하를 엄격히 나누기보다 관등의 묶음 단위를 보다 중시한 것으로,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의 관등제 운영과 비교된다. 신라 골품제의 경우, 각 신분의 관등 승진 상한이 일정한 관직의 취임 자격의 하한과 경계선을 형성하였다. 관등의 엄격한 상하 서열보다 신분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참고해 보면 고구려 관등의 몇 가지 묶음은 신분제의 구조를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골품제처럼 관등 소지자를 귀족으로 볼 수 있고, 위두대형·대형·소형 이상이 특정 관직의 취임 자격으로 제시된 것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귀족 신분 내에 모두 네 계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분제에 기초해서 관등제가 운영되었다고 보지만, 귀족 신분이 네 계층이 아니라 세 계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었다(임기환, 2004). 『고려기』를 보면 고구려의 관등을 당의 정종(正從) 9품 관제에 대응시키고 있는데, 대사자(정4품)와 대형(정5품) 사이, 상위사자(정6품)와 소형(정7품) 사이에는 당의 종4품과 종5품에 대응되는 관등이 보이지 않는다. 대사자·상위사자·선인을 하한으로 간격을 둔 것이다. 이는 신라의 고구려인 경위 수여 기사에서 골품제에 편입시킨 관등의 경계선과도 일치하고 있다. 고구려의 관등을 당의 관품에 대응시킨 것은 고구려인이었다고 이해된다. 이 점에서 간격은 상하의 관등이 신분제상으로도 유의미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따라서 세 계층의 귀족 신분을 생각한 것이다.
고구려 귀족의 신분 계층은 관등·관직의 세습현상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예컨대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모두루의 가문은 “대대로 관은(官恩)”을 입고 북부여 지역의 지방 통치를 맡았다. 〈고자묘지〉를 보면 그의 선조 고밀(高密)이 모용선비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면서 승습(承襲)이 끊이지 않았고 대대로 공후장상(公侯將相)을 세습했다고 하였다. 7세기의 사례이지만 연개소문은 부친의 사후 마땅히 계승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의 아들은 차례로 막리지에 취임했다. 이러한 사례는 4세기~7세기 고구려의 중앙귀족이 가문 단위로 구성되었고, 이들이 주요 관등과 관직을 독점적으로 차지한 모습을 보여준다(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여기서 모두루 가문의 구성원이 대사자·대형 관등을 역임하였고, 이보다 상위의 관등에 오른 사례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목되는데, 이를 보면 모두루의 가문이 상급 귀족가문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徐永大, 1995). 이로 보아 귀족가문은 상급·중급·하급 등으로 구분되어 그의 정치적 지위는 사회적으로 세습되었고, 각 신분마다 넘어서기 어려운 벽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귀족가문의 정치적·사회적 세습은 폐쇄적인 통혼권을 통해 유지되었다. 6세기~7세기의 사례이지만, 온달(溫達)의 사례가 참고된다(李基白, 1996). 온달은 대형(大兄) 관등까지 수여받지만 본래 하급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평원왕의 공주와 혼인하는 데 난관을 겪어야 했다. 왕실은 상부(上部) 고씨(高氏)로 칭해진 상급 귀족가문과 통혼하는 것이 상례였고, 온달은 이례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온달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왕의 사위로 인정받았고, 차후에야 대형 관등을 받을 수 있었다. 고구려 귀족가문의 폐쇄적인 통혼권은 특권을 배타적으로 유지·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통해 정치적·사회적 핵심권력은 상급 귀족가문이 독차지했다.
이상과 같이 4세기~5세기 고구려는 율령의 반포를 통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정치적·사회적 특권은 주요 귀족가문이 나누어 가졌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중심에는 국왕만 아니라 귀족이 함께 자리하였다. 귀족은 관등·관직을 세습하며 가문 단위로 분화했는데, 정치적·사회적 권력의 핵심은 상급의 귀족가문이 독차지했다. 따라서 4세기~5세기 고구려 태학의 설립과 율령의 반포, 그리고 관등제의 정비와 운영은 기본적으로 왕권의 강화를 말해주지만, 한편으로 귀족의 특권을 보장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기능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세기 중반 이후 귀족연립정권의 성립(노태돈, 1999; 임기환, 2004)은 이러한 4세기~5세기 정치구조의 연장선상에서 전망할 수 있다.

  • 각주 006)
    구사자(九使者)는 대사자(大使者)의 오기(誤記)일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소대사자와 소대형이 주의된다. 이들 관명은 『주서』 고려전과 그 이후의 여러 사서에서 찾을 수 없는데, 각각 대사자와 대형을 가리킨다고 볼 여지가 있다(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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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등제 정비와 운영 자료번호 : gt.d_0003_0010_0020_0030